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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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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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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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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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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02화

DUMMY

그건 정몽이라고 부를 게 아니라 백일몽이나 다름없다고 도진은 반발적으로 든 생각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가망도 없고 의미도 없는 공상 말이다. 그러나 이미 안수에게 속내를 들킨 일이니 괜히 거들어 대화를 더 길게 끌 필요는 없다. 구태여 말을 보태지 않고 도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자연스레 대화는 계속해서 안수에 의해서 이어진다.


“보통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허무를 가장 꺼리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정신적 충격을 떠안게 된 어떤 이에게는 때에 따라 가장 공포스러운 감정이기도 할 테니······.”


말의 끝을 흐려도 관념은 지저분해지지 않는다. 자신이 현재 느끼고 있는 이 기분을 설명하기 이해서 안수는 더는 망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도진 군,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허무가 과연 감정이냐고 하는 것이지요.”

“감정이라고 하기에는 참 덧없기는 해도, 확실히 감정이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12성인에 어떻게 백면이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했었으니까요. 나는 도진 군의 의견을 당차게 거절할 수도 없을 겁니다.”


도진이 시선을 아래로 두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에 나나가 두 눈을 완전히 감아 마침내 기이 잠든 것을 확인한 안수는 이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문장 뒤에 문장을 덧붙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도진 군, 그 책에서는 ‘허무감’과 ‘허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요. 먼저 ‘허무감’은 감정을 뜻하고 다른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허무’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처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상태라고 사료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었던 백면이라는 성인의 존재는 ‘허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허무감’을 위한 것이 되겠지요. 더불어 짚어야 할 게 하나 더 있는데, 방금 전에 내가 도진 군에게 한 말을 도진 군이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지요.”


“허무는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말이죠?”


도진이 고심하는 얼굴로 팔짱을 끼며 답했다.


“보다 저 구분하여서 용어를 사용하자면 ‘허무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건 ‘허무’가 아니라 ‘허무감’을 가리키는 것을 먼저 분명히 밝혀야 하겠지요.”

“교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 단 한 번만 듣고는 둘을 구분할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이 책의 이론이 반드시 정론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만 인간이 두려워하는 상황이 실로 ‘허무’인 이상, ‘허무감’은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자 요지임을 밝히고자 말을 꺼낸 게 이렇게 길어지고 만 겁니다.”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방금 솔직하게 제 생각을 털어놓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안수가 꺼낸 『허무에 대하여』라는 책이 제안하는 사상적 맥락을 짚기란 그 고백보다도 더 난감한 일이다. 혼자서 가늠하려고 할수록 생각의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상실감은 도진은 느꼈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야겠군요.”라고 안수가 말할 때가 되어서야 그는 빛이 제 앞을 퍼뜩 지나가기라도 한 양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정신을 차렸는데 그때에는 이상하리만큼 머릿속이 텅 비었다기보다는 맑은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책의 종이는 300년 정도 된 것입니다.”


안수가 말했다. 그는 이들을 만나기 전에 이미 테이블 끝에 책을 준비하여 두었기에 일어서지 않고도 책을 집어 도진의 앞으로 내밀 수 있었다. 제 옆에서 바짝 붙어오는 인기척이 없는데도 도진은 아직 나나의 수몽(睡夢)을 알아채지 못한 채로 괜히 책 표지 위를 쓸어보았다. 이에 안수는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입을 연다.


“그러니 시인도 그 시대에 살았을 것이 당연한 논리겠지요. 그래서 모두가 예상하고 있던 대로 그 시대 지배층에 속하는 한 양반으로다가 인물을 정했지요. 독특하게 만들 수는 없겠더군요. 성공한다면 실존인물처럼 비추어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가상의 인물이라는 게 더 눈에 띌 것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거울을 지니고 있었을 정도면······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 당대 문화로 보았을 때 보편적으로 누릴 수 없었을 특별한 혜택을 누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래서 더 이상하지 않나요?”

“뭐가 말인가요?”


도진의 물음은 마치 미끼를 제때에 문 물고기의 것처럼 순수한 것이었다. 안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양 입꼬리에 힘을 주어 대답하기 시작했다.


“너무 당연하다는 겁니다.”

“원작자의 설정이 말이죠?”

“그래요. 너무 당연해서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거지요. 그걸 알아버리니 나는 무시무시한 허무감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허무’라고 해야 옳겠지만, 또 그것 외에도 나는 ‘허무’를 더 겪어야 하긴 했었지만······. 그래서 나는 ‘허무’와 ‘허무감’을 구분하고자 했던 기존의 이론으로부터 착안하여 시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조금 새롭게 바꾸어보고자 시도했습니다.”


도진이 잠자코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을 보내자 그는 땀이 차버린 두 손을 맞잡아 두어 번 비벼대고는 도진에게서 책을 빼앗아 자신 쪽으로 가지고 왔다.


“시를 읽고 또 읽어야만 했지요. 아무리 그래도 이 시집에 담긴 작품들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규칙에 위배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다가 나는 하나의 발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시인은 반드시 우리가 예상하고 있던 사대부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비틀고자 하게 된 겁니다.”

“사대부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팔을 뻗어 책을 끌어오기는 하였지만 아직 두 손을 맞닿은 채로 떼어놓지 않고 있던 안수는 그대로 손뼉을 치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다면 평민이라는 말씀인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진 군도 알고야 있겠지만, 군데군데 시에서 드러나듯이 작자가 상당히 신분이 있는 자라는 건 암시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는 하다만, 어차피 자아을 되돌아보는 것이라면 평민이라도 상관이 없는 것 아닌가요? 이야기는 얼마든지 덧붙일 수도 있을 테고요.”

“그래요. 그저 인간이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안수는 제가 이상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입술을 꾹 다물며 잠시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자신을 되돌아본기 위해서는 그저 인간이면 된다고 말하였으나 스스로 되돌아보기에는 그저 인간이기만 해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되돌아볼 때 나의 그림자도 나를 따라 되돌아볼 것이지만, 나의 그림자는 스스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능력이 없을 테니까. 결국에 그가 다다른 극한점의 생각도 고집이 되고 말았다. 상관없다. 이미 시인은 정해졌으니까.


“그러니 어떤 인간이라도 괜찮다는 소리지요.”


안수의 미묘한 대답이 도진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럼 도대체 어떤 인간으로 묘사하셨길래 이렇게 진지하신 거죠?”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그저 그럴듯하다고 여길 수 있는 한 인간을 만들어냈을 뿐입니다. 바로 여자의 성별로 말이지요.”


그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꾸뻑인 몸의 움직임에 놀라 화들짝 깨고 만 나나가 서둘러 일어나 눈을 억지로 크게 뜨며 외쳤다.


“뭐, 뭐라고요?”


어떻게든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음을 알리려는 의도에서 꺼낸 말이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대화가 단절되고 말았다는 것을 자신만큼 놀란 얼굴을 한 다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깨달아야만 했다.


“왜, 왜 그러는데?”


도진을 쳐다보며 나나가 물었다. 재촉하는 의미로 그의 팔뚝을 툭툭 쳤으나 도진이 쉬이 응하지 않은 탓에 자신만 우심히 민망해지고 말았다.


“저, 죄송한데 지금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요?”


결국에 나나는 억지스러운 미소는 물론, 최대한 상냥한 말투와 함께 안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꽤 단잠에 취했던 모양인지 퀭하고 힘없던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긋말긋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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