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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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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작품등록일 :
2015.03.30 14:51
최근연재일 :
2016.02.0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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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1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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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118화. 험멜의 뒤를 쫓아 -3

DUMMY

1028년 6주 13일.


발페아케이르의 동부지구 이스트라인 빙벽지역을 뚫고, 페르디마시로 잠입할 수 있던 것은 험멜과 다른 예순 명 뿐이었다.


그와 함께 목숨을 걸었던 다른 모든 이들은 지금 티프소의 수비군과 정면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는 없었다. 창을 거꾸로 잡고 도망치는 이도 없었다. 그들이 실패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이상, 포기란 있을 수 없는 단어였다.


그 병사 중에는 험멜의 장남 매쉬 켄틱도 있었다. 매쉬는 그가 가르친 창술을 누구보다도 잘 배운 무도가이니 쉽게 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헤어지기전 그의 아버지를 끌어안았었다. 아들은 딱 한번 아버지에게 그렇게 부자의 정을 보였다.


상장 라이트 브라우저는 오랜 시간 전장에서 검을 휘둘러온 부하이자 전우이다. 그는 지금까지 험멜을 위해 몇 번이나 목숨을 걸었다. 이 순간에도 그는 두 손에 장검을 휘두르며 목숨을 내놓고 있을 것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막아야 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1년 전, 혹독한 바람이 불던 날, 험멜을 찾아온 "페티마"라는 티프소인이 알려준 것은 정해진 세계의 멸망. 그녀는 티프소인이기 이전에 평범한 인간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게르벨츠 주식회사에서 창조할 "그것"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그런 괴물을 탄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


"괴물이 아니에요, 험멜 장군님. 게르벨츠 주식회사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그것의 정체를 말했고, 험멜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런 것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가?"


"이미 완성단계에 이르렀어요. 앞으로 1년, 아니 반년이면..."


페티마는 창백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험멜은 그녀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가 보여준 증거들은 진실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제가 어떻게든 완성을 늦추겠어요. 그러니까..."


험멜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눈 앞의 여성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그 각오는 험멜에게 충분히 전해졌던 것이다.




1028년 8주 11일.


비트리즈는 어두운 하수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내리막이 이어졌지만 발 밑이 말라있었기 때문에 미끄러지는 일은 없었다. 어느 정도 희미한 수은등이 나오고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여전히 보초는 커녕 쥐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다. 자동경보장치라도 설치되어 있을까 했지만, 감지센서가 반응하지 않는다.


'차라리 뭔가 방비가 되어있다면 뭔가 있는 건데 말이야. 이래서야 보통의 하수도와 다를 바가 없는데...'


다만 너무나 길다는 것이 이상했다. 이어지는 길은 이미 페르디마시를 벗어날 정도로 이어져 있었다.


하수도 안은 차가운 공기만이 가득했다. 비트리즈의 입에서 하얀 호흡이 얼어붙었다. 가벼운 피로마저 느낄 때 즈음까지 그녀는 걸었다.




험멜은 페티마가 말한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어디로 와야 할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병사들을 이끌고 하수도로 들어가 계속 걸었다. 길게 뻗은 길은 그녀가 미리 말한대로 경비조차 없었다. 도시 밖 연구소로 잠입하는 방법은 이것 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도 험멜은 병사들에게 만약을 대비하게 했다. 그와 함께하는 병사들은 테르센트 최고의 무력집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는 백도 되지 않지만, 개개인의 전투력은 물론이고, 집단전투력은 특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수십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연구소에 침입하여 적의 연구물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영웅들이었다.




비트리즈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감지센서가 반응했다. 전방에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흐릿한 하얀 등 아래로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는 몇 명의 사람이 감지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생명반응이 너무나 약하다. 마치 시체가 걸어오는 것 같이... 설령 작은 새나 쥐라해도 이정도로 생명반응이 약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다가오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사람의 형상.


비트리즈는 팔의 철갑을 풀었고,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푸른색 빛이 도는 나이프를 쥐고 그녀는 자세를 낮춘 채로 다가오는 적을 주시했다. 긴장에 전신이 고양된다. 잠시후 그녀의 동공이 팽창했다.


"저게 뭐야?"




'장군님, 누군가 있습니다.'


조금 앞서 가던 정찰병이 험멜에게 돌아와 속삭였다.


험멜은 조용히 매고 있던 활을 들고 화살을 쟀다. 다른 병사들도 험멜의 행동을 이어 재빨리 각자의 병장기를 들었다. 어두운 하수도에 잠깐 철의 소리가 들리고, 고요함을 되찾았다.


험멜의 군대는 완벽한 전투 태세로 다가오는 적을 기다렸다. 흐릿한 불빛 아래, 확보되는 시야 속으로 적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험멜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달려오는 것은 언뜻 보면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수십의 인간들은 하얀 빛이 증기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닥의 물기가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얕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가올 수록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완성되었단 말인가!'


험멜은 한탄했다. 저 생명체들은 페티마가 말했던 것들의 일부. 분명히 그녀는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그렇지만 퇴각할 수는 없다!'


그는 오른손에 힘을 주어 시위를 당겼다. 손을 놓는 순간 화살은 일직선으로 뻗어나가 오십보 밖, 가장 앞서 오던 적의 이마를 관통했다. 적은 그대로 부스러지듯이 연기로 변했지만, 다시 서서히 뭉쳐져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 없다. 그들이 여기에 오기까지 희생된 사람의 수가 그들의 등을 뒤에 있다. 이제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오로지 전진할 뿐!


"적을 섬멸하라!"


험멜은 명령을 내렸다. 부하들은 차갑게 얼어부튼 공기에도 개의치 않고 쩌렁쩌렁한 기합을 질렀다. 하수도의 공기가 터져나간다. 요란한 철의 소리가 진동했다.




"저게 뭐야?"


비트리즈는 망연자실하여 다가오는 적들을 쳐다보았다. 하얀 빛을 뿜어내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유령이었다.


"저것과 싸울 수 있는건가?"


온도가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시야안에 들어온 적을 확인한 순간 비트리즈는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리베리아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선 유령은 긴 창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 곁의 유령은 검을 들었다. 각자의 병장기를 들고 그들은 비트리즈를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말도 안 돼...!"


그녀의 이가 뿌드득, 소리를 냈다. 잇몸사이로 피맛이 느껴졌다. 수십의 백색 생령(生靈)들이 그녀를 덮쳐오고 있었다.




험멜의 부하들은 잘 싸웠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병사들은 약속된 전술에 따라 적을 막아내며 순식간에 수 백의 적을 도륙했다. 하지만 아무리 베어내도 적은 쓰러지지 않았다. 적의 수는 줄어들 줄 몰랐다. 목을 베어내고, 허리를 끊어놓아도 잠시 움직임이 멈출 뿐, 그들은 서서히 회복하여 다시 덤벼들었다.


게다가 떨어지는 온도는 그들의 체력을 앗아갔다. 조금전과 비교가 안될 정도의 추위가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들은 급속도로 지쳐가고 있었다.


20여분의 전투 중에 첫 희생자가 나왔다. 험멜의 곁을 지키던 병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시체는 적들에게 도막났다.


산산조각나는 와중에 그 병사와 닮은 흰 생명체가 몸을 일으켰다. 몇 명이 더 쓰러졌다. 아군의 시체에서부터 다시 새로운 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험멜은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퇴각하라! 여기를 벗어나는 거다!"


하지만 이미 난전 중이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그들은 전장을 이탈할 수 없었다. 험멜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희생자는 다른 희생자를 불렀다. 죽어가는 험멜군들의 절규가 하수도를 채웠다.




비트리즈는 전투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숫자도 숫자지만, 저들의 전투방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추위는 그녀의 움직임만 제한하는 듯하니 굳이 불리하게 싸울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도주를 택하지 않았다.


'이 정도 온도라면 움직일 수는 있어.'


보통 사람이었다면 몸을 움츠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추위였지만, 비트리즈에게는 의미가 달랐다. 이어라트인 그녀는 애초부터 이 얼어붙은 대륙을 지키기 위해 개발되었다.


"돌파해주겠어!"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힘을 주는 기분은 전기신호로 바뀌어 기계의 신경에게 받아들여지고, 인공 근육 사이로 페르타미네랄을 흘려보냈다. 페르타미네랄의 출력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비트리즈의 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하수도 옆 벽을 박차고 다가오는 적의 머리위를 달려나갔다. 근접한 적 병사가 그녀에게 하얀 빛이 나는 검을 휘둘렀지만 베트리즈는 해트해프 나이프를 들어 그 검을 잘라버렸다.


"타앗!"


비트리즈는 다시 기합과 함께 다리에 힘을 주어 날아올랐다. 그녀의 몸 전체에 페르타 미네랄의 에너지가 돌고 있었다. 소모가 극심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적 무리를 돌파하자마자 남은 에너지를 모조리 소모하여 질주했다. 6초가 되기 전에 그녀는 백미터 밖에 있던 하수도 출구를 빠져나갔다.




험멜과 그의 충직한 병사들은 결국 하수도 돌파에 실패했다. 그들은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게르벨츠 주식회사의 정원으로 빠져나왔다. 그의 군대는 아직도 싸우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전멸했을까?


'우리는 그것의 탄생을 막지 못했다...'


그는 참담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내려오는 하늘은 마치 피의 색과 같았다.


"장군님, 일단 여기서 물러나야 합니다."


살아남은 병사가 말했지만 험멜은 갈 곳 따위는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생존자인 그들을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험멜은 흐릿해지는 시야를 애써 바로잡으며 마지막 싸움을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여태까지 싸웠던 적과 다른, 평범하게 생긴 여성이 그를 향해 고고히 다가오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데도 그녀는 추위따위는 모르는 것처럼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 추위는 늙고 지친 장군만이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장군님, 물러나십시오!"


험멜을 지키려는 병사들이 적에게 달려들었다. 세 병사는 각각 검과 창을 휘두르기 위해 팔을 들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피하는 대신 병사들을 한번 씩 쳐다불 뿐이었다. 눈짓만으로 병사는 자리에서 쓰러졌다. 병사의 몸 곳곳에서 얼음조각이 비집고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몸속에서부터 칼날이 자라난 것 같은 장면. 그것은 마법 그 이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티프소인이 마법을 쓰다니... 이것도 그 연구의 결과인가."


험멜은 검을 들었다. 이제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쓰러진 병사들은 원망의 말조차 내뱉지 않고 그를 염려하며 죽어갔다. 험멜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네가 바로 세계를 멸망시킬 악마를 만들려는 자인가."


그녀는 험멜의 말에 표표히 웃었다.


"틀려요, 늙은 장군이여. 우리가 만들려는 것은..."


험멜은 그 말을 다 듣지 않고 달려들었다. 이미 몸은 너무나 무거웠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한명이라도 더 데려가야 한다. 그래서 그것의 탄생을 미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험멜은 양 팔에 힘을 주어 기합과 함께 검을 내리쳤다.


쩌엉....!


둔탁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와 함께 수백전을 치루던 강철검이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지는 소리. 차가운 얼음의 검이 그녀의 손에서 튀어나와 험멜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의 검은 보통의 병사라면 받아내기는 커녕, 그 강렬함에 날아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험멜을 향해 무언가를 속삭였다.


험멜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몸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단 1초만에 그의 장기를 모조리 파괴하고 등을 찢고 나왔다. 얼음은 계속해서 성장해갔다. 마치 피를 마시는 것처럼...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여인은 험멜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늙은 장군이여, 우리가 만드는 것은 악마가 아니에요. 우리가 만드는 것은..."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입모양은...




비트리즈가 하수도를 막는 철망 두개를 동시에 몸으로 밀어내고 달려나왔다. 요란한 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에 놀라 얼른 주위를 살핀 다음, 그녀는 자신이 거대한 공장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넓은 공장의 곳곳에서는 알 수 없는 기계들만이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공간을 채우는 요란한 소리가 청각을 괴롭혔다. 증기가 뿜어져나오는 곳이 보였다. 푸른색 증기는 하늘로 아름답게 흩어져 빛을 내며 사라져갔다.


"뭐지, 여긴."


공장의 창문 밖으로는 바다가보였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은 해안지역. 페르디마시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이라는 증거이다. 비트리즈는 공장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지만 역시 사람의 모습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자동화 시설...? 기계로만 작동되는 곳인가?"


비트리즈는 기계들 사이를 지나 천천히 걸었다. 그녀가 어렸을 때 일했던 방직공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장소였다. 기계들은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이어져서, 공장을 가득 채운 채로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곳이 험멜이 오려고 했던 곳이겠군.'


그녀는 확신했다. 이런 기계화공장은 들어본 적도 없고, 당연히 등록된 장소도 아닐 것이다. 푸른 증기가 여기저기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 증기는 피의 냄새가 난다.


'몸이 움직이는군.'


방금 하수도를 탈출하기 위해, 잔여분의 에너지를 모두 썼다. 충전된 에너지가 없는 한, 기계몸은 근성으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몸이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설마 이 증기가 페르타 미네랄인가?'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페르타 미네랄은 이렇게 마구 증기로 바꿀 정도로 만만한 가격의 연료가 아니다. 제1시대의 티프소였다면 동량(同量)의 백금보다도 비쌌을 터.


'이 증기가 모두 페르타 미네랄의 가스라고?'


공장 전체에 푸른 빛이 돌 정도로, 농밀한 기체가 이 넓디 넓은 공간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기체는 공장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의 경계를 풀지 않으며 천천히 공장의 중심으로 향했다.




공장의 중심에는 거대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그 공간의 중심에 있는 것은 거대한 구덩이. 기계의 꿈틀거림은 구덩이의 아래로 뻗어가고 있었다. 화산의 분화구를 닮은 그 구덩이는 푸른색의 기체를 빨아들이고, 또 내뱉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호흡과 닮았다.


"여긴 뭐야? 이 아래에 뭐가 있길래..."


몸을 내밀어 난간 아래쪽을 쳐다본 그녀는 꿀꺽 마른 침을 삼쳤다. 대동공이 펼쳐져 있었다. 끝도 없는 기계들이 벽을 이루고 있었고, 그 기계들 사이로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왠만한 시청건물 한개쯤은 너끈히 들어갈 넓이의 구덩이는 그 최하부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깊었다. 가장 안쪽에는 너무나 농밀하게 푸른 기체가 가득하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가볼까.'


비트리즈는 두번 생각하지도 않고 내려가기 위해 난간에 손을 댔다. 그러자 거의 즉시,


"저라면 내려가지 않을 거에요, 비트리즈 중장님."


들어본 적이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그녀를 제지했다. 비트리즈는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는... 카탈리나라고 했나? 성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보았던 그녀는 분명 게르벨츠 주식회사의 비서라고 했었다. 여전히 붉은 드래스는 추위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피부를 드러내고 있다. 비트리즈는 천천히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뒷걸음질쳤다.


"어머, 천하의 비트리즈 중장님이 무얼 두려워 하시는 건가요?"


그녀는 웃음띤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런 준비자세도 취하지 않았지만, 비트리즈는 그녀가 말도 안되게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험멜 장군은 여기에서 죽은건가?"


"그렇지 않아요. 그 사람은 여기에 이르지 못했지요. 이 부화장에 처음 오시는 것이 비트리즈 중장님이실 줄은 몰랐네요."


"부화장이라고?"


비트리즈는 힐끔 동공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안에는 기계소리만이 가득했다. 이어라트의 눈을 가진 그녀에게도 지하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 아래에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무얼 만들고 있는거지?"


비트리즈는 계속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카탈리나는 빙긋이 웃었다. 그 웃음은 지독할 정도로 섬뜩했다. 그 여자는 황홀한 표정으로 비트리즈의 질문에 대답했다.


"신."


"신?"


"우리 모두를 구원할 신이죠."


카탈리나는 동공 아래를 바라보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부화하게 될 거에요. 그러면 신의 힘에 의해 세상은 안식을 얻게 되겠지요."


"저 지하도에 있던 병사들도 그 신과 관련이 있는건가?"


비트리즈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난간의 끝에서 멈춰섰다. 퓨휵, 하고 페르타 미네랄의 증기가 바로 곁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신의 축복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새어나오는 신의 힘만으로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거죠."


"축복? 죽은 자들을 조종하는 게 말인가?"


"신의 축복은 그것만이 아니에요. 비트리즈 중장님이 알아도 의미는 없겠지만 말이에요."


곧 죽을 테니까, 라는 말이 감추어져 있다는 알고 비트리즈는 식은 땀을 감추기 위해 여유있는 척 하며 구덩이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둠 아래에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것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태동. 비트리즈는 억지로 웃음을 연기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


"지금 발페아케이르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암살도 네 녀석들의 짓이로군."


"그건 어떻게 아셨죠?"


"험멜군과 싸울 때 그들에게 마법사 따위는 없었다. 그들이 그런 힘이 있었다면 나와 붙었을 때 그 힘을 아낄 이유가 없지. 게다가 그들은 전멸하고, 일부 생존자는 대륙을 벗어났다. 빠져나가는 사람은 내가 직접 놓아준 거니 모를리 없어."


여성은 놀랍다는 듯이 비트리즈를 향해 고개를 갸웃 해보였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지만 비트리즈가 느낀 것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살기였다.


"그건 문제 발언이군요. 나라를 위협한 자들을 놓아주다니, 상부에 알린다면 비트리즈 중장님은 즉시 군법회의에 회부되시겠죠."


그녀는 이제 비트리즈를 몰아넣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비트리즈는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타앗!"


비트리즈의 두 다리가 그녀의 몸을 띄우자마자 비트리즈가 있던 곳에 얼음 조각이 나타나 사방으로 뻗어갔다. 비트리즈는 기계에 매달리자마자 다시 발로 기계를 차고 몸을 띄웠다. 그녀가 있던 곳에는 다시한번 얼음 조각이 나타났다.


카탈리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날아오른 비트리즈는, 아까부터 해안을 보여주던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쿵, 하고 부딪혔지만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제기랄, 강화유리잖아."


비트리즈는 몸에 남아있는 에너지는 이미 잔량이 없었지만, 이 공장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기계몸이 움직였다. 그녀는 팔에 힘을 주어 유리창에 매달린 다음, 몸에 반동을 주었다.


"깨져라!"


비트리즈가 체중을 실어 두 다리로 동시에 유리를 후려치자, 강화유리는 그대로 산산조각났다. 갑작스럽게 차가운 바람이 몰려왔다. 비트리즈는 공장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카탈리나는 비트리즈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망할...!"


공장에서 나온 직후부터 비트리즈는 모든 기계부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 보조 에너지까지 모조리 소모해버린 이상 그녀에게는 보통 사람만큼의 속도도 낼 자신이 없었다. 거기에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어서 시야마저 제한적이었다.


"젠장, 보조 배터리를 가져오는 거였는데..."


처음부터 갑작스러런 기분으로 달려온 것이었으니 제대로 준비가 되었을리 없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성격을 원망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해. 성격을 고치는 건 살아난 다음이다.'


비트리즈는 눈보라를 헤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노출많은 옷을 입은 추위 안타는 섹시한 보라색 속옷을 입고 있을 것 같은 여비서가 쫓아온다면 이기기는 커녕 도망칠 자신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완전히 사기잖아, 그런건.'


자연력을 다루는 것은 테르센트의 마법이라는 기술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테르센트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결국은 게르벨츠 주식회사가 바라는 일이었다.


'어째서?'


생각해봐도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일단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르벨츠 주식회사에서 만들고 있는 "신"이라는 것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인가.'


추위가 심해지고 있었다. 비트리즈의 몸은 이제는 그녀의 의사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청각과 시각도 사라져가고 있다. 여기서 얼어죽어서야 지금까지 한 고생이 모조리 물거품이 될 뿐이지만 그녀에게는 더 이상의 방법이 남지 않았다.


'차라리 이 근처에서 생명유지장치를 켜고 기다리는 편이... 구조신호를 보고 아델모가 와주는 것을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하지만 게르벨츠 놈들이 먼저 날 발견하면...'


"비트리즈 중장님!"


몸을 움츠리고 걸음을 멈춘 비트리즈에게 바람을 타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트리즈는 몸을 펴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비트리즈 중장님! 대답해주세요!"


"헬난 소령...?"


코트니의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비트리즈는 손을 흔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비트리즈 중장님!"


달려오는 것은 페르디마시로 자신이 잠입한 것을 도와주었던 헬난이었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 반가웠지만 비트리즈에게는 미소지을 힘조차 없었다.


"괜찮으신가요?"


헬난은 비트리즈를 부축하여 코트니 안으로 데리고 갔다. 비트리즈는 헬난이 자신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따뜻한 액체가 들어있는 팩을 줄때까지 아무말도 못하고 겨우겨우 정신을 잡고 있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비트리즈를 보며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트리즈도 그제서야 미소지을 수 있었다.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았지?"


"중장님께서 남기신 신문을 보고 알았어요. 게르벨츠의 연구소에 대해 보고 계셨지요?"


"... 그것만으로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군. 솔직히 말해 덕분에 살았어."


헬난은 비트리즈의 감사의 말에 웃어보였다. 비트리즈는 거의 작동하지 않는 시각을 회복하기 위해 눈을 감고 따뜻한 감각에 몸을 녹였다. 지난 몇시간이나 추위속에 파묻혀있던 그녀에게 이 따뜻함은 너무나도 절실한 것이었다.


헬난이 운전을 해나가며 물었다.


"여기에서 뭘 보신거에요?"


차는 덜컹거리고 바람소리는 날카로웠다. 눈보라가 창문에 부딪혀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비트리즈는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헬난에게 사실을 말하면 그녀 역시 위험에 빠질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비트리즈가 이대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군가가 진위(眞僞)를 밝혀야 한다. 진실을 알고 있어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 비트리즈는 굳은 결심을 하고 그녀에게 전했다.


"게르벨츠 주식회사가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어. 험멜이 막으려고 했던 것은 게르벨츠 주식회사가 만든 어떤 괴물이고... 카탈리나라고 하는 게르벨츠의 요원을 추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에 헬난은 눈을 헤치고 달리던 코트니를 멈췄다.


"게르벨츠 주식회사가 전쟁을요?"


"그래... 리베리아 제국군이 암살을 하던 것이 아니었어. 모든 것은 게르벨츠 주식회사 놈들의 짓이야. 그리고 괴물... 그들은 그 괴물이 세상에 안식을 줄거라 믿고 있어."


"괴물... 이요?"


헬난은 그 불쾌한 단어에 미간을 찌푸렸다. 비트리즈는 그런 그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단어를 다시 반복했다.


"기계가 가득한 구덩이가 있었어. 그 구덩이 안에서 부화한다고 하더군. 괴물이..."


"..."


헬난은 무언가 중얼거렸지만 비트리즈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미안하군, 소령. 조금더 크게 말해주게. 지금 청각이 거의 고장나서, 작은 소리는 들을 수가 없어."


헬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비트리즈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신이라구요, 중장님. 괴물이라니, 어떻게 저희의 신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거죠?"


비트리즈는 천천히 눈을 떴다. 헬난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옅어지는 눈보라 사이로 아까 전에 도망쳐나왔던 연구소가 보였다.


카탈리나는 코트니 바로 앞에서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에 비트리즈는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런 비트리즈를 개의치 않고 헬난은 권총을 들어 탄창을 끼우며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정말 중장님은 예의란 것을 모르시군요. 신성모독은 죽을 죄인데, 그것조차 모르다니요. 괴물이라니, 정말 안될 말이에요. 암요.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요."


헬난의 입에서 하하, 하고 마른 웃음소리가 나왔다. 비트리즈는 눈을 부릅떴지만 여전히 시야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마에 차가운 총구가 닿았다. 비트리즈는 마지막 힘을 짜내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더 이상 몸의 어떤 부위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신이에요, 신. 비트리즈 중장님. 우리가 만들려는 것은 신이에요."




총성이 울렸다.


코트니의 뒷좌석 문틈으로 피가 흘러내려 차가운 눈위에 떨어졌다.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11월 중에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12월이 되어야 연재 속도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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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116화. 승리, 그리고 승리 -3 16.02.02 166 2 13쪽
127 115화. 승리, 그리고 승리 -2 16.02.02 156 2 27쪽
126 114화. 승리, 그리고 승리 -1 16.01.30 153 1 8쪽
125 113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4 16.01.24 122 2 13쪽
124 122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3 16.01.18 147 2 12쪽
123 121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2 16.01.14 170 2 19쪽
122 120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1 16.01.14 130 2 8쪽
121 119화. 전야 16.01.14 156 3 10쪽
» 118화. 험멜의 뒤를 쫓아 -3 15.11.17 238 2 26쪽
119 117화. 험멜의 뒤를 쫓아 -2 15.11.09 251 2 13쪽
118 116화. 험멜의 뒤를 쫓아 -1 15.10.30 195 2 15쪽
117 115화. 휴식의 날 15.10.23 152 2 20쪽
116 114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3 15.10.21 256 2 17쪽
115 113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2 15.10.19 216 2 16쪽
114 112화. 선지자 15.10.16 95 3 12쪽
113 111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4 15.10.15 178 4 15쪽
112 110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3 15.10.13 138 2 16쪽
111 109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2 15.10.08 101 2 7쪽
110 108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1 15.10.04 192 2 8쪽
109 107화. 옛 연인 -3 15.09.30 140 3 15쪽
108 106화. 옛 연인 -2 15.09.21 239 2 12쪽
107 105화. 옛 연인 -1 15.09.18 188 2 8쪽
106 104화. 세만 요새 공성전 -3 15.09.16 110 2 8쪽
105 103화. 세만 요새 공성전 -2 15.09.14 206 3 9쪽
104 102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1 15.09.11 305 3 8쪽
103 101화. 스스로 만들어낸 승리 -3 15.09.09 179 3 13쪽
102 100화. 스스로 만들어낸 승리 -2 15.09.07 172 4 9쪽
101 99화. 스스로 만들어낸 승리 -1 15.09.02 183 3 10쪽
100 98화. 의도된 급변 15.08.31 187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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