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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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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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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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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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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나는 세계의 왕이다!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벨에어 주택에 군식구가 셋이나 늘었다.

다름 아닌 고우찬, 안재민, 최영웅이다.

집안이 워낙 넓은데다가 방까지 남아도니 문제될 것이 없다.

집주인 류지호는 <Remo : The Destroyer> 프리프로덕션으로 바빠 친구들과 마주치는 일도 별로 없었다.


하암.

으드득!


전날 과음을 해도 류지호는 4~6시 사이 기상이 생활화 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습관화 된 생활패턴이다.

침대를 빠져나오면 가장 먼저 스트레칭을 한다.


“일어나셨습니까. 보스!”

“좋은 아침!”


마당으로 나가 가볍게 태권도로 몸을 풀거나, 상주하는 경호원과 조깅을 다녀온다.

Pinkerton Corp. 현장요원들은 대부분 소위 ‘헬창’이다.

따로 전문 강사를 고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아침 루틴에 두 사람이 합류했다.

고우찬과 최영웅이다.

LA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고우찬은 만세를 불렀다.

제 세상이라도 만난 것처럼 흥분했다.

그걸 보고만 있을 류지호가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맘대로 해봐, 어디.”


이 한마디로 끝이었다.

고우찬은 싫어도 류지호의 생활패턴에 강제로 맞출 수밖에 없었다.

한다면 하는 녀석이 바로 자신의 친구 류지호였으니까.

안재민은 아침 운동에서 열외다.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다.

최영웅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무술수련이 생활화 되어있는 최영웅은 자발적으로 아침운동에 합류했다.


“좀 사람답게 살어. 로봇이냐?”


아침식사 자리에서 고우찬이 투덜거렸다.


“일찍 일어나면 하루를 길게 쓸 수 있어. 게으른 너도 기상시간을 한 시간 앞당기면 하루가 정말 길게 느껴질 걸?”


류순호가 가자미눈으로 고우찬을 째려봤다.


“왜?”

“우찬이형 때문에 형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됐어...”

“뭐, 인마!”

“학교 다녀올게.”


류순호가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무리하고 등교했다.


“넌 출근 안 해?”

“우린 따로 갈 데가 있어.”

“우리 모두?”

“응.”

“어디?”

“영화 촬영 현장.”

“진짜?”


안재민이 잔뜩 흥분했다.


“할리우드 촬영현장 구경할 수 있는 거야?”

“본 촬영은 아니고, CG 소스 테스트 촬영이라 볼 건 없어.”

“무슨 영화인데?”

“<매트릭스>.”

“오오~”


안재민이 흥분하는 것과 달리 고우찬과 최영웅은 그러려니 했다.

최영웅은 한국과 홍콩의 촬영을 질릴 정도로 경험했다.

고우찬은 영화촬영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혹시 배우도 오냐?”

“CG 소스 테스트 촬영이라니까.”

“그럼, 난 체육관 가서 놀게.”


고우찬이 Vic & Jay에서 운동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혼자 갈 수 있겠어?”

“내가 어린 애냐?”

“믿음이 가야지 자식이.... 오후에 웨스트우드 사무실로 와. 함께 저녁 먹게.”

“오케바리!”

“재민이는 잠깐 나를 따라와.”


세 친구가 쪼르르 류지호의 뒤를 쫒아갔다.

서재로 들어가자, 방 한편에 커다란 박스가 놓여있다.

류지호가 박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재민이 네 거야.”

“뭔데?”

“미국잡지.”


안재민이 책상에서 커터를 챙겨 박스를 개봉했다.

박스 안에는 계간지 CineFex VFX가 한가득 들어있다.

80년부터 발행된 이 잡지는 특수효과와 관련된 기술과 발전 동향, 유명한 특수효과 코디네이터의 인터뷰가 실리는 FX 관련 전문잡지다.

JHO 의장 비서실에서 8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나온 잡지 대부분을 구해왔다.

잡지 몇 권을 들춰본 안재민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한국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어찌어찌 구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거의 초창기 호부터 40여권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마워 지호야.”

“박스 안쪽에는 특수효과 관련 서적들이 들어있으니까. 틈틈이 읽어봐. 영한사전도 서재 책장에 꽂혀있으니까 찾아서 가져가고.”

“응.”


류지호가 최영웅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혹시 그림 좀 그리냐?”

“....그림?”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나 연출학도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필사와 콘티 베껴보기야.”

“나도 시나리오를 베껴 써보라고?”

“시나리오 필사하는 건 마음대로 하고, 일단 할리우드 액션 영화중에서 잘 된 것들 골라서 스턴트 시퀀스만 콘티를 그려봐. 넌 현장경험도 많으니까 스턴트 장면들을 찍을 때 대략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거야. 간단한 편집기법도 배우고.”


두 친구는 충무로와 홍콩영화 현장에서 어깨 너머로 영화를 배워왔다.

따로 대학에 들어가 이론적인 공부를 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관련 서적을 읽거나 잘 만든 영화를 베껴보는 것으로 공부를 대신 할 수밖에 없다.

특수효과와 스턴트 디자인을 하게 될 두 사람에게 시나리오를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편집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내가 찍는 영화에서 인턴 경험을 하게 되겠지만, 너희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알차게 배우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안재민과 최영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기회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비조합원이 스태프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 ✻ ✻


집을 나선 류지호는 컬버시티에 들러 Vic & Jay 센터에 고우찬을 내려주었다.

<Remo : The Destroyer>의 스턴트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는 빅키를 만나 추후 배우들의 트레이닝 스케줄에 대해 논의했다.

류지호는 본인이 열심히 하는 만큼 많은 돈을 받는 이들도 열심히 하길 주문한다.

할리우드 무비스타라고 해서 예외를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스타는 더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류지호다.

류지호의 사고방식이 싫으면 아예 프로젝트에 합류하지 않는 것이 좋다.

고우찬이 스턴트맨들과 어울리기 시작할 때 류지호와 친구들이 센터를 떠났다.


TRI-STELLA Gower STUDIOS.


선셋 대로와 노스 고워 대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종합촬영소다.

최근 이 스튜디오에 트라이-스텔라TV와 IVE Entertainment가 입주한 상태다.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의 본사가 들어갈 17층짜리 오피스 건물은 한창 마무리 공사 중이다.

15개 사운드 스테이지 가운데 두 개는 <X-파일>의 6번째 시즌의 후반부 에피소드와 <앨리 맥빌>을 각각 촬영하고 있다.

<소프라노스>도 스테이지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는 아직까지 비워져 있다.

참고로 <X-파일>은 5번째 시즌까지 캐나다에서 촬영을 했다.

올 가을 방영예정인 시즌6부터 LA 인근으로 로케이션을 바꿨다.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배우가 하도 징징거려서.... 고위 인사들만 아는 비밀이다.


“이 스튜디오가 네 것이라고?”

“트라이-스텔라 거지.”

“트라이-스텔라가 네 것이니까. 결국 이 스튜디오도 네 것이잖아.”

“달라.”

“그렇다고 치고. 여기에 트라이-스텔라가 있는 거야?”

“입구에 짓고 있는 고층건물 있지?”

“응.”

“완공되는 7월 중순 쯤 거기로 들어올 거야. 일단은.”


따라서 스튜디오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것은 8월이나 되어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5만 평의 넓은 부지다.

입구 쪽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사운드 스테이지 근처에는 제작자, 감독, 주연배우, 장애인 주차장만 마련되어 있다.

또한 촬영지원 차량과 캠핑트레일러만 주차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일반 스태프와 조단역들은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하고 걸어서 자신이 촬영하는 스테이지로 가야 한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사람 차별해?”

“억울하면 출세해야지. 그게 바로 할리우드니까.”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철저하게 스타 위주로 돌아간다.

한마디로 잘나가는 놈, 돈 많이 받는 놈이 장땡이다.

그러다가 인기 떨어지면 다시는 처다 보지 않는 냉혹함도 함께 보여주는 세계다.


“환영합니다. 보스!”

“수고해요.”


류지호를 태운 차량은 주차장을 그대도 통과했다.

제작자이자 스튜디오의 오너였으니까 당연한 거다.

600평 규모 스테이지 앞에 차량이 멈췄다.

입구 옆에 <The Matrix> 명패가 걸려 있다.

스테이지 안으로 들어가서 본 풍경은 유명한 플로우 모션(flow motion) 세트다.

네오의 총알 피하기와 트리니티 점프 장면을 만들어냈던 바로 그 기술이다.

카메라를 피사체 주변에 일정 간격으로 여러 대 설치하여 동시촬영 후, 프레임 작업으로 한 화면을 만드는 방법인데, 지미 가에타 시각효과감독은 최적의 카메라 대수와 합성 방법을 놓고 수십 수백 번의 테스트 촬영을 진행했다.

그 결과 120대의 카메라로 1초에 100프레임을 찍어, 360도 회전 영상을 선보이게 된다.

플로우 모션 일명 플로모 기법은 지미 가에타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인디영화 쪽에서 실험적인 촬영을 했었다.

광고와 뮤직비디오에서 초보적인 수준의 시도가 있었다.

그것을 대형 스크린에 투사하는 영화에서 훨씬 진일보된 방식으로 선보인 것이 지미 가에타와 그의 VFX팀이다.


“저게 다 뭐야?”

“뭐긴, 10만 달러짜리 장치지.”


그린 매트와 카메라 수백 대가 세팅되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이 영화감독이 재팬애니메이션 마니아거든. 재팬애니 화면연출을 영화로 옮기고 싶대.”


바쇼비츠 형제가 막연하게 이야기한 것들을 영상으로 구현하기 위해 지미 가에타는 수많은 연구기관과 대학들에 자문을 구했다.

그런 후 수많은 방식의 실험을 거쳤다.

연구개발비만 따로 수십만 달러가 소요됐다.

지미 가에타는 걸핏하면.


“아마 <매트릭스>가 역사상 가장 많이 연구, 조사한 영화일 겁니다.”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총알속도와 피하는 모션의 타이밍을 알아내는 것과 한 화면에서 360도 회전하는 것이 가능한지 알아내는 데 4개월이 걸렸고, 최선의 방법을 찾는 데 또 다시 6개월이 더 걸렸다.

영화를 실제 찍는 동안 끊임없이 개량했다.

바쇼비츠 형제는 툭하면 자신이 원하는 재팬애니스러운 영상을 요구했다.

기술적으로 꽤나 난감한 것들이 많았다.

가령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린 트리니티의 뒤로 건물 유리창이 폭발하는 장면 같은 경우, 일종의 저속도 촬영을 통해 유리창이 해바라기처럼 부풀어 터지기를 원했다.

지미 가에타와 Hues & Rhythm은 처음에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각각 다른 종류의 유리와 폭발재료를 가지고 촬영하면서 실험했다.

알맞은 조합을 찾는 데 거의 3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트라이-스텔라에서는 지미 가에타와 Hues & Rhythm가 실험예산을 요구할 때마다 반려했다.

그럴 때마다 지미 가에타는 류지호를 찾아와 부탁했다.

웬만하면 들어주었다.

사실 <매트릭스>를 제작하면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곳이 바로 Hues & Rhythm다.

수십 개월에 걸쳐 돈으로 살 수 없는 다양한 기술적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다.


“어때 근사하지?”


바쇼비츠 형제가 짐짓 우쭐댔다.


“뭐가?”


형인 로렌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놀라운 VFX기술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거늘.

지금껏 보지 못했던 최첨단 기술에 전율해야 마땅했다.

헌데 류지호는 지나치게 무덤덤했다.


“네가 몰라서 그런데....”

“내가 <타이타닉>을 제작한 거 잊었어?”

“그 영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VFX라고!”


동생 앤드루가 일침을 가했다.


“형, Jay는 세계 최초로 D-Cinema를 해냈어. 우리가 하고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한 거라고.”

“부러운 녀석....!”

“아카데미에 초청되었다며?”


앤드루가 부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응.”

“<타이타닉>이 무려 14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되었던데?”

“그렇다고 하더라.”


그 외에도 JHO 산하 영화사들의 영화들이 각종 부문에 후보에 올랐다.

벌써부터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도 JHO로 시작해 JHO로 끝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유일하게 류지호만은 담담했다.

이번 아카데미 주요 부분 수상자를 이미 알고 있으니까.

류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화제를 돌렸다.


“시드니로는 언제 가?”


로렌스가 씩싹하게 대답했다.


“다음 주에.”

“주로 시드니에서 촬영하지?”

“로케이션은 거의 시드니에서 촬영할 거야.”

“17주였던가?”


형제는 대답을 삼갔다.


피식.


류지호는 형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괜히 약속했다가 어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예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혹시.... 시드니에 올 거야?”

“갈까?”

“네 영화 찍어야 하잖아.”


제작자 혹은 투자자가 촬영현장에 오는 걸 좋아할 감독은 없다.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차이다.

충무로는 대체로 제작자가 현장에 오면 그 날은 회식이다.

할리우드에서 제작가가 현장에 나타날 때는 제작과정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의미다.

사기진작 차원에서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미리 알려주고 방문하면 모르겠지만.

대체로 심각한 문제일 경우가 많다.

그러니 형제가 펄쩍 뛸 수밖에.


“모리스 메타보이 회장이 호주를 가지 않도록 하길 바래.”

“무, 문제없어!”


<매트릭스> 트릴로지의 첫 번째 작품은 3월 중순에 촬영을 시작해 8월 쯤 마무리 된다.

17주로 계획되었던 스케줄은 4주를 초과하게 된다.

내년 3월로 개봉 날짜가 잡혀있다.

포스트프로덕션의 여유가 별로 없다.


“일정을 상당히 빡빡하게 진행해야 할 겁니다. 그것이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류지호가 <매트릭스>의 포스트프로덕션 매니저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 ✻ ✻


웨스트우드 시내에서 UCLA 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레스토랑에 류지호가 친구들과 저녁을 먹기 위해 들렀다.

미리 와 있던 김윤희와 그녀는 함께 대학원 수업을 듣고 있는 친구 두 명이 류지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인사해. 학교 후배야.”


류지호가 친구들에게 김윤희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숙녀분들은 윤희 친구들.”

“....”


친구들은 류지호가 소개팅이라도 시켜주나 싶었다.


“윤희와 할 이야기가 있어. 내가 너무 바빠서 갑자기 약속을 잡았다. 저쪽 테이블에 예약이 되어 있을 거야. 음식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어.”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친구들이 결국 예약석으로 떠났다.

류지호는 김윤희의 친구들에게 잠시 한국말로 대화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내가 선배 사무실로 찾아가도 되는데.”

“요새 내가 좀 많이 바빠.”

“뭔데요? 또 시나리오 각색 맡겨주려고요?”


김윤희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졸업하고 어떻게 할 거야?”

“아직 잘 모르겠어요.”

“미국에 남을 거야? 아니면 한국으로?”

“내가 미국에서 작가로 살 수 있어요? 선배가 보기에는 어때요?”

“작가로는 살 수 있겠지. 최고가 될 수 있느냐는 나도 모르겠다.”


김윤희가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배가 모르겠다는 걸 보니.... 난 글렀네.”

“자식이... 최고가 되지 못하면 어때? 먹고 사는 게 어디야.”


김윤희는 비관적인 이야기는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왜 보자고 했어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뭘 좀 맡겨볼까 하고.”

“....시나리오?”

“영화는 아니고... TV시리즈.”

“TV시리즈 연출까지 하려고요?”

“내가 할 건 아니고."

“한국에서 케이블 채널을 인수했다고 하더니, 거기서 드라마도 찍어요?”

“알고 있었냐?”

“선배 때문에 UCLA 영화과 인기가 날로 하늘을 찔러요.”


생뚱맞은 말에 류지호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미국으로 유학 오는 영화과 학생도 많아졌지만, 유학생들이 지원하는 학교 일 순위가 우리 학교라네요. 올해 신입생 중에 한국 유학생이 작년보다 두 배는 늘었대요.”


그런 현상이 좋은 건지 알 수 없다.

다만 NYU, USC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UCLA 영화과가 좋다는 것.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문들도 빵빵하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인마....”

“설마 제게 TV시리즈 맡겨주려고요?”

“응. 어때? 한국식으로 미니시리즈 한 번 써볼래?”

“제게 드라마를 맡기신다고요? 진짜? 진짜요?”

“당연하지. 내 시나리오 노예 1호니까.”

“누가 노예에요?”


김윤희가 사납게 째려봤다.


“싫으면 말고.”


김윤희가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아휴! 증말. 미워 죽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류지호가 계속해서 제 할 말만 했다.


“경찰드라마 하나와 의학드라마 하나를 생각하고 있어.”

“.....?”

“혹시 한국의 방송 중에 <리얼TV 경찰 24시>라고 알아?”

“그런 드라마가 있었어요?”

“다큐야. 인천지역 민방의 간판 프로그램이지.”


<리얼TV경찰24시>는 지상파 방송 최초로 PD 한 명이 6㎜디지털 캠코더로 기획·연출·촬영을 모두 책임지는 시스템을 도입해 화제를 모았다.

인천지역 민방 프로그램 중 최고 시청률(7~12%)을 찍고 있는 리얼다큐멘터리다.

인권문제를 지적받고 있긴 했다.

그럼에도 현재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인 범죄를 실제상황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참고로 VJ(비디오 저널리스트)란 칭호를 최초로 얻은 팀은 다큐전문 케이블 Q채널의 <아시아리포트> 제작 PD들이었다.

그들이 인천 민방으로 옮겨 만든 첫 다큐프로그램이 <리얼TV경찰24시>다.


“그런 콘셉트로 미국 TV시리즈처럼 시즌제로 하고 싶어요?”

“지상파가 아니라 케이블이라서.”

“한국에서 시즌제가 가능하려나.....”

“상관없어.”

“의학드라마는 <ER>을 생각했겠네요?”

“우리나라도 <ER>같은 드라마가 나올 때가 됐지.”

“케이블에서 시청률이 나와요?”

“난 그런 거 모르겠고.”


풋.


김윤희가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역시나.


“새끈한 의사가 간호사하고 연애질 하는 병원물이 아니라 진짜 다큐 같은 느낌 속에 재미까지 가진 의학드라마를 만들어 보고 싶다.”

“다큐처럼이요?”

“리얼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진짜 사고가 발생해 119 구급대원이 현장에서 환자를 이송해 응급실에 들어오고, 처치실로 옮겨지든가 수술방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라이브로 연기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지.”

“선배는 별 희한한 건 다하려고 한다니까.”

“뭐가 희한한 거야?”

“한국 시청자 정서에 그게 먹히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너도 그런 리얼한 드라마 보고 싶지 않냐? 시청자로서?”

“제작비는... 걱정할 필요 없겠구나. 선배는 한 번 픽한 스크립트에는 팍팍 제작비 지르는 걸로 유명하니까. 딴 건 몰라도 드라마 퀄리티는 진짜 끝내주겠네요.”

“지르긴 뭘 질러?”

“선배가 <타이타닉>에 1.5억 달러 질렀다고 해서 얼마나 말이 많았는데요.”


정확하게는 1.4억 달러다.

언론에 관련 내용을 확인해주지 않아 추정치만 루머로 떠돌고 있다.


“내가 댔냐? 회사가 댔지.”

“그게 그거죠.”

“자꾸 딴 소리 하지 말고. 어때, 네가 해보겠다면 맡기고.”

“언제 방영할 생각인데요?”

“기획도 안 잡혔는데 편성이 가당키나 하냐?”

“자료조사하고 취재하고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은데....”

“네가 하겠다면 졸업하는 순간부터 일 시작이야. 혼자는 못 쓰니까 네가 마음에 드는 친구들로 팀도 짜야하고, 적어도 6개월은 취재와 자료조사 기간이 되겠지.”

“진짜 미국처럼 의학드라마 같은 콘셉트를 잡아요?”

“응. 최소 50% 사전제작. 가능하면 100% 사전제작 할 수도 있고.”

“....선배.”


김윤희가 매우 진지한 얼굴로 류지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말해.”

“선배 제의는 무조건 잡아야 하는 게 맞는데요.....”


김윤희가 말투에 한숨과 함께 자조가 섞였다.


“솔직히 난 작가를 계속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류지호가 가소롭다는 듯이 꾸짖었다.


“질풍노도냐? 늦게 사춘기라도 왔어?”

“진지하게 들어줘요.”

“뭐가 겁나는데?”

“사실 조합이 잘 갖춰진 할리우드에서도 시나리오 작가로 먹고 살기 쉽지 않잖아요. 작가 알기를 타자기로 보는 충무로에서.... 제가 버틸 수 있을까요?”


할리우드는 배우조합과 함께 작가조합의 힘이 센 편이다.

그럼에도 극도로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만 기억해서 그렇지.

어렵게 사는 작가들 널리고 널렸다.

할리우드에서 작가로 A-List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와 같다.


“물론 최소 집필료를 정해놓고 있죠. 근데 할리우드와 동부의 뉴욕의 물가를 고려하면 결단코 작가질 한다는 게 딱 굶어죽지 않을 정도. 그렇잖아요. 알기로는 충무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는 것 같던데.”

“나 모르냐?”

“알죠. 내가 유학생 중에 선배를 제일 잘 알걸요?”

“근데 뭘 고민해. 내가 너 하나 굶길까봐?”

“우와. 그 말은 혹시....”

“진지하자며?”


언제 죽상을 했냐는 듯 김윤희가 짐짓 활기차게 물었다.


“일단 생각할 시간은 있다는 거네요?”

“응.”

“작년에 작업한 <Dream Come True>나 <Escape>처럼 흥행, 시청률 따위는 개나 줘버려도 되고요?”

“이번에는 따져야지.”

“....에?”


김윤희가 매우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아는 류지호는 흥행에 일희일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간혹 돈이 남아돌아 영화를 찍는 것 같아 재수 없긴 했지만.

막상 영화를 준비하고 촬영할 때는 목숨을 건 사람처럼 군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다.

일부에서는 류지호가 영화 연출하는 것을 부자의 유희, 취미생활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단편영화부터 쌓아온 그의 커리어를 알게 되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괜히 스티븐 아들러에게 붙였던 ‘영화신동’이란 별명을 붙여줬을까.


“한국드라마의 전형적인 흥행코드에 맞출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쿨해서도 안 되겠지. 미국 TV시리즈를 만들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볼 드라마를 만들 거니까. 한국적인 정서나 기본적인 코드는 어느 정도 들어가야 할 거야. 가령 약간의 신파 같은.”

“선배도 알다시피 난 한국에 아는 작가가 없어요.”

“USC나 AFI 졸업반에 마음에 맞는 유학생 친구 없어?”

“언니 한 명이 있긴 한데....”

“걱정 마. 네 팀 꾸리는 건 WaW 프로듀서들이 도와줄 수 있으니까. 송진한 작가라고 아냐?”

“<넘버 쓰리> 감독님이요?”

“네가 의학드라마를 쓴다면 경찰드라마는 그 양반에게 의뢰할 생각이야. 네 글을 봐달라고 부탁할 생각이고.”

“송 작가님이 쇼러너가 되는 거예요?”


쇼러너(Showrunner)는 미국 TV 프로그램에 있는 개념이다.

드라마 대본을 쓰는 책임 작가이면서 전체적 방향설정을 비롯한 스태프와 배우의 캐스팅 등 제작 전반에 관여하는 총책임자다.

심지어 예산까지도 다룬다.


“한국에서 쇼러너 개념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김윤희가 입을 다물고 고민에 싸였다.

류지호는 믿을 수 있는 프로듀서다.

학교 단편부터 할리우드 영화까지 두루 작업을 해봐서 잘 안다.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진짜 제작자다.


“나는 병원에서 의사와 환자가 노닥거리는 드라마를 보고 싶지 않아. 구급대원, 간호사, 병원행정직원까지 비중 있게 다루면서 말 그대로 의사뿐이 아닌 응급실 혹은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거든.”

“왠지 미션임파서블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요, 선배?”

“응. 착각이야.”


작가의말

부족한 소설 추천을 해주신 부공삼매님께 늦었지만 감사하단 말씀 드립니다. 2000년대로 넘어가면 달라지거나 새롭게 추가된 에피소드들도 많습니다. 기대해주십시오.


벌써 11월 마지막 주입니다. 겨울철 대비 잘 하시고 한주 활기차게 여기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PS. 니름님 매번 과분한 후원 감사드립니다. 완결까지 재밌게 보실 수 있도록 열심히 연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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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왕족만이 왕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16 22.12.13 4,188 152 27쪽
364 왕족만이 왕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10 22.12.12 4,259 148 27쪽
363 The Destroyer. (13) +7 22.12.10 4,159 146 26쪽
362 The Destroyer. (12) +9 22.12.10 3,795 128 26쪽
361 The Destroyer. (11) +9 22.12.09 3,936 147 28쪽
360 The Destroyer. (10) +9 22.12.09 3,770 125 27쪽
359 The Destroyer. (9) +9 22.12.08 3,942 144 28쪽
358 The Destroyer. (8) +14 22.12.08 3,778 133 26쪽
357 The Destroyer. (7) +9 22.12.07 3,955 145 25쪽
356 The Destroyer. (6) +10 22.12.07 3,842 132 25쪽
355 The Destroyer. (5) +9 22.12.06 4,105 142 26쪽
354 The Destroyer. (4) +8 22.12.06 3,915 133 27쪽
353 The Destroyer. (3) +8 22.12.05 4,015 143 21쪽
352 The Destroyer. (2) +7 22.12.05 4,036 122 25쪽
351 The Destroyer. (1) +12 22.12.03 4,360 147 26쪽
350 위험으로 내몰지도 않을 테니 걱정 마.... +8 22.12.02 4,322 138 26쪽
349 WaW는 아주 살판났네! +8 22.12.01 4,441 142 28쪽
348 나는 세계의 왕이다! (3) +8 22.11.30 4,240 146 22쪽
347 나는 세계의 왕이다! (2) +11 22.11.29 4,239 161 24쪽
» 나는 세계의 왕이다! (1) +13 22.11.28 4,335 154 24쪽
345 구차하지 맙시다. (3) +12 22.11.26 4,354 142 30쪽
344 구차하지 맙시다. (2) +10 22.11.25 4,284 133 26쪽
343 구차하지 맙시다. (1) +8 22.11.24 4,283 136 25쪽
342 아리랑 겨레. (3) +11 22.11.23 4,268 132 24쪽
341 아리랑 겨레. (2) +4 22.11.22 4,177 15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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