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멧돼지 소동
마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속력은 달릴수록 더더욱 빨라져서 어느새 유신이 버닝하트를 업고 열심히 달려왔던 평탄한 길을 지나 바가반과 사투를 벌였던 바위 숲에 이르렀다.
“마침 여기 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승태 너는 무슨 일을 생각하고 저지르기보다는 일단 저지르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다행히 저번엔 운이 좋았지만, 네가 계속해서 그렇게 행동하다가는 너의 치기 어린 행동 때문에 일행 전부가 위기에 빠지게 될 거야.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
“무슨 행동을 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지. 네 네 알겠습니다.”
버닝하트가 재민의 말을 중간에 가로챘다. 본능적으로 재민이의 잔소리가 시작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승태 너는 어찌하여 친구의 말을 함부로 끊는 것이냐? 그게 다 승태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임을 승태 너는 정녕 모른단 말이더냐? 물론 이미 내가 알아듣게 잘 설명해둔 것을 재민이가 다시 말을 해 지루한 것은 알겠으나, 원래 그런 말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부족함이 없는 법이다.”
유신이 시무룩하는 재민을 거들어 버닝하트를 핀잔했다. 하지만 버닝하트는 유신이 그러든 말든 듣는 둥 마는 둥 헤헤하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결국, 유신은 가볍게 내쉬고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마차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어느새 하늘에는 서서히 아름다운 붉은 노을이 수놓아졌다. 이는 이제 곧 해가 진다는 소리였다. 잠시 말고삐를 버닝하트에게 맡기고 휴식을 취하던 유신은 버닝하트를 불러 다시 자리를 바꾸어 말고삐를 잡았다. 해가 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말을 몰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말을 달린 끝에 마차는 바위 숲을 지나 비교적 평탄한 공터에 이르렀다. 그 공터를 한 시간정도 더 달리자 저 멀리서 울창한 숲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차를 더 달려 숲에 도착했다. 그 숲은 아름다운 가로수 길이었다. 바닥에 깔린 흙길은 마치 갈색 융단처럼 평탄했고, 양옆으로는 침엽수들이 울창하게 퍼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야영을 해야 할 것 같다.”
유신이 마차를 멈추며 그리 말했다. 날이 지금보다 더 어두워지면 천막을 치기 힘들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버닝하트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안 그래도 계속해서 마차에 앉아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그는 작정이라도 한 듯 숲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이야, 나무들이 모두 장난 아니게 큰데?’
그가 숲에 있는 나무들을 훑어보며 생각했다. 지금 날이 갑자기 어둑해진 이유도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들이 나뭇잎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떤 나무들은 정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줄기가 굵었다. 그 뒤에 서너 사람이 숨어도 충분할 것처럼 보였다.
“승태야. 이제 구경 그만하고 이곳에 오거라.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천막을 쳐야하지 않겠느냐?”
막 아리엘을 위해 마차 짐칸에 이부자리를 핀 유신이 버닝하트를 소리쳐 불렀다.
“네. 갈게요.”
유신과 버닝하트는 본격적으로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재민은 숲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땔감을 모았다. 오래지 않아 천막이 완성됐다. 재민도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며 땔감이 될 만한 잔가지를 많이 모아왔다. 버닝하트는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았다.
“와, 멋지다!”
버닝하트가 탄성을 내질렀다. 맹세컨대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렇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보고 있는 밤하늘은 그가 살며 수없이 보아왔던 서울 하늘과는 많이 달랐다. 단순히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별들이 서울 하늘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고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승태 너는 병상에 누워있느라 이 아름다운 광경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겠구나.”
유신이었다. 그는 그동안 버닝하트를 저녁 이후에는 숙소에 문밖에도 못 나가게 하였었다. 환자의 절대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유였다. 물론 말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이것 역시 버닝하트의 인내심을 길러주기 위한 훈련의 연장선이었다. 다행히 버닝하트도 그런 그의 뜻을 알았는지 순순히 그의 말을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펄쩍 뛰며 몰래라도 나갔을 버닝하트지만, 이번엔 지은 죄가 있는지라 그도 순순히 유신의 말을 따른 것이다. 그가 오늘에야 이곳의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승태 네가 왜 감탄했는지 알고 있다. 너는 아마 서울 하늘에서 보던 별들보다 이곳의 별들이 커 보인다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그것은 단순한 눈의 착각이다. 생각해 보면 서울 하늘에서 바라보는 밤하늘과 강원도 산골에서 보는 밤하늘도 다르지 않으냐. 이곳은 그 강원도 산골보다도 오염이 되지 않은 곳이니 네가 그리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 언젠가는 이곳도 서울의 밤하늘처럼 될까요?”
버닝하트가 물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도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서울의 밤하늘처럼 된다고 생각하니 괜히 씁쓸해졌던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시간이 지나면 이 세계도 조금씩 과학에 눈을 뜨게 될 것이고, 그 과학의 발달은 결국 환경오염을 야기시킬 테니 말이다. 허나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할 게다. 짧은 인생을 살다가는 우리네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그런 긴 세월 말이다.”
유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산업혁명 이전의 그들의 선조들은 다들 이런 밤하늘을 보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 발전이라는 핑계로 벌어진 여러 가지 대기 오염물질들이 우리의 시야를 가려 더는 이와 같은 장관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버닝하트는 이곳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쉿 조용히 해라.”
그때 유신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낮은 목소리로 버닝하트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그는 그러면서 천천히 천막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뭔가 이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숲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였다. 그 발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졌다. 점점 더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사람인가? 아니다. 그러기엔 발소리가 너무 크고 불규칙적이다. 즉 이는 들짐승의 발소리라는 뜻이다. 이윽고 발소리가 멎었다. 그러더니 이내 쿵쿵 하는 발 구르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버닝하트는 자세를 낮추고 숨을 죽였다. 재빠르게 몸을 날려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순간, 드디어 수풀을 헤치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하늘을 향해 반달모양으로 자라난 어금니였다. 몸길이가 2m는 족히 돼 보였고 털빛은 흑갈색이었다. 버닝하트는 이 반갑지 않은 손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멧돼지. 멧돼지였다.
“멧돼지라. 이거 미치겠구먼. 그래 좋다 와라.”
버닝하트가 씩 미소를 지으며 멧돼지를 도발했다. 납작한 돼지코를 실룩거리며 버닝하트를 노려보고 있던 그 멧돼지는 버닝하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괴성을 지르며 버닝하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버닝하트도 몸을 오른쪽으로 날렸다. 그는 공중에서 몸을 둥그렇게 말아 구르며 안전하게 착지했다. 회전낙법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멧돼지를 보았다. 왠지 더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멧돼지가 다시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가 짐승의 말을 할 줄 아는 건 아니지만, 왠지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 낭팬데?’
지금 현재 버닝하트의 엉덩이는 땅에 닿아있었고 두 손은 그 엉덩이 뒤에 놓여있었다. 조금 전엔 자세를 낮추고 미리 준비하였기에 멧돼지의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지만, 이런 자세로는 어림도 없었다. 만약 이대로 저 어금니에 얻어맞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간단한 부상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거 재민이에게 또 한소리 무지하게 듣겠구먼.’
눈을 감을까 생각했지만 감지 않았다. 그러면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멧돼지의 어금니가 몸에 부딪히는 그 순간까지 노려볼 생각이었다. 멧돼지가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버닝하트는 그런 멧돼지를 힘을 주어 노려보았다. 행여 겁에 질려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멧돼지가 점점 가까워졌다. 커다란 돼지의 어금니가 버닝하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대로 끝인가?
바로 그때였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멧돼지가 꽥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어금니가 막 버닝하트의 몸을 들이받기 직전이었다. 말 그대로 부딪히기 직전에 균형을 잃으며 스쳐 지나나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옆으로 지나간 멧돼지를 보니 몸통에 큼지막한 화살이 박혀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여러 대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와 돼지의 머리와 옆구리 그리고 심장을 꿰뚫었다. 이 솜씨는 분명 유신이었다. 고개를 들어 화살이 날아온 쪽을 바라보니 역시 유신이 각궁을 들고 우둑하니 서 있었다.
“아슬아슬했다. 너무 늦어 미안하구나.”
유신이 천천히 다가와 그를 일으켰다. 유신은 정말로 미안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버닝하트는 그런 유신을 보며 뭐가 즐거운지 헤헤하며 해맑게 웃었다.
“괜찮아요. 스릴 있고 좋은데요 뭐. 그나저나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이제 저기 먹을 게 생겼네요?”
그의 목소리에는 전혀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저히 방금 죽을 위기를 벗어난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아주 긴장을 안 할 수는 없었던 것이리라. 유신은 그 땀을 모른 채 해주었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먹을 것이 생겼구나. 내 안 그래도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네가 누워있는 일주일 동안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일을 배웠다. 내 너에게도 가르쳐 줄 터이니 어서 가서 가죽을 벗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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