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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천국 님의 서재입니다.

무림을 씹어먹는 특전사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전쟁·밀리터리

나의천국
작품등록일 :
2023.12.11 05:56
최근연재일 :
2024.01.02 11:25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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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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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8,657

작성
23.12.12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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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5

DUMMY

다시 시작되는 삶.

나는 하나부터 천천히 배워나갔다.


이곳의 말과 글을.

이곳의 문화와 여러 관계들을.


외국어는 외국에 살아보면 저절로 배워진다는 말이 몸소 느껴졌다. 하루종일 듣고 보는게 이들의 말이고, 몸소 겪는게 이들의 문화이다 보니 학습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곳도 그저, 하나의 목숨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세계였다.


무학을 중시하고, 의를 중시하며-

부당한 위협 앞에선 맹렬히 맞서는 사람들의.


그리고 내겐 시간이 많았다.

나는 딱히 하는 일이 없었고, 따라서 하루하루가 지난 인생에서 이어진 휴가같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뭇잎을 흩날리는 당산나무와,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별들의 향연을 보며-


새삼스럽게도.

나의 지난 생이 얼마나 각박한 것이었는지를 깨닳게되는.


나는 자주 세가 내의 정자에 앉아 이곳의 땅과 하늘을 음미하곤 했다.


그리고.

친구가 있었다.


“여어~ 강공자!”


정자에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고있던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세가의 정무관 방향으로부터, 술상을 들고서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재양이었다.

워낙 키가 작은 녀석이 상을 들고 오니, 술상이 더 푸짐해보였다.


“오늘도 술잔 하나 없이 청승인가.”

“하하. 그러게.”

"거참 같이 매월관에 한번 가자니까 빼기만하고... 날더러 이리 직접 술상을 들고 오게 만드시나."


매월관은 재양이 자주간다는 주점이다.

내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짓는데, 재양은 내 옆에 앉으며 술상을 내려놓았다.

일전의 상처를 다 치료하고난 재양은, 무척이나 성격이 밝았다.


녀석은 내 잔에 곡주를 따르며 말했다.


“요즘, 장서각에 자주 드나든다곤 들었네.”

“약선 어르신이 그러시던가?”

“응... 무슨 책이 그리 재미나던가.”


나는 그가 채운 곡주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재미로 읽는다기 보단, 이것 저것 배운다는 느낌으로 보고 있네.”

“오호.”

“최근에 읽은 책은, 이곳 혁련세가와 관련된 것이었네.”


재양은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무슨 책이었는데?”

“산석경의 일대기.”

“산석경? 우리 가문, 초대 장문인 말인가?”

“응.”


500년 전-

산석경은 권각술의 독자적인 무학을 완성한 자였다.

그리고 이곳 혁력세가는 그런 산석경의 무학을 계승해온 세가였다.


무려 500년 동안.

온갖 검술과 암기가 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세계에서, 오로지 맨 몸의 격투술을 연마하는 세가.


그 장구한 기간을 생각해보면 조금 숙연해지고 만다.

내가 알기론, 조선왕조의 역사가 500년이니까.

혁련 세가는, 그 외관만큼이나 긴 역사를 가진 가문이었던 것이다.


“그래. 읽고 무슨 생각이 들던가.”

“음··· 나는 앞으로 무얼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

“심오하구만··· 그래. 뭘 하고 싶은데?”


난 재양의 잔에 술을 부었다.

이곳에 머무르며, 재양에게만큼은 이미 내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털어놓은 상태였다.


무혼을 쓰러뜨렸던 그 총이라는 무기에 대해.

다른 세계, 다른 시대에서 군인으로 살았던 것과, 그 마지막에 대해.

그리고 이 세계에서 다시 부활하게 된 것에 대해.


녀석은 2번째 삶이라는 것에 신기해했지만, 나의 이야기를 지어낸 말로 호도하진 않았다.

나는 재양이 잔을 비우길 기다렸다가 말했다.


“나는 전생에, 시시한 삶을 살았어.”

“시시한 삶이라···”


이에 재양은 가만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동의할 수 없네.”

“...동의를 못하다니?”

“글쎄··· 자네가 말하는 시시함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넨 노력하는 삶을 살았을거야.”

“뭘 봐서?”

“자네의 외공.”


이 세계는 확실히 무(武)의 세계이다.

재양은 묵직한 근육이 자리잡은 내 팔뚝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무리 체격이 타고났다하더라도, 이런 몸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걸세··· 난 자네가 필시 노력하는 자였을거라고 확신하는 바네.”

“그러신가.”


우습다.

녀석의 말에서, 이상하게 위로받는 것이.


나는 연못 위에서 하늘거리는 달빛을 말없이 감상하다가 다시 잔을 꺾었다.

그리곤 덧붙였다.


"어쨌건, 이번엔 시시하진 않은 삶을 살아보고싶네."

“시시하지 않은 삶이라..."


나의 속도로에 맞춰 마주 잔을 꺾은 재양은,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런 목표라면, 우리 세가의 무학도 한번 체험해보는게 어떤가?”

“무학?”

“그래, 무학···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혁련세가의 무학이 그리 시시한 것만은 아닐걸세.”


쓰게 웃고 만다.


“무학이라···”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지 않나? 반대로 자네는, 자네의 무학을 내게 알려주는 거지··· 두 세계의 무학을 다 익혀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 같은데.”

“글쎄···”

“마침, 내일 세가에서 무투회가 열려. 참전까진 아니더라도 관전 정도는 해보시게.”

"···지금 보니 너, 그 말을 하려고 술판을 벌린거군."

"하핫, 들켰나···. 악의는 없었네."


물론 악의야 없었겠지.

나에 대해서 잘 몰랐을 뿐.


무학이던 무술이건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기술이다.

지난 삶에서 아주 지겹게 익히고 배웠던 것.


하지만 대놓고 거절하기엔 살짝 마음에 걸렸다.

객식구라는 나의 입장과 유달리 초롱이는 재양의 표정이.


난 힘없이 말했다.


“생각해보겠네.”


재양은 다시 내 잔을 채우더니, 나와 마찬가지로 당산나무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잠시 말없이 있자, 재양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공자.”

“응?”

“질문하나 해도 되나?”

“뭔데?”

“아까부터, 왜 자꾸 선아 쪽을 바라보는 거지?”

“...선아?”

“저기 당산나무 앞에 있는 여자애 말야.”


알고보니 보니 정자의 기둥에 시야가 딱 가리는 각도에, 재양이 말한 여자애가 있었다.

무복을 입은 채로, 당산나무를 향해 합장을 하고 있는 여자애가.


녀석은 한차례 헛기침을 하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선아··· 좀 묘한 아이긴 해.”


이어서 녀석은 내가 묻지도 않은 걸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너도 보시다시피 여자애고, 17살이고, 작년에 혁련세가에서 거둬드린 여종이야. 신기(神氣)가 있는 아이이기도 하지.”

“음··· 신기?”

“응··· 세가 내에선 저 애에게 관상같은 걸 봐달라는 이들도 있어.”


나는 ‘그런가’ 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는데, 난 저 여자애를 보는게 아니라, 당산나무를 바라봤었어.”

“당산나무? 왜?”

“만약 내가 저기에 소원을 빈다면, 어떤 소원을 빌어야하나 싶어서.”


재양이 언급한 덕분에 나도 그 선아라는 소녀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어찌나 미동이 없는지, 얼핏보면 굳어있는 석고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달빛에 물든 긴 머리카락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있었고, 복숭아뼈까지 내려오는 치맛단은 바람에 하늘거리며 잔디 끝을 살짝 쓸어대고 있었다.


재양이 ‘신기’가 있다고 한 탓에, 조금 신비롭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전의 삶에서도 난, 종종 무당을 찾아가곤 했었다.

주로 위험한 임무를 앞둔 시점에서.

그리고 내가본 점들은 대체로 잘 맞는 편이었다.


내가 본 마지막 점이, '낙상(落喪)을 조심하라' 였던가.


“강공자, ···정말 당산나무 바라보는거 맞아?”

“응?”

“뭐, 그대가 정 그런거라고 하면, 나도 그런 거로 해주고.”


엥?

어조가 좀 이상해 재양이 녀석 쪽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조금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


이런 저런 잡담 끝으로 술을 다 마신 녀석과 나는 자리를 파했다.

재양도 죽자고 마시려드는 성격은 아니라서, 남은 술 한 병은 내게 챙겨가라고 했다.


“혼자서 한잔 하고 싶을 때가 생길지도 모르잖나.”

“사양 안하겠네.”


재양은 손을 흔들어보이며 정자를 떠났다.

마음 씀씀이가 고운 녀석이다.

취기도 있고 해서, 왠지 잠이 잘올 것 같은 밤이었다.


나는 접객관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 발길이 닿은 곳은, 평소처럼 세가의 옥이었다.

세가의 옥은 연못 옆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항상 늦은 시간에만 면회를 허락한다.


옥지기는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강공자님. 오늘도 오셨군요.”


그리 밝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응··· 여전히 면회는 불허인가?”

“무혼 말씀인거죠?”

“응.”


횃불에 비친 옥지기의 얼굴엔 민망함이 스쳤다.

그가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을 보고, 나는 차분하게 물었다.


“이런게 원래 자주있는 일인가?”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죄수의 면회가 거절되는 일 말일세.”


옥지기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나, 죄인이 죄인인지라 그런 것 같습니다.”

"흐음..."

"저도 위에서 내려온 명령인지라, 잘은..."


나 역시 군대에 오래 몸을 담아봤기에 조직의 구조에 대해선 안다.

세가에서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명령권자는 재양이나 조견 정도.


내가 면회를 희망한다는 것은 분명 두 사람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

이에 끝내 면회가 거부되는 것은, 그만큼 이 자에 대한 면회가 민감한 사항이라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그간 친분이 쌓인 재양에게 직접 면회를 부탁한다면 그 허락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는 것은, 손님이라는 나의 처지 때문이다. 상대가 민감해하는 사항을 부탁하는 것은, 좋은 손님의 태도가 아니다.


나는 잠시 바닥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 무혼이라는 자는, 대체 어떤 죄를 저질러 왔던 것인가.”

“다양하지요··· 그는 암영문 내에서도 고급 살수였습니다... 주로 명망있는 정파가문의 자제를 상대로 암살을 시행해왔지요.”


조견과 재양이 가졌을 적개심이 어느정도는 이해되는 바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옥지기를 괜히 곤란하게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알겠네··· 매번 이렇게 찾아와 묻는 것도 그러하니, 혹 면회가 허락되는 날이 온다면 내게 알려주겠나?”

“네. 그렇게하겠습니다.”


나는 목례를 하곤 등을 돌렸다.

접객관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며 자문해 보았다.


‘나는 왜, 잠깐 만났을 뿐인 그 무혼이라는 자에게 집착하는가.’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안다.

그 흐름이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방금 옥지기에게 들은 대화로 더욱 확실해졌다.

무혼은 말 그대로 정파 가문의 공적 같은 존재.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그런 이의 신변을 손수 넘겨준 자가 된다.

그런 나에게까지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그럴듯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접객관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씻고 자려고 나무욕조에 몸을 담았는데, ‘똑똑-’ 하고 누군가 욕조문을 노크했다. 어차피 이 시간에 내가 머무는 객실을 직접 찾아오는 것은 재양 정도다.


‘그 녀석, 술이 좀 부족했나?’


나는 욕조를 나와 수건으로 몸을 대충 가리며 말했다.


“들어와··· 재양이냐?”

“아니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깜짝 놀랐다.

재양의 목소리가 아닌, 앳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당황한 내가 ‘몸을 좀 덜 가렸나’ 하고 확인하는데 문이 스르르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 정자에서 봤던 여자애가 서 있었다.


그 이름이, 선아랬던가?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며 말했다.


“늦은 시간에, 강철호 공자님을 뵙습니다.

“...어?”


초면인데, 내 이름을 아네?


곧 나는, 내가 이곳의 유명인임을 떠올렸다.

어느날 갑자기-

세가 독문의 수련동굴에 나타나, 암영문의 자객에게 쫓기던 막내 도련님을 구해준 남자.

나는 이 암영문의 자객, ‘무혼’을 쓰러뜨런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제성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눈 앞의 아이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본 세가에서 일하는, 선아라고 하옵니다.”


으음.

전생에 남중 남고를 나와 군대로 직행했던 나다.

그런 고로 여자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당황한 티가 나지 않게 애쓰며 말했다.


“그··· 그런데요?”

“강 공자님. 말씀 편히 하소서···”


그녀가 이 세가의 몸종인 걸 차치하더라도, 내가 그녀보다 연배가 높긴 하다.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한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맑아보이는 소녀였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재양 도련님으로부터, 강철호 공자님을 뫼시라고 명 받았사옵니다.”

“에? ···언제?”

“방금 전에요.”


아.


술자리의 마지막 쯔음을 떠올려보고서야 난 그 자초지종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녀석 딴에는, 신경을 써준다고 취한 조치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넘겨집기로 말이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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