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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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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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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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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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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구차하지 맙시다.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는 개인적으로나 소유한 기업을 통해서나 기부와 자선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기부 금액 전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영역이 종교단체다.

자선복지단체 그리고 교육기관이 뒤를 따른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종교단체 기부가 가장 크고, 그 다음이 복지단체 다음이 개인의 영역이다.

두 국가의 기부 영역이 다른 특징은 한국의 경우 복지단체와 개인 영역에 기부하는 비율이 50%가 넘는 다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 비교해 문화 예술이나 공공/지역사회, 의료기관, 교육기관을 위한 기부 비율이 현저하게 낮다.

지나치게 종교단체와 자선 복지단체에 기부 영역이 편중되어 있다.

한국에서 기부를 한다는 것은 대체로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시작한다.

특히 종교단체를 통한 복지후원, 자선단체 후원, 해외 난민 구호 등의 분야가 두드러진다.

또 아동, 저소득계층, 독거노인 등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기부에 집중한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취지가 강했다.

그로 인해 기부라는 문화에 대한 인식이 생활화 되지 못한다.

경제적 상황에 따라 동기부여가 달라진다는 문제가 있다.

기부를 한 사람의 절대 다수는 자신이 낸 기부금의 사용 경로와 과정을 알고 싶어 한다.

내 피 같은 돈이 정말 투명하게 쓰여 지고 있는지, 혹은 재단에서 빼돌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수밖에 없다.

흔히 사람들은 특정 재단이나 비영리단체에 기부를 하게 될 경우, 운영비의 비율이 낮은 재단이 투명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운영비 비율의 높고 낮음은 기부금 사용의 투명성과 큰 관련이 없다.

류지호가 지원하고 있는 다울재단은 제법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다.

역사가 짧은 자선재단치고는 규모가 상당한 편이다.

재단이사장인 류민상은 철강회사 반장을 해본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잘 해나가고 있다.

다울재단의 자본금은 류민상의 퇴직금과 류지호의 지원으로 마련됐다.

거기에 사인방 부모들이 돈을 보탰다.

류지호의 지인들도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렇게 모인 자금을 가온GP투자신탁이 관리해주면서 돈을 불려주고 있다.

자산과 기금 면에서 재벌이 설립한 재단을 빼고 상당한 규모다.

다울재단의 회계보고서를 훑어보던 류지호가 물었다.


“인건비 지출이 너무 큰 거 아니에요?”


류민상이 느긋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운영하는 자선단체를 보고 느낀 게 뭔 줄 알아?”

“뭔데요?”

“낮은 운영비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거야.”

“돈을 아껴 그 돈으로 좀 더 좋은 곳에 쓰면 좋은 게 아니구요?”

“네가 운영하는 자선단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알죠... 대충.”

“인석이!”

“아버지 아들의 몸과 뇌는 하나라구요.”

“파커가문과 네가 설립한 자선단체들을 보며 많이 배웠어. 운영비라는 게 효율적인 재단 운영에서 필수적이더라. 기부자들과의 소통에 해당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는 거지. 기부자가 원하는 낮은 운영비로는 유능한 인재를 고용하거나 필요한 자원에 대한 투자를 할 수 없게 되지.”

“그들이 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에요. 우리와 문화가 달라서.”

“나도 안다.”

“자선재단이나 봉사에서 유능한 인재라는 게 콕 꼬집어서 이런저런 사람이다. 계량할 수 없어요.”

“파커가문이 운영하는 자선재단에는 연봉 10만 달러 이상 받는 직원이 20명이 넘더구나. 심지어 팀장은 20만 달러 가까이 되지. 난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돈이 썩어나서 저러나 싶었어.”

“....음.”

“캐서린이 내게 그러더구나. 기부자들은 점점 똑똑해지고 있다고. 주식이나 부동산을 사고팔 때 사람들은 가치가 오를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투자하듯, 기부를 할 때에도 사회적인 가치가 오를 것으로 보고 투자를 한다고.”


류지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들어 사람을 고용할 때 몇 명이 고용됐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6개월 후에 고용이 얼마나 지속되는지 혹은 고용 상황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등이 진정한 결과라는 것이지.”


류지호는 아버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현명한 기부와 이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감정과 이성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

좋은 일을 했다는 만족감과 더불어 구체적인 결과를 확인하게 되었을 때 기부라는 투자에 대한 성취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부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스마트해야 하는 것이고.


“일반 기부자들의 기부금도 받을 생각이세요?”

“당장은 아니야. 우리 재단의 사업이란 게 아직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니까.”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우리 재단에 법률 전문가를 한 명 모시는 건 어떻게 생각해?”

“신변이 있잖아요?”

“일일이 다온에 문의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구나.”

“왜 요? 무슨 일 있었어요?”

“작년 말에 철민이 형님 친구 분이 찾아오신 적이 있었어.”


김철민의 친구는 개인 사업가로 주식 200억 원치를 한 대학에 기부했다.

그런데 증여세 폭탄을 맞았다고 한다.

세금 고지서를 받고 황당하고 화가 나서 몇날 며칠을 술로 지새웠단다.

하도 답답해 자선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류민상을 찾아와 하소연을 했던 것.


“선행으로 한 일에 세금폭탄을 때리는 나라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냐고 울분을 토하더라.”


한국사회는 과거에 비해 더 복잡해지고 급변하고 있다.

그 같은 사회구조에 발맞추지 못하는 행정과 입법의 단적인 예다.


“만약 다울에 법률 전문가나 회계 전문가가 상주하고 있었다면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테고, 거액의 기부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문의해 오는 사람들을 잘 이끌어 줄 수 있지 않겠냐?“


김철민의 친구 같은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는 ‘세제혜택’ 문제와 관련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기부자에게 소득의 50%까지 기부금액으로 한도를 인정해 주고 있다.

소득공제 한도의 이월 역시 가능하다.

즉 김철민의 친구가 미국에서 기부를 했다면 소득 200억에서 100억까지 기부금으로 인정받는다.

나머지 100억에 대해서만 소득세를 매기게 된다.

또한 기부금의 140억에서 초과한 40억에 해당하는 금액은 다음으로 이월이 가능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소득공제의 방식으로 기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그 범위 또한 워낙 작아서 잘 모르고 기부하는 일이 많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세금 폭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공익 법인에 출연하는 재산은 상속·증여세를 과세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익 법인 출연 재산이 영리 법인의 의결권 있는 주식인 경우 5~10%를 초과하는 지분엔 상속·증여세를 매긴다.

대기업 오너들의 그룹 지배를 위한 공익 법인을 우회로로 삼는 꼼수를 막기 위해서다.

김철민 친구의 경우는 당초 취지와 달리 선의에 의한 주식 기부가 도리어 막대한 세금부과로 돌아온 것이다.


“내가 보니까, 모금 단체 대부분이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 행자부조차도 법의 해석을 두고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주지 않는다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기부금 규모조차 들쭉날쭉인 게지.”


잠자코 있던 김우영 비서실장이 입을 뗐다.


“의장님....”

“뭔가요?”

“각 재단 및 비영리단체에서는 연례 보고서 형식으로 1년 동안의 수입·지출에 관한 결산 보고서 및 감사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작성하게 되어있으며, 소관부처에서 관리감독을 받고 있습니다. 다만 기부금과 관련 해 소득공제든 세액공제든 뭔가 법이 바뀌면 모금단체들은 이를 명확하게 알 수 없어 혼란을 겪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세계은행의 원조 대상국 명단에서 아예 빠졌지요?”

“국제적으로 한국은 글로벌 나눔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2년 전에 빠졌습니다.”


이전 삶에서는 대한민국은 2009년 개발 원조의 선진국 클럽이라 불리는 ‘개발원조위원회(DAC)’의 신규 회원국까지 되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적어도 기부자를 위한 다양한 조세지원 마련은 기본인데 말입니다.”


일부 재벌과 부자들의 편법 기부를 감시·감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액 기부자와 여러 형태의 기부를 아우를 수 있는 좀 더 세심한 법과 제도가 절실했다.


“일은 안 하면서 혜택은 있는 대로 다 챙기는 우리나라 국회에 뭘 바라겠냐마는..... 싸움박질이나 좀 안 하면 안 되나.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어찌 뉴스만 보면 그렇게 쌈질을 해대는지 원....”

“다온로펌에서 변호사를 파견형식으로 지원을 받으시든 직원으로 채용하시든 아버지가 결정하세요.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알겠다. 그리고 말이다.... 세미나를 열어볼까 한다.”

“무슨 세미나요?”

“비영리단체나 자선재단의 실장급들을 모아 교육도 하고, 교류도 하고, 파커재단이나 그레이엄재단에서 오랜 시간 비영리단체나 사회적기 업을 운영했던 전문가를 초청해 강의도 듣게 하고. 네 빽을 이용해서 할리우드에서 자원봉사 열심히 하는 연예인을 초청하는 행사도 하고.”


순간 류지호는 아버지가 요상한 미국물이 들었나 의심이 들었다.


“한국에도 수십 년간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며 자신의 삶을 어려운 이웃에 바친 사람들이 많아요, 아버지.”

“안다.”

“파커와 그레이엄이 규모가 큰 재단을 운영한다고 해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성자급 인성을 갖춘 것도 아니구요.”

“나는 우리나라 자선가들이 좀 똑똑해졌으면 좋겠다. 고행하는 수행자도 아닌데 왜 다들 몸으로 때우려고만 하는지....”


봉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면 존경심 이전에 안쓰러움이 먼저 든다.

류민상이 그런 심정인 것 같았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일시적이다.

그 같은 문화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돈과 인력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한 사람의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것에 돈을 쓸 것인지. 몇 년 후 몇 사람을 더 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기부와 자선문화 시스템에 투자를 할 것인지.

류민상이 최근 고민하는 부분이다.


“최근에 무료급식소를 또 늘리셨다면서요?”

“IMF 때문에 직장을 잃은 사람이 너무 많아.”

“저는 솔직히 두 분이 가온GP에서 재단자금을 굴려서 나오는 자금으로 여생을 소소하게 선행을 베풀면서 여유롭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무리하시는 건 반대예요.”

“자선재단도 사업이라고 말한 건 너였단다.”

“그렇긴 하지만.... 저는 그런 행사에 쓸 돈으로 수술비가 없어 제대로 치료를 못 받는 아이 한 명이라도 더 살리면 좋겠어요.”


류민상이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름 의욕적으로 추진해보려고 했다.

아들이 반대하고 나서니 기운이 쑥 빠지는 기분이다.


“아버지가 생각하신 아이디어에요?”

“.....응.”

“계획을 세워보세요. 대신 다울재단 돈 쓰지 말고, 스폰서 형식으로 가온에서 할 게요. 진행은 다울에서 하고 자금은 가온에서 대는 걸로 해봐요.”

“고맙다, 아들.”


금세 환한 표정을 짓는 류민상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듯이.

때로는 부모 이기는 자식도 없는 법이다.


❉ ❉ ❉


마지막 상영이 한참 전에 끝이 난 새벽 시간의 G.O.M 강남점.

<퇴마기록>에 참여한 거의 모든 스태프가 THX 인증관에 모였다.

새벽시간임에도 출연자 몇 명이 참석했다.

오랜 후반작업 끝에 완성된 <퇴마기록>의 기술시사를 보기 위해서다.

기술시사란 말 그대로 기술적으로 완성된 영화를 실제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이다.

포스트프로덕션을 하다보면 작은 스크린을 통해 편집부터 색보정, 사운드 믹싱까지 작업을 하게 된다.

그렇게 작업한 결과물을 실제 극장에서 상영을 하면서 미진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확인한다.

확인 작업을 하려면 작품에 참여한 전문가를 부르는 것이 당연지사.

가끔 배우들이 와서 보기도 한다.

대체로 배우들은 기술시사 대신에 개봉날 첫 회 상영을 보는 편이다.

기술시사에서 중요한 확인 중에 하나가 엔드크레디트다.

의외로 크레디트에서 문제가 많이 확인된다.

기술시사에서 문제가 없으면 최종본이 되는 것이고,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면 편집이든지 음악이든 수정하기도 한다.

류지호 역시 기술시사에 빠질 수 없었다.

명색이 총괄프로듀서다.

할리우드에서는 Executive producer라 불린다.


짝짝짝.


기술시사를 본 스태프들이 절로 박수를 보냈다.

현재 한국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기술력의 끝장을 보여줬다.

자타공인 최고의 충무로 스태프가 모였다.

출연진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외형적으로는 <은행나무 침대>를 뛰어 넘었다.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분명 그랬다.

기술시사를 관람한 스태프들의 표정에는 뿌듯함이 역력했다.

그런데 류지호의 표정만은 딱딱했다.

엔드크레디트 확인까지 꼼꼼하게 마친 후 스태프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류지호는 자신의 자리에 꼼짝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주요 스태프들과 보완해야 할 사항을 의논한 배창훈 감독이 류지호에게 돌아왔다.


“어떻게 봤어?”

“앉아서 편안하게 봤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다.

배창훈 감독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혔다


“농담한 거야?”

“아니요.”

“.....?”

“그러니까 제 말뜻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일어서지 않았다는 뜻이었습니다.”


알쏭달쏭한 말이다.

몰입해서 봤다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뭔가 뉘앙스가 미묘했다.

류지호에게는 영화가 단 한 번도 제대로 감정이입을 끌어내지 못하고 겉돌았다.

배우들의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에 박수를 쳐줄만 했다.

이것이 류지호의 감상이다.


“감독님.... 건방지게 한 말씀드려도 될 까요?”


배창훈 감독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분명히 약속을 드렸잖아요. 대중의 기호에 맞는 영화를 연출하시고 나면, 그 다음 작품은 감독님이 하고 싶은 영화의 기회를 드리겠다고.”

“최대한 상업코드에 맞춘 거야.”

“진심으로요?”


더 강하게 배창훈 감독을 압박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배창훈 감독은 대답을 삼갔다.


“한 쇼트 한 쇼트 공들여서 찍으신 건 충분히 전달되었어요. 하지만 그건 우리 같은 선수들끼리나 그렇죠. 관객들은 감독님이 전하고자 하는 은유보다는 이야기와 캐릭터 그리고 서스펜스를 기대하잖아요. 누가 <퇴마기록>에서 우아한 필름 누아르를 기대하겠어요.”


솔직히 영화가 꽤 마음에 들었다.

역시나 배창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쓸데없이 고급스럽다는 것이다.

영화를 개봉하면 평론가와 일부 영화 지식층만 좋아할 터.

관객들은 지나친 서사중심의 전개에 하품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사실 그것도 의미가 있다.

품격 있는 블록버스터라고 칭송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평론가에게 찬사를 받고, 감독 필모그래피에 자랑스러운 영화로 남으면 뭐 하겠는가.

상업적 성공이 따르지 않으면, 자기만족에 그치고 만다.

이번 영화는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가는 중요한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다.

상업성과 주제의식의 균형감이 매우 중요하다는 거다.


내로남불.

맞다.

류지호는 지금 이중적이다.

자신의 영화에서는 자의식을 마음껏 드러내는 주제에.

타인에게는 엄격한 대중영합주의를 강요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퇴마기록>은 한국형 판타지 블록버스터의 미래가 걸려있는 작품이다.

<은행나무 침대>가 열어놓은 대작영화의 흐름을 이어가는 것.

관객들에게 한국영화가 더 이상 방화라고 멸칭을 듣지 않도록 영화의 완성도를 증명할 시점이다.


“다시 찍을 순 없잖은가?”

“제 말을 오해하셨네요. 영화 자체에는 만족해요. 다만....”

“.....”

“제가 볼 때는 템포에 문제가 있어 보여요.”

“늘어져?”


물론 2020년을 살다 온 류지호의 영화 템포와 현재가 같을 순 없다.

류지호가 살던 시기의 극적 전개와 편집 속도는 정말 빨랐다.

영상세대가 보고 느끼는 영화의 속도를 이 시기의 관객이 따라올 리가 없다.

다만 한국의 영화팬들은 거의 대부분 ‘할리우드 키드’들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들이 인식하는 영화의 서사와 편집 리듬이 할리우드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 한국 감독들의 주특기인 신파가 먹힐 때가 있고 안 먹힐 때가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속도를 따라가면서 한국인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신파를 풀어내는 영화는 한국에서 무조건 통한다.

이 시기에는 <접속> 같은 영화가 대표적인 예다.

이 속도라는 것이 결코 간단치가 않다.

분석하기도 쉽지 않고.


“감독님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을 편집기사가 버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인공들의 고민과 복잡한 내면.... 알겠어요. 아이러니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영화 전편에 걸쳐서 미주알고주알 설명하고 있어요. 은유와 암시가 고급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잖아요. 또한 엘리베이터 되어야 하는 플롯에 매몰되어서 정작 중요한 디테일을 자꾸 놓치고 넘어가는 것 같고요. 그래서 관객들이 볼 때 삐걱거리는 느낌이 불쑥불쑥 들 것 같아요.”

“.....음.”

“모두가 기술적인 성취에 만족해 디테일에 대해 너그러워 진 걸까요? 게다가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 꼭 주인공들의 얼굴이나 눈동자일 필요는 없잖아요. 29억짜리 영화가 꼭 10억짜리 휴먼드라마 같아요.”


배창훈 감독은 잠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류지호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처럼 와이드 앵글로 화려한 영상미를 영화 내내 보여줄 수 없다는 한계는 잘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포스트프로덕션이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 같아요.”


배창훈 감독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지호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벤치마킹한다고 했는데.

류지호의 눈에는 엉성해보였던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편집도 다시 손보고 특히 BGM 부분과 대사 믹싱을 갈아엎고 싶지만.... 개봉이 잡혀있어서 대공사는 불가능하겠죠.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이대로 진행해야겠네요. 아쉬운 대로요.”

“뭔데?”

“키네스코핑을 새로 해야 할 것 같아요.”

“.....?”

“CG가 꽤 많이 들어갔잖아요. 텔레시네와 키네스코핑 과정에서 화질 손실이 생긴데다가 밤 장면이 많은 영화의 특성상 전체 톤까지 어두워요. 한국에서 가장 화면이 밝다는 THX 인증관이 이 정도로 어둡다면 지방극장에서는 지저분한 콘트라스트 때문에 관객들이 스트레스만 받게 될 것 같아요.”


영화필름의 해상도는 2048*1536 이다.

이 당시 디지털 기술로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최대의 해상도는 HD급인 1920*1080이다.

할리우드 영화 기준이다.

필름으로 영화를 찍은 뒤 VFX 합성하려면 텔레시네라는 필름스캔 작업을 거친 뒤, 그렇게 만들어진 디지털 소스를 가지고 합성·편집 등을 한 뒤에 다시 또 키네코스코핑 작업을 거쳐 필름으로 완성하게 된다.

여기서 화질 손실을 불가피하다.

이 당시 충무로에서 텔레시네 작업을 할 때 D1급 720*480의 형태로 받았다.

그런 다음 합성·편집 등을 거쳐 다시 필름 프린트를 만들게 되는데, 화질 손실률은 엄청났다.

물론 WAW Digi Lab에서는 HD급 포스트 프로덕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충무로에서 그걸 지원할 HD급 텔레시네, 필름스캔 장비가 부실했고, 이를 운용할 노하우도 부족했다.

사실 <은행나무 침대>때에도 VFX가 들어간 장면에서 화질이 뚝 떨어져 이상하다 혹은 어딘지 엉성하다라는 느낌을 줬다.

<퇴마기록>의 촬영, 조명, 컴퓨터 그래픽 모두 이전보다 훨씬 진일보한 것은 맞다.

그러나 류지호는 화질, 색보정이 매우 거슬렀다.

마치 고가의 화장품으로 풀 메이크업을 했는데, 화장이 뜬 것 같다랄까.

화장이 잘 먹게 하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포스트를 미국에서 다시 하죠.”

“제작비가.....”

“해요, 그냥. 감독님, 여권 있어요?”


당연히 해외영화제에 자주 초청받아 다니기 때문에 여권은 문제없다.

비자 문제만 해결하면 미국에서 포스트 프로덕션을 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대신 <퇴마기록> 망하면.....”


배창훈 감독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한 동안 감독님은 계속 상업영화만 찍으셔야 합니다. 제가 돈 버는 영화만 주구장창 맡길 테니까요.”


무슨 말이 나올까 조마조마했던 배창훈 감독의 표정이 일순 풀어졌다.

이 같은 모습은 결코 프로들의 세계가 아니다.

흥행이 부진하면 금세 잊히고 버려지는 판이 영화판이다.

한동안 꽃길을 걸었던 배창훈 감독이다.

영화라는 흥행산업은 절대 만만치 않다.

매편 매순간이 살얼음판이다.

게다가 90년대 들어와 찍은 영화들이 평론과 흥행 모두 신통치 않은 상황.

배창훈 감독으로서는 <퇴마기록>이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또 다시 기회를 주겠다는 류지호의 말이 황금 동아줄이나 마찬가지다.


“류 감독, 순수한 마음을 가지면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믿나?”


갑작스런 뜬금없는 물음에 류지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을 하기 위해 어렸을 적부터 꿈을 꿔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어떤 인간을 알게 되었지. 참 순수하고 매일 꿈꾸는 인간을.”

“혹시 하 감독님이에요?”

“또 한 명이 있지.”

“유 기사님이겠군요?”

“그 인간들을 떠나보내고, 내가 다짐한 게 있어. 후배들에게 현란함만 쫒지 말고 항상 영화 본질에 다가가라고, 영화선배로서 충고할 의무가 있다고.”


류지호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려는 찰라.


“근데, 때로는 현란함을 쫒아도 된다고 말 해 볼 수 있을지.... 이번 참에 확인해 볼 셈이야.”

“연출 그만 하시고, 프로듀서 하시게요?”

“할 줄 아는 게 영화밖에 없으니 평생 영화밥 먹고 살 수 있으면 제작실장인들 못할까?”

“회사에 이야기 해둘 테니까 미국 가서 작업할 준비 해 두세요.”


류지호는 아침이 밝자마자 WaW 픽처스로 출근했다.

박건호 대표에게 <퇴마기록> 후반작업을 할리우드에서 다시 진행하고 싶다고 양해를 구했다.

박건호 대표는 군소리 없이 허락했다.


“포스트를 통째로 다시 할 생각이십니까?”

“.....가능하면.”

“개봉 스케줄을 조정해야겠군요?”

“아마도.....”

“그 자리에 감독님의 <Escape>를 넣어야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저는 괜찮은데 WaW가 손해를 볼 텐데.....?”

“멀티플렉스 지점 매출은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서울의 날개극장과 지방관들 역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장기상영하면 크게 곤란할 것 같지 않군요.”


개봉 스케줄이 조정되면 편집까지 싹 다 갈아엎을 수가 있다.


"고마워요."

"영화가 잘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퇴마기록> 같은 대작이 망가지면 가뜩이나 얼어붙은 충무로 자금사정에 찬물을 끼얹게 될 테니까....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손댄다고 해서 영화가 엄청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어요."


박건호 대표가 신뢰를 듬뿍 담아 포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배급 스케줄이 조정됐다.

류지호가 하겠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지만, 박건호 대표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거칠 것이 없었다.

한국의 편집기사에게 예의가 아닌 걸 알지만, 편집까지 다시 손 볼 수 있게 됐다.

스펜서 베어드 감독에게 편집 도움을 요청했다.

크레디트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는 조건이다.

즉 코디네이터 역할이다.

류지호가 느낀 편집 불편함과 삐걱거림에 대해 스펜서 베어드라면 아이디어를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액션영화를 원체 잘 다루는 양반이니까.’


감독과 편집기사가 아까워 빼지 못한 커트를 류지호는 과감하게 들어낼 수 있다.

눈요깃거리를 더 많이 보여주려고 희생한 서사의 디테일을 복원할 수 있다.

주인공들 얼굴 위주로 편집된 TV드라마 같은 시퀀스를 좀 더 영화적으로 바꿔줄 수 있다.

현학적인 영화처럼 보이기 위해 생략한 신파까지도 되살려 낼 수 있다.

때론 한 발 떨어져 있는 사람이 훈수를 잘 두는 법이다.

왜냐하면 류지호가 <퇴마기록>의 제작자이자 프로듀서였으니까.

배창훈 감독 못지않게 영화에 대한 큰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으니까.


작가의말

한국에서 가장 큰 공익재단을 운영하는 기업은 당연히 3성입니다. 공익재단만 4개에 자산이 3조원이 넘는다고 하죠. 최연소 억만장자 타이틀을 가진 아들의 아버지인데 류민상 어르신이 뛰어넘어 봐야겠죠. 습작에도 있던 내용입니다만 리메이크에서 주인공이 더 돈을 잘 벌게 됨으로써 덩달아 공익재단도 커질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빌 X이츠처럼 코로나 음모론에 등장하진 않을지. 의료지원은 공익사업에서 필수니까요.

오늘 하루도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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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2.11.24 09:42
    No. 1

    잘 보고 있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건나라
    작성일
    22.11.24 09:48
    No. 2

    과감하게 들어낼 수 있다
    덜어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하얀유니콘
    작성일
    22.11.25 03:50
    No. 3

    수고 하셨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무한땅꼬마
    작성일
    22.11.27 01:39
    No. 4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1 주니서기
    작성일
    23.02.22 14:00
    No. 5

    대공사 안하고 키네스코핑만 한다고 했다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정상적으로? 진행되어 다 갈아 엎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3 트뤼포
    작성일
    23.02.25 12:46
    No. 6

    좀 더 자연스럽도록 수정/보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7 cooooool
    작성일
    23.07.04 00:15
    No. 7

    솔직히
    퇴마록 영화보고 아직도 기억나는 두가지
    1. 신현준이 영화내내 무개잡고, 추상미 축 쳐져있고
    2. 영화는 쓸데없이 어두워서 잠 솔솔

    이 소설에 나온 딱 그런 문제점이 많았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7 ma******..
    작성일
    24.04.14 14:18
    No. 8

    주식으로 기부해서 세금 폭탖 맞은 거요 케이스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본 기사에서는 주식을 재단에 기부했는데 그 재단에 아들이었던가 가족이 근무하고 있었고 관련 기관에서 주식은 기부가 아니라 증여에 해석해서 세금 폭탄 맞으니까 주식 현금화해서 현금으로 기부하라고 권고를 하고 몇 달 유예 기간을 줬는데도 주식 기부를 철회하지 않아서 세금 부과한 걸로 설명되어 있었어요 기부자분도 공문받고 해결하려고 고생하셨지만 법 자체가 그렇게 되어서... 기부 관련 법이 불충분하고 비합리적이지만 당시에는 현행법이라 시행한 거
    기사 읽으면서 참 일이 뭐가 이리 꼬였어 싶더라고요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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