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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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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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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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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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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198화

DUMMY

그렇다고 아직 이 남자에게서 그림을 배우겠다는 것을 날이 저무는 무렵의 신조처럼 완전히 결심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이 기억하는 「사계절」을 그대로 훔쳐오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버젓이 내보인 그림에 이끌려 진심을 부풀린 경향도 없지 않아 있으니 말이다. 오기에 부리는 자존심으로 하는 생각은 아니다.

세잔의 이름을 안다고 해도 그의 첫 작품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림을 세기의 걸작처럼 여기는 남자의 태도는 마뜩찮은 것이기는 해도 호기심이 번득이는 것은 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벽면에 기대도록 비스듬하게 놓은 캔버스를 난처하게 바라보는 남자를 들썽대는 마음으로 지켜본 나나가 벼름벼름 기회를 엿보다가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는데.”

“그러면요?”

“될 것도 없거든.”


농담으로 던진 말을 아니었는지 캔버스에 꽂힌 눈빛의 온도가 상당히 미적지근하다. 이에 트집을 잡을 수밖에 없는 나나가 지금 느끼는 짜증을 최대한 덜은 채로 따져 물었다.


“그럼 된다는 소리예요, 안 된다는 소리예요?”

“그건 나도 모르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았거든.”

“알겠어요. 그런데 그건 묻지 않으시네요.”

“뭘 말이야?”

“왜 제가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는 건지 말이에요.”


남자는 차분한 위풍으로 상체를 돌리며 나나를 마주했다. 건들먹대는 느낌이 이상한 여유 같은 것을 만들어냈는데, 썩 불쾌하려다가도 그 분위기에 눌려 나나는 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별로. 요즘에도 아직 그런 것을 묻나?”

“보통은 그렇지 않아요?”

“보통을 생각해서는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지.”


이미 그의 그림 한 점을 본 상태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나나는 더욱이 남자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를 업신여기게 된 것은 아니다. 평균이라고 섣불리 불러도 좋은 ‘보통’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렸다고 한 그림이 「사계절」이라니. 그의 말대로 ‘보통’은 아닐 것이다. 세잔 역시 보통의 예술가는 아니라고들 하니까. 그런데······ 이미 다른 세계에서는 어엿하게 존재하고 있는 그림을 떠올리면 고까운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이유는 설명하지 않을래요.”


사실 나나는 이미 아까부터 말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했던 처지라 자신 역시 이 기회를 아쉬워할 필요가 없는 입장이라고 여겼다.


“그래.”


남자가 아주 간단하게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그럼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건가요?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난 거 같은데.”

“미안하지만 그건 모르겠는데.”

“왜요?”


나나의 물음이 끝나는 대로 곧 어깨를 으쓱거린 남자는 자신은 무엇에도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결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했잖아.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대답할 수 없어.”


항복의 의미를 뜻하는 두 손을 다 든 모양새로 남자는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도망가려는 건 아닌지 걸음이 느린 것은 물론, 느긋하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이제는 손님에게 볼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본래의 위치였던 하얀 벽 뒤로 사라지려는 듯하다.


“언제 마음을 정할 건데요?”


나나의 질문에도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속도도 변함없기만 하다.


“나야 모르지.”

“본인 마음을 언제 정할지도 모른다고요? 아니, 당장에는 모른다고 해도 언제든 정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고들 하지. 너도 꽤 고리타분한 사람이었군. 그건 좀 실망이야.”


어쩌면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남자가 심각한 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나나는 조심스레 추측해 보았다. 구태여 불필요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것은 오로지 이 대화 탓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일 수도 있겠지. 그러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이 하는 말을 정확히 인지하면서도 책임은 약간이라도 짊어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저 남자는 보일 수는 없을 테니까.


“몇 가지 더 물어봐도 돼요?”


남자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기는 했으나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편한 방식으로 그 뜻을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왜 그림을 배우려고 하는지도 안 묻네요.”

“그건 아까 한 질문과 같은 것 아닌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부탁을 하는 것이랑 그 부탁을 결심한 것은 조금 다르지 않아요?”

“그럴 수도 있겠네.”


줏대가 없는 사람처럼 굴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처럼 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를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실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무심코 이를 정도로 남자의 태도는 일관성이 없다가도 그래도 길이나 방법을 바꾸지 않는 일률을 지니고 있었다.


“네가 그림을 그린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요?”

“손을 보면 알 수 있어.”


그에 나나는 즉시 두 손을 펼쳐 제 앞에 두어 바라보았다. 뒤집어도 보고 주먹을 쥐어도 보았지만, 무엇이 제 숨기고픈 과거를 드러내는 특징으로 남았는지는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말도 안 돼요.”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는 거지, 말이 안 되니까 말이야!”


말하고도 스스로 우스웠는지 남자는 거창한 웃음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두 어깨를 동시에 움직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자신만만해서 한 듯한 행동으로, 남자는 곧바로 나나에게 다음 질문을 재촉한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은 뭔데?”


아직 첫 번째 질문에 머무르고 싶었던 나나는 불안하면서도 못마땅한 눈치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손에 대해서 자세하게 묻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두 번째로 꺼낼 이야기를 준비하기에 앞서 마음이 괜히 조마조마해져서 그렇다.


“아까 보여준 그림 말이에요.”

“그게 왜?”


이번의 어깻짓은 일의 까닭을 몰라 한 것이다. 같은 몸짓을 두고도 저마다 다른 의미를 오해도 없이 드러내는 남자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도대체 왜 그린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왜 「사계절」을 그린 건지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혹시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라서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나는 ‘사계절’을 그렸을 뿐이라고 이미 말했잖아.”

“그 뜻이 아니에요. 왜 ‘세잔’의 「사계절」을 그렸냐는 뜻으로 한 이야기라구요.”


남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에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그게 뭔데?”

“네?”

“네가 말한 그 ‘세잔’이 뭐냐고.”


그 이름에만 집중하느라고 그 이름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고 해야겠다. 나나는 벙찐 얼굴로 남자를 마주하다가 이내 눈알을 굴리며 어설픈 변명을 급조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요. 그러니까 제가 아는 화가요.”

“그렇다면 네 말은 작자의 그림이랑 내 그림이 똑같단 말인가?”

“맞아요.”


남자는 난데없이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아주 결단적으로 두 입술을 맞물렸다. 나름 깊은 고심에 빠진 모양인지 눈썹이 꿈틀거리는 모양이 날카롭기까지 하다.


“이해가 안 되는 말인데?”

“맞죠? 그래서 이야기한 거라니까요.”

“아니, 네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된다고.”

“그건 갑자기 또 무슨 소리예요?”


아연실색했을 정도로 놀란 나나가 하는 물음에 남자는 저벅저벅 다시 이쪽으로 걸어온 후, 나나를 지나쳐 캔버스가 몰려 있는 벽면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더니 대답은 잠시 미루고 뒷면이 가장 깨끗해 보이는 캔버스를 골라 들었다.


“네가 하는 말이 뭔지 모르겠다니까.”

“말한 그대론데, 그걸 모른다고요?”

“그래. 나한테서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는데 난 그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거든. 어쨌든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지?”


대뜸 그것을 나나에게로 들이밀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네가 한 말을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봐.”

“뭘 말이에요?”

“그림을 그리라는 소리지, 너도 꽤 말을 잘 알아듣는 애는 아니구나. 그건 마음에 들어.”


남자는 이제는 쓸데없는 이야기에 붙잡히지 않겠다는 의지로 엉거주춤 캔버스를 받아든 나나의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래도 무심히 돌아보며 한 마디 마저 던지는 것은 예술가의 별난 인정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네가 생각하는 ‘사계절’을 그려도 좋을 거야. 그냥 네가 오늘 내게 한 말을 내가 이해할 수 있게끔 하면 돼. 그건 네 자유라고.”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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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201화 20.12.22 28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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