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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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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조회수 :
622,786
추천수 :
8,717
글자수 :
1,341,677

작성
16.04.07 16:48
조회
388
추천
7
글자
12쪽

60화

DUMMY

" 아무것도 없네. "


하루밤낮을 꼬박 걸었지만 나오는 것은 모래뿐이었다. 가슴 뛰는 발견도, 침입자들을 처치해온 미지의 적도, 이곳만의 특별한 자연 현상도 없었다. 그녀는 아직 초입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가슴 속 고동은 이미 잔잔해져 있었다.


[사막이니까 당연한거잖아. 그러게 이딴 헛짓거리 할 시간에 다른 『기사』나 찾아다니라니까. 이대로 간다면 아줌마도 결국 굶어죽을거라고.]


" 아줌마라고 하지 말랬지. "


퍽!


그녀는 짜증을 내며 창날을 모래에 처박고는 표정을 구겼다. 그러나 불쾌하다고 해서 마냥 흘려들을 말은 아니었다.


' 『소원의 열쇠』... 진지하게 노려봐야하나? '


이대로 이상현상이 계속된다면 결국 인간도, 괴물도 전멸하게된다. 그리고 더 이상 잡아먹을 생물이 없어진다면 그녀도 끝이었다. 나름대로 후회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역시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았다.


" 어라? "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고민에 빠져있던 그녀의 시야에 모래 이외의 무언가가 걸렸다. 건물이다. 약간 빛바랜 하얀색으로 칠해진 건물이 사막 한복판에 분명히 서 있었다. 단층에, 4인 가족이 살기에도 비좁아보이는 작은 건물이었지만 어쨌거나 모래가 아닌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흥분했다.


타타탓...


그녀가 달리기 시작하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저 멀리 자그맣게 보이던 건물은 어느새 바로 앞에 있었다. 그리고...


콰앙!


' 어라? '


그녀의 시야가 한순간 검게 물들었다가 밝아졌다. 하늘과 땅이 반대로 뒤집혀있다가 느릿느릿 제자리로 돌아간다. 제멋대로 발동한 피의 소용돌이가 노이즈처럼 불안정하게 지직거렸다.


' 뭐지? 뭐지? '


턱!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아귀가 그녀의 목을 잡아챘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다. 너무 작은 나머지 별로 두껍지도 않은 목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힘은,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을만큼 무시무시했다.


" 컥, 커억! "


" ..... "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건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숨통이 막혀버리니 머리가 전혀 돌아가질 않았다. 그저 살기 위해 무작정 발버둥칠 뿐이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의미없는 발버둥에 불과했다.


" ..... "


" ..... "


툭.


" 푸학! 캑! 캑! "


그러나 어떻게 된 셈인지 다시 숨통이 트였다. 연신 헛기침을 하는 사이에 산소를 공급받은 머리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 캘룩! 캘룩! "


거울이 있었다면 아마 자살하고 싶었을 정도로 꼴사납게 눈물 콧물 다 빼가며 기침을 해대던 그녀는 거의 1분이 지난 뒤에야 겨우 평정을 되찾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괜찮나? "


그런 그녀에게 묘하게 낮익은 듯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모르는 언어였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다른 언어로 말을 걸어왔다. 몇 번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끝에, 겨우 그녀가 아는 엘로얀 말이 나오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 예... 감사합니다. "


얼마만에 써보는 존댓말인걸까? 너무 오랜만이라 하마터면 실소가 나올 뻔했다. 은기사를 물려받은 이후부터 그녀는 남에게 존댓말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동으로 존댓말이 나왔다. 분명, 안전하지 않다는걸 깨닫자 나약해빠진 본성이 기어나온게 틀림없다.


[아줌마! 아니, 주인 나으리! 등신처럼 자빠져 있을 때가 아니야! 저 자식, 『기사』를 갖고 있다고!]


" 주인님, 이 녀석 『기사』를 가지고 있는데요. 마침 좋은 기회니까 회수하죠? "


그때, 시끄러운 파트너의 다급한 목소리와 동시에 남자의 등 뒤에서 나타난 어린 여자아이가 살벌한 소리를 하면서 다가왔다. 체구로 짐작컨데 저 아이가 바로 그녀의 목을 조른 범인인 듯 싶었다.


' 『기사』라고? '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사』의 소유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기사』의 소유자를 제압할 수 있겠는가. 남자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조금 부럽... 이 아니라, 아마도 인간형의 『열쇠』일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여자는 고민할 것 없이 도주를 선택했다.


" 누가 도망쳐도 좋다고 했지? "


" 컥! "


그녀는 제자리에서 뒤를 향해 한번 도약한 것으로 1km 가까이를 이동하는 초인적인 신체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에게 또다시 목을 잡히고 말았다. 여전히 작고, 부드럽고, 말캉말캉한 손아귀. 틀림없이 처음에 그녀를 제압한 녀석의 소행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뒷목을 잡혀서 그런지 괴롭긴 하지만 머리가 멈추진 않았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려 범인의 모습을 확인한다.


' 그 여자애가... 아니야? '


남자를 주인님이라 부른 여자애는 하얀 머리에, 하얀 피부, 하얀 옷에, 하얀 신발까지 신은, 그야말로 하얀색 성애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쪽은 미미하게 연두빛이 도는 갈색 머리에 묘하게 사락거리는 소재 불명의 흰색 천 위에 갈색 가죽인가 실인가 모를 무언가로 정교한 무늬를 새겨놓은 옷을...


' 이익, 바보! 지금 그딴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


중요한건, 이 계집애 더럽게 세다! 뒷목을 잡혔을 뿐인데 목 아래가 마비된 것처럼 제대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어떻게든 수를 내지 않으면 살아날 길이 없다. 하지만 어떻게!? 그래, 그녀의 수다쟁이 파트너라면 무언가...


[우린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봐...]


' 야! 네가 지금 약한 소리 하면 안되잖아! '


비록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표정만 보고도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깨달았는지 은빛 창은 체념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그치만 주인 나으리. 저거 진짜 괴물이라고? 지금 흘러나오는 마력치로 추정해보건데 우리 전력이 1이면 저건 최소한으로 잡아도 1.15야. 이 정도로 차이나버리면 우리가 뭘 해도 이길 수가 없어. 심지어 그게 최소치라고 최소치!]


고작 15%의 전력차로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기사』 수준에서 15%라는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엄청난 격차였다. 생각해보라, 10의 15%는 1.5 밖에 안되지만 1조의 15%는 1500억이나 된다. 1500억이란 격차를 순간의 기지나 용기 따위로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단언컨데 없다. 절대로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무슨 수를 써도 좁혀지지 않는다. 그만큼 1조와 1조 1500억의 격차는 절대적이었다. 승산을 논하려면 적어도 1조짜리가 한 명 더 달라붙어야한다.


' 뭐야, 그게! '


그녀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 도저히 살아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하니 『기사』를 가지고도 이 사막에서 뼈를 묻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한 몸 빼서 도망치는 것 정도는 걱정없다고 생각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이딴 사막 오는게 아니었는데! '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너무 늦었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하얀 소녀의 신난 목소리가 그녀의 타는 속에 기름을 끼얹었다.


" 아가씨, 그대로 꽉 잡고 계셔주세요. 자, 주인님. 이틈에 저 계집애의 목을 '댕겅' 해버리는거에요. 애냐가 해드리고 싶지만 주인님이 직접 하지 않으면 소유권이 넘어오질 않으니까요. 아, 그렇지. 무기 만들어 드릴까요? 스윽, 그어버리기만하면 댕겅! 하고 날아가는 날카로운걸 만들어 드릴까요? "


쓸데없이 의식이 살아있는 바람에 쓸데없이 공포감이 고조된다. 차라리 의식이 없었다면 여자애의 하얀 손끝에서 솟아나온 길쭉한 하얀 칼날 같은걸 볼 일도, 저것에 목이 떨어지는 자신 같은 걸 상상할 일도 없었을텐데.


남자는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칼날을 건내는 하얀 소녀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서서히 손을 들어올렸다.


꽁!


그리고 손날로 소녀의 정수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 아얏! "


" 어느 입이 그딴 소릴 지껄이는걸까? 설마 멋대로 남의 목숨을 빼앗지 말라고 했던 요 입이냐? 요 입이야? "


" 으므므므므! "


남자는 두 손으로 정수리를 부여잡고 엄살을 피우는 소녀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빨래집개처럼 사용하여 그녀의 입술을 꽉 붙잡고 위로 잡아당겼다.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다가 3초가 지난 다음에야 겨우 풀려난 소녀는 빨개진 입술을 붙잡고 항변했다.


" 아후... 그치만 저건 『기사』잖아요! "


" 다를거 하나도 없어. "


하얀 소녀는 불량한 눈초리로 쳇, 하고 혀를 찼지만 주인의 뜻을 거스를 생각은 없는지 얌전히 칼날을 집어넣었다.


" 엘리. 너도 됐으니까 그 녀석 놓아줘. "


" 괜찮아? "


" 괜찮아, 내가 책임질게. "


" 뭐, 아빠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엘리라고 불린 소녀는 순순히 여자를 놓아주었다. 자유를 되찾았지만 아직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여자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남자는 저벅저벅 그녀에게 다가가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그 얼굴 그대로 쓰러진 여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오랜만이네, 어디보자... 올해로 16년 만이려나? "


" 어...? "


여자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을 아는 듯이 말하는 남자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는 보기 드문 흑발과 좌우로 길게 째진 눈, 그리고 사막의 모래처럼 노란빛이 도는 피부를 가졌다. 광대뼈가 유난히 도드라져있고 이목구비의 위치가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 든다. 농담이라도 잘생겼다고 하긴 힘든 외모였다.

아니, 단순히 못 생겼다기보단 무언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걸 뭐라고 해야할까... 그래, 아예 품종이 다른 인간이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가장 이질적인 것은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였다. 생물 특유의 분위기라고 해야할까, 살아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언데드 같다는게 아니고 돌이나 물 같은 자연물과 비슷했다.


어째서일까?


어쩌면 가느다란 눈 사이로 비치는 초록빛 눈동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맑고 투명한 그것은 사람의 눈처럼 생겼지만 사람의 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신비한 빛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 이처럼 인상적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16년 전이라면 아직 은기사를 물려받지 않은, 평범한 하층민 꼬마였던 시절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인물과 마주칠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 당시 그녀는 오빠를 따라 평범하게 일을...


" 아? "


있다. 딱 한사람, 분위기는 하늘과 땅처럼 다르지만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길게 기른 앞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다니던 노란 피부의 남자가 틀림없이 있었다. 다른 의미로 인상적인 사람이기도 하고, 오빠가 심심하면 칭찬하고 다니던 사람이었기에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설마...


" 설마... 사장님? 아르모어 폰 피르쉬어 사장님? "


남자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아직 기억하고 있었구나. 오랜만이다 요안나. "


정말 오랜만이야, 하고 그는 환하게 웃었다.


작가의말

야생의 아르모어 아재 (43세, 판타지 생활 24년차)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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