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사기꾼 42화
필드의 사기꾼 42화
라티나의 미드필더가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나쳐 가는 민선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화려한 기술에 돌파를 당했다면 이렇게 처참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선은 단지 자신을 바라보다 눈동자를 돌렸을 뿐이다.
그 눈동자가 얼마나 진지했던지 자신도 모르게 그 눈동자를 따라 몸을 움직이고 말았다.
그리고 민선은 유유히 그를 지나쳐 갔다.
수비수가 달려온다. 우측에서는 파울리뉴 바테가 손을 들며 달리고 있다.
“파울리뉴!”
민선이 외치자 마크를 하기 위해 다가오던 라티나 선수가 멈칫 한다.
그 순간 민선이 한층 더 빨라진 속도로 그를 스쳐 지나간다.
툭-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공을 좌측으로 툭 밀어 놓는다.
노룩 패스를 받은 이는 좌측 윙포워드 다미아노 보체티다.
다미아노 보체티는 오랜 훈련을 통해 자신이 빈 공간을 선점하면 민선이 패스를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대로 패스가 왔다. 하지만 패스를 줄 것이라는 아무런 신호가 없었기에 대처가 조금 늦었다.
공을 키핑하기는 했지만 퍼스트 터치가 조금 길어져 빠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훈련을 할 때도 몇 번이나 있었던 상황이다.
민선의 움직임은 상대 선수를 속이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그의 작은 몸짓, 눈동자의 움직임이 모두가 페인팅이다.
문제라면 가끔 같은 팀의 선수들도 민선의 움직임에 속는다는 것이다.
지금의 자신처럼 말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다미아노 보체티는 크로스를 올렸다.
이미 페널티 박스 안에 침투를 한 바레세의 선수는 세 명이다.
수비수의 숫자가 조금 더 많기는 하지만 자신의 동료들이라면 어떻게든 골을 만들어줄 것이라 믿었다.
펑-
낮지만 빠른 크로스가 필드를 가른다.
공은 민선에 비해 한 발 늦게 페널티 박스로 들어선 알폰소 람브룬기의 이마에 떨어졌다.
불안정한 자세였기에 알폰소 람브룬기는 헤더 슛을 과감히 포기했다.
그가 선택을 한 것은 공을 떨어뜨려 주는 것이다.
퉁-
알폰소 람브룬기의 이마에 맞고 떨어진 공을 걷어내기 위해 라티나 수비수들이 달려든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들보다 먼저 공에 발을 댄 사람이 있었다.
‘툭’ 하고 강하지 않게 찬 공이 골대의 오른쪽 하단으로 굴러간다.
수비수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 라티나 골키퍼가 다이빙을 하며 손을 뻗었지만 공에 미치지 못했다.
삐이익-
골이 들어갔음을 알리는 심판의 호각 소리와 함께 바레세 선수들이 코너를 향해 달려간다.
스타디오 프란코 오솔라를 찾은 바레세 팬들이 미친 듯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그런 팬들을 향해 양팔을 번쩍 들고 있는 이의 등에는 ‘9’라는 넘버가 페인팅 되어 있다.
민선은 전반에 이어 후반에 한 골을 더 집어넣으며 데뷔전에서 두 골을 기록한 것이다.
바레세의 팬들은 이미 민선에 대해 알고 있다.
민선은 몇 년 전부터 바레세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했기에 그들의 개인 SNS나 홈페이지를 통해 민선의 존재를 알렸었다.
팬들 중 광적인 몇몇은 그런 민선의 팀 내 별명을 알고 있었다.
“쏠레!”
누군가의 외침에 팬들이 일제히 ‘쏠레’를 외쳤다.
바레세에서 가장 어린, 그것도 오늘 데뷔전을 치루는 루키가 그들의 태양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그렇게 외치고 또 외쳤다.
***
경기가 끝난 후 로커의 분위기는 흥분으로 가득했다.
개막전에서 홈팬들을 가득 불러들여 최고의 경기를 선물했기 때문이다.
전반전 내내 무기력했던 모습의 선수들이 맞냐는 듯 바레세 선수들은 후반 내내 라티나를 몰아쳤다.
민선의 추가골이 나온 이후 바레세 선수들은 훈련으로 완성한 유기적인 플레이를 선보이며 라티나를 압도했다.
거짓말처럼 라티나의 두 수비수 가랑이를 통과하는 환상적인 민선의 스루 패스를 받은 파울리뉴 바테가 마지막 골을 기록하며 라티나의 추격 의지를 박살내 버렸다.
들뜬 분위기에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선수들을 보며 숀 브라운 역시 흐뭇하게 웃고 있다.
이번 시즌은 자신이 바레세의 사령탑으로 부임한 후 최고의 시즌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아니,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다.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떠드는 민선을 보고 있자니 한없이 든든하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고 있습니까?”
“하하, 좋지 않을 리가 있나.”
안영우가 다가오자 숀 브라운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자넨 역시 복덩어리야.”
“그렇습니까?”
“자네가 아니었다면 저런 환상적인 선수가 바레세의 유니폼을 입지 못했겠지. 저 실력이라면 당장 프리미어 리그의 상위팀에서 활약을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프리미어 리그는 타 리그에 비해 1부 리그 선수들의 연령 제한이 낮다.
그 이유로 타 리그의 유망주들이 어린 나이에 프리미어 리그로 이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 민선은 최고의 경기를 펼쳤어. 나는 감독이 아닌 한 사람의 축구 팬으로서 감동을 받았어.”
“고작 한 경기를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 민선이 보여줄 것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때마다 매번 감동을 받으면 되지 않겠나? 이래 뵈도 굉장히 감수성이 넘친다고.”
숀 브라운의 말에 안영우가 웃고 만다.
***
“여기야, 여기.”
펍의 문이 열리며 연한 초콜릿 색 피부의 건장한 청년이 들어온다. 민선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든다.
“오랜만이야, 줄리오.”
“오랜만은 무슨……. 지난달에도 봤잖아.”
“시즌 시작하고는 처음이잖아.”
“하아, 민선. 이틀 전이 개막전이었거든?”
민선과 함께 피렌체 유소년 클럽에 있던 줄리오 실바가 한심스럽다는 듯 민선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든다.
줄리오 실바는 현재 피에몬테 주 베르첼리에 연고를 두고 있는 FC 프로 베르첼리 1982에 소속이 되어 있었다.
민선에 비해 두 살이 많은 줄리오 실바였기에 2년 전에 입단을 해 지금은 주전으로 활약을 하고 있는 중이다.
“개막전 승리 했다며? 그것도 페루자를 상대로.”
“하하, 다 위대한 이 몸 때문 아니겠냐?”
줄리오 실바가 가슴을 툭 치고는 거만하게 말을 한다.
프로 베르첼리는 세리에 B의 강자인 페루자의 홈으로 가서 2:1의 짜릿한 역전승을 거둬냈다.
줄리오 실바의 말대로 그는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역전골의 어시스트를 한 것이다.
“너도 잘했다며? 데뷔전부터 두 골을 넣다니. 확실히 사기 캐릭터라니까.”
“하하, 내가 대단하긴 하지.”
“많이 거만해졌어. 예전의 민선은 이렇지 않았는데.”
민선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주문한 맥주가 나오자 건배를 하고 잔을 비웠다.
“다른 애들하고는 연락 자주 해?”
“너나 나나 똑같지. 성공적으로 입단한 아이들 말고는 다들 연락이 안 돼. 자존심이 뭔지…….”
“그러게.”
유년 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들 중 많은 이가 연락이 두절되었다.
몇몇 아이는 성공적으로 세리에 B나 프리마 디비시오네 A와 B, 세콘다 디비시오네 A와 B 등에서 활약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축구의 꿈을 접었다.
“우리 팀과 언제 만나지?”
“4라운드.”
“읔!”
줄리오 실바가 장난스럽게 가슴을 움켜쥔다.
“왜 그래?”
“우리 팀의 1패가 4라운드에 확정이 되는 순간이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너 같은 괴물을 어떻게 막아? 생각보다 우리 팀 수비들이 형편없다고. 자동문까지는 아니라도 최악인 것은 분명해. 페루자와의 경기에서도 몇 번이나 실점 위기가 있었어. 골키퍼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2:1아 아니라 5:2로 깨졌을걸.”
“뭐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 쉽게 1승 할 수 있겠네.”
줄리오 실바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피식 웃는다.
“설마 진담으로 받아들인 거냐? 어떻게든 너희 팀 이길 거야. 전력을 다해도 못 이기면 붕 날라서 발목에 태클을 걸어서라도 이길 거야.”
“헐!”
“크크,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그때 재미있는 경기하자. 너하고 경기 뛰어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물론 같은 팀이 아니라 상대팀이지만 말이야.”
“그래. 최선을 다할 테니 너도 최선을 다해.”
“당연한 말을 하고 그래. 내 목표가 뭔지 아냐? 바로 널 뛰어 넘는 거야.”
민선이 고개를 흔든다.
“달성하지 못할 목표는 빨리 포기하는 것이 좋아.”
“뭐라고? 오랜만에 봐서 이 줄리오 님의 펀치를 잊고 있나 보구나. 오늘 제대로 교육시켜 주지.”
“하하, 미안. 내가 잘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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