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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공룡

몰락한 천재헌터는 폐급의 헬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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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공룡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2
최근연재일 :
2023.08.14 23:55
연재수 :
8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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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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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0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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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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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7)

DUMMY

최지환과 힘을 합쳐 상대할 때도 고작 갑옷에 흠집 조금 낼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그 날이 떠오른다. 흠집 조금 낸 것도 잘 한 거라며 잘난 듯 칭찬하던 칼트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게 그려지는 걸 보면, 그날 겪은 충격이 생각보다 뼈저리게 박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엔 베었다.”


다음은 없겠지만.


지금껏 머릿속에 그려만 왔던, 모든 걸 쏟아 부은 단 일격. 단 한 번으로 온몸을 두르던 마력과 함께 체력이 빨려나갈 만큼 위력적인 일격.

그 위력적인 일격 한 번으로 칠흑으로 뒤덮인 칼트의 가슴팍에 기다란 자상이 그어졌다.

온몸에 두꺼운 갑옷을 두르고 있는 탓에 녀석에게 직접적인 타격이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평소라면 검 끝으로 느꼈을 감각도 모든 걸 쏟아 붓는 와중엔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저 괴물을 내 손으로 베었는데.


눈앞으로 칠흑의 대검이 높게 솟은 모습이 보이고, 반대편엔 함께 싸웠던 일행이 쓰러져 있지만, 녀석의 가슴팍에 그어진 흔적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 피어오른 미소가 지워지질 않는다.

이제 저 커다란 대검에 죽는 것도 두렵지가 않다.


그래. 두렵지가······.


순간, 눈앞으로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갔다.

균열 속으로 사라지던 최지환. 싸늘한 시체로 남은 홍지아. 균열 속에서 홀로 죽어가던 정상윤. 함께 전투를 치르다 처참히 죽어간 헌터들. 마물에게 찢겨나간 가족.

그리고 커다란 대검에 복부를 뚫린 채 서서히 죽어가던 나.


아직 지켜야 하고, 갚아야 할 게 한참이나 남았는데, 여기서 죽는 게 두렵지 않을 리가.


드디어 여기까지 닿았는데.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진다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텐데.


하늘높이 치솟았던 대검이 천천히 떨어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시간이 늘어지는 듯한 모습에 몸을 움직여도 봤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다.

나름 온갖 발버둥을 치는 동안 당장이라도 몸을 반 토막 낼 정도의 기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방법이······.


그때, 오로지 거대한 대검에 집중됐던 시야 속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그러자 느릿하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제 속도를 되찾아 가더니 ‘서걱’하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풀썩.


칼트가 쥔 검 끝이 바닥에 닿자 앞을 가렸던 누군가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양팔을 잃어 두 개의 기다란 뿔로 날아드는 검을 막으려 들던 뒷모습이 말이다.


“정······상윤?”


분명 저 뒷모습은 정상윤이다. 악마화가 진행돼 제 정신을 찾지 못하고 날뛰던 녀석이 무슨 이유로든 정신을 되찾은 건지, 혹은 그저 날뛰고 싶은 마음에 전장으로 뛰어든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지금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건, 녀석에겐 칼트의 일격을 받아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눈을 굴려가며 바닥에 널브러진 정상윤을 찾았다.


“방해꾼이 끼어들었군.”


하지만 그곳에 보인 건 다시 솟아오른 거대한 대검이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날아드는 대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거뭇한 기운이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마기······.


“벨프.”


휘두르던 검을 멈춘 칼트의 마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녀석을 조롱하는 듯한 벨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만히 생각해봤거든? 난 네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근데 저 녀석이 조금만 커지면 너 따위는 그냥 잡아먹을 것 같단 말이야. 어차피 이렇게 있어봤자 난 죽을 텐데, 그럼 너무 분하잖아?”


몸을 둘러싼 건 벨프의 마기였다. 균열을 자유자재로 열고 닫을 수 있는 녀석의 마기. 그런 마기가 몸을 감싸며 시야를 가리자 시야에 들어오는 배경이 서서히 다른 곳과 겹쳐지기 시작했다.


“허튼 짓을 하는군.”


칼트의 마지막 목소리를 끝으로 시야가 마기의 검은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이내 눈을 뜬 곳은 처음 균열 속으로 들어섰던, 우리가 살던 세계였다.

처음 균열 속으로 들어설 때와 다르게 이미 해는 저물어 있었다. 흙바닥에 널브러진 채 하늘을 가득 메운 달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 상황이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으헉!”


“허억!”


그때, 지금 상황이 현실이라며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머리 위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눈알을 굴릴 힘도 남지 않아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숨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평소완 다르게 목소리에 기운이 빠진 김성환.


“나, 나도 잘 모르겠는데······.”


평소완 다르게 자신감이 결여된 정세라.


“으갸아악!”


악몽이라도 꿨는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박다미까지.

벨프의 변덕 덕분에 그곳을 빠져나오게 되자 공간을 짙게 억누르던 마기의 늪 속에서 벗어난 일행들은 거의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리고······.


어째서······.


하지만 이어서 들려야 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저, 정상······윤······.”


“차, 찬솔씨! 괜찮으신 겁니까?”


남은 힘을 쥐어짜가며 간신히 목소리를 내뱉자 김성환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꺄악! 아, 악마!”


무언가를 발견한 박다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파지직.


“물러나. 이미 죽은 것 같긴 해도 확실히 끝내버릴 테니까.”


무사히 공간을 빠져나온 일행들 사이에 죽어가는 악마.


“······안 돼. 멈······춰.”


“자, 잠깐만 기다려주십쇼!”


다행히 내 목소리를 들은 김성환이 정세라를 멈춰 세웠다.


“악마한······테 데려다······줘.”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던 김성환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날 천천히 일으켜 세워 악마, 아니. 정상윤이 있을 곳으로 부축했다.

돋아나다 만 작은 날개와 깔끔하게 잘려나간 뿔. 문신처럼 피부에 퍼져나간 마기의 흔적과 창백한 얼굴. 얼굴부터 복부까지 길게 그어진 깊은 자상. 그리고 눈가에 그어진 붉은 피눈물의 자국.

짙은 마기가 자상으로 갈라진 살점을 이어 붙이려 꿈틀대고 있었지만, 얼핏 보기에도 깊은 상처를 메우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정······상윤······.”


“뭣······!”


내가 부른 이름이 놀라웠는지 아주 잠깐 박다미의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옆에서 함께 지켜보던 정세라가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았다. 몸을 붙들고 있는 김성환의 손에서도 옅은 떨림이 전해졌지만, 이내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녀석의 옆으로 날 앉혀줬다.


“······눈 떠······볼래?”


느껴지는 건 없지만, 아직 마기가 꿈틀거린다는 건 목숨이 붙어있다는 증거. 하지만 별다른 반응이 보이진 않는다.


“일어나······, 이 녀석아······.”


그제야 정상윤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 속에 담긴 초점은 어디에도 닿지 못했지만, 분명 내 목소리에 반응하고 있었다.


“내가······아직 부족해서······이번에도 널 지키진 못 했다.”


그저 마력을 쏟아져 나와 잃었던 체력이 서서히 돌아오는 게 느껴지지만, 눈앞에 보이는 정상윤의 마기는 반대로 서서히 옅어져만 갔다.


“널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더 깊게 생각했어야 됐는데······.”


눈앞이 점점 흐려져 간다. 볼가를 타고 흐른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리자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내가······. 내가 미안하다, 상윤아. 결국 내가 또 일을 그르쳤구나······.”


점차 회복되어 가는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김성환의 부축에서 벗어나 점점 체온을 잃어가는 정상윤의 손을 잡아주는 것뿐이다.


“상윤아······. 전부 내가 잘못한 일이야······. 그러니까 제발······.”


회복되는 마력을 잡은 손으로 족족 밀어 넣어도 봤지만, 갈피를 잡지 못한 마력은 그저 허공으로 흩어져만 갔다.


“아아······.”


내 목소리를 들은 건지, 내 마력을 느낀 건지, 정상윤의 눈가로 붉은 피눈물이 흘렀다. 이어서 깊게 남은 상처를 메우려 일렁이던 마기가 천천히 녀석의 몸속으로 스며들더니 검붉은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 안 돼! 제발······!”


“······스······승······.”


마지막 한 마디였다. 회복하지 못할 생명력을 간신히 붙들고 있던 마기를 거두고, 그 모든 힘을 쏟아내 내뱉은 마지막 한 마디. 그리고 정상윤은 간절히 붙들고 있던 손의 엄지를 천천히 치켜세웠다.

이런 모습이 되었어도 날 알아봐 주는 유일한 아이이자, 저런 모습이 되었어도 날 지켜주려던 유일한 아이가 그렇게 눈을 감았다.


“아······아아······.”


결과가 바뀌진 않았다. 결국 정상윤도 죽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벨프도 잡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바뀐 게 하나 있다면 이 멍청한 녀석이 복수를 위해서가 아닌, 날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런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 이 녀석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려 했다. 내가 바꿔야 할 건 단 하나뿐이라고, 다른 욕심은 부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결국 조금뿐이라며 부리던 욕심은 또다시 막심한 후회로 남게 될 뿐이었다.


“저······. 찬······솔씨.”


이쪽을 가만히 지켜보던 김성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더 많은 피해가 생길지 모르니 우선 이 사실을 길드에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정론.

돈벌이가 되기 때문에, 복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별별 이유들이야 많지만, 결국 헌터들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악마와 마물을 상대하는 이유는 인류를 지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김성환이 이런 말을 건네 온 것도 다른 이들을 대표했을 뿐이지, 내 슬픔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다고 볼 순 없다.

그건 안다. 알고는 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화가 치미는 걸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스르릉.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새 손에 쥔 검으로 몸을 지탱해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이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다.


“······찬솔씨?”


당황한 김성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욱 화가 난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머리를 울린다.


“난······.”


-죽여 버려.


-인간이 어쨌는데?


-나보다 중요한 건 없잖아.


끊임없이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고생했어요, 스승님.’


눈꺼풀로 가려진 어둠 그대로 몸의 통제권이 사라지고, 모든 의지가 이 몸에 깃들었던 감각으로 되돌아갔다. 차츰 피어오르던 분노는 어느새 잠잠하게 사그라졌고, 그저 정상윤이 죽었다는 슬픔만이 온전히 가슴을 파고들었다.


“죄송해요. 제가 기운이 없어서 그러는데 사형 좀 챙겨주실 수 있을까요?”


이찬솔의 말에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김성환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윗옷을 벗어 정상윤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한기를 내뿜어 녀석의 시신을 차갑게 식혔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곳에서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기뻐해야 마땅하겠지만, 길드로 돌아가는 내내 주변을 감싼 공기는 너무도 무거웠다. 말 그대로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일행이 균열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던 차량을 타고 사옥이 보이는 곳까지 도달하자 쌓였던 피로에 불안감이 더해졌다.

다 깨져나간 유리창과 온갖 균열이 그어진 외벽. 그리고 자칼의 습격으로 허허벌판이 돼 복구 중이던 지역은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어 우리가 없는 동안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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