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극작관련 강좌를 들었었는데, 주요골자가 개연성과 리얼리티였습니다. 너무 오래 전이라 자세히는 기억을 못하지만, 개연성은 인과관계가 짜여져서 실현되는 성질로, 리얼리티는 그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사실성과 현실성으로 배웠구요.
개연성과 리얼리티. 이 두가지가 없으면 소설은 물론, 드라마, 영화 또한 죽은 작품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강의를 해주신 스승님이 설명하길, SF영화에도 리얼리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얼리티는 작품 속 세계의 현실입니다. 그 SF영화가 타임워프를 하든 22세기로 날아가든, 스타워즈처럼 우주계이든 뭐든 간에, 작가는 자신이 쓰는 소설 속 세계, 그 설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자 혹은 관객은 작품을 보면서 그 설정과 세계를 머릿속에 그려가기 때문에, 그렇게 머릿속에 형성된 작품의 세계 자체가 리얼리티입니다.
아주 오래된 SF영화에서 외계인들은 빨리 늙는 설정이라면, 최소한 그 영화에선 그 규칙대로 가는 것이 리얼리티입니다. 외계인과 지구인 사이에서 2세가 태어나면 좀 다르게 전개되더라도, 일단은 외계인끼리 낳은 2세가 아무런 원인 없이 천천히 늙을수는 없는 것이구요. (물론 다른 영화에 그 영화의 룰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무협을 예로 들면, 어떤 소설에선 '인피면구'로 누군가와 똑같이 변신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변조하지 못하는 설정으로 해둡니다. 그런데 소설 속의 지인들은 인피면구를 쓴 가짜와 대화를 오랫동안 나누면서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이게 리얼리티가 깨진 장면입니다. 이럴 경우엔 물론 개연성도 깨지겠지만요.
하지만 어떤 소설에선 인피면구 뿐만이 아니라 음성까지 변조가 가능한 캐릭터를 만듭니다. 그럴 경우엔 에이..싶다가도 설정의 규칙을 독자가 따라가게 되지요. 작가가 작품 속 설정의 틀을 최대한 지키는 것이 리얼리티입니다.
개연성의 경우에는 막장드라마를 예로 들기가 좋지요. 여주인공이 잘 가다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다든지, 분명 부모가 양친 생존한 남자주인공이 갑자기 친어머니가 계모라는 설정으로 아무런 설명없이 스토리가 바뀐다든지, 여주인공이 임신의 증상이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애를 낳는 설정이라든지, 머리나쁘고 노력않는 인물이 갑자기 명문대에 들어간다든지, 인과관계가 전혀 납득되지 않는 장면이 개연성이 파괴된 것이구요.
저는 사극이든 무협이든 SF든, 작가가 설정을 치밀하게 깔아두기만 하면 개연성이든 리얼리티든 흔들릴 일이 없다고 배웠습니다. 재미있는데 개연성과 리얼리티가 없다...그렇게 느낀 순간부터 재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독자가 머릿속에 의심을 품고 점점 몰입이 흐트러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재미있으면 개연성이고 리얼리티고 필요없다는 말은, 독자가 슬슬 재미없어지기 시작하는 작품에 대해 변명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냥 이번만은...이러고 용서하는 개념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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