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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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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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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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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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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화

DUMMY

오로지 가만히 있는데도 은근히 성가시게 구는 것은 그녀의 특별한 재주라고 봐야겠다. 흑석은 제 앞에 놓인 오선지 위에 별 의미는 없는 짧을 길이의 검을 줄 여러 개를 모서리 부근에 긋고는 뒤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다리를 꼬고 앉아 벽에 기댄 채로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곳에 와서 자신을 들들 볶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곧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소리가 거슬렸는지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다행히도 잔소리가 더해지지는 않았다.


“좀 가면 안 돼?”


그렇다고 해도 반복되는 그 눈치에 마침내 인내의 한계에 달한 흑석이 어렵사리 뒤를 향해 제안 하나를 했다. 명령처럼 말했다가는 오히려 들러붙을 빌미를 주고 말았을 것이다.


“안 돼. 내가 원하는 걸 만들어 줄 때까지는 절대 안 돼.”


언제나 예외를 두는 것을 즐길 정도로 제 멋대로인 초영이 오늘은 유달리 고집을 부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게다가 그건 무엇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 한 치의 양보도 없을 것이다.


“내가 왜 그런 걸 만들어야 돼? 나도 내 자존심이 있지.”

“이게 지금 자존심을 따질 문제니?”


이때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일어난 초영이 흑석 옆으로 득달같이 달려왔다.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뺐지만, 그래 봤자 초영이 몸을 숙여 다가온 턱에 오히려 그녀의 두 눈을 피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차마 초영이 상해버린 제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이렇게 부탁한다는 것을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흑석은 어쩔 수 없이 말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옛날의 사랑 이야기를 알게 되면 인간들한테도 이로울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고 어서 만들도록 해.”

“구체적으로 뭘 만들 건지 알려주지도 않고 그런 걸 볼 수 있는 걸 만들라고 하면 어떡해?”

“흑석, 그건 네가 해야 할 일이잖아. 그렇지 않니?”

“······그렇게 따지면 사랑은 네가 처리해야 할 일이라고, 초영.”


내리꽂는 시선이 따끔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하다. 얼굴을 돌려 시선을 회피할수록 오히려 기울어진 몸만 더 불편해질 뿐이다.


“어차피 너 지금 안 바쁘니까 날 좀 도와줘도 되잖아.”


앞에 있는 책상을 팔 하나로 짚으며 초영이 물러섰다. 그 사이에 흑석은 재빨리 자세를 바르게 고치며 초영으로부터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의자를 옮겨 앉았다. 그 얍삽한 행동이 얄미워 눈을 가늘게 뜨기는 했지만, 부탁하는 중인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것도 아닌지라 초영은 못 본 체 넘겨야만 했다.


“내가 안 바쁜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딱 보면 모르니? 이 책상을 봐.”


여러 도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재료가 고스란히 놓여 난장판을 이루던 책상 위는 오선지와 펜 하나만 놓여 있어서 깔끔하다. 매끄러운 손짓으로 허공을 한 번 쓸어본 초영이 보란 듯이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흑석의 두 손이 가지런히 놓인 책상을 가리켰다.


“그거야 지금은 다른 일을 하는 중이니까 그렇지.”

“그래, 그건 알겠는데 내 부탁을 먼저 들어달라는 거잖아. 왜 그렇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지, 얘도 참.”


멀어지려고 용을 썼으나 어차피 초영은 이렇게 제 어깨에 팔을 걸치며 끈질기게 요구하고야 만다. 뻔한 결과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한숨을 내쉬며 흑석은 본격적으로 초영이 원하는 것에 자신이 시간을 덜 할애할 수 있는 쪽의 길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잠깐만. 초영.”

“응?”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은 때에 흑석은 초영의 팔을 슬며시 빼냈다. 그러고는 방금 떠오른 대안 하나를 그대로 털어놓았다.


“지나간 과거를 볼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백면이 정말로 평범한 인간을 사랑했었는지 그걸 알고 싶은 거잖아.”


직설적인 화법에 난색이 된 초영은 차마 화를 못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그렇다면 굳이 내가 새로 뭘 만들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어째서?”

“이미 예전에 내가 만든 게 있잖아. 아마 그 백면의 내생인 아이들이 갖고 있을 거야.”


흑석의 이야기에 초영의 눈동자가 마치 섬광을 본 것처럼 빛났다.


***


“나도진 있잖아.”


그 순간에는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곧 순식간에 고의로다가 남자로부터 건네받은 흰 물감을 계속 손바닥 안에 굴리며 나나가 도진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책장을 넘기며 무의식중에 피로해진 눈을 비비고 있던 때였다.


“너는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어?”

“이름이요? 누구를요?”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몰라 도진은 책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잠시 얼굴을 내밀어 아래쪽을 살폈다. 그리고는 맞은편에서 바닥에 눕다시피 몸을 낮은 자세로 기울여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나를 바라보며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 애 말이야.”


그 내려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몸을 바로 일으킨 나나가 도진의 옆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새근새근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고른 숨에 안정된 잠을 자는 아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냥 궁금해져서 말이야. 혹시 그런 이름이 있나 싶어서.”

“글쎄요. 그건 제가 정할 건 아니라고 봐서요.”

“왜?”


줄곧 관찰한 결과 한가한 날에도 빠지지 않고 머리를 쓰는 일을 즐기는 것 같아서 심심풀이로 가볍게 물어보았던 의도가 민망해질 만큼 도진의 대답은 무거웠다. 냉큼 그 이유를 물어보기는 했으나 나나는 굳이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으면 하는 부담스러운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비록 백면의 영혼으로 묶여 있다고는 해도,” 도진이 더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저는 이 아이에게 남일 테니까요. 그리고 이름을 지어줄 만큼 중요한 사람이 될 것 같지도 않고요.”


그가 신중한 자세를 고집하는 것은 불가해한 게 아니었다. 본래 사람의 이름이라는 건 함부로 짓는 게 아니라고도 하고, 뜻하건 뜻하지 않건 그 하나의 이름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함께 따라다닐 테니. 그래도 도진의 설명은 조금 불충분했다.


“저 애한테 너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네가 이곳으로 데려온 거잖아.”


이번에도 그녀는 턱짓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내가 만약에 저 아이의 입장이었고, 훗날에 내 이름을 지은 사람이 너라는 걸 알았을 때 굳이 기분이 나쁘거나 그러진 않을 것 같거든. 오히려 고마워할 수도 있어. 어쨌든 넌 저 애를 버리지 않을 거잖아.”


어쩌면 너무 앞서나가는 바람에 실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이 생각에 나나는 제 입을 한 손으로 슬며시 틀어막았다. 타인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그의 생각을 단언하는 것만큼 무례한 일도 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실수를 자꾸만 저지르는 건 자신에게도 생각이 있는 탓이니, 뒤늦게나마 자신의 생각을 억누르려고 한 행동과 “미, 미안.”이라는 짤막한 나나의 말에 도진은 이번에야말로 다소 가벼운 답을 내놓으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그렇긴 하죠.”


고작 이 한 마디로 상황은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정말?”

“나나 씨가 보기엔 그 정도로 제가 매몰찬 사람으로 보여요?”

“그건 아니야.”

“그런데 왜 그렇게 겁먹은 표정을 지어요?”

“그건······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직접적인 혈연도 아닌데 너한테 괜히 부담을 떠넘기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렇지.”


도진이 그리 달지 않은 미소를 보이며 옆에서 잠든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히려 부담은 내가 이 아이에게 떠넘겼을지도 몰라요.”

“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백면이 자신의 삶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떠넘긴 것처럼 말이에요. 나나 씨가 말한 대로, 이 아이를 월계로 데려온 건 저니까 그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있기도 하죠. 그래서 더더욱 이름을 지어줄 순 없어요.”


도진이 하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나는 더 묻지 않고 그와 아이가 이루어내는 광경을 천천히 살폈다. 한 사람은 눈을 뜨고 있고, 한 사람은 눈을 감고 있다. 한 사람은 가능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이름조차 모른다.

이건 생전 백면의 모습일까, 아니면 내가 이해한 백면의 모습일까. 어느 쪽이든 백면인 것은 맞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한 쪽을 바라보아야 한다면 나는 어느 쪽을 바라보아야 하지? 어느 쪽이 더 백면에 가까울지 생각하는 자신조차도 백면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나는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현관문이 있는 데로 돌렸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서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나나는 젖먹이의 죄암질처럼 손바닥 안에 줄곧 들려 있던 흰 물감을 연신 매만진다. 이곳에 있다가는 반달, 초승달, 보름달 등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던 달이 오로지 달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불리는 것처럼 백면이라는 하나의 이름을 위해 나의 이름마저 잃어버리는 게 아니냐고, 조금 염려스러운 생각으로.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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