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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활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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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활
작품등록일 :
2022.07.04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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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0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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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합권

DUMMY

육합권



책사 왕주학

그는 본디 정도 문파의 소속이었다.

흔히 정도 문파의 대표로 꼽는 구파일방(九派一幇), 사대세가(四代世家), 오주명문(五柱名門).

왕주학은 이 중에서도 오주명문으로 꼽히는 해남일문의 이품 제자였다.

자신의 무예에 대한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거야 옛저녁에 알았다.

방탕하게 지내던 그는 자신을 무시하던 기방의 기녀를 홧김에 죽인 뒤 그대로 문파에서 도망쳤다.

아마도 파문이 되었거나 했겠지.

그렇듯 도망쳐 온 곳이 바로 이곳 서강이다.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삶.

왕주학은 응룡회주 문우강을 만나 그 휘하로 들어갔고, 비록 변방의 작은 지역이라 하나 나름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어쨌건 오주명문의 일원이었던 주학이다.

이런 변방의 머저리들과 자신은 다르다.

해남일문에 있을 때에도, 나름 영리하다는 평가를 듣고는 했다.


‘해남일문을 도망쳐 나올 때 비급하나를 훔쳐 나왔었지. 귀령제살검결. 서고에 있던 상승 검법 중 하나였기에 기대가 컸지만, 고작 3성의 성취를 이뤘을 뿐인가? 하지만 이런 변방에서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수로 취급을 받을 수 있지. 이 건방진 꼬맹이가 어디서 무술을 좀 배운 모양이다만, 상승 검법이 가진 힘을 보여주겠다.’


본디 이 같은 긴 역사를 가진 문파의 서고에는 그 역사에 맞게 다양한 경로로 수집된 무공 비급이 있기 마련이다.

200년 전의 고수로 추측되는 귀영검객의 독문무공, 귀령제살검결은 해남일문의 이품 제자가 익히게 되는 진천검법에 비해 한 단계 우위에 있는 검법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 봐라?’


연무장으로 올라온 채호는 봉 한자루를 손에 들었다.

벽력문에는 봉법도 있었나?

그러나 봉을 쥐고 취하는 자세는 육합권의 기본형이었다.


‘어이가 없군.’


고작 육합권을 믿고 이 싸움을 걸었다고?

져도 상관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여기서 숨통을 끊는 건 그림이 나쁘겠지만, 적어도 다신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으로 만들 수는 있다.

왕주학은 본디 그 심성이 곱다고 볼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고 보니 수년 전, 그 기녀의 숨통을 끊었던 밤이 떠올랐다.

자신을 얕잡아 보는 인간을 견딜 수 없다.


‘무예를 익힌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제법 실력이 나아졌다지? 그냥 놔두면 아마도 쓸만한 고수로 성장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 무예의 길은 여기서 끝난다.’


확실히 싹을 짓밟고, 오늘 여기서 벽력문을 끝장낸다.


“그럼 어디 시비를 가려보도록 하지. 말솜씨만큼이나 공자의 무예가 뛰어난지 봐주도록 하겠네.”

“벽력문의 결백함을 증명해 보이죠.”


실지 이 비무는 승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앞서 서로 승과 패를 나눠가진 만큼, 이번 비무는 어디가 이기든 결국 모든 건 마지막 대장전을 통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는 있다.

벽력문이 단순히 작고 힘없는 문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채호는 왕주학의 자세를 살폈다.

남해일문의 진천검법을 익히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모양이다.

진천검법이라면 채호도 안다.

남해일문은 300년 전, 전생의 윤채호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오주명문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왕주학이 취한 자세는 남해일문의 검법과는 유사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아니, 이제 곧 죄를 실토하게 되겠지! 간다!”


왕주학이 달려들었다.

종으로 베어오는 칼날에서 피어오른 예기에 봉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간단히 동강났다.

검기.

왕주학은 그럭저럭 쌓은 내공이 없지는 않았다. 최소 10년 내공 이상.

어처구니없게도, 선기까지 느껴진다.

그럴 것이 귀령제살검결은 사악한 마도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가계열의 검법이다.

이 같은 검법을 변방 작은 사파의 책사가 쓰고 있으니, 그 위화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또 삼재기공이냐?’


이제는 따지고 넘어갈 생각도 안 든다.

채호는 왕주학의 검술이 역시 그 내공의 기반을 삼재기공으로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쯤 되면 삼재기공을 도용하지 않은 무술이 더 드문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름 쓸만한 검술이라는 건 알겠다.

벽력문의 객원인 진노인이 사용하는 비영검술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았다.

하지만 결국 검술이란 그 사용자가 누구냐에 따라 갈린다.

정직하고 빠른, 그러면서도 몹시 매서운 이 검술은 그 자체로는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사용자의 성취가 너무 낮았다.

채호는 왕주학의 자세만 보고도 어떤 식으로 공격해올지를 파악했다.

거리를 좁힌다.

반토막 난 봉 하나를 들고 검기가 서린 일격을 받아냈다.

첫 공격으로는 두부처럼 가볍게 베어낸 봉이, 이번에는 잘려나가지 않았다.


“큭!”


왕주학이 낮게 신음했다.

아무리 날카로운 예기를 품었다 할지라도, 이가 발현되기 위해서는 충분힌 힘이 가해져야했다.

그 충분한 힘을 얻을 수 없는 거리.


“벌써부터 앓는 소리를 내셔야 되겠습니까.”


채호는 그렇게 말하며 왼손에 쥔 봉을 살폈다.

극도의 근접전을 지향하는 육합권에서 있어 기다란 봉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반토막으로 줄긴 했지만, 여전히 귀찮은 길이였다.


“네 이놈!”


왕주학이 거칠게 외쳤다.


착!

채호는 다음으로 이어진 주학의 검기에 남은 봉의 반절 이상을 잘라냈고, 팔뚝만한 길이만 남겼다.

짧아진 봉을 단검처럼 쥐고, 채호는 주학에게 바싹 붙어 근접전을 펼친다.

거기에 바로 육합권의 진수가 있었다.

육합권에 뛰어난 기공술이나, 그에 맞는 상승의 무공은 없었다.

그러나 기본에 충실했다.

다양한 경의 원리를 담은 권법이었으나, 이는 내공을 사용하는 기공경과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애초에 경이란 기공술 이전에 힘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이는 상승 무공에 급급하여 검기나 검경, 또는 검풍을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현 시대의 다른 무술들에 비해 훨씬 단단한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치잇!”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 하는 왕주학을 채호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지난 닷새.

채호가 가장 주력한 것은 다름 아닌 보법이었다.

어떻게든 근접전으로 끌고 갈 수 있다면, 전투의 거리를 자신의 간격으로 만들 수 있다면 승산이 있다.

여기까지가 채호의 계산이다.

현재 자신의 실력을 십분 끌어낼 수 있는 열두 초식을 선별해 연계를 가다듬었다.

왕주학의 외공이 보다 단련이 되어있었거나, 또는 내공을 통해 묵직한 일격으로 채호를 떨쳐낼 수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귀령제살검결은 대단히 가벼운 쾌속의 검술이었다.

차라리 상당한 변화를 내포한 남해일문의 진천검법이 오히려 채호가 상대하기에는 어려웠을 수 있다.

채호는 1척도 안 되는 봉으로 상대의 검을 완전히 묶었다.

팔꿈치, 무릎, 어깨.

서로의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채호는 육합권의 진수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육합권, 육합권이라.”


진노인은 채호가 보이는 무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단련이라고는 되어있지 않은 저 물렁한 몸으로, 어떤 무술을 펼칠지 궁금했었다.

그 자신감의 뒤에는 특별한 무공이 숨겨져 있으리라는 게 진노인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드러난 무공은 흔하디흔한 육합권일 뿐이다.

이전, 객잔에서 촌경을 썼던 그때와 같다.


“하지만 실력은 확실히 늘었지. 전날과 비교하자면, 훨씬 자세가 잡혀있구나.”

“······그건 그렇네요. 그때는 본 실력을 꺼내지 않았던 걸까요?”


지난 번, 서강문의 조영출과 싸웠을 때에도 초식의 연계는 훌륭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번에는 그때보다도 월등히 나아졌다.


“글쎄다. 그 과정은 알기 어려우나······. 보거라. 이게 기초고, 기본기라는 거다. 백날 더 뛰어난 상승 무공만 찾는 이들은 평생을 수련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게야. 왕주학이 지닌 검술은 분명 상승 무공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 본연의 힘을 절반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필시 소협의 승리겠지.”

“하지만, 이건 그저 기본기일 뿐이잖아요. 저라면 있는 힘껏 검기를 쏟아 부어 밀어낸 뒤, 충분한 거리를 벌려 싸우겠어요. 그렇게 하면 고작 육합권으로는 상대 할 수 없을 걸요?”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싶구나. 저토록 가까이 붙은 이후에는 검기를 날릴 간격이 나오지 않아. 물론 당장 붙는다면 아직 신체적으로 완성이 되지 않은 소협을 어떻게든 밀어낼 수도 있겠다만, 제대로 외공을 단련한 뒤라면 어찌 될지 궁금하구나.”

“할아버지는 제가 질 거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건가요?”

“누가 꼭 네가 질 거라더냐. 다만 저 같은 근접전을 상대로 한 대처법을 익혀둘 필요는 있겠지.”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가는 사이, 채호와 주학의 비무는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주학은 이를 악 물었다.

어떻게든 거리만 벌리면 된다.

칼을 한번만 휘두를 간격만 나와도 저 같잖은 육합권을 깨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에 이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이어지는 채호의 공격을 받아내기에도 벅찼다.


“헉! 헉헉!”


조금은 체력 단련이 필요했던가?

하지만 그건 이 녀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지금껏 제대로 된 수련도 한번 해본 적이 없던 녀석에게 장시간 근접전을 펼칠 체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이놈은······.’


처음에 비해 호흡이 거칠어지긴 했다.

고작 닷새 만에 극적인 체력의 상승방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단지 채호는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공격을 취한다.

이는 권이나 각보다 팔꿈치, 무릎, 어깨 등의 활용을 중요시 하는 육합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 깊게!

더 안쪽으로!

피부가 맞닿는 거리에서.

아니, 머리가 맞닿는 거리에서!

그리 품위 있는 일격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단련되지 않은 주먹이나 발에 비해, 머리는 단단한 법이다.

삼재기공의 원리에 따라, 전신의 내기가 머리끝으로 발산되었다.

주학은 자신의 가슴을 들이 받는 채호의 머리를 보며, 그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이두발경(裡頭發勁)!!


폭발적으로 쏟아진 힘의 발산과 함께 왕주학은 채호의 머리를 받고, 텅! 하고 튕겨져 연무장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맙소사, 저 녀석이 진짜로 해냈네.”

“거봐요, 사제는 믿을 수 있다고 말했잖아요.”


와아아아!

좌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윤백양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무공서를 갑자기 들여다본다고 하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저기까지 육합권을 연마했을 줄이야.

마지막, 머리를 통해 보여준 발경도 분명 대단했지만, 그에 앞서 절묘한 보법과 연계기로 끊임없이 상대를 몰아붙인 그 투로에는 감탄이 다 나왔다.

쓰러진 왕주학을 뒤로 하고 윤채호는 연무장을 내려오며 말했다.


“몸이 안 따라주면 머리를 쓰라는 말이 있죠.”

“믿고 있었으니까.”


상희가 미소를 띠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리 옷 끝을 잡아당깁니까.”

“그, 그거야 이기더라도 혹여 다치기라도 할까 조금 걱정이 되어 그렇지!”

“보시다시피, 예리한 검기에 살짝 베이기는 했지만, 부상이라고 할 만한 상처는 전혀 없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응. 그럼, 이제 내 차례지?”

“네. 벽력문의 힘을 보여주고 오시죠, 사저.”

“그래, 알겠어.”


이렇게 해서, 마침내 벽력문과 응룡회의 운명을 건 마지막 비무가 준비되었다.

문우강은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손짓 한번이면 가볍게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벽력문주 윤백양의 승리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방금 본 세 번째 비무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끝내 대장전까지.

자신의 상대는 저 어린 계집.

무재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그래봤자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이 마지막 비무에서, 확실한 힘의 격차를 보여주리라.

앞선 비무의 그 누구도 비견되지 못할 강한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꿀꺽.’


어디선가 쏘아지는 차디찬 시선을 느끼며, 응룡회주 문우강은 허리춤의 패도를 뽑아들고 연무장으로 올라섰다.


작가의말

연재는 한동안 주 4회, 비정기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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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벽력의 검 +1 22.07.22 2,150 46 11쪽
» 육합권 +1 22.07.20 2,133 4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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