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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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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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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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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화

DUMMY

그로부터 며칠이 더 흘렀다. 달라진 거라곤 제법 꿉꿉해진 날씨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구름의 움직임마저 우물꾸물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내고 뱉는 공기가 그리 상쾌하지가 않다. 그래도 당장에 비가 오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에 날씨에 대해 그리 심려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나나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잠긴 유리문을 서너 번 애타게 흔들어보고는 뒤로 물러섰다.

하얗디하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몇 번 들른 적이 있는 곳이라고 해도 저 벽 뒤에까지는 닿아본 적이 없으니 사람의 미련을 묘하게 붙잡아두는 재주가 있는 벽이라고 해야겠다. 그 틈이 어떻게든 보이도록 대각선 방향으로 서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봤지만, 내부가 잘 보이지는 않았다.

이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한두 번 해본 짓이 아닌 터라 더없이 빠르게 체념한 나나가 뒤돌아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럼 다 잘 된 거네요!”


오랜만에 집에 머무는 시간을 가지게 된 조이가 잠든 아이의 등을 지금 전보다 약간 세게 토닥이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를 포함해서 나나와 도진, 세 사람은 고전 작품 한 권을 읽는 것처럼 객관적이면서도 비정치적으로 안수의 논문에 관한 이야기를 10분 전부터 나누고 있었다. 그건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결말을 긍정할 때의 궁극적인 태도이기도 했다.


“그런 거 같아요.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해도, 그쪽 학계에서는 좋은 반응이 더 많다고 하니까 뭐 어떻게든 좋게 끝난 거겠죠?”


나나가 말했다.


“그럼요! 좋은 게 좋은 거죠. 그렇지 않아요? 아직 더 지켜봐야 할 일인 건 나나 양의 말대로겠지만요. 그래도 중요한 건 중간의 한 단계를 무사히 지나쳤다는 거예요.”

“그, 그렇겠죠?”


조이의 낙관적인 태도에 기가 눌려 나나는 얼떨결에 동조하고 말았다. 물론 조이의 이론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에 내내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바로 그 학회장이라는 작자가 도서관에서 남몰래 치우려고 했던 시집 한 권이었다. 한 줄짜리 언급이 지나지 않았더라도 안수의 연구가 주목을 받게 된 결과, 그 시집에 관해서 논하려고 드는 사람들이 버젓이 있기 마련일 텐데 그에 비하면 이후 기현의 행보는 이쪽에는 무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미술관에서의 예상치 못했던 만남. 그때도 그는 고작 제 배알을 곤두서게 한다고 해서 시집 한 권을 훔치려고 할 만큼 옹졸한 노인네로 보이지는 않았다. 인정하기는 싫어도 고상한 쪽으로 표현하는 게 더 옳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그런 척에 지나지 않겠지만.


“하지만 아직 모르는 일이야.”


나나가 머릿속에서 홀로 앓고 있던 고민을 끄집어낸 건 여태 두 여자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도진이었다. 나나는 그의 난입이 반가워 저도 모르게 밝아진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말았다.


“어째서?”


도진의 신중한 태도가 의아하다는 듯이 입술을 오므린 조이가 물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속임수에 지나지 않잖아. 게다가 교수님께서도 백면의 시집이라는 걸 아시게 된 이상 앞으로 연구를 계속하시리라는 보장도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원본이 두 권이 되어야만 했는지 아무것도 밝혀낸 게 없어.”

“맞아. 나나 양의 필체로 쓴 시집이 나중에 나타났다고 했죠?”


제 옆에 앉은 나나의 어깨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려놓으며 조이가 다정히 말했다. 도진이 물밀 듯이 내놓는 걱정거리에 갑자기 겁먹은 나나는 어색한 고갯짓으로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지 않아? 더군다나 나나 양의 꿈에 백면이 보이지 않은 지도 꽤 됐다고 했잖아.”

“그랬지.”


침묵이 찾아오는 동시에 조이와 도진의 시선이 나나에게 꽂혔다. 무슨 이야기라도 좋으니 새로운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다.


“꾼 적 없어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지금도 그렇고.”


해이해진 백면의 출연은 결코 제 탓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나나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죽은 이가 무엇이 그렇게도 공사가 다망한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가 꿈에 보이지 않은 지는 꽤 되었다.


“그렇다면 그 교수님이 마지막 사람인 게 아닐까요?”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단 희망에 부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오히려 자신들의 의무는 이제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이가 들뜬 목소리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아까보다 더 기대감에 차오른 듯한 눈빛이 역력하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기대에 부응할 사람은 저 자신이 아니라 백면이라는 점에서 나나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의기소침해지는 순간에 도진이 나나를 거들었다.


“그건 나나 씨 말이 맞아. 꽤 한참이나 백면이 내생에 대해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뒤에 다른 내생이 없었던 건 아니잖아. 네가 내생이라는 걸 알린 뒤로······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걸 고려하면 자부할 수 없어. 지금처럼 복잡한 상황에서는 기왕이면 이상의 내생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하지만 천일나무가 썩어가고 있다며?”

“응.”

“지금까지 나나 양이 들려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아이를 고쳐 안으며 조이가 말을 이었다.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잖아! 백면 말이야. 저번에는, 그러니까, 나나 양이 저번에 이런 이야기를 했었죠?”


그녀는 도진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여전히 겁먹은 듯한 나나를 마주했다. 나나는 조이의 말을 중간에 자르지 않고 그 시선에 눈을 맞추기만 했다.


“교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말이에요. 그러니까 난연에서 말고요. 여기 수도에 와서 말이에요. 그때 교수님을 다시 만난 건 분명히 도진이었는데 그때 백면이 심연도에 있던 나나 양에게 드디어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했잖아요. 맞죠?”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조이는 조금 더 부담스럽게 나나를 바라봐야 했다. 나나는 “맞아요.”라고 간신히 답하고는 바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이야기 들었을 때 엄청 신기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지 않아, 도진아? 그 순간에 너는 그분이 백면의 내생이라는 걸 조금도 알지 못한 상태였고, 나나 양 역시 심연도에서 12성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만나지 않은 상태였잖아. 그런데 네가 그분을 만난 다음 날에 말이야. 네 꿈도 아닌 나나 양의 꿈에 나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정말 신기했거든. 이상한 기분도 들기도 했어.”

“이상한 기분?”


도진이 고민에 잠긴 듯이 천천히 손깍지를 끼며 그 손등 위로 제 턱을 괴었다.


“응. 꼭 백면이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 말이야. 우리가 자신의 영혼을 나눠 가졌다는 게 정말 사실이라고 해 봐. 그렇다면 본인의 영혼은 온전치 않다는 건데 그럼에도 우리의 일을 바로 아는 게 정말 이상하지 않아? 솔직히 소름이 끼쳐야 할 일일 수도 있어.”


이야기를 마치며 조이는 비단 자신만이 느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나나의 귀에 대고 “그렇지 않아요?”라며 작게 속삭였다. 나나는 이번에도 고갯짓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확실히 그렇네.”


눈을 감은 채로 조이의 이야기를 토대로 새로운 의문을 도출해낸 도진이 손깍지를 풀며 중얼거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거지? 충분히 이상한 일인데.”


늘 방심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던 습관이 정작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놓치고 말았다. 아니라면 백면이 성인(聖人)이라는 점에서 가장 파헤치기 힘든 의문을 죄책감도 없이 간과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인 게 하나 있다면 어느 쪽이건 백면은 우리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백면이 천일나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조이가 나나에게 물었다.


“그랬던 것 같아요.”


나나는 허공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보니 번번이 백면에게 속고 있다는 느낌을 더욱 떨칠 수 없게 되어서 그렇다.


“정말로 신기한 일이에요. 나나 양, 백면은 정말 죽은 사람이 맞을까요?”


다른 두 사람의 삭막한 표정이 암시하듯이 심각해진 분위기를 느낀 조이가 아무런 말을 지껄였다. 단지 대화의 주제를 가벼운 쪽으로 바꾸기 위해서 농설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이 한마디로 인해 자신의 자그마한 소원은 각박한 상황에 부딪혀 홀연히 그리고 완벽히 날아가 버렸음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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