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필더
작품등록일 :
2015.03.30 14:51
최근연재일 :
2016.02.02 20:41
연재수 :
128 회
조회수 :
21,352
추천수 :
577
글자수 :
766,658

작성
15.10.23 16:27
조회
152
추천
2
글자
20쪽

115화. 휴식의 날

DUMMY

티에세를 점령한 이후의 시민연합의 행보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히폴리토는 항복한 리베리아 제국병들을 설득하기 위해 며칠이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긴 역사의 영주가문 출신인 히폴리토 백작의 명성은 유효하였기 때문에, 그의 열정적인 설득은 큰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부상자를 제외한 병사들은 대부분이 시민연합의 편으로 돌아선 것이다.


"지금 제국에는 그대들이 돌아갈 곳이 없을 걸세. 황제폐하를 다시 모실 수 있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지 않겠나? 원치 않는다면 무장해제만 하겠네. 그 뒤에는 마음대로 하게나."


"어차피 우리는 상관을 지키지 못한 죄를 묻게 될겁니다. 싸울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제국군 상급 지휘관이었던 파비안 파우스티노 남작은 그렇게 말하며 플로라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플로라는 헬레나의 조언에 따라 파비안 남작을 새로운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원래대로라면 기존의 군사지휘관인 안젤라 벨린다의 부하로 놓아야겠지만, 헬레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파비안 남작을 최고지휘관으로 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저기, 그러면 안젤라씨가 기분나쁘지 않을까요? 파비안 남작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플로라가 조심스럽게 안젤라를 배려했지만, 그것은 정말로 의미없는 일이었다. 모병소 건축을 감독하던 안젤라는 파비안 남작이 시민연합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달려와서, 그를 자신의 선임으로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의 경험은 우리 시민연합에게 꼭 필요합니다. 거기에 그가 지휘관이 된다면 제국군들은 우리와 함께 싸워줄 거구요."


안젤라의 말대로 파비안 남작의 포섭은 시민연합의 극단적인 성장과 이어졌다.


모병소는 매일같이 많은 젊은이들로 붐볐다. 티에세의 사람들은 이미 왕실에 대해 크게 실망해버렸고, 기꺼이 황제를 간신의 손에서 구하자는 시민연합의 부름에 응했다.


왕실귀족들에게 실망한 이는 티에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근처의 소도시에서도 귀족, 기사, 용병을 필두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도시의 곳곳에 임시 군사훈련소가 지어졌다. 헬레나는 그 엄청난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하나의 군대로 만들어갔다. 그녀의 수완은 플로라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저기... 그럼 저는 무얼 하면 좋죠?"


"플로라님은 엘리사와 함께 쉬고 계세요."


헬레나가 너무 상냥하게 웃으며 딱 잘라 말해버렸기 때문에 플로라는 엘리사의 손에 이끌려 하릴없이 도시를 산책하게 되었다.


한 무리의 젊은 여성들-아마도 플로라와 비슷한 또래인-이 멍하니 평화로운 거리를 걷고 있는 플로라를 보자 손을 흔들며 소란을 피웠다.


"플로라님이시다!"


"플로라님, 여기 좀 봐주세요~!"


"꺄악, 여기를 보셨어! 손도 흔들어 주셨어~!"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그 후로 만난 농부들이나,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상점 직원들이나, 술집에서 나오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티에세의 시민들은 플로라에게 정중히 인사하거나, 그녀의 용기를 칭송했다. 개중에는 플로라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젊은 청년들도 있었지만, 플로라는 감사하다는 말 대신 농담은 그만두라며 보란듯이 한숨을 쉬어서 그들에게 사과를 하게 만들었다.


사실 플로라의 역할은 시민연합에서는 특별히 중요했다.


그녀는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시민연합이라는 임협집단에 불과한 단체를 이끌고 계속 이겨와서 결국 티프소까지 얻어낸 총명한 군주. 마법시대의 석상처럼 아름다운 여성. 왕실에 의해 부모님을 모두 잃은 불쌍한 소녀. 누구라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시민연합에게 호의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만 플로라 본인은 자신이 아무것도 안하고 도시를 산책하고 있는 현실에 분해할 뿐이었다.


"이렇게 저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걸까요..."


"네."


엘리사는 그녀의 엄마처럼 단호하게 말해버려서 플로라의 볼을 부풀게 만들었다.


도시 곳곳에는 플로라의 이름으로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페델리코는 문장관 출신답게 멋드러진 문장을 작성해 놓았는데, 황제폐하를 위한 각오에 대한 아름다운 글귀와 귀족들의 폐해를 막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다음은 이렇게 마무리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플로라님의 뜻입니다."


플로라는 대자보를 빤히 바라보다가, "나덜론님의 뜻이겠지요."라고 투덜거렸다.


"플로라님은 아빠의 생각에 반대하시나요?"


엘리사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플로라는 우물쭈물대다가 힘없이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반대할 리가 없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옳다는 것이 지금까지 증명되어왔으니까.


플로라가 나덜론에게 갖는 불만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벌써 스무날이나 지났는데...'


어제까지는 열 아홉날, 내일이면 스물 하루. 플로라가 나덜론을 보지 못한 기간이다. 티에세를 점령하자마자 떠난 나덜론은 연락조차 없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수소문할 방법이 없기에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헬레나와 엘리사에게 노골적으로 수상한 말투로 그의 행방을 물었을 때, 두 사람은 짠 것 처럼 대답했다.


"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 나덜론님은 플로라님을 위한 일을 하고 있을 거에요."


"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 아빠는 플로라님을 위한 일을 하고 있을 거에요."


플로라는 침대에 잔뜩 쪼그리고 누워서 그가 돌아오면 마구 뭔가 쏘아붙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처음에 돌아오자마자 멱살을 잡고 막 흔들어야지. 그리고 군주에게 어디로 가는지 보고하기로 한 약속을 어긴거에 대해서 화를 내야지. 그래도 욕설은 하지 말아야지.'


어떤 순서로 그를 추궁할지 계획을 세우면서 며칠이 더 흘러갔다.


플로라가 한숨을 섞어서 스물 다섯날을 센 아침, 아침 보고를 받기 위해 집무실로 들어갔을때 모병 현황을 설명하기 위해 들어온 안젤라가 나덜론에게 이런저런 농담을 하며 웃고 있었다. 플로라가 이 예상치못한 그의 등장에 노골적으로 당황하고 있는 동안 은발머리의 청년은 그녀에게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플로라님."


나덜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녀에게 정답게 인사했다.


플로라는 이 기습에 깜짝 놀라 열심히 연습했던 추궁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안젤라가 그녀에게 모병현황을 보고하는 동안에도 플로라는 어질어질한 현기증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나덜론씨, 그럼 다음에 봐요.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죠."


안젤라는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하고 플로라에게 목례한 다음 집무실을 나섰다. 나덜론은 아무렇지도 않게 플로라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병력증강은 무난하군요. 새로운 병사들의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방어구의 추가 생산을 위해 생쥐르 브룸에게 강철구매를 지시했습니다. 훈련 담당은 안젤라님이 계속 맡게 되겠지만, 파비안님 역시 훈련 지도가 가능합니다. 오전 오후를 나누어 지도하게 만드는 것이 후일 전투를 풀어나가는데 용이하겠지요. 페델리코님에게 험멜군의 노드장군에게 편지를 부탁드렸습니다. 앞으로의 전투에는 그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잠깐만요, 나덜론님, 저기...!"


나덜론은 말을 멈추고 울그락붉그락 하는 플로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플로라는 나덜론을 있는 힘껏 노려보려했지만 얼굴이 자꾸 풀려서 계속 웃음만 흘러나왔다. 분명 화가 났었는데, 그를 보자마자 그런 감정은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은 어째서일까? 멱살을 지금 잡으면 좀 이상할까? 멱살을 잡으려면 발 뒤꿈치를 올려야 하는 걸까? 그러면 그건 키스하는 자세랑 너무 비슷하지 않을까? 그녀는 온갖 생각이 겹쳐서 다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덜론의 목소리에 그녀는 스스로가 매우 바보같은 표정으로 웃고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얼굴빛을 고쳤다.


"그 동안 어디에 계셨나요?"


"대륙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알피엑시 대륙에도 갔었지요."


"알피엑시 대륙에요? 왜요?"


"우리의 적을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우리의 아군을 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요."


나덜론의 말은 조금 이상한데다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플로라는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지적해봐야 말해주지도 않을 거라는 것을 짧지 않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플로라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냉정, 냉정을 되찾아야 이 남자와 말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한다음 그녀는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그럼 언제 또 가시나요?"


이렇게 장시간 떠나있었으니 이제는 떠날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차가운 질문을 해서 그를 당황하게 만들면, 그도 여유를 잃고...


"오늘 밤에 갑니다."


플로라는 냉정이고 뭐고 다 사라져서 "오늘 밤에요?!"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되물었다.


"예. 밤 열시경에 출발할 듯 합니다. 남쪽으로 가봐야해서요."


플로라는 막 낚여 올라온 새끼 잉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나덜론은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 웃어보였다.


"염려마십시오. 제가 하는 행동은 모두 플로라님을 위한 것입니다."


플로라가 정신을 되찾아 뭔가 말하려고 하는 순간 노린 것처럼 헬레나가 들어왔다. 그녀가 플로라에게 몇가지 문서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은발머리의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무실을 나섰다.


"오늘 밤에?"


플로라가 당장이라도 울 것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헬레나는 부드럽게 웃고, "저와 엘리사도 같이 가게 되었어요. 처리할 업무는 모두 끝마쳤습니다. 가급적 일찍 돌아올 거에요."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녀가 고운 미소와 함께 집무실을 나가자 플로라는 마른 웃음을 흘리고 "좋아, 이렇게 나왔다 그거지."라며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못 참아, 라든가, 남쪽이라면 역시 남문으로 통해서 가겠지, 라든가, 검은 옷을 챙겨야지, 라든가를 불온하게 중얼거리면서.




날은 완연한 봄이었다.


티에세의 남문은 까마득하게 높은 절벽과 이어져 있었지만, 근처의 숲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다.


플로라는 검은 색의 옷을 상하의로 맞춰서 입고, 달빛에 반사가 될만한 장신구는 모두 빼놓은 채로 그 꽃밭에 엎드려 있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8시부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3번 정도 거미때문에 비명을 질러야 했고, 5번 정도 때이른 모기에게 물려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남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열시가 되었을 때, 작전의 목표가 그녀의 시야에 정확히 들어왔다.


달빛에 빛나는 은발을 가진 사내는 말 고삐를 가볍게 잡고 천천히 걸어나가고 있었다. 뭔가 바쁜 일이 있던 것 같더니, 그리 바빠보이지도 않잖아, 라고 중얼거리며 플로라는 그 사내의 뒤를 따르는 두 필의 말을 살펴보았다.


엘리사와 헬레나는 정말로 편한 복장으로 말에 앉아있었는데, 두 사람 다 마치 꽃놀이라도 떠나는 것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항상 자신의 신장만한 대검을 가지고 다니던 엘리사는 검은 커녕 단검 한자루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세 사람은 따박따박 말을 몰아 숲으로 들어갔다.


플로라는 얼른 꽃밭에서 일어나 얼른 그들을 쫓으려고 했지만, 너무나 오래 같은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리가 저려서 움직일 수 없었다.


'꼴사나워...'


플로라는 힘이 쭉 빠져버렸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그녀의 시선 끝에서는 나들이를 가는 단란한 가족이 보일 뿐이었다. 나덜론씨는 저 두 사람과 가족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가족끼리 외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가족들도 이런 계절이 오면 저녁 나들이를 가곤 했었다. 빵과 치즈를 넣은 광주리를 들고 앞장서는 것은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다. 달빛을 받으며 꽃밭에서 수다를 떠는 것은 지금은 추억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광경.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가족을 떠올릴 틈이 없었다.


'너무 할 일이 많았으니까...'


헬레나는 그녀의 말상대가 되어주었다. 엘리사는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나덜론은 그녀에게 계속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녀를 위해 웃어주었고, 그녀를 위해 다정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녀를 위해 다음 해야할 일을 알려주었다.


멀리 떠나는 저 사람들 사이에 그녀가 낄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데도, 그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아버지...'


기사로써의 훈련을 게을리 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그녀가 진 무게가 가벼울리 없다. 아직 어린 소녀에게 수 천, 수 만 명의 군주라는 자리는 너무나 무거웠다. 아직도 그녀는 갑옷보다는 드래스 쪽이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외로워...'


훌쩍, 하고 콧물을 삼켰다.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한 번 맺힌 눈물은 겉잡을수 없게 쏟아졌다. 나덜론이 어디로 갔는지는 눈물 때문에 보이지도 않는다.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지만 예쁜 얼굴이 흙투성이만 될 뿐, 눈물은 다시 고여 흘러내렸다.


꼴사납게 엎드려서 끙끙대는 동안 나덜론에게 지시를 받은 엘리사는 말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꽃덤불로 다가갔다.


"플로라님, 여기 계신가요?"


플로라는 입을 다물고 잠시 버텨보았지만 곧 다 글러먹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엉금엉금 엉덩이부터 앞세워 기어나온 다음,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엘리사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왕좌왕하다가 양손으로 엉망이 된 얼굴이라도 가리기로 했다.


"저, 아빠가 모시고 오라고 하셔서요. 플로라님도 같이 가실거죠?"


플로라는 대답없이 얼굴을 가린채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녀의 찬란한 금발에 매달려있는 거미 한마리를 떼어준 다음, 엘리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나덜론의 말 앞으로 데려가 주었다.


나덜론은 그녀를 말 위로 끌어당겨주었다. 플로라는 말 위에 올라서 나덜론의 뒤에 매달렸다. 푹, 하고 나덜론의 향기가 났다.


"천천히 가겠습니다, 플로라님."


그의 체온이 전해지는 걸 느끼며 플로라는 고개를 숙였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덜론의 허리를 꽉 잡았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같이 가자고 말씀드리는 편이 좋았을까요."


그의 목소리는 너무 따뜻해서 플로라는 눈물섞인 신음소리를 내서 대답을 대신했다.


거의 삼십여분을 걸어간 다음에 나덜론은 말을 세웠다. 워워, 하는 목소리에 플로라는 허둥지둥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달이 보였다.




"오늘은 보름달이라서요. 달빛이 밝죠."


나덜론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지었다. 하얀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


눈 부실리가 없는데도 플로라는 한 손을 들어 잠시 달빛을 가린다. 몇 그루의 나무와, 굉장히 많은 꽃들이 펼쳐져 있다. 늦은 밤인데도 잠을 잊은 나비 몇 마리가 향기와 어울린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가 좋겠군요."


나덜론이 지정한 자리에 헬레나는 천으로 만든 돗자리를 깔았다. 엘리사는 그 위에 성에서 가지고 온 과일음료와 몇 종류의 단 과자와 계피빵과 치즈 한 덩어리를 꺼내놓았다.


"플로라님도 말에서 내리심이 어떠하십니까?"


멍하니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플로라는 나덜론의 말에 허둥지둥 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나덜론은 그녀를 에스코트하여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었다.


"고, 고마워요."


"천만에요."


나덜론은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플로라는 따라 웃기는 커녕 시선둘 곳도 찾지 못했다.


네 사람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음료수가 담긴 컵을 들었다. 제대로 자신의 컵까지 준비되어 있는 걸 보고 플로라는 나덜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그는 못 본 척한 건지 못본건지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여태까지 잘 풀려나간 것을 자축하기 위한 자리래요."


엘리사가 플로라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할테니까 오늘 휴가를 보내는 거구요."


플로라는 작게 한숨을 쉬고, "그건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저, 그보다... 그럼, 가족모임이..."라고 말을 흐렸다. 헬레나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져 주며 웃었다.


"부담을 느끼시지 마세요."


"그래도... 가족끼리의 시간을... 저기, 방해하고 있는 건..."


"애초에 플로라님이 방해라고 생각했다면 플로라님의 컵은 가지고 오지 않았을 거에요."


"이 홍차 과자도 안가져 왔을 거구요."라며 엘리사가 과자단지를 권했다. 플로라는 알싸한 맛의 과자를 씹으며 나덜론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그저 편한 자세로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멀리 가시는 줄 알았어요. 저에게 또 비밀로 하고요."


나덜론은 소리내어 웃었다.


"전에 저기, 저에게는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


나덜론은 끄덕이지도 않고 좌우로 젓지도 않았다. 하지만 플로라는 그가 그렇다고 말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전 정말 괜찮은 건가요? 이렇게 저, 아무것도 몰라도...?"


나덜론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플로라는 그의 평온한 얼굴은 처음 본다는 생각을 해내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덜론은 그녀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멍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헬레나와 엘리사도 가끔 키득거리며 옆집 언니 이야기라던가 건너마을 청년의 결혼이야기라던가 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플로라는 그를 그렇게 바라보다가 아예 몸을 눕혀버렸다. 조금 지칠 정도로 꽃향기를 맡은 것 같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햐얀 달빛은 여전히 그녀에게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나덜론은 그렇게 누워있는 그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발의 소녀는 아직도 머리카락에 나뭇잎이 하나 붙어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살짝 쓸어주었다. 플로라는 눈을 감은 채로 그의 손가락이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것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나덜론님과는 전에 만났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전생이었을지도 몰라요..."




멀리서 동이 트고 있었다.


플로라는 나덜론의 앞자리에서 망토에 싸여 잠들어서,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좋은 기분전환이 되었을까요?"


헬레나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바빠지는 거지요?"


엘리사의 목소리에도 염려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위험해지기도 하지."


나덜론은 나직히 대답했다. 달빛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떠오르는 해는 평소보다도 훨씬 붉게 지평선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재앙이 올 때까지 몇 주 남지 않았어. 아직도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덜론은 플로라를 의식해서인지 말을 흐리고, 두사람을 한번씩 돌아보았다.


"두 사람에게는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헬레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전 나덜론님께 감사하고 있는걸요."


엘리사도 그녀의 어머니를 닮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저도 아빠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다구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나덜론은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1028년 9주 7일.


발페아케이르의 티프소군에 대규모의 출진명령이 내려졌다.


출전 병력은 30만.

12척의 전함과 1000척의 수송선단이 대륙 곳곳에서 출진준비를 끝마쳤다.


이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리베리아 제국의 점령이었다.


작가의말

마법시대에는 테르센트의 함대들은 정령의 가호를 받아 바다위에서 티프소와 맞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028년 현재, 티프소는 해상위의 전투에 있어서 절대 우위에 있습니다. 증기선을 개조한 전함은 그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기동력과 화력에서 목조선을 아득히 능가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테르센트 연대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새로운 방침도 진행중 입니다. +2 15.04.20 379 0 -
128 116화. 승리, 그리고 승리 -3 16.02.02 166 2 13쪽
127 115화. 승리, 그리고 승리 -2 16.02.02 156 2 27쪽
126 114화. 승리, 그리고 승리 -1 16.01.30 153 1 8쪽
125 113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4 16.01.24 122 2 13쪽
124 122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3 16.01.18 147 2 12쪽
123 121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2 16.01.14 170 2 19쪽
122 120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1 16.01.14 130 2 8쪽
121 119화. 전야 16.01.14 156 3 10쪽
120 118화. 험멜의 뒤를 쫓아 -3 15.11.17 238 2 26쪽
119 117화. 험멜의 뒤를 쫓아 -2 15.11.09 251 2 13쪽
118 116화. 험멜의 뒤를 쫓아 -1 15.10.30 195 2 15쪽
» 115화. 휴식의 날 15.10.23 153 2 20쪽
116 114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3 15.10.21 256 2 17쪽
115 113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2 15.10.19 216 2 16쪽
114 112화. 선지자 15.10.16 95 3 12쪽
113 111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4 15.10.15 179 4 15쪽
112 110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3 15.10.13 138 2 16쪽
111 109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2 15.10.08 101 2 7쪽
110 108화. 마지막을 피할 수 없는가 -1 15.10.04 192 2 8쪽
109 107화. 옛 연인 -3 15.09.30 140 3 15쪽
108 106화. 옛 연인 -2 15.09.21 239 2 12쪽
107 105화. 옛 연인 -1 15.09.18 188 2 8쪽
106 104화. 세만 요새 공성전 -3 15.09.16 110 2 8쪽
105 103화. 세만 요새 공성전 -2 15.09.14 206 3 9쪽
104 102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1 15.09.11 305 3 8쪽
103 101화. 스스로 만들어낸 승리 -3 15.09.09 179 3 13쪽
102 100화. 스스로 만들어낸 승리 -2 15.09.07 172 4 9쪽
101 99화. 스스로 만들어낸 승리 -1 15.09.02 183 3 10쪽
100 98화. 의도된 급변 15.08.31 187 3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