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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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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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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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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08화

DUMMY

완연한 여름이다. 숨소리마저 질리게 하는 한여름이라는 시절은 사람에 의해서 정해질 때도 있다, 정녕 그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숨을 내쉴 때마다 노기를 드러낸 얼굴은 더욱 붉게 익어간다. 후덥지근한 대기 중에 달아오르는 탓에 그 얼굴이 곧 태양의 것인 줄 착각한 듯이 달도 그 위로 뜨지 않고 조금씩 비켜서서 그가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스스로 저만치 멀어져간다. 하늘의 이치란 실로 묘한 것이다. 절대로 닿을 리 없는 대신에 결코 숨는 법은 없으니, 이처럼 하늘을 머리 위에 두지 않고서는 씩씩거리며 걸을 수도 없을 듯하다.


“이런, 빌어먹을!”


대학 건물 안으로 들어온 권기현은 속된 말을 작게 읊조리고는 들고 있는 서류 봉투를 꾸깃하게 쥐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 손아귀의 히에 이끌려 안의 종이가 잔뜩 구겨졌으리라는 것이 봉투의 구김 자국만으로도 짐작이 간다.


“젠장.”


평소 모든 이가 드나드는 출입문을 이용하지 않았던 기현은 건물의 정중앙에 난 간문을 통해 들어온 상태다. 유리문도 아니거니와 창고의 문처럼 남루한 철제문인지라 그가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문을 닫은 후에 몇 걸음 정도 내걸은 후에 이 간문은 통로의 역할을 감쪽같이 잃고 말았을 정도로 배경에 스며들었다.

고개를 무리하지 않고 돌리기만 해도 보이는 복도의 한 벽면에는 안수의 연구실 문이 부채꼴 모양의 밝은 틈을 보여주고 있다. 그 사이로 스며 나오는 빛이 기현이 이제까지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고약한 성질을 자극하고 마는 과오를 저질렀다.


“정 교수!”


늘 그랬기는 해도 유달리 되록거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이 바깥에서 들려오자, 안에서 제 동료인 명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안수가 찻잔을 들던 손짓을 빠르게 멈추고 말았다. 이윽고 구김살이 지고 아무렇게나 뜯어 헤친 흔적이 역력한 봉투 하나를 들고 기현이 이쪽으로 들이닥치고 말았다.

문을 등지고서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던 명훈도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반쯤 몸을 돌려 뒤를 볼 때에 이미 기현은 안수를 향해 당차게 걸어가 봉투를 두 사람의 찻잔 사이로 내려놓은 후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안수가 기현에게 고개를 약간 숙이며 물었다. 의례적인 인사는 생략하기보다는 아예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뜬금없이 나타난 존재의 등을 보며 명훈은 서서히 자리에 앉는 동작을 보인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기현은 대답하지 않고 도로 자신이 물었다. 아무래도 그 질문은 자신이 하기에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분개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호소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모호하게 격양된 기현의 목소리에 다분히 놀란 안수는 그 뒤로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은밀하게 주시하고 있던 제 죽마고우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시선 교환 속에서 어떤 메시지도 전달되지는 못했다. 그저 함께 눈을 꿈뻑거리는 동안에 안수가 고작 꺼낸 말은 “예?”가 전부였으니.


“이렇게 논문을 쓰는 작자가······ 아니, 이렇게 논문을 쓰는 학자가 어떻게 실제로 존재하느냐고 묻는 말인데!”


치밀어 오르는 격분에 벌개진 기현의 얼굴빛은 그 시선에까지 스며들어 혈안이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이러한 파장을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므로 안수는 탁자 위로 올려진 봉투를 들었다. 그리고는 무엇이 그토록 기현을 자극한 것인지 확실시하기 위해 봉투의 방향을 뒤집어 그 비밀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우수수 떨어지지 않고 둔탁하고 육중한 음 하나만을 비대하게 울리며 탁자에 떨어진 것은 안수가 이번에 고심하며 준비한 논문이 실린 학술지다.


“보셨나 보군요.”

“보다 말다!”


안수의 나지막한 소리에 기현이 조롱하듯 반응했다.


“보는 것은 물론이고, 읽기까지 했다고 하면 믿을 수 있는지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계절에 맞지 않게 대기 중으로 한기가 퍼지자 당황한 기색의 명훈이 이쯤에서 자신은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두 다리를 굴리며 제자리를 배회한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누구의 안중에도 들지 못했다.


“도대체 문학을 뭘로 보고! 학문을 장난으로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짓을 뻔뻔스럽게 한단 말입니까? 나는 정 교수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렇고 말고. 이렇게 한탄스러울 수가······ 사람은 사람을 등지더라도 학문은 결코 그럴 일이 없어야 하건만! 어째서 정 교수는 그것조차 모른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최선이 그 진리에 못 미쳤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그리고 겸허히 수긍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신경전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이 없어도 계속되었다. 두 명 모두 모략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것 역시 예고된 전술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에 죄인이 된 양 안수는 절대로 눈을 바닥에서 들지 않고 묵묵히 제 의견을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열 번째 시를 토대로 그런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제 고뇌를 전부 내비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적당히 이성적이기만 하면 된다. 학문이라는 것은 때로 감정을 추앙하다가도 물음이 막힐 적에는 그것을 가장 먼저 질려 하는 고질적인 문제를 떠안고 있으면서도 그 심각성을 조금도 자각하지를 않으니, 이는 솔직한 것과 정직한 것이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열 번째?”


화가 가라앉지 않은 어조로 학회장이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단어를 짚었다.


“예, 열 번째 시를 보고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아니, 높은 확률로 시인은 당대의 양반 여성일 것이라고 말이지요.”

“열 번째 시라면······.”

“「칠석(七夕)」입니다.”

“그래, 그 시가 어떻게 여자가 쓴 게 됩니까? 규방문학이 버젓이 전통을 잇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너무 맞지 않아요, 너무 맞지 않다니까.”

“하지만 반드시 남성일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익살스러운 무표정을 하며 안수가 덤덤히 말했다. 겉으로 나타나지는 않아도 속에서는 기현을 시원히 꼬집고 싶은 문장들이 그의 가책에 간신히 붙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여 남성이라고 하더라도 어차피 새로운 사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 저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이설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학술적인 가치는 있을지언정, 명예와 권위를 얻을 수는 없겠지요.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으니까요.”


기현은 난데없이 학술지를 봉투에 사납게 집어넣고는 그것을 그대로 옆구리에 차며 안수의 방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논란만 만들 겁니다, 논란만. 우리 학계가 우스워지고 말 거라고.”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듯이 나름 아쉬운 눈빛을 보이기는 했지만, 더는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이 그는 안수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쓸데없는 논란만, 무가치한 논란만 만들 것인데! 왜, 왜 하필 이번에 내가 이런 수모를 겪어야만 했는지······ 그 일만 아니었다면!”


말하는 도중에 기현은 찰나의 노려보는 시선을 명훈에게 던지기도 했다. 입술을 말아 넣을 정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명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다소 놀란 기색을 보였다.


“아무튼 매우 실망했습니다. 뭐가 부족해서 이런 같잖은 글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안수의 침착한 물음이 기현의 씩씩대는 걸음을 붙잡았다.


“초본을 얻어놓고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지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삽시간에 울려 퍼졌다. 기현이 또 봉투를 뭉갠 것이다. 안수가 선 쪽에서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으나, 옆모습 정도는 거뜬히 볼 수 있는 명훈이 앉은 자리에서는 붉었던 안색이 퍼렇게 질리고 있는 그 선배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명훈은 서둘러 제 벗에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면목이 없습니다.”


이야말로 의례적인 인사였다. 명훈은 자신의 친구가 어쩌자고 저리 담담하게 대응하는 것인지 그 속내를 도통 알 수 없어 제 근심을 거두지 않고 안수를 주시한다.


“다음에는 조금 더 나은 글을 내놓을 것을 약속드리고 싶은데,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것을 여쭈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이라.”


상대는 자비를 베풀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여 조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데, 그 등에 대고 안수는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했다.


“다음이라!”

“예.”

“······다음이라고!”


곱씹을수록 더욱이 기가 차는 바람에 기현은 이미 했던 말을 적극적으로 되풀이했다. 그러고서는 이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최면 속에서 길을 죄며 사라졌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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