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사기꾼 34화
<※본 글은 소설이며 단체명이나 이름 등은 사실이 아닙니다. 작가의 상상에 의한 순수 창작물입니다.>
필드의 사기꾼 34화
세월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빠르고, 흐르는 물, 주위를 부유하는 공기와 같아 손으로 잡을 수가 없다.
세월의 힘은 어린 아이를 청년으로, 사내를 중년으로 만들어 버렸다.
“잘 가. 아들.”
이제는 자신보다 훨씬 커 버린 민선을 올려다본다.
“우리 아들이 벌써 이렇게 컸네.”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잘 먹는데.”
“내년 부터는 드디어 프로 리그 입성인가?”
민선이 씨익 웃는다.
이탈리아와 한국을 오가며 겨울 방학을 보낸 것이 벌써 여덟 번째다.
한국 나이로는 열아홉 살이고 이탈리아 나이로는 열여덟 살이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이탈리아는 한국과는 달리 고등학교 2학년까지가 의무교육이다.
계속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은 3년간 더 학교를 다닐 수가 있다.
하지만 중학교 때부터 학문 위주의 학교가 아닌 직업전문 학교를 다녔기에 축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 할 수가 있었다.
민선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피렌체 유소년 클럽을 떠났다.
지금 머물고 있는 지역은 피렌체가 아닌 바레세였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던 열여섯 살부터 이탈리아 2부 리그 세리에 B팀인 AS 바레세 1910(이하 바레세)에서 함께 훈련을 했다.
바레세는 밀라노의 북쪽에 위치한 도시 바레세에 연고를 둔 팀으로 인터 밀란의 영향력이 강한 팀이기도 하다.
민선이 바레세로 둥지를 옮긴 이유는 인터 밀란의 코치이자 안영우의 친구인 하이드넌 오셀로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인터 밀란의 영향력하에 있는 바레세에 소속이 되어 있어야 이후 민선의 이적에 힘을 쓰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바레세의 선수들은 인터 밀란의 1군, 2군 선수들과 수시로 친선 경기를 펼치며 친목을 다지고 있다.
그리고 바레세 출신의 선수들이 인터 밀란으로 이적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내년에는 못 오겠네?”
“모르지.”
“비시즌이라고 해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장거리 여행으로 컨디션 조절 실패하고 그러면 안 돼. 감독 눈 밖에 나서 좋을 게 없으니까.”
선수 생활을 했던 윤석이기에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서운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빠가 이탈리아로 오면 되지.”
민선의 말에 윤석이 피식 웃는다. 한국 나이로 열아홉 살이 되었음에도 아직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민선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타지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정 붙일 곳이 없어 그런 것이리라.
“아빠 바빠.”
“거짓말 치고 있네. 기성 삼촌이 제발 좀 이탈리아로 떠나라고 매일 노래를 한다며?”
“누가 그래?”
“나도 다 알고 있거든. 그러지 말고 이탈리아로 오면 안 돼? 나하고 같이 살자.”
“여기서 할 일이 많아.”
민선이 이탈리아에서 축구를 배울 수 있는 것도 모두 김기성의 덕이다.
안영우가 민선을 케어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김기성이 아니었다면 안영우가 민선을 만날 일도 없었다.
그렇기에 윤석은 어떻게라도 김기성에게 도움이 되려 노력을 하고 있다.
꽤 많은 선수를 발굴해 유성 코퍼레이션과 계약을 맺게 하였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갈게.”
“약속이다. 꼭 와야 해.”
“당연하지. 아빠는 약속한 것은 꼭 지켜.”
“술 안 먹겠다는 약속 빼고?”
“큭!”
윤석이 장난스레 가슴을 잡고 비틀거린다.
민선의 빈자리에 외로움을 느낄 때면 술을 벗하다 보니 이제는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
민선 역시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술을 그만 마시라는 잔소리는 할망정 싫은 소리는 하지 않는다.
“비행기 시간 다 됐다. 어서 들어가.”
“아빠 먼저 가. 어차피 체크인 해도 안에 들어가서 한참 기다려야 하는걸.”
“알았어. 잘 가고. 도착하면 전화해.”
민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윤석을 보며 민선이 크게 외친다.
“밥 잘 먹어.”
“너나 잘 먹어.”
윤석이 손을 흔들며 웃고는 멀어져 간다.
***
이탈리아 밀라노말펜사 국제공항.
“왔어? 제 시간에 온 것을 보니 비행기가 막히지 않았나 보구나.”
“선생님, 그 재미 없는 유머는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펍에서 웨이트리스가 한 번 웃어줬다고 계속 하시는데…… 진짜, 정말 안 재밌어요.”
안영우가 머쓱한 듯 딴청을 피운다.
“선배는 잘 보고 왔어?”
“네, 유익한 시간 보내고 왔습니다.”
“잘했네. 숀이 너 언제 오냐고 매일 전화했어.”
“감독님이요?”
숀 브라운.
46살의 영국 국적은 가진 감독으로 바레세의 사령탑을 맡고 있는 사내다.
“드디어 내년부터 네가 합류를 하게 되니 몸이 달아올랐겠지. 어때? 잘할 수 있겠어?”
“저를 아직 그렇게 모르세요?”
“어쭈, 많이 거만해졌는데?”
“항상 스스로 최고라는 마인드를 가지라고 가르치신 분은 선생님이십니다.”
“하하,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어서 가자. 에밀리아가 너 온다고 아주 만찬을 준비하고 있다.”
오랜만에 에밀리아의 요리를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이는 것 같다.
수년에 걸쳐 민선을 위해 요리를 해온 에밀리아였기에 누구보다 민선의 입맛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가족처럼 느껴지는 에밀리아를 떠올린 민선이 환한 미소를 짓는다.
“앞으로 훈련 강도가 강해질 거야.”
“바라던 바예요.”
바레세 집에 도착한 민선이 짐을 풀었다. 캐리어를 열자 옷가지는 몇 개 되지 않고 죄다 몸에 좋은 먹거리들뿐이다. 윤석의 아들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잘 나왔네.”
작은 액자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둔다. 책상 위에는 이미 많은 액자들이 있다.
매 해 방학 때마다 한국에 가서 윤석과 함께 찍은 사진들과 피렌체 유소년 클럽 동료들과 찍은 사진들, 그리고 바레세와 인터 밀란 선수들과 찍은 사진들이 담긴 액자들이다.
책상의 한쪽에는 축구공이 하나 놓여 있다. 공에는 멋들어진 글씨로 사인이 되어 있다.
펠릭스 바디.
최고의 축구 명문 구단을 꼽을 때 항상 가장 먼저 거론이 되는 스페인의 축구 클럽 FC 바로셀로나가 작년 챔피언스 리그를 치루기 위해 이탈리아에 왔었다.
상대는 인터 밀란이었다. 그때 민선은 안영우와 함께 경기를 관람했다.
민선은 그날 바로셀로나의 환상적인 플레이에 감탄을 했다.
매 순간마다 감탄을 하고 놀라는 민선을 보며 안영우가 깜짝 이벤트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경기가 끝난 후 바로셀로나의 로커에 방문을 한 것이다.
안영우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었기에 로커를 지키고 있던 스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몇몇 선수를 만날 수가 있었다.
펠릭스 바디는 그때 만난 선수였다.
바로셀로나의 주전 공격수이자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찬사를 듣고 있는 환상적인 스트라이커가 펠릭스 바디다.
안영우는 영국 리그에서 뛸 때 펠릭스 바디와 인연이 있었다.
당시에는 펠릭스 바디가 이제 막 1부 리그에 계약을 한 루키에 불과했다.
출장이 보장이 되는 역대급 슈퍼 루키도 아니었고 그저 그렇고 그런 루키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안영우는 감독과 코치들도 발견을 하지 못한 펠릭스 바디의 재능을 발견했다.
위치 선점과 골문 앞에서의 환상적인 플레이, 그리고 동료들의 마음을 읽는 재치까지 두루 겸비를 한 이가 펠릭스 바디였다.
다만 그 재능들이 개화를 하지 못했을 뿐이다.
안영우는 감독에게 건의를 하여 펠릭스 바디를 약체 팀과의 경기 때 가끔 선발 출장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당시 안영우의 팀 내 인지도가 상당했기에 감독은 어렵지 않게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때부터 펠릭스 바디의 재능이 서서히 개화가 되었다.
플레이 메이커인 안영우의 환상적인 패스를 놓치지 않고 골로 연결시키며 감독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한 것이다.
안영우가 은퇴를 결정한 순간 가장 마음 아파했던 이가 감독이 아닌 펠릭스 바디였다고 한다.
펠릭스 바디는 안영우가 은퇴를 한 후 더 이상 팀에 남아 있을 의미가 없다며 스페인의 바로셀로나로 이적을 하게 되었고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되었다.
그날 민선은 펠릭스 바디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사인 볼을 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펠릭스 바디는 민선이 안영우가 키우는 제자이고 자신과 같은 포지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회가 되면 꼭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노하우를 전수해 주겠다고 했다.
펠릭스 바디의 사인 볼을 보는 민선이 흐뭇하게 웃는다.
이 공은 그냥 공이 아니다. 당시 인터 밀란과 8강을 치룬 바로셀로나의 펠릭스 바디가 해트트릭을 이룩하며 받은 공에 사인을 해준 것이다.
전 세계의 수많은 축구 팬 중 이런 의미를 가진 사인 볼을 가진 이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펠릭스 바디는 헤어지기 전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일 중 하나가 영우와 상대팀으로 만나지 못해 유니폼 교환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안영우를 지극히 높이 평가하는 펠릭스 바디였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에밀리아 특유의 톤이 높은 목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진다.
“식사 시간이에요. 모두 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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