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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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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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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0.12.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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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DUMMY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백겸은 하얀 꽃이 날리는 들판에 서 있던 향과 단진이 떠올랐다. 너무도 아름다워

너무도 두려워 가슴이 바들바들 떨렸다.

579년의 세월이, 인연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백겸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조선에 온 이유를 알아버렸다. 허나 돌이켜야 했다. 반드시 돌아가야 했다.

백겸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일어나 앉았다.

도화는 병풍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쓸쓸했다. 그 쓸쓸함을 견디지 못해서일까. 창이는 없었다. 창이의 빈자리엔 덩그러니 이불만이 있었다.


창이가 삼년을 죽일 듯이 패자 백겸이 창이를 잡았다.

“그만해! 애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야!”

백겸이 창이를 벽에 밀어붙이고 진정시키려 했다.

“그만해!”

“비켜!”

“집에 가려면 쟤도 있어야 돼! 집에 가야 할 거 아냐!

“넌 집에 가는 게 그렇게 중요해!”

“중요해!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어? 대체 너는 뭐가 중요한데?”

“봄이!”

......

“나는 봄이가 중요해!”

백겸은 한 대 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창이를 보았다. 백겸은 창이의 눈을 보았다.

사내의 눈빛이었다.


백겸은 왜 이제껏 몰랐는지 자신의 무신경함에 더 놀랐다. 왜 그랬을까.

늘 창이는 단진의 곁에 있었고, 창이는 그토록 단진을 좋아한다고, 단진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알아달라고 했는데.

왜 단 한 번도 창이가 단진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백겸에게 단진은 너무도 부족한 동생이라고만 생각해서였을까. 늘 챙겨야 하고 늘 사고뭉치에. 해서 창이가 여자로 단진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아예 배제했던 것 일까.

왜 하필이면 단진이냐.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

백겸은 창이의 빈자리를 보았다.

‘어디 가?’

‘연모하러.’

‘연모한다.’

백겸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자는 줄 알았던 도화가 앉아서 보고 있었다.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아니...잠이 안 와서. 하루가 이렇게 길어서야 579년을 어떻게 걸어 가냐!”

“아깐 고마웠어.”

백겸은 단진에게 모진 소리를 하고 보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창이에게 인옥을 데려다주라 하고는 단진이 잘 들어가는지 보기 위해 뒤따라갔다.

생각지도 않게 향이 나왔다. 향과 단진의 모습에 넋을 놓고 있다 내금위 별감들에게 끌려갈 뻔했는데 도화가 나타났다. 도화는 백겸과 은밀히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둘러대며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허나 소용없었다. 별감들이 백겸뿐 아니라 도화까지 추포해 가려는데 향이 나타났다. 다행히도 단진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향과 눈이 마주친 백겸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향은 백겸을 잠시 보더니 그냥 보내주라고 했다.

“너한테 신세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봄이 일도 그렇고...여기서 지내게 해주는 것도 그렇고...”

도화는 서운함에 퉁명스레 말했다.

“신세라...신세라고 생각되면 갚아라.”

백겸의 눈길이 주인 없는 이부자리에 머물자 도화가 말했다.

“후원에 가봐. 없으면 궁 서문에 있을 거야.”

“넌 알고 있었어?”

.....

“나는 몰랐어. 왜 몰랐을까.”

도화가 잠시 보다가 내뱉었다.

“네가 아는 게 뭐가 있냐? 모르는 게 그것뿐이겠냐?”

도화가 벌떡 일어나 어둠 속에서 백겸을 응시했다.

“넌 모르는 거 많아 좋겠다.”

도화가 병풍 뒤로 들어가며 덧붙였다.

“검 가지고 나가!”

백겸은 벙찐 얼굴로 도화가 사라진 병풍을 보고 있었다.


후원의 등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밤하늘의 달조차도 구름에 가려 있었다.

창이가 홀로 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다. 창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 소리가 났다. 창이의 벗은 몸이 땀에 흥건했지만 창이는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창이의 눈은 슬프면서도 사나웠고 사나우면서도 슬펐다. 창이는 운명을 베고 있었다. 자신과 단진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을 베고 있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한 죽을힘을 다해 운명을 베고 있었다.

창이는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창이의 흘러내리는 땀은 눈물이었고 창이의 소리 없는 침묵은 절규였다.

백겸이 창이를 보고 있었다.


준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여름에게 용기 내어 말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아까 아까 말했는데, 안 궁금해?’

‘왜 궁금해?’

‘이야 진짜 20년 우정 금가는 소리 들리네, 네 친구인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짝사랑이 자랑이냐?’

‘내가 언제 짝사랑이라 그랬어? 좋아하는 사람 있다 그랬지!’

‘고백할 거야! 그 전에, 네가 먼저 인정해줬으면 좋겠고, 날 지지해주면 좋겠다.’

함길도에서 화살에 맞은 창이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백겸은 창이의 고통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말을 시켰다.

‘좋아하는 여자 얘기 좀 해봐!’

창이는 힘겨워했다.

‘....사생활...공유 싫다며?’

“당분간 공유해야겠다!”

‘어떤 여자야?’

‘...사랑스럽고...사랑스럽고...사랑스럽고...’

창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보고 싶다...’

창이가 백겸을 잡으며 말했다.

‘먼저 한양으로 가, 봄이 찾아야지!’


백겸은 이제야 창이가 왜 갑자기 군대에 갔는지 이해가 됐다.

비가 후드득 떨어지더니 금세 빗줄기가 굵어졌다. 백겸이 하늘을 보고 있는데 창이가 백겸에게 검을 휘둘렀다. 백겸은 본능적으로 날렵하게 피했다. 창이가 또다시 백겸에게 덤벼들자 백겸이 창이의 어깨를 딛고 날듯이 뛰어올랐다.

백겸은 창이를 잠시 보다가 검을 뽑아들었다.

두 사람의 첫 검술대련이었다.

백겸이 검을 거칠게 내려치자 창이의 발이 뒤로 밀렸다. 창이는 제법이라면서 피식 웃고는 날쌔게 백겸에게 달려들었다. 백겸은 창이의 빠른 검에 놀라워하다가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백겸과 창이의 대련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진검승부였다. 백겸과 창이의 검이 춤을 추듯 부딪치다가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

검을 맞댄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웃고 있었다. 그러다 백겸은 창이의 눈을 보았다. 어둠도 창이의 슬픔을 감춰주지 못했다.

백겸은 그제야 알았다. 오늘 처음으로 창이가 단진이 궁으로 잘 들어갔는지 묻지 않았다는 걸. 창이는 그곳 하얀 꽃이 날리는 들판에 왔던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단진과 향을 본 것이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을 창이를 생각하자 백겸의 마음이 저려왔다.

창이의 얼굴에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빤히 보고 있는 백겸을 창이가 기습했다. 또다시 어두운 빗속에 두 사람의 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찌나 검의 속도가 빠른지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젠 땀이 아니라 비에 흠뻑 젖은 창이는 백겸에게 계속해서 공격했고 백겸은 다 막아냈다.

도화가 우산을 쓰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백겸과 창이의 검술은 너무도 고요했고 떨어지는 빗소리는 요란했다.

도화는 동문 밖에서 백겸과 창이 모두를 보았다. 단진의 뒤를 따라 걷던 백겸의 발걸음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뒤늦게 달려온 창이의 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땅도 딛지 않고 단진에게 날아가는 것 같았다.

창이는 하얀 꽃이 나부끼는 들판을 보고는 멈춰섰다.

단진과 이향의 아름다운 광경을 창이는 차마 보지 못하고 돌아섰고 백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도화는 바람처럼 날아다니는 백겸과 창이를 보았다.

백겸과 창이가 서로 날듯이 뛰어올라 검을 부닥치고 착지했다. 서로가 돌아보았다. 백겸도 창이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이렇게 몸을 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창이가 검을 내리고 말했다.

“이걸로는 승부가 나질 않아.”

창이가 검을 던지고 백겸에게 다가갔다.

“내가 이기면 날 포기해! 내가 없어서 잠이 오지 않는다 해도 날 찾지 마. 너에게 줄 몸도 마음도 없어.”

백겸은 창이를 보았다. 이상했다. 부친 진호가 떠올랐다. 백겸은 진호의 눈으로 창이를 보았다. 단진의 짝으로 창이를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창이라면 오직 단진이만을 위해 살 것이다. 창이는 단진의 짝으로 더없이 좋은 남자였다. 똑똑하고 잘생기고 정의롭고 비열하지 않으며 치사하지 않으며 계산하지 않으며 남을 의식하지도 않으며 세태에 찌들지도 않았으며 오직 자신의 심장이 뛰는 대로 살아갈, 그런 녀석이었다. 21세기에 남은 몇 안 되는 괜찮은 녀석이었다. 백겸이 아는 남자 중에 두 번째로 멋진 남자였다.

그런 창이의 친구가 백겸이었다.

백겸은 창이의 친구로서 단진을 보았다. 창이의 짝으로 단진은 말할 것도 없이 불합격이었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모든 게 부족했고 어딜 가나 사고를 치고 다니는 사고뭉치에 평생 함께 한다면 피곤할 게 자명했다. 무엇보다. 다른 남자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오직 한 남자만을 사랑할 심장만을 가지고 있기에 안되는 일이었다.

백겸은 그 순간 결정했다. 모른 척하기로.

“또 짝사랑 얘기냐?”

“짝사랑 아니랬지!”

“남자 있는 그 유부녀 잊어.”

“내 연모를 모독하지 말랬지.”

백겸은 하는 김에 더 나갔다.

“애도 있는 거 아냐?”

“야! 서여름!”

“허공만 베지 말고 네 마음도 좀 베라. 끝내!”

창이가 눈을 부릅뜨고 덤벼들었다. 백겸은 몸을 낮추고 날쌔게 창이를 잡아 던졌다. 창이가 빗속에 나가떨어졌다. 창이가 벌떡 일어서서 백겸을 잡아 던졌다. 백겸은 얄밉게도 나가떨어지지 않고 나무를 딛고 땅에 착지했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도화는 정각의 등불 하나를 밝히고 계단에 걸터앉았다.

창이가 씨익 웃더니 백겸의 바지춤을 잡았다. 백겸은 창이가 무얼 할지 알기에 도망치려 했다.

“하지 마...”

창이가 말했다.

“우리 수준엔 이게 어울려. 우리의 진짜 승부는 지금부터야!”

창이가 백겸의 바지를 벗기려 했고 백겸은 도화를 의식하며 하지 말라고 난리를 쳤다. 최고의 검객들이 어린아이가 됐다. 백겸의 바지가 반쯤 벗겨져 엉덩이가 보이자 백겸은 기겁하며 주저앉았다. 창이는 깔깔 웃으며 더욱 붙잡고 늘어졌다.

창이의 웃음소리는 컸고 백겸의 난리치는 소리도 컸다. 백겸도 평소보다 더 크게 소리쳤고 창이도 더 크게 웃었다. 마치 마지막인 듯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백겸과 창이가 서로 지칠 때까지 뒹굴다가 하늘을 보고 누웠다. 창이는 하늘의 비를 고스란히 다 맞고 있자니 살 것 같았다. 백겸은 얼굴에 떨어지는 빗줄기가 이토록 기분 좋은 것임을 처음 알았다.

도화가 우산을 쓰고 그들을 내려다보며 술병을 흔들었다.

백겸과 창이, 도화가 후원 정각 계단에 걸터앉았다. 백겸이 위에 앉고 그 아래에 윗옷을 대충 걸친 창이와 도화가 앉아 술을 마셨다.

빈 술병이 늘어갔다.

정각 위로 나뭇잎으로 땅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제각각이었다. 백겸과 창이, 도화는 길고도 긴 하루를 보내느라 다 타고 남은 재가 되어 있었다. 모든 생각과 감정을 소진해 그저 귀만 열려 있었다. 빈속에 술까지 들어가니 노곤해지고 빗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그들은 멍하니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화가 말했다.

“소주 병째 나발 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백겸과 창이가 동시에 도화를 보았다.

창이가 말했다.

“나 심장 떨렸어...나 다시 돌아간 줄 알았잖아. 쪽 지고 전통 옷 입고 나발이 뭐냐 나발이.”

백겸이 도화를 보며 웃었다. 도화는 개의치 않고 술병을 들고 마셨다.

모두가 다시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도화가 말했다.

“소주에 새우깡.”

백겸이 말했다.

“난 맥주에 치킨.”

창이가 말했다.

“난 소주에 봄이가 만들어준 컵라면. 봄이가 젤 잘하는 요리가 컵라면이잖아. 진짜 힘든 요린데...너 그거 아냐? 봄이 사발면은 물을 못 맞춰. 꼭 컵라면이어야 돼!”

창이가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쓸쓸해 백겸과 도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백겸이 가장 먼저 감상에서 벗어났다.

“내일부터 나비문신 잡자. 그리고 빨리 집에 가자.”

도화가 잠시 있다 말했다.

“지난번에 진양과 안평이 공양왕에 대해 이야기했어. 나비문신은 고려인이 분명해.”

창이가 말했다.

“어차피 같은 놈들을 쫓고 있으니까, 진양에게 다 알려주는 건 어때? 나비문신에 대해서.”

백겸이 말했다.

“그건 위험해. 네 어깨에 있는 나비문신은 어쩌고. 그놈들이 역적이면 너도 역적으로 오해받을 수 있어.”

창이가 옷을 젖혀 나비문신을 보여주었다.

“이미 나는 역적이야.”

창이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백겸과 도화가 창이를 보았다.

그때였다. 숲속에서 사람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백겸이 일어서려하자 창이가 붙잡았다.

“아까부터 있었어. 이제 가나보네.”

“잡아야지!”

“또 올 거야. 내일 잡자.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

창이는 몸을 백겸에게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백겸은 창이를 보다가 빗속으로 눈길을 돌렸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좀 어떠하냐? 차도는 있느냐?”

“저하...아직도 열이 내리질 않는다 하옵니다.”

“좀 어떠하냐? 열은 내렸느냐?”

“예 저하....많이 좋아졌다 하옵니다. 열이 좀 있사오나 곧 나아질 거라 하옵니다.”

“날이 추운데 처소를 옮겨야겠구나.”

“저하...그건 아니 되옵니다. 소신이, 소신이 준비하겠사옵니다.”

“오늘은 좀 어떠하냐?”

“예 저하. 의녀 말이 열도 내리고 차츰 회복이 되고 있다고 하옵니다. 하루 이틀 더 쉬면 금세 좋아질 거라 하옵니다.”

“저하...밤이 깊었사옵니다.”

“오늘은 좀 어떠하냐?”

“오늘은 맥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이제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하옵니다.”

가을비는 요란하게 내렸다. 이틀을 더 내리고 나서야 비가 멈추었다.

단진은 사흘 밤낮을 꼬박 앓았다.

단진은 향과 함께 꽃이 나부끼는 들판을 걸으며 너무도 행복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처소로 돌아온 단진은 향을 떠올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일어나지 못했다.

향의 근심은 깊었고 틈이 날 때마다 단진을 찾았다. 보는 박 내관이 애가 탈 지경이었다. 요란한 비가 그치고 하늘이 쾌청해지듯 단진은 언제 아팠냐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단진이 마루에 걸터앉았다.


향과 단진이 하얀 꽃이 날리는 들판을 걸었다.

“저하...기억을 잃고 나서 처음으로 정식으로 궁 밖을 나섰습니다. 매번 저하 몰래...해서 오늘은 제 시각에 맞춰 잘 들어갈 줄 알았사옵니다...소인이 또다시 이리 저하께 누가 될 줄은 몰랐사옵니다...”

.....

“늘 저하께서 데리러 나오시게 하시고...한성부에서도 그랬고. 지난번 운종가에서도 그랬고...오늘도...소인은 어찌 이리 저하께 걱정만 안겨드리고...저하께 못난 모습만 보이는지 모르겠사옵니다...”

향이 멈춰서 단진을 보았다. 단진이 향을 보았다.

향이 고개 숙여 단진의 눈을 보았다. 향의 얼굴이 가까이 있자 단진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향이 웃으며 단진의 어깨를 살포시 잡고 몸을 돌렸다.

“자 보거라...”

단진은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핀 하얀 꽃들을 보았다.

“어떠하냐?”

“아름답사옵니다...너무도 아름다워 꿈을 꾸는 것 같사옵니다.”

“이것이 너다.”

단진이 향을 올려다보았다.

“저하...”

“걱정만 안겨준다 했느냐? 걱정도 있다. 네가 궁 밖에 나가면 걱정된다. 위험한 곳에 간 건 아닌지, 별 일은 없는지. 네가 궁 밖에 나가지 않아도 걱정된다. 밥은 먹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잠은 잘 자는지.”

.......

“허나 걱정이 전부겠느냐, 네가 내게 주는 기쁨은 이 들판과 같은 것이다.”

“저하...”


단진이 창을 열었다.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단진이 앓고 일어나니 처소에 변화가 있었다. 나무창에는 한지로 만든 문이 달려있었다. 곳곳에 있던 가마니들이 사라지고 마루에는 두터운 천이 달려있어 바람을 막아주고, 푹신한 이불이 깔려 있고 화로가 있어 따뜻했다.

단진은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웠지만 의식은 있어 모든 게 기억났다. 향이 단진의 머리맡에 앉아 이마를 짚어보고 괜찮은지를 물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밤에도 향이 단진의 곁에 있었다.

단진이 잠깐 잠깐 깨어날 때마다 향이 있었다.

단진은 아팠다. 열이 펄펄 끓어오를 때 마음 속 상처가 슬픔이 고통이 아픔이 함께 끓어올랐다. 열이 내리고 땀으로 흥건해졌다. 단진은 슬픔을 상처를 고통을 아픔을 흘려보냈다. 단진은 알고 있었다. 어떤 슬픔도 상처도 고통도 아픔도 흘려보낼 수 없다는 걸. 허나 단진은 알고 있었다. 더 단단해지면 모든 아픔을 견딜 수 있다는 걸. 또한 단진은 알고 있었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단진은 오늘을 살 것이고 내일을 살 것이기에.

단진은 서둘러 준비했다. 단진이 나인 옷을 입고 머리를 댕기로 묶고 있는데 향이 들어섰다.

아침 햇살에 향은 눈부셨다. 햇살이 들어오는 것인지 향이 들어오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단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햇살 속에서 향과 단진은 서로를 보고 있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서로는 말하고 있었고 듣고 있었다.

미안하다고...고맙다고...그리고...

향이 다가와 단진을 살폈다.

“이제 괜찮은 것이냐?”

“예 저하...송구하옵니다 저하...저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다 나았사옵니다.”

향이 단진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구나.”

향이 단진을 보았다. 단진의 눈빛 속에 있던 슬픔이 사라졌다. 슬픔이 사라지겠는가. 슬픔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토록 아팠던가 싶으니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그 슬픔이 얼마나 깊었으면 그토록 아팠을까.

아픈 단진을 홀로 두고 갈 때마다 향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갔다. 돌아가서도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저하...이제 다 나았습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저하...소인이 아직 자라질 못했나보옵니다. 아이들도 아프면서 자란다고 하질 않습니까! 소인이 부족하여 아직도 자라질 못해, 이리 아프면서 어른이 되나 봅니다. 저하...이제 다시는 아프지 않을 것이옵니다.”

단진이 햇살 같이 웃었다.

향은 웃고 있는 단진을 말없이 보았다.

향은 지켜주고 싶었다. 단진의 해맑은 미소를 지켜주고 싶었다. 허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 맑은 미소를 곁에 두고 싶었다. 이 맑은 미소가 어찌나 보고 싶었는지 이리 보고 있으니 더없이 좋았다.

향의 애틋한 눈길에 단진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향이 미소 짓고는 말했다.

“몸이 좋아질 때까지 좀 쉬도록 하거라.”

“아니옵니다 저하...다 나았사옵니다.”

단진은 잠시 있다가 말했다.

“저하...소인이 아파서 며칠 청을 하지 못하였사옵니다. 다 해도 되옵니까?”

향이 웃었다.

“무엇이든 들어주실 것이옵니까?”

“다 들어줄 것이다.”

“저하...오후에 궁 밖에 잠시 다녀와도 되겠사옵니까?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해결해야 할 일이 있사옵니다.”

향은 잠시 보다가 말했다.

“그리하도록 하거라.”

“일찍 들어오겠사옵니다.”

“늦더라도, 다 두고 오너라.”

단진이 향을 잠시 보았다.

“예 저하...그리하겠사옵니다.”

하늘의 태양이 높게 떠올랐다.

궁 밖으로 단진이 홀로 나왔다. 하얀 저고리에 하늘색 치마를 입고 쓰개치마를 팔에 걸치고 보자기에 싼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단진이 돌아보았다.

‘예 저하...다 두고 오겠습니다.’

단진이 다시 앞을 보았다. 단진의 눈빛은 단단했다.

단진이 쓰개치마를 쓰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진양이 집을 나섰다. 평소와는 다르게 한쪽에 꽃문양이 있는 녹갈색 답호를 입고 갓을 썼다. 망건의 관자와 갓의 정자와 갓끈은 은과 비취로 장식했다. 옷에 어울리는 노리개까지 갖추고 집을 나섰다. 진양의 뒤를 김가와 은가가 따랐다.

김가는 진양이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누굴 만나러 가는 건지 어딜 가는 건지 일일이 물을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궁금했다. 이토록 들뜬 진양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진양은 여러 날을 한성부에서 살다시피 하며 판관과 이야기하고 사체검시결과를 살폈다. 또한 백겸과 창이를 은밀히 미행하라고 했다. 백겸과 창이는 매일같이 도성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나비문신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러다 진양의 집 주변을 배회하다가 돌아갔다. 또한 백겸과 창이를 감시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찾아내지 못했다. 진양이 미행하는 걸 알고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진양은 백겸과 창이에게 알아낼 때가 됐다고 여겼다.

진양이 하늘을 보았다.

진양은 요즘 살아있다는 걸 매 순간 느꼈다. 대군으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이 고개 숙였지만 바람 같은 것이었다. 대군으로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진양이 향의 신하로 다시 태어났다. 하루 종일 역당의 뒤를 쫓아도 소득이 없어 성을 내기 일쑤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가슴이 뛰었다.

많은 것을 누리기만 하며 살아야 하는 대군의 삶을 살 때,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비루했다. 비단옷을 입고도 비단금침을 깔고도 초라했다.

향의 신하로 사는 지금, 매일 밤 잘했다 진양. 내일은 더 잘할 수 있다 진양. 하고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었다.

사내로 태어나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사내로 태어나 처음으로 계집에게 가슴이 뛰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진양은 살아있었다.

진양은 걷는 내내 햇살이 이토록 따스한 것인가 생각했다.

바람이 이토록 기분 좋은 것인가 생각했다.

발걸음이 이토록 가벼운 것인가 생각했다.

그 독기 가득한 눈으로 나타날 단진을 떠올리자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이토록 설레는 일인지 처음 알았다.

진양은 지금 단진을 만나기 위해 광통교로 가고 있었다.


연분홍 천들이 휘날렸다. 그 사이로 하얀 저고리에 하늘색 치마를 입은 단진이 있었다. 단진이 햇살처럼 웃고 있었다.

진양의 몸 위에 단진이 있었다.

단진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진양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진양은 파란 하늘 아래에 있는 단진을 보았다. 단진의 체온이 느껴졌다. 따뜻했다.

단진의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을 지니고 독기를 품고 바들바들 떠는 단진이 갖고 싶었다.

“내가 아니다! 네놈이 죽였다! 네놈이 죽인 것이다!”

진양이 웃자 단진은 주먹을 치켜들고 진양을 내리치려 했다. 진양이 단진의 팔목을 잡고 확 돌렸다.

진양이 단진의 위에 있었다. 진양은 단진의 양 팔을 누른 채 보고 있었다.

“이거 놔! 이거 안 놔! 이 나쁜 놈아. 이 살인자. 이거 안 놔!”

진양은 단진이 발버둥 칠수록 갖고자 하는 열망이 커져갔다.

“나를 죽일 생각은 여전히 있는 것이냐?”

“죽일 것이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허면 닷새 뒤 미시에 광통교로 나오거라. 거기서 승부를 보자꾸나! 허나 명심하거라. 밥을 먹어도 모래알 같아야 하고 물을 마셔도 그놈의 피를 마시는 기분이 돼야 할 것이다. 잠을 자서도 안 되고 이를 갈고 뼈를 가는 심정으로 나를 증오하거라. 그리고 찾아오너라. 그래야 내 옷자락 한 올이라도 건드릴 수가 있을 것이다!”

단진은 진양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양이 몸을 숙여 단진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다. 단진의 숨결이 느껴지고 입술이 닿을 듯했다. 진양은 단진이 고개를 돌릴 거라 여겼으나 단진은 움직임 없이 더욱 독을 품고 노려보았다.


광통교에 도착한 진양은 김가와 은가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했다.

진양은 양손을 맞잡고 서성였다.

처음이었다. 이토록 설레일 때가.

하늘은 맑고 쾌청하고 바람은 시원했다. 광통교 아래로 흘러가는 물줄기는 더없이 맑았다. 가을에 물들어가는 나무들이 한들한들 춤을 추었다.

처음이었다. 이토록 가슴이 뛰는 게.

진양이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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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숙원 홍씨 93. 용무용과 그들 +3 21.04.05 1,133 9 21쪽
92 숙원 홍씨 92. 이향, 양주로 향하다-3 +2 21.04.01 1,150 9 18쪽
91 숙원 홍씨 91. 이향, 양주로 향하다-2 +2 21.03.29 1,174 9 16쪽
90 숙원 홍씨 90. 이향, 양주로 향하다-1 +2 21.03.25 1,201 9 19쪽
89 숙원 홍씨 89. 비보 +2 21.03.22 1,234 9 20쪽
88 숙원 홍씨 88. 단진을 향한 이향의 마음 +2 21.03.18 1,285 9 16쪽
87 숙원 홍씨 87. 그들의 이향 +4 21.03.15 1,293 9 18쪽
86 숙원 홍씨 86. 낙엽비 +2 21.03.11 1,308 9 19쪽
85 숙원 홍씨 85. 단진, 부왕과 마주치다 +2 21.03.08 1,335 9 18쪽
84 숙원 홍씨 84. 용무용, 이향을 만나다 +5 21.02.04 1,384 10 24쪽
83 숙원 홍씨 83. 백겸, 김종서를 만나다 +3 21.02.01 1,439 10 19쪽
82 숙원 홍씨 82.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3 +2 21.01.28 1,485 10 23쪽
81 숙원 홍씨 81.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2 +3 21.01.25 1,515 10 18쪽
80 숙원 홍씨 80. 이향, 백겸과 창이를 만나다-1 +2 21.01.21 1,527 10 21쪽
79 숙원 홍씨 79. 진양, 사저로 백겸과 창이를 부르다 +2 21.01.18 1,560 10 17쪽
78 숙원 홍씨 78. 단진과 공두, 김종서 집에 들다 +3 21.01.07 1,562 9 20쪽
77 숙원 홍씨 77. 목멱산의 첫 모임 +2 21.01.04 1,584 10 14쪽
76 숙원 홍씨 76. 모두 목멱산에 오르다 +2 20.12.31 1,604 10 23쪽
75 숙원 홍씨 75. 용모파기 +2 20.12.28 1,626 10 17쪽
74 숙원 홍씨 74. 진양과 안평, 입궐하다 +3 20.12.24 1,655 10 26쪽
73 숙원 홍씨 73. 다시 돌무덤으로 +2 20.12.21 1,675 10 21쪽
72 숙원 홍씨 72. 이향의 진귀한 서책 +2 20.12.17 1,703 10 25쪽
71 숙원 홍씨 71. 단진, 육갑을 마음에서 내려놓다 +3 20.12.14 1,724 10 14쪽
» 숙원 홍씨 70. 단진의 남자들 +2 20.12.10 1,734 10 25쪽
69 숙원 홍씨 69. 향의 고백 +4 20.12.07 1,753 10 16쪽
68 숙원 홍씨 68. 이향, 단진을 기다리다 +3 20.12.03 1,783 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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