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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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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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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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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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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원 홍씨 95. 이향, 한성부에 가다

DUMMY

숙원 홍씨 95. 이향, 한성부에 가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허나 한성부는 대낮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안에서는 성이 난 장문호가 판관과 참군들을 닦달하고 있고 그 소리가 입구에 있는 관원들의 귀에까지 들렸다. 관원들은 괜한 불똥이 여기까지 튈까 싶어 창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용무용은 호와 결과 함께 그 앞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분명 올 때가 되었는데.

‘나라의 안위가 걸린 일이거늘, 네놈들이 어찌 일을 이따위로 하느냔 말이다!’

장문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용무용은 힐끗 보고는 다시 밖을 보았다. 큰 그림을 보라 해도 저리 작은 그림 밖에 못 보는 위인이었다. 큰 그림을 보려면 멀찍이 서야 하거늘.

그때였다.

느껴졌다.

울림이었다.

말발굽 소리였다.


향과 백겸, 최 무사와 십여 명의 별감들이 한성부 앞에서 멈췄다.

향이 말에서 내리자 모두가 서둘러 따라 내렸다.

한성부를 지키던 관원들은 갑자기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각 위의 관원들도 일제히 긴장해 횃불을 비추며 내려다보았다.

최 무사가 향에게 간청했다.

“저하, 속히 환궁하셔야 하옵니다. 저하...”

백겸은 향을 보았다. 도성에 다다랐을 때 달려오던 말발굽 소리는 내시부 호위 내관들이었다. 도성에 또 다른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면서 속히 환궁하시라 간청했다. 그럼에도 향은 이곳으로 왔다.

“조금 빨리 간다한들 마음이 편켔느냐. 상호군 또한 마음이 이곳에 있지 않으냐.”

“저하...”

향이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용무용이 뛰듯이 내려왔다. 전립의 큰 구슬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저하!”

향이 용무용을 보았다.

용무용이 향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저하! 어찌 이런 때에, 어찌 이곳까지 납시셨사옵니까!”

용무용 곁으로 호와 결이 함께 앉았다.

백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온 용무용이 거슬렸다.

용무용은 관복을 입고 전립의 큰 구슬이 멈춘 채 고개 숙이고 앉아 있고. 그 앞에 나뭇잎 문양의 남색 답호를 입은 향이 서 있었다.

백겸은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향이 아무 움직임 없이 용무용을 보고 있었다.

용무용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향의 발끝이 눈 속에 들어와 있었다. 속에서 아우성 거렸다. 이향의 피를 뿌려 달라 고려의 한 맺힌 영혼들이 울부짖었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용무용이 검을 뽑아 한 걸음 내딛으며 향에게 검을 내리꽂았다.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백겸만 없다면.

용무용이 일어남과 동시에 백겸과 최 무사와 별감들이 검을 뽑을 것이다. 호와 결이 검을 뽑아 용무용에게 길을 터주려 해도, 길을 터주기도 전에 백겸의 검에 쓰러질 것이고. 윤이 달려온다 해도 용무용의 검이 이향에게 닿기도 전에 백겸의 검에 막힐 것이다.

용무용은 이향의 피로 고려인의 한을 풀어달라는 아우성을 달래야 했다.

저만치에서 혹시라도 용무용이 신호를 보낼까 싶어 윤이 검을 잡은 채 숨어서 보고 있었다.

백겸과 최 무사는 갑작스런 살기에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용무용은 그날을 기다릴 것이다. 50년을 기다렸는데 며칠을 더 못 기다린단 말인가. 백겸이 지금 없다 해도 검을 뽑진 않을 것이다. 그날에 벨 것이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뺐다.

그제야 용무용은 이향이 평소와 다르게 빤히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향이 잠시 보다가 말했다.

“일어서거라.”

용무용이 일어나 향을 보았다.

향은 평소와 다름없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 깊은 눈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참담함도 분노도 노여움도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늦은 시간인데 어찌 남아있었느냐? 오늘 번이더냐?”

“아니옵니다 저하. 번은 아니나 지금같이 중차대한 일이 벌어진 때에 어찌 나라의 녹을 먹는 소신이 집에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열심인 걸 보니 좋구나.”

“망극하옵니다 저하. 소신 한 거라고는 저하에 대한 염려밖에 없사옵니다.”

.....

“소신 뿐 아니라 다른 판관들과 좌윤, 우윤 영감과 판부사대감께서도 안에 계시옵니다. 속히 드시옵소서.”

용무용이 고개를 숙이고 있고 향이 계단으로 올라갔다. 향이 쓴 갓의 길고 가는 구슬이 흔들렸다. 용무용이 눈길을 들어 향을 보았다.

그런 용무용을 백겸이 싸늘히 보았다. 용무용과 백겸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성부 관아 곳곳에 횃불과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만큼 장문호의 노여움은 더욱 타오르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것이냐? 네놈들이 진정 일을 이 지경을 만들고도 나라의 녹을 먹는 관료라 할 수 있겠느냐?”

장문호 앞에 우윤, 좌윤, 문 판관과 양 판관을 비롯해 참군들이 죄인처럼 서 있었다. 수십 명의 관원들은 모두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장문호는 집에 가자마자 마음이 편치 않아 다시 나왔다. 헌데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일처리를 이따위로 하다니. 어찌 얻은 기회인데.

장문호는 짚단이 덮여 있는 시신을 보며 대노했다.

“내금위 별감들이 살해된 사건이다! 이는 전하와 저하의 안위가 걸린 일이다. 이보다 더 막중한 일이 또 어딨단 말이냐! 한시라도 빨리 죄인을 잡아와야 하거늘, 그 자객을 봤다는 증인을 죽게 하다니!”

.......

“증인이 있다 하면 죽은 자도 살려야 하거늘, 네놈들이 대체, 이러고도 나라의 녹을 먹는 관료더냐! 뭣들 하느냐? 가서 도성을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다 뒤져서라도 범인을 본 자를 찾아내라. 해서 오늘 안으로 범인을 잡아와라. 범인을 잡아다 내 눈 앞에 갖다 놓으란 말이다!”

문 판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판부사대감, 그리되면 엄한 백성들이 죽게 될 것입니다.”

장문호가 고함을 쳤다.

“네 이노옴! 하찮은 백성 목숨 따위가 전하와 저하의 안위보다 중하단 말이냐?”

“그만하세요 대감.”

“그만하긴 뭘.”

장문호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하!”


모두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향에게 예를 갖추었다.

장문호가 향의 앞으로 달려가 호들갑을 떨었다.

“저하...어찌 이곳까지 납시셨사옵니까! 역당이 도사리고 있사옵니다. 속히 환궁하셔야 하옵니다. 이런 때에 저하께서 이리 나오시다니요!”

향은 또다시 차디찬 땅에 누워있는. 발만 삐죽 나와 있는 백성을 보고 있었다.

장문호가 최 무사를 야단쳤다.

“대체 내금위에선 정신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저하의 안위를 살피는 내금위가 어찌 저하를 모시고 사지로 나왔단 말인가! 내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야!”

......

향이 장문호를 지나쳤다.

향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짚단을 젖혔다.

장문호가 호들갑을 떨었다.

“저하...어찌 미천한 몸에 손을 대십니까! 저하, 죽은 자이옵니다. 저하...”

.......

십대 후반의 사내가 죽어 있었다. 순박한 얼굴의 사내였다. 짚단을 더 젖히자 사내의 몸에 베인 칼자국이 선명했다. 사내에게서 약재 냄새가 났다. 향은 사내의 품에 있는 봇짐에 매달린 약재를 보았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을 터. 기다릴 터인데. 스물 셋의 죽음에 별감들의 죽음이 더해졌다.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향이 일어섰다.

“모두 일어서거라.”

모두가 일어섰다.

향이 장문호를 보았다.

“미천한 몸이 아니라 귀한 백성의 몸입니다. 귀히 다루세요 대감.”

.....

“또한 어찌해서 한성부의 잘못으로 죽은 이 백성을 이리 둔건지 본관을 이해시키셔야 합니다.”

향의 눈길이 어찌나 싸늘한지 장문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장문호는 잘잘못을 떠나 한성부의 잘못이란 말이 귀에 박혔다.


향과 장문호가 정청 안에 들었다.

깊어가는 밤하늘 아래 정청의 기와는 달빛을 받아 평화로워 보였다.

그 아래에 한지 창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했다.

허나 정청 앞은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겸과 최 무사와 별감들이 입구를 지키고 서 있고. 한쪽 옆에는 용무용과 호와 결, 석이 서 있었다. 모두 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향의 지시로 문 판관이 관원들을 데리고 서둘러 죽은 백성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가고. 운종가 일대를 탐문하던 일을 멈추고 백성들에게 더 피해가 있는지를 찾으라 했다. 해서 모두가 분주한데 용무용만이 이곳에 있었다.

보초를 서는 관원들은 망부석처럼 서서 힐끗힐끗 그들을 보고 있었다.

백겸은 용무용과 화톳불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백겸이 용무용을 싸늘히 보았다.

용무용은 백겸의 눈길을 무시하고 최 무사에게 다가갔다.

최 무사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자 용무용이 입을 열었다.

“수하들이 그리 비참하게 죽어 마음이 좋지 않겠소.”

일순 별감들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렇잖아도 무참히 살해된 동료의 죽음에 비통해하고 있던 터였다.

“별감들이 검을 뽑기는 했으나 자객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못하고 죽은 것 같소. 비명에 그리 갔으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최 무사가 매섭게 정 무사를 보았다.

“저하께서 계신다. 어디 감히 목소리를 높이느냐!”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터라 정 무사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나으리.”

용무용은 아무 감정도 없는 눈으로 말했다.

“사체 검안할 때 나도 보았소. 해서 하는 말이었소.”

최 무사가 용무용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최 무사가 조용히 말했다.

“김 판관이 야인이었다고는 하나 이제 조선인이오. 조선에는 법도가 있고 품계가 있소. 김 판관이 내게 하대를 해선 아니 된다 가르치는 것이오.”

.....

“봐 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오.”

용무용이 고개 숙였다.

“송구합니다 상호군 나으리.”

백겸이 최 무사를 힐끗 보았다. 최 무사는 노여움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용무용은 한눈에 봐도 원리원칙이라 쓰여 있는 최 무사를 보았다.

“야인으로 오래 살았던 터라 부족한 게 많습니다. 또한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허니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

“그러고 보니 상호군 나으리의 무예 실력을 본 적이 없는 듯한데. 언제 기회가 된다면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

“조선 무관들 중에 왕실의 호위를 맡는 내금위 군관들만큼 실력이 뛰어난 자는 없다 들었습니다. 허니 일천한 제가 배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최 무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겸은 여전히 용무용을 싸늘히 보고 있었다.


‘사람답게 살기 전에는, 조선에 해가 되는 어떤 악행을 저질렀소?’

용무용은 백겸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향을 보았다.

‘저하...아뢰옵기 송구하오나...소신, 조선에 해를 끼치는 악행을 너무도 많이 저질러 일일이 말씀 올릴 수 없사옵니다. 또한 너무도 잔인해 말씀 올릴 수 없사옵니다. 또한 소신, 조선인이 되기로 하고 그 모든 것을 내려놨기에 말씀 올릴 수 없사옵니다. 모든 걸 말씀 올리고 조선인으로 살 수 없기에 말씀 올릴 수 없사옵니다...’

용무용이 엎드렸다.

‘저하...부디 지난날을 용서하시고...조선인 김선으로 살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뱀 같이 교활했다. 발톱을 숨기고 있는 사나운 짐승 같았다. 용무용을 보기만 해도 거슬렸다. 그 거슬림의 원천이 잃어버린 기억에 있을 터이니, 이자의 어깨에 나비문신이 있을 것만 같은 의심은 거둬지지가 않았다. 분명 있을 것이다.

백겸은 예민해져 신경이 바늘 같았다. 단진이 걱정으로도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는데 별감을 데려간 자객을 보았다는 백성의 죽음이 더해지며 초조해져 있었다. 거기다 용무용까지 이리 있으니.

나비문신만 잡으면 모든 걱정이 끝이 나는 일이었다. 단진이 걱정도 창이 걱정도. 나비문신을 잡아야 했다. 나비문신에 집착할수록 용무용의 어깨에 나비문신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불현듯 순포의 베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나비문신이 떠올랐다.

용무용의 눈길이 백겸을 향했다.

백겸이 잠시 보다가 말했다.

“그리 일천하다 하니, 내가 한 수 가르쳐주는 건 어떻겠소?”

그 말에 용무용은 웃었고 호와 결, 석이 한 걸음 튀어나갔다.

용무용이 사납게 호와 결, 석을 보았다. 그 눈길을 백겸은 놓치지 않았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사나운 짐승의 눈이었다.

용무용은 다시금 몸을 낮춰 제 정체를 숨기는 눈으로 백겸을 보았다.

“그전에 네게 궁금한 게 있다. 지난번에 함께 있던 창이란 자 말이다.”

백겸이 보았다.

“그자의 무예실력은 봐서 잘 알고 있는데 너의 실력은 본 적이 없으니. 네가 그 정도 실력은 되느냐?”

“된다하면 내게 배우겠소?”

용무용은 소년 같은 얼굴의 백겸을 재밌다는 듯이 보았다. 백겸의 속이 훤히 보였다. 나비문신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만하구나. 내 실력이 궁금할 땐. 한 수 가르쳐 달라 청하는 것인데 너는 한 수 가르쳐 주겠다 하니, 내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용무용이 한 걸음 다가와 백겸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리 확인하고 싶으면, 다음엔 말이다. 내게 청을 하거라. 또 아느냐, 내 들어줄지.”

용무용이 얼굴을 떼자 백겸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불길 앞에 백겸의 하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용무용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문득 이놈과 창이가 겨루면 진짜 누가 이길까 궁금했다. 허나 그런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터였다.

문이 열렸다.


앳된 별감과 하얀 얼굴 별감의 주검이 있었다.

촛불 아래 차디찬 시신이 된 앳된 최 별감은 더욱 어려 보여 아이 같았고 하얀 얼굴의 윤 별감은 하얗게 칠해놓은 것 같았다. 그들의 푸르스름한 입술만이 그들이 살아있던 사람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백겸은 자신을 찾으러 나갔다 죽은 별감들을 직접 눈으로 보자 무거운 죄책감이 짓눌렀다.

최 무사는 싸늘한 주검이 된 수하들을 보자 목구멍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허나 삼켰다.

향은 말없이 보았다.

향이 별감들에게 시선을 둔 채로 물었다.

“이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최형수와 윤진호이옵니다 저하.”

향이 앳된 별감의 얼굴을 보았다.

“최형수.”

하얀 얼굴의 별감을 보았다.

“윤진호.”

향이 잠시 있었다.

“이리 늦게 불러줘 미안하구나.”

최 무사가 망극해했다.

“저하...말씀 거두어 주시옵소서. 저하 앞에서 이리 누워 있는 것도 불충이옵니다. 또한 저하께서 친히 불러주시니 죽어서도 광영일 것이옵니다. 원도 한도 없을 것이옵니다.”

향은 최 무사를 보았다. 순해 보이나 단단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올곧고 고지식해 비록 부러질지언정 굽힐 줄 모르는 성품에 과묵해 할 말만 하는 사내였다.

내금위 별감들에게 엄하게 대하는 걸로 정평이 나 있었으나 속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아마도 칭찬 한 마디 해주지 못한 게 사무쳤을 것이다.

“천천히 나오거라.”

“아니옵니다 저하.”

향이 최 무사를 보았다.

“서운해 할 것이다.”

향이 최 무사의 팔을 툭 잡고 나갔다. 그 손길에 최 무사의 눈이 뜨거워졌다.

백겸은 향을 따라 나가야 하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

최 무사가 돌아보진 않았으나 엄히 말했다.

“무얼 하는 것이냐? 어서 저하를 모시거라. 저하 곁에서 한 걸음도 떨어져선 아니 된다.”


혼자된 최 무사는 별감들에게 다가섰다.

최 무사의 그림자만 봐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고는 했는데. 이리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두 별감은 누워만 있었다.

칭찬 한 번 해주지 못했었다. 매번 어찌나 호되게 야단을 쳤었는지. 무관 시험을 보고 내금위에 들어온 지 일 년도 채 안 되는 별감들이었다. 앳된 얼굴의 최 별감은 별명이 내금위장이었다. 아침마다 부친이 내금위장 영감 다녀오시라 인사를 한다고 했었다. 부친이 영상의 자리보다 내금위장이 되는 게 더 큰일을 하는 거라며, 주상전하와 저하의 호위를 맡는 일은 가문의 영광이라고 했다며.

헌데 행동이 굼떠 최 무사는 늘 야단만 쳤었다.

앳된 별감은 그때마다 굼떠도 끝까지 가겠다며 웃었었다. 그래서 최 무사에게 더 야단맞고는 했다.

하얀 얼굴의 윤 별감은 홀어머니와 단 둘이었다. 모친이 문과 시험을 보라고 그리 애원했는데도 꼭 무관이 되겠노라 고집을 피워 내금위에 들어왔었다. 앳된 별감이 내금위장이 되겠다고 할 때마다 윤 별감은 자신이 먼저 될 거라 장담했었다.

그때마다 티격태격하다 최 무사에게 야단을 맞았었다.

최 무사는 하얀 얼굴의 별감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이 어찌나 찬지...이 손을 잡을 홀로 된 모친을 생각하니...

최 무사는 앳된 별감 다리의 상처와 배를 가른 칼자국을 보았다.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목구멍으로 가릉가릉 무언가가 올라와 삼킬 수가 없었다.

미안했다. 제 목숨 하나 건사하지도 못하게 가르친 것 같아. 미안했다. 또한 이대로 나가면 저하의 안위를 지켜야 하기에, 또한 남은 수하들을 지켜야 하기에 이들의 죽음을 잊어야 하기에 미안했다.

최 무사는 앳된 별감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수고 많았다.


문 앞에 향이 있었다. 백겸이 눈길을 떨구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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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1.04.12 11:23
    No. 1

    수고 많았다 ㅠ 울컥했네요 ㅠ 최고의 작품!!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6 k1******..
    작성일
    21.04.12 19:36
    No. 2

    크으!! 너무 좋아용 ㅠㅠㅠㅠㅠㅠ 추천누르고갑니당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17 vely4606
    작성일
    21.04.13 14:07
    No. 3

    최형수, 윤진호, 이리 늦게 불러줘 미안하구나.....ㅜㅜㅜ 이향의 마음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정말로 따뜻하고 어진 성군이 되실 분이네요. 너무 매력적입니다. 저도 모르게 이향을 사랑하게 된 거 같아요. 이런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내시는 작가님, 너무나 존경합니다^^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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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3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52 10 16쪽
68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82 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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