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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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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작품등록일 :
2015.03.30 14:51
최근연재일 :
2016.02.02 20:41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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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0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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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115화. 승리, 그리고 승리 -2

DUMMY

이튿날 아침 일찍 쿠안은 루이와 휴고에게 성을 맡기고 전군을 출진시켰다. 휴고는 "성으로는 적이 오지 않겠지. 암, 오지 않을거야."라며 회의 내내 우중충한 안개를 뿜어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기 때문에 아멜리아는 그의 커피에 후추를 뿌리는 걸로 조용히 시켰다.


"대신 재채기 소리가 엄청 시끄러웠으니까 조용히 시키는 건 완전 실패다."


쿠안이 혹평하자 아멜리아 혀를 낼름 내밀었다.


"이번에는 미안하지만 제대로 싸워야겠다. 싸울 준비를 해 둬."


"추가수당만 주신다면요. 누구랑 싸워야 하는데요?"


쿠안은 자신의 커피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킁킁 냄새를 맡은 다음 입술을 조심조심 댔다. 후추의 향기가 안나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뜨거운 커피를 꿀꺽 삼킨 다음 아멜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기... 말을 안하면 불안한데요."


"그 불안한 예감대로야."


쿠안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자 아멜리아는 헤에, 하고 감탄사를 던진 다음, "'바'로 시작하고 '트'로 끝나는 사람은 아니겠죠?"라고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쿠안은 그 웃음에 더욱 환한 미소로 답했다.


"..."


"난 널 믿는다, 아멜리아."


"저기, 진짜로요? 제가? 아론오빠도 못 이긴 사람을 맡으라고요? 쿠안님, 제가 그게 될거라 생각하세요?"


"처음 볼때부터 좋아했었어."


"이럴 때 그런 뜬금없는 시시한 가짜 고백을 받아봐야 하나도 안 기뻐요!"


"아무튼, 잘 부탁해."


궁시렁거리는 아멜리아를 대충 설득한 쿠안은 가장 먼저 램투로와 마루자나를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 다음 디지와 아론에게 병력을 나누어주고, 카를로스에게도 무언가를 지시하였다. 마지막으로 팽을 불러 아무도 모르게 임무를 주니 쿠안군은 엄청나게 분주해졌다.


"전 무얼 하면 되죠?"


아무것도 지시를 받지 못한 아델베르트가 멍하니 서있다가 묻자 쿠안은 멋쩍게 웃고, "내 곁에만 있으면 돼... 라고 말하면..."라고 말을 흐렸다.


"화내겠죠."


그녀가 진심을 담아 노려보자 쿠안은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한 다음, "사격 실력이 녹슨 건 아니지?"라고 넌지시 물었다. 아델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고 쿠안은 "리프베아체를 잡아보자."라고 선언했다.




쿠안군을 물러나게 한 페드루크는 호쾌하게 웃으며 바카무트의 용맹을 칭송하였다. 거기에 병사들에게는 술과 고기가 주어지니 이미 승전보를 울린 부대와 같은 분위기가 펼쳐졌다.


요란해진 막사에서 리프베아체는 아퀼리노를 불러 머리를 땋아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아뇨, 전 바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만..."


그는 싱글벙글하며 리프베아체의 물결같은 머리카락에 손을 대고 조심조심 빗질을 했다. 하얀 목이 아른아른 드러날 때마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좋은 향기가 났다. 아퀼리노는 마음속으로 여신에게 백가지 말로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가능한한 천천히 머리를 손질했다. 그런 중에 문뜩 리프베아체가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아퀼리노, 당신은 날 위해 죽을 수 있나요?"


엄청나게 시시한 걸 묻는 말투에 아퀼리노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전 리프베아체님을 위해서라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만번이고 죽을 수 있습니다!"


리프베아체는 그의 충직한 시종을 위해 얌전히 머리칼을 맡겼다. 아퀼리노는 곧 그녀가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을 잊고 정성껏 머리칼을 땋았다. 리본까지 묶은 다음에야 그의 상관의 의아한 질문에 궁금함을 느껴 "저기, 그런데 그런건 왜 물으십니까?"라고 묻자, 리프베아체는 빙긋 웃었다. 아퀼리노는 거울 안의 그녀의 미소에 헤벌쭉하고 웃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갖는 사람은 이 세상에 또 없을거야.'


그는 자신이 그 아름다운 분의 머리칼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리프베아체는 그런 그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위해 다시 한번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케를에서 한시간 거리의 평야지대에 아침해가 떠올랐다. 완연한 봄날씨 아래의 들판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들판의 절반을 채우고 있는 것은 페드루크의 군대였다. 페드루크는 자신의 직속 병력을 선두에 두고, 카자라스 백작의 군대와 만수아 백작의 군대를 좌군과 우군으로 삼게하여 종심진을 짰다. 쿠안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신한 이상 정면에서 승부하면 케를이 함락될 것은 정해진 일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쿠안은 성앞에 진형을 짰는데 방패보병을 앞세우고 창병을 사이사이에 세워 철저한 항전태세를 내보였다.


페드루크 공작은 그 진형을 훑어보고 호쾌하게 웃었다.


"어제의 패배로 얻은 교훈이 있나보군. 바카무트를 당해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전면전을 포기한건가."


"쿠안의 성벽은 농성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성 앞을 지키는 것은 차선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메이야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하자 카자라스 백작도 질세라 의견을 냈다.


"쿠안이 제대로 전술을 펴는 것은 무리라 보오. 어제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병사로는 우리를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니 승리는 정해진 것이라 할 수 있겠지."


카자라스 백작의 시종역으로 회의에 참전하고 있던 레티치아는 "아론의 기병대가 보이지 않습니다요."하고 작은 목소리로 주인에게 귀띰을 주었다. 카자라스백작이 보니 과연 쿠안대의 상징이라 하는 기병대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턱을 괴고 생각을 하다가 손벽을 짝치고 껄껄 웃었다.


"쿠안은 기병대를 돌려두었소. 필히 그의 기병대는 우리가 적들을 공격하는 순간 우리의 후미를 노릴 것이외다! 그의 작전은 천재적이지만 나의 계산을 벗어나지 못했소!"


페드루크는 카자라스 백작의 현안을 높게 평가하며, "귀공이 함께 하는 것은 우리의 축복입니다."라는 찬사를 던졌다.


"그가 노리는 곳은 틀림없이 우리의 보급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대군이고 본거지를 떠나있으니, 보급이 끊기면 곤란해집니다."


메이야가 염려하자 페드루크는 즉시 바카무트를 불러 그에게 후방을 맡겼다.


"적장 아론이 기마병을 이끌고 후방에서 쳐들어오면 그 기세를 꺾도록 해라. 귀공에게 이미 진 그는 그대의 녹색보검을 보자마자 달아나게 될 것이다."


"기꺼이 후방을 맡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선봉은 누구를 세우실 생각이십니까?"


바카무트가 묻자마자 "저에게 맡겨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장수 무리에서부터 나온 것은 프레도르로, 한 팔은 여전히 붕대를 감고 있었다. 쿠안과의 일전에서 패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카자라스에게 창피를 당한 그는 이번에야 말로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벼르며 부상이 낫지도 않았는데 무리하게 출진한 참이었다.


"한 팔을 쓰지 못한다 하여도 제 검술이 통한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페드루크는 마지못해 그에게 같이 갈 것을 허락했다.


"좋소. 적의 전술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시오. 귀공은 부상중이란 점을 잊으면 아니될 것이오."


프레도르는 믿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이제 남은 건 승리를 쟁취하는 것 뿐이다! 폐하를 우리가 모실 날도 머지 않았다!"


페드루크 공작의 외침에 모든 장수들이 환호했다.




그 환호가 어찌나 큰지 방어진을 구축하고 기다리던 쿠안의 본진에도 들릴 정도였다.


"저 녀석들 기세등등하군."


동행하고 있던 카를로스는 웃음을 참으며, "어제 크게 이겼으니 그럴만도 하겠지요."라고 대답했다.


"슬슬 우리 쪽에 기마대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까?"


"그거 확인하라고 진형을 벌려두었는데, 여태까지 눈치 못채지는 않았겠지요."


카를로스가 그렇게 대답하자 쿠안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좋아. 그럼 작전의 시작을 알리고 출진하도록."하고 카를로스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그는 유쾌하게 웃고, 그의 두자루의 검을 등에 맨 채로 진형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난 쿠안대의 부장 카를로스다! 어제 마상전을 했으니 오늘은 검술대결을 해보는 것이 어떠한가!"


그 소리가 사뭇 컸지만 페드루크는 마음 속으로 비웃었다.


'바카무트를 끌어내고 그 사이에 아론으로 후방을 칠 생각인가. 헤아림을 넘지 못하는 작전이로군.'


앞서 나온 쿠안의 장수를 보니 두자루의 검을 메고 있었는데 어깨가 크고 허리가 표범처럼 날렵해보였다. 페드루크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좋다! 네 실력을 보겠다!"라고 외치고, 프레도르에게 눈짓했다. 프레도르는 평소의 그처럼 멋진 옷을 빼입고, 검을 차고 있었는데, 가죽구두는 광이 날 정도로 깨끗했다. 카를로스와 검을 나눌 거리에 닿자 그는 모자를 벗어 예를 표했다.


"나는 에스페란자 가문의 프레도르요."


"음. 그대는 잘 알고 있지. 검술 대회에서 전승이라고?"


"날 알고 있다면 이 싸움의 승부 역시 알고 있겠지. 그대에게 승산은 없소, 기사여."


"난 카를로스. 기사는 아니야. 듣자하니 대장님이 상처를 입혔다고 하던데, 그대의 군에는 부상자를 내보낼 정도로 인재가 없는건가?"


"감히 나에게 모욕을 주다니!"


카를로스가 짐짓 걱정하는 척하며 도발하자 프레도르는 발끈하여 검을 뽑아들었다. 카를로스도 두 자루의 검을 동시에 뽑아 빗겨들고 큭큭 웃었다.


"뭐, 좋소. 덤벼보게. 다만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프레도르의 검이 현란하게 날아와 카를로스의 머리, 어깨, 허리를 동시에 베었다. 하지만 카를로스의 양 손에 쥔 각각의 검이 기이한 궤도로 휘둘러지자, 모든 참격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튕겨나가버렸다.


"나 역시 검을 휘두르는 싸움에서 져본적이 없소."


현란한 검술이었다. 쌍방의 검은 눈으로 쫓기에는 너무나 빨랐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프레도르의 검을 모두 받아내고, 찰과상 하나조차도 받지 않았다.


"저런 검사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도대체 저 적은 뭐하는 녀석인가?"


카자라스가 놀라서 묻자 레티치아가 조곤조곤 말했다.


"카를로스는 쿠안의 삼장군 중 하나로, 쌍검술사로 유명합니다요. 용병이 되기 전에는 검투사였는데, 절대 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죠."


"지지 않는다니! 레티치아, 그럼 저 자는 여태까지 검의 승부에서 전부 이겼다는 말이 아닌가?!"


"아뇨, 그게 아니라 지지 않는다는 겁니다요."


레티치아는 자기가 아는 대로 말했지만 카자라스 백작은 이해하지 못하고 마구 떠들어댔다.


"지지 않는 건 이겼다는 말이 아닌가, 레티치아! 자네는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구만!"




두 사람의 화려한 검격이 벌어지고 있는 그 순간, 페드루크군의 후미에서는 다른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론을 필두로한 쿠안의 별동대가 적의 보급선을 노리고 나타난 것이다. 아론이 이끄는 3천의 기병은 쿠안의 직속 병사로, 최정예라 부를만했지만, 이들이 나타날 것을 예측한 페드루크 역시 최고의 패를 준비해 두었다.


"패하여 도망친 장수가 부끄러움을 모르고 다시 덤비다니, 이번에야 말로 네 목을 걸고 나의 주인에게 돌아가겠노라!"


보급대의 바로 뒤에서부터 바카무트가 노호성을 지르며 달려나오자 페드루크의 병사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아론은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창을 꼬나잡고 달려들었다. 바카무트는 승리를 확정짓는 포효와 함께 한 칼에 목을 쳐버릴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바로 어제 이 일격에 말에서 떨어질뻔한 아론은 힘으로 받아내는 대신 창을 미끄러뜨려 그의 검을 쳐냈다. 바카무트가 다시 거리를 벌리려고 하는 순간 아론은 그의 말의 고삐를 잡아 당겨 바카무트의 말과 나란히 하여 달리게 하였다. 거리를 벌리고 다시 강격을 날릴 자세를 잡을 틈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바카무트의 말은 중갑을 채워두었는데다가 본인은 풀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으니 말의 속도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말의 방향을 꺾어도 아론을 떼어낼 수 없었다. 거기에 아론은 연속해서 빠르게 창으로 찔러오니 검을 제대로 잡을 수도 없었다.


"큭, 비겁한 놈이...!"


바카무트는 창을 튕겨냈지만 아론의 공격은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묵직한 창이 급소만을 노리고 찔러오는 이상 방어하는 것 이외에 다른 행동은 불가능했다.


"이놈! 어제는 실력을 숨기고 있던건가!"


바카무트가 겨우겨우 창을 강하게 튕겨내고 자세를 잡았지만, 아론은 즉시 달려들어 거리를 좁히며 여유있게 비아냥 거렸다.


"우리 대장님은 가끔은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지. 다치지말고 멋지게 지고 오라고 하는 명령을 내리니 말이야."


아론의 말에 바카무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검을 휘둘러왔다. 아론은 그 틈을 놓지지 않고 그 큰 획의 검을 밀어내며 바카무트의 말 목을 찔렀다. 바카무트의 말이 앞으로 꼬꾸라지자 아론은 재빨리 말을 당겨 다음 전투를 위해 달려갔다. 절대적 열세의 싸움에서 아론이 빠져서는 안된다는 쿠안의 판단 때문이었다.


바카무트가 말에서 굴러떨어지면서도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검을 들었을 때, 그의 앞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긴 봉을 들고 있는 묶은 머리 소녀였다.




프레도르의 검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카를로스의 두자루의 검은 자석처럼 따라가서 그의 검격을 튕겨내버렸다. 짧은 시미터를 닮은 쌍검은 검날이 넓어서 공격을 막아내기 제격이었다.


"그대의 주인도 그렇고, 하나같이 싸울 생각은 없는건가?"


프레도르가 아무리 짜증을 내도 카를로스는 냉정히 검의 간격을 잡을 뿐이었다. 애초부터 "카를로스, 이기지 못해도 상관없지만 절대 지면 안돼."라고 쿠안에게 명령받았다. 그러니 그는 무리하여 적에게 공격해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도리어 자세를 잡고 방어에만 전념한다면 프레도르가 아니라 바카무트라도 막아낼 자신이 있는 그였다.


검투사 노예 출신인 그는 철이 들 때부터 검을 붙잡고 자랐다. 그가 하던 싸움은 항상 말도 안되었다. 어떨 때는 다수의 적과 싸우되 누구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또 어떨때는 아슬아슬하게 지라는 강요도 받았다. 애초부터 그는 주역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흥을 띄우는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그였다. 그의 검은 프레도르의 것처럼 반짝이는 무대 위의 것은 아니었지만, 단 한번도 진 적이 없는 것이다. 카를로스는 냉정하게 프레도르의 검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의 검은 참 화려하긴 한데, 그것 뿐인것 같군."


"뭐, 뭐라고?"


"그 검으로는 죽일 수는 있겠지만, 죽음을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의 검을 모욕하지 마라!"


"다음에 기회가 되면 투기장에라도 가서 살아남아보시게. 살아 남으면 당신도 검술이란 것은 결국 싸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거야."


프레도르는 버럭 화를 내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레이피어는 이번에는 그의 어깨와 목, 머리를 동시에 노렸다. 세 곳을 빠르게 찌르는 것은 프레도르의 검술에서 가장 화려하기 그지 없었지만 이미 카를로스는 격파법을 눈치채고 있었다.


굉장히 빠를 뿐이라면, 첫번째 공격을 파훼하는 순간 다음 검은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쌍검은 결코 빠르게 벨 수 있는 무기는 아니지만, 그의 오랜 경험은 정직하게 움직이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이미 완벽히 읽고 있었다. 프레도르의 검이 카를로스의 왼쪽 어깨를 노리는 것을 카를로스의 오른검이 쳐냈다. 동시에 그의 몸은 한바퀴 회전하여 왼손의 검이 지면을 긁었다. 돌과 강철이 튕기는 요란한 소리와 먼지구름이 그들의 전장을 채웠다. 그리고,


"으아아악!"


프레도르는 검을 떨어뜨리고 쓰러졌다. 그의 발등에서 흘러나온 피는 구두를 물들이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그의 위로 오른손의 검을 힘껏 내리쳤다.




"큭, 놈들은 사기가 떨어져 있을 터이다! 전군 공격하라!"


페드루크 공작이 외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명령만을 기다리던 병사들이 거대한 함성과 함께 달려나오자 쿠안은 깃발을 들게 한 다음 포향을 울리게 했다. 그 포향을 들은 디지는 본인의 기병대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차례야!"


그녀가 가려뽑은 별동대는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여 적의 외각을 우회하기 시작했다.


"우리쪽으로 오고 있지 않은가!"


카자라스 백작은 깜짝 놀라 창병대를 앞세우고 궁병대를 준비시켰다.


"적을 요격하라! 적의 접근을 막아라!"


화살의 비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동안 디지는 더욱 우회 범위를 늘려 아예 측면까지 이동하고 있었다. 디지의 기병대를 막으려고 서있던 창병과 궁병들은 적이 접근하지 않자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쿠안의 지시를 받은 램투로의 방패보병대가 출진하여 카자라스 쪽으로 전진을 개시했다. 이미 창병을 앞세운 카자라스에게는 기병대를 낼 기회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발을 구르며 외쳤다.


"궁병대는 저놈들을 쏴라! 놈들의 접근을 막아라!"


카자라스의 궁병대는 무수한 화살을 뿌렸지만 방패를 머리에 이듯이 하고 다가오는 보병대에게는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게다가 근접한 것은 단순한 보병대만이 아니었다.


"마루자나님, 적의 본진에 접근했습니다!"


램투로가 외치자 마루자나는 팽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방패보병대와 함께 다가온 라즈나 일족은 방패에서 벗어나자마자 적의 부대에 녹아들어가듯이 섞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선혈이 치솟고 비명이 터져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륙 최고의 무도가인 그들은 누구보다도 이 혼전에서 강했다. 진형이 깨진 다음부터는 이들을 막을 수 있는 부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앞장선 마루자나는 양손에 금속 너클을 끼고 적의 얼마 남지 않은 방어진을 간단히 부숴버렸다. 그 뒤를 따르는 팽의 낫족제비는 적들의 힘줄과 핏줄을 끊어놓았다.


"라즈나 일족이다! 라즈나 일족이...!"


병사들의 비명소리를 들은 카자라스 백작이 아연실색하여 그의 시종에게 외쳤다.


"이게 어떻게 된건가, 레티치아!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온건가!"


"적 보병대와 섞여서 온 듯합니다. 이건 우리가 이렇게 움직일 것을 예측했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레티치아가 침착하게 말했지만 카자라스는 납득하지 못하고 화를 낼 뿐이었다.


"그런 멍청한 소리는 그만두게, 레티치아! 자네는 정말 전략은 하나도 모르는 것이 틀림없어! 이 변수가 많은 전장에서 예측이라니...!"


카자라스 백작이 그의 시종의 무능함을 따지는 동안에 전장의 기운은 바뀌고 있었다. 쿠안이 직접 이끄는 보병대는 정면에서 페드루크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다시 말에 올라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에 포진한 만수아 백작의 움직임을 끊어놓았다. 수에서 압도적인 열세라 해도 전장에서 싸울 수 있는 수는 한정되어있었다.




쿠안은 말에서 내린 바카무트를 아론이 이길 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론 오빠는 말 타면 짱 쌔다구요!"


"... 어,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무기의 상성이 나빠."


"그래도 아론 오빠가 이겨요!"


아멜리아가 우는 소리를 하자 쿠안은 아멜리아의 머리를 꾹꾹 누르는 대신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바카무트의 장검은 애초부터 말과 기수를 한번에 벨 수 있게 만든 무기야. 어중간한 실력이라면 아론이 버텨내겠지만, 바카무트는 강해. 그가 말 위에 있을 때는 압도할 수 있겠지만, 도리어 상대가 말 아래 있으면 공격 각을 잡기 어려워."


"그럼 아론 오빠도 내리라고 해요!"


"그래서야 아론이 약해지잖아. 게다가 아론이 없으면 페드루크의 정예병을 격파할 수 없어. 우리는 기병대지만 상대는 파이크야. 정면에서 뚫을 수 있는 건 아론 뿐이야."


"그렇다고 카를로스 아저씨나 팽씨나 마루자나아저씨를 보내면 되잖아요!"


"모두 다른 맡길 일이 있어. 거기에... 너라면 이길 수 있어."


쿠안은 아멜리아의 모든 퇴로를 끊어버렸다. 아멜리아는 서른 번쯤 깊게 한숨을 쉰 다음, "제대로 성과수당을 주셔야 해요?"라고 대꾸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론은 보급대의 물자에 불을 놓게 하고 적의 후방을 밀어붙였다. 건초에서 치솟은 연기가 하늘의 태양을 가릴 정도였다. 아론의 기병대를 막기 위해 덤벼드는 병사들은 그 압도적인 힘에 밀려났다.


"덕분에 내가 이 사람하고 싸우고 있고 말이죠."


바카무트는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아멜리아를 노려보았다.


"설마 나와 싸울 생각인가?"


아멜리아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얼른 봉술 자세를 잡았다.


"나는 여자와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 먼저 덤비지 않는 한은."


"누가 애라고 하는 거에요! 흠씬 때려줄거에요!"


바카무트는 녹색 검을 꾹 쥐고 아멜리아를 향해 검을 한번 휘둘렀다. 아멜리아는 얼른 검을 피했지만, 상상보다 긴 검날에 앞머리가 잘려나가버렸다.


"꺄악! 여자의 머리칼을 자르다니, 너무해요! 앞머리는 여자의 생명인데!"


"방금은 위협이다. 물러서라."


바카무트가 말했지만 아멜리아는 다시 봉을 잡았다. 물러날 수 있다면 나도 물러나고 싶은데, 라고 중얼중얼 거렸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경고를 무시했으니, 죽어도 원망하지 마라!"


바카무트가 노호를 지르며 아멜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그의 중갑옷이 무색할 정도로 빨랐다. 아멜리아는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녀는 봉을 지면에 댄 상태로 양 팔에 힘을 주었다.




"내가 그 아저씨를 어떻게 이길 수 있는데요?"


다 포기한 아멜리아가 쿠안에게 힘없이 묻자 쿠안은 하나씩 손가락을 꼽아주었다.


"넌 그 친구보다 리치가 짧고, 갑옷도 얇고, 속도도 느리고, 힘도 밀리지."


"혹시 절 죽이려고 함정을 파고 있는건가요?"


아멜리아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자 쿠안은 마지막 손가락을 꼽으며, "대신 넌 그 녀석보다 위로 올라갈 수 있어."라며 웃어보였다. 물론 아멜리아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으로 쿠안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날아올랐다. 애초부터 그녀의 봉술은 철저히 정도(正道)와 차이가 있었다. 초식은 모두 변형되어 있으니 봉에 대해 잘 아는 이라고 해도 최소한 처음 한번에 한하여서는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거기에 쿠안은 승부를 걸었다.


"뛰어 넘으면서 투구를 있는 힘껏 쳐서 날려버리면 돼."


"그 다음에는 화난 바카무트씨에게 반토막 나면 되나요?"


아멜리아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자 쿠안은 큭큭 웃었다.


"타앗!"


아멜리아는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높게 뛰어 올랐다. 바카무트는 돌진을 멈추었지만 위의 그녀를 확인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 여자에 대한 방심, 약해보이는 아멜리아의 반응에 대한 적당한 움직임, 거기에 바카무트의 투구가 머리 바로 위의 시야를 차단하고 있는 것까지 쿠안의 작전대로였다. 모든 것은 오직 이 일격을 위해.


"큭...!"


바카무트의 투구가 하늘을 날아 지면에 떨어졌다. 아멜리아는 지면에 착지한다음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도리어 타격을 받기는 커녕,


"엄청 화나보이는데..."


아멜리아는 히잉, 하고 울먹였지만 바카무트는 그런 것 따위는 이제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론에게 당한 것도,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계집애에게 얻어맞은 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서치 않았다. 그는 앞뒤를 보지 않고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탕! 탕!


두발의 총성이 울렸다. 바카무트가 조금만 더 주위를 살폈다면, 조금 전부터 자신을 노리고 있던 아델베르트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지 않았다면 날아오는 총알을 피해냈을지도 모른다.


"크.. 커헉..."


두 발의 총알은 완벽하게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의 입과 코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아델베르트는 총신이 긴 리볼버를 다시 바로잡고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타앗!"


아멜리아는 바카무트의 움직임이 멈춰있는 틈을 노려 달려들었다. 그녀의 봉이 그의 측두부를 후려치자, 그의 몸은 힘없이 지면에 나자빠졌다. 쿵, 하는 묵직한 울림이 전장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적장이 쓰러졌다! 이제 우리의 승리다!"


아델베르트의 외침에 쿠안군은 각자의 무기를 들며 환호로 답했다. 반대로 페드루크군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론은 그런 적들에게 기다릴 틈을 주지 않았다. 선두에서 창을 휘두르며 나뭇잎을 베어내는 것처럼 적병의 목을 베니, 이미 그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아론 오빠가 저 상태면 쿠안님도 못막을거에요."


아멜리아가 가죽푸대에 담아온 딸기 주스를 마시며 말하자 아델베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론의 신들린 듯한 돌진에 적들은 이제는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미 카자라스의 군대는 와해되고 있었다. 라즈나 일족은 어느새 본진에 이르고 있었다. 막무가내의 돌진이 아니라, 정확히 요소요소의 거점을 파괴하며 들어오는 그들의 움직임은 철저히 작전대로였다. 카자라스의 진형은 쿠안의 예측범위를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적들은 주인님을 노리고 있는 것 같은뎁쇼."


레티치아의 말에 카자라스는 각오를 다지며 검을 뽑아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저들을 직접 상대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저들을 상대하라굽쇼?"


"그렇네, 레티치아. 즉시 무기를 들게나."


레티치아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 근처에 있는 짧은 검을 들어보았다.


"가능한한 많은 적을 길동무로 삼아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걸세!"


"주인님, 제 생각에는 그건 좀 무리일 것 같은뎁쇼."


"레티치아, 자네는 정말 어리석군! 역사에 기록되는 자들은 모두 이런 각오를 하지 않았는가!"


레티치아가 뭐라고 말을 더 하려할 때, 대장진문이 부서지며 거대한 근육덩어리의 남자가 달려들어왔다. 그는 양 손에 피묻은 너클을 휘둘러 근처의 병사 네명을 모조리 날려버린 다음 카자라스 백작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백작은 벌벌 떨며 검을 들었지만 너무 심하게 손을 떨었기 때문에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레티치아는 그런 백작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검을 들었지만 그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하.. 항복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끝까지 목숨을 바쳐..."


마루자나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발로 툭 쳐서 공중으로 띄우더니, 손날로 강철 칼날을 쳐서 부러뜨러버렸다.


"주인님. 항복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요."


레티치아는 깔끔히 검을 바닥에 던지고 양손을 들며 마지막 충고를 했다. 여태까지 단 한번도 그의 시종의 말대로 움직이지 않던 카자라스는 결국은 가장 마지막에는 본인의 의견을 꺾고 양손을 들었다. 카자라스의 항복으로 그를 따르는 모든 병사는 전의를 잃고 항복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승리는 서서히 쿠안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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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116화. 승리, 그리고 승리 -3 16.02.02 166 2 13쪽
» 115화. 승리, 그리고 승리 -2 16.02.02 157 2 27쪽
126 114화. 승리, 그리고 승리 -1 16.01.30 153 1 8쪽
125 113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4 16.01.24 122 2 13쪽
124 122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3 16.01.18 148 2 12쪽
123 121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2 16.01.14 170 2 19쪽
122 120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1 16.01.14 130 2 8쪽
121 119화. 전야 16.01.14 157 3 10쪽
120 118화. 험멜의 뒤를 쫓아 -3 15.11.17 238 2 26쪽
119 117화. 험멜의 뒤를 쫓아 -2 15.11.09 251 2 13쪽
118 116화. 험멜의 뒤를 쫓아 -1 15.10.30 195 2 15쪽
117 115화. 휴식의 날 15.10.23 153 2 20쪽
116 114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3 15.10.21 256 2 17쪽
115 113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2 15.10.19 216 2 16쪽
114 112화. 선지자 15.10.16 95 3 12쪽
113 111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4 15.10.15 179 4 15쪽
112 110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3 15.10.13 138 2 16쪽
111 109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2 15.10.08 101 2 7쪽
110 108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1 15.10.04 193 2 8쪽
109 107화. 옛 연인 -3 15.09.30 140 3 15쪽
108 106화. 옛 연인 -2 15.09.21 239 2 12쪽
107 105화. 옛 연인 -1 15.09.18 189 2 8쪽
106 104화. 세만 요새 공성전 -3 15.09.16 110 2 8쪽
105 103화. 세만 요새 공성전 -2 15.09.14 207 3 9쪽
104 102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1 15.09.11 306 3 8쪽
103 101화. 스스로 만들어낸 승리 -3 15.09.09 179 3 13쪽
102 100화. 스스로 만들어낸 승리 -2 15.09.07 172 4 9쪽
101 99화. 스스로 만들어낸 승리 -1 15.09.02 183 3 10쪽
100 98화. 의도된 급변 15.08.31 188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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