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화 붉은 왕국 사랑 시 이야기:붉은 여왕의 결심
모렐박사의 기상 천외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 붉은 여왕의 결심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나를 깨운 사람은 세바스찬이라는 소년이었다. 그는 나하고 나이가 비슷하였는데, 뭔가 어리숙해 보여도 좀 통하는 친구였다. 세바스찬과 금방 친해진 나는 그와 함께 붉은 왕국을 여행하게 되었다.
“세바스찬, 붉은 왕국에 대해서 뭐 좀 아니?”
“글쎄, 소문을 듣기로는 이 왕국을 다스리는 붉은 여왕의 성격이 장난이 아니라던데!”
“그래? 어떻게?”
“잘은 모르겠지만, 듣기로는 아직 독신이어서 무척 히스테리가 심하다더라!”
“하하! 그런 사정이 있었군!”
“하지만 웃어넘기기에는 그 히스테리의 정도가 엄청나데.”
“독신녀의 히스테리라……!”
세바스찬과 붉은 왕국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형형색색의 장미 잎들로 덮어지더니 어디선가 칼과 방패가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세바스찬, 저게 무슨 소리지? 누가 싸우고 있나 봐!”
“저쪽을 봐! 저기 저 원형 경기장에서 나는 소리 같아.”
세바스찬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그곳에는 마치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 같이 보이는 큰 경기장이 있었다.
“무슨 검투사 시합이라도 있나 봐. 어서 가보자! 세바스찬.”
호기심에 우리는 그 경기장으로 한달음에 뛰어갔는데 다행히 입장료는 없었다. 경기장 안에는 마치 축제라도 벌어지는 듯 엄청난 양의 장미 잎이 휘날리고, 수십 명의 삐에로들이 신나게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흥을 돋우고 있었다.
“오늘은 붉은 여왕님의 생일입니다. 모두 들 질서를 지켜 주세요! 잠시 후 경기를 하기 위해 장미의 기사들이 입장하겠습니다. 오늘 경기에 이기는 기사는 영광스럽게도 붉은 여왕님께 청혼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모두들 기사들이 나오면 열성적으로 환호해 주세요!”
장내 사회자가 큰 소리로 말하자 경기장 안에는 큰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경기장 중앙으로 여러 명의 기사가 등장하자,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평상시에 내가 생각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상시에 나는 기사들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기사들의 모습이란 은백색의 화려한 장미문양 갑옷과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방패 그리고 반짝이는 황금 투구와 성스러운 검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마를 타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입장하는 기사들의 모습은 나의 이러한 막연한 동경을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그들은 끈으로 된 팬티 한 장만 달랑 걸치고 등장한 것이었다.
‘끙! 이럴 수가!’
나는 몹시 당혹스러워졌지만, 어쨌든 잠시 후 기사들의 경기가 진행되었다. 경기방식 무척 낯설었는데 어떤 한 기사가 갸우뚱거리며 한쪽 다리를 옆으로 높이 들어 올리면, 상대편 기사도 같은 방식으로 갸우뚱거리며 한쪽 다리를 옆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맨 처음 다리를 올렸던 기사가 다시 갸우뚱거리며 올린 다리를 내려놓으면, 상대편 기사도 곧 갸우뚱거리며 다리를 내려놓는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양쪽 다리를 올렸다가 내려놓으면 비로소 게임의 시작 준비가 된 것이다. 본 경기는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로 시작되는데,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면 기사들은 서로를 향해 ‘우가! 우가!’라고 외치며 상대를 향해 돌진하여 상대편을 밀어내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생소한 경기방식 때문에 지루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기가 너무나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어서, 나는 보는 내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러야 했다. 그렇게 한 참 경기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뿔고둥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경기가 중단되었다. 그리고 곧 네 마리의 코끼리가 끄는 화려한 마차가 나타났다.
“세바스찬, 저 화려한 마차엔 누가 타고 있을까?”
“아무래도 붉은 여왕이 아닐까?”
세바스찬의 말대로 마차에는 붉은 여왕이 타고 있었다. 붉은 여왕의 모습은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가 힘들었지만 대략 설명하자면 아름답기도 하면서 동시에 추하기도 하였고, 마르기도 하였지만 어떻게 보면 통통해 보이기도 하였다. 또 얼굴 또한 어떻게 보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떻게 보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기묘한 모습이군!”
“그래, 나도 저렇게 생긴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세바스찬이 말하였다.
잠시 후 붉은 여왕은 마차에서 내리더니 단상에 올라가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그대, 붉은 왕국의 기사들이여! 내가 붉은 왕국에 즉위한 지도 오늘로써 벌써 십 년이 지났도다. 그간 수많은 장미의 기사들이 짐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아직도 진실한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투에서 승리한 기사들은 한결같이 짐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지만, 그 고백은 그저 허무맹랑한 기사담일 뿐이었다. 그대, 장미의 기사들이여!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도다. 그래서 이제 명령하노니 모두 싸움을 멈추어라!”
그 말에 갑자기 경기장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다가 갑자기 곳곳에서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만세! 만세! 붉은 여왕 폐하 만세!”
여왕의 선언에 모든 장미의 기사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진정한 자유를 얻은 모습이었다. 곧 여왕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기사들이여! 하지만 나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왕국과 그대들이 존재하는 이유니까. 바야흐로 우리 붉은 왕국은 새롭게 거듭나는 시기를 맞고 있도다!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나듯이 나 또한 그대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노라! 이제부터 모든 기사들은 짐을 위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기사에게 짐은 영광을 허락하겠노라! 그 영광이란 나에게 청혼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 말에 갑자기 경기장 안은 미리 준비한 걸로 보이는 폭죽들이 일제히 터졌다. 여왕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분명히 지금 그대들은 나의 영광스러운 명령에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영광스러운 명령을 받들어 온몸이 떨리고 영혼이 떨리겠지만, 모두 최선을 다해서 이야기를 준비해 오길 바란다. 하지만 거짓된 이야기나, 터무니없는 이야기 혹은 짐을 우롱하는 이야기를 하는 기사들은 그 응당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응당한 벌이란 그대들의 심장을 갈라 짚으로 채운 후 영원히 어릿광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모두 이 말을 가슴속 깊이 명심하길 바란다!”붉은 여왕이 발언이 끝나자 모든 기사들의 얼굴은 낯빛처럼 검붉게 변했다.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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