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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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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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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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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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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196화

DUMMY

그렇게 마음이 점차 허우룩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나나의 생각이 쏠리는 데가 새롭게 등장하고 말았다. 허전하다고 해야 할지 서운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낯선 감정으로 현관문이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대뜸 심심하여서 눈을 깜빡거리니 갑자기 문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어디에 있니?”


어느 것의 자리를 두고 묻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쑥 들이닥친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것일까 사방을 급하게 살피며 초영이 거리낌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두 사람이 대답하기도 전에 초영은 제 말만을 반복한다.


“어디에 있지, 어디에 있니? 내가 좀 급하단 말이야!”


그러다가 그녀는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자세의 도진을 마주치자 그의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자신의 것도 아닌 시간이 순서대로 지나가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본 후 그녀는 도진의 방이 있는 곳으로 망설이지 않고 직행했다.


“잠시만요.”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간발의 차로 초영의 앞을 막을 수 있던 도진은 난처하면서도 두려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비켜 봐. 단지 부채를 가지러 온 거니까.”

“부채요? 아······.”


잊고 있던 물건들의 존재에 그는 탄식에 가까운 감탄사를 뱉었다. 뒤에서 이 상황을 어리숙하게 지켜보던 나나도 뭔가가 떠올랐는지 눈을 살짝 찌푸린다.


“제가 가지고 나올게요.”


초영이 좀처럼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억지로 제 몸을 뒤로 바짝 밀착시키며 도진은 문고리를 쥐었다. 틈 사이로 안이 보일세라 문이 열리는 즉시 등을 보이며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찰나에 일어난 일에 초영은 기가 찼지만, 어쨌거나 그 부채만 손에 얻으면 되는 일이기에 한 걸음 물러나 도진이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려고 허리춤에 손을 찔러 넣었다.


“쓰실 일이 있는 건가요?”


밖으로 나오며 바로 문을 닫아버린 도진이 그와 동시에 부채를 초영에게 건네며 물었다. 그녀는 먼저 부채를 받아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모자도 같이 드릴게요. 저희는 당분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필요할 것 같지는 않지만, 도진이 네 마음씨를 봐서라도 우선 챙겨는 둘게. 아무래도 확인할 게 한두 가지여야 말이지. 난 귀찮게 이것저것 조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뭐든 알아낼 수 없는 법 아닌가요?”

“나한텐 아니야.”

“그럼 초영 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 거죠?”

“기억을 읽어야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사랑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시간의 기억이니까. 그렇지 않니?”


그 말을 알아듣고는 바로 도진이 “그렇겠네요.”라고 답하자 초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고 돌아섰다. 그러다가 다시 자리에 앉고야 마는 나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는데, 이때 그녀는 들고 있는 부채로 반대쪽 손바닥을 툭툭 치며 나나를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사랑은 시간의 기억이라고.”

“네? 뭐, 그렇겠죠.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솔직한 답변이었다. 전적으로 초영의 의견에 찬성하기에는 굳이 사랑이라는 사건인지 현상인지 모를 것을 두고 기억이니 감정이니 서로 다른 표현을 사이에 두고 고민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어머, 네가 제일 그렇게 생각할 텐데 유감이다. 아무튼 나는 이만 갈게. 이런 수다를 할 시간은 원래 없는데 갑작스러운 방문에 너희가 놀란 것 같아서 꺼내본 말이었거든. 난 아마 당분간 난연에만 있을 것 같아. 너희가 나를 찾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럴 일이 있다면 난연으로 오도록 해. 어디에 있을 건지는 짐작이 가지 않니? 그럼 바쁘니까 정말 안녕.”


이만 가겠다고 하는 손짓이 이상야릇할 정도로 너그러워 보였다. 초영은 작별인사를 끝낸 후 아쉬울 것 하나 없이 도도하게 머리를 뒤로 넘겼고, 안녕히 가시라는 도진의 인사를 받으며 그대로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초영이 떠난 자리를 두고 아까와 같이 백면을 떠올리게 된 나나가 금세 화제를 바꾸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랑은 기억이라는 말씀 말인가요? 실은 저도 잘 모르는데 초영 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가 보다, 그렇게 넘기는 거예요.”

“아니, 그것도 그렇긴 한데······ 백면에 대해서 말이야.”


그러자 묵묵히 노력하며 이야기하던 도진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나나는 눈길을 슬쩍 그에게 돌리면서도 말을 이어나간다.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정말로 그게 사랑 이야기라면, 정말로 아무도 몰랐을까? 보통 누군가를 짝사랑한다고 해도 주위에 한두 명은 알게 되기도 하잖아.”

“그런가요?”

“그렇지 않아?”

“전 사랑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요.”


아마도 자신이 과거를 두고 질책하며 하는 이야기인 듯싶다. 그런 의도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죄책감을 느낀 나나가 서둘러 변명에 나섰다.


“아니,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보통은 그런 것 같아서 하는 이야기야. 나도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은 있어도 사랑이니 뭐니 그런 깊은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다니까. 그런데 주변을 보면 좋아하는 감정은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보다 더 많잖아. 정말로 백면의 사정을 아무도 몰랐는지 그게 의심스러워서 하는 이야기야.”

“어째서 나나 씨는 그렇게 생각해요?”

“직접 만났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꿈에서 몇 번 만나본 백면과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로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백면은 그래도 꽤 솔직한 성격인 것 같았거든. 거짓말은 제대로 즐기는 것 같긴 하지만.”


도진은 그제야 자리에 돌아와 앉으며 나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나나 씨가 본 그대로 백면이 드러낸 게 아닐까요?”

“뭘?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네.”

“어떻게? 백면이 주관하는 인간의 감정은 허무라면서, 허무함으로 어떻게 사랑을 감출 수 있는 건지 그게 잘 이해가 안 돼.”


도진은 두 눈썹을 높게 치켜뜨며 새로운 진실을 폭로할 때의 멋쩍은 표정으로 나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단견(短見)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 말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조금씩 짐작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구태여 감출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던 거겠죠. 시의 제목으로 거짓말을 하고, 또 나나 씨의 꿈에 나타나서 거짓말을 하고, 그게 백면이 생각하는 사랑의 방식이었던 건지도 모르니까요.”

“확실히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나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조금 전에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던 물감을 이제야 알아채고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이 손바닥 안에서 물감을 만지고 굴리며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그 거짓말이 우리 같은 인간이 아니라 성인에게도 통했는지, 난 그게 궁금해서 그래.”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렇게 통했기 때문에 초영 님이 뒤늦게나마 백면의 뒤를 캐내려고 하시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성인(聖人)이잖아. 그런 성인이라면 앞을 내다보거나 무슨 일을 두고 대부분의 사람이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을 때도 사리 분별을 정확하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나 씨는 여전히 나나 씨가 살던 세계에서의 신(神)을 생각하는군요.”

“그럴 수밖에 없어. 나는 달이 줄곧 뜨는 세상에선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고도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나나는 양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입술을 최대한 일자로 만들었다. 밍밍해진 마음에 자연스레 한 행동이다.


“나도진. 있잖아.”


뭔가가 되풀이되고 있는 기분이 새롭게 들었는데, 그건 아까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이 도진을 불렀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나는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왜 그래요?”


다행인 것은, 도진은 이번에 책을 읽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말로 우리는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

“모르죠.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저희는 계속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도진이 몸을 뒤척이려는 아이의 등을 사근거리는 손길로 토닥거렸다.


“나나 씨는 생각보다 공백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


예상치 못한 도진의 말에 놀란 나나가 되물었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보인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조바심이 들면 교수님의 논문이 와성되는 동안에 그림을 그려보는 게 어때요?”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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