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잠시··· 머리 속이 하얘졌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현실 도피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그래··· 설마 내가 아는 그 음식 이름은 아닐꺼야. 뭔가의 약자일꺼야. 그리고 그 단어의 스펠링에 필사적으로 이것저것 단어들을 조합하려 무의미하게 애쓰는 시간도 잠시··· 결국 나는 다시 현실을 직시하고 태연한 표정으로 호밀빵을 우물거리며 나를 보는 바실을 보았다. 야··· 설마, 정말로 그거 음식 이름 맞는 거냐? 나는 그래서 역시나 여기 온 이래 하루하루 나의 귀가 본능을 자극하는 이 황실 가족 일원에게 다시 한번 학을 떼고 물었다.
“설명을 좀··· 해주시죠.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나의 말에 바실은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이죠. 우선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제국의 군의 구조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네요. 전통적으로 제국의 군대는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져 있어요. 각 지방에 배치된 군관구에 토지 기반 자영농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해서 구성되는 지방군 테마가 있죠. 그리고 중앙에 모병을 통해서 구성된 중앙군인 타그마타가 있죠. 군인들에게 토지를 부여해서 거기서 나는 소득으로 무장을 갖추게 하고, 동시에 자기 토지에 대한 수호를 위해서도 열심히 싸울 것이라는 테마는 근본적으로 제국의 방어력의 근간이에요.
하지만, 토지에 매여있는 군의 특성 상 멀리 오랫동안 원정을 나서기는 적합하지 않고, 지역별 병력 편차를 보완하기 위해 구성된 정예 중앙군 타그마타가 공격력을 보완하는 제국의 군사 구조는 상당히 안정적인 구조에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안정적으로 보였던 테마 제도도 조금씩 헛점이 생기고 누수가 생기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죠. 비용이 많이 드는 타그마타를 무한정 늘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과거 몇번의 패전으로 손실을 크게 입은 타그마타의 역량 공백은 간단히 메워질 수 없었죠.
그래서 그런 타그마타의 누수를 보완해야 했던 테마가 통상 권한 이상의 작전권이나 통제력을 가지게 되면서, 점차 지방 군사 귀족들이 힘을 기르면서 군벌이 되고, 그 힘을 근간으로 중앙에 진출해서 난동을 부린 것이 지난 오랜 시간 벌어졌던 제국의 내전의 원인이었죠. 결국, 어영부영 근위대를 재편해서 내전을 종식시키기는 했지만, 내전이 종식된 이후에 제국의 군사 상황을 보니 참담하기 그지 없더군요. 너무 오랜 내전과 외침의 패전으로 인해 군이 사실상 귀족가의 사병이나 도적떼와 다름없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그런 사정과 무관하게 먼 지방의 대귀족들은 다시 사병들을 강화해서 힘을 모으려 하고, 거기다 외부의 적들도 내전을 기회로 자기 땅처럼 제국으로 밀고 들어오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내전이 진압되고 난 이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군대의 재편이었어요. 그리고, 그런 제국군의 재편에 대해서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제국의 황제만이 가능하고 동시에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일이었죠.”
나는 그의 말에 어제도 응원하던 팀이 마법의 숫자 찍었다고 짜증내는 무책임한 중년 아저씨를 떠올렸다. 그 양반이 제국군 재편을? 뭔가 잘 연상이 안되는 일인데··· 그런데 그런 나의 생각과 틀리지 않게 바실이 말했다.
“근데, 아부지는 그거 하기 싫어 하시더라구요. 여기저기서 그런 일은 당연히 전통적으로 제국군 총사령관인 황제의 책무라고 설득해도 하기 싫다고 징징거리셨죠. 하지만, 하도 여기저기서 압박을 해대는 통에 버티지 못한 아부지가 내린 결론은··· 대타를 세운다는 것이었죠. 그 책무가 황제의 것이라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황제인 공동황제가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면서요. 그리고, 순식간에 저를 제국의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군에 대한 모든 일의 전권을 넘겨 버리셨어요.”
“네에? 아니··· 태자님 나이가 지금도 어리신데, 대체 그때 몇살이셨는데 그걸 태자님한테···”
“그러게요. 그때 한 열살 정도 됐던가? 어이가 없어서 아부지한테 난리쳤는데, 아부지도 만만치 않게 난리치시더라구요. ‘늙은 애비 군대 두번 보내기 있기? 없기?’ 그러면서 군대 관련 업무 하기 싫다고 생떼를 부리시더라구요.”
“황후 마마는요? 황후 마마는 태자님을 공동 황제로 봉하고 군대를 맡기시는 걸 동의하셨어요?”
“처음에는 엄마도 성질내면서 아부지한테 응석 부리지 말라는 반응이셨죠. 근데··· 아부지가 꼼수를 쓰시데요. 군부 관료들이 모여서 아부지한테 부임하라고 종용하는 자리에서 엄마 들으라는 듯이 소리치시더라구요. ‘야! 니들은 마누라가 안이쁘니 병영에서 자도 상관없겠지만, 난 마누라가 너무 이뻐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그 말을 듣더니 그 다음부터는 엄마도 제가 아부지 대신 부임하는 것에 동의. 그래서··· 얼떨결에 열살짜리한테 공동 황제 겸 제국군 총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던져 주더라구요. 눈앞이 캄캄하데요.”
나는··· 이제는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는 황실 가족의 깨는 소리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바실의 말에 순간 흠칫할 정도로 놀랐다.
“여기서, 처음에 얘기드린 선지국이 나오는 거죠. 전에 제 별명이라고 알려주신 혈태자라는 이명, 나중에 좀 알아보니 그거 사실은 외부에서 붙여준 별명이 아니라, 처음 시작은 우리 쪽에서 시작된 거더라구요.”
“네? 네에? 그게 무슨··· 제국군 내부에서 그런 별명이 처음 붙었다고요? 어째서요? 다른 사람도 아닌 태자 마마에게 어째서 그런 흉흉한 별명을 붙인 건가요?”
그러자 바실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좀 상황을 알아보니 웃겨요. 처음에 공동 황제에 총사령관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달고 군대에 왔지만, 상황은 암담하기만 하더라구요. 내전 기간 동안 완전히 소멸된 타그마타는 전무해서 조금씩 모집 및 훈련을 시작하는 상황이다 보니, 제 밑에 있는 부대들은 대부분 지방군인 테마 소속들이 대부분이었죠. 과거 내전 시기에 군사 귀족들의 사병으로 내전을 일으킨 자들 중에, 그나마 처벌을 면한 병사들인지라 저와 새로 부임하는 장교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죠.
대부분 사기도 바닥에 훈련 상태도 엉망이었고, 일부는 내전에 자신들이 모시던 귀족들을 몰아낸 새로운 지도부에 원한을 품은 사람도 많았죠. 그런 병사들을 데리고 재대로 된 제국군으로 재편하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죠. 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었구요. 그래서, 우선 초심부터 시작하기로 했어요. 당장 열살짜리가 총사령관이라고 뻗대봤자 노련한 베테랑들 한테 비웃음만 살것이 뻔하리라 생각해서··· 우선 유년 신병으로 복무를 시작했어요..”
“네에? 다른 사람도 아닌··· 태자님이 일반 신병으로 복무를 시작하셨다구요?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그럴 신분이 아니시잖아요?”
내가 살던 동네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작위 낮은 집안 막내 아들도 그러지는 않을텐데··· 하지만 바실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께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그럴 신분이 아니라고는 해도··· 딱히 카르브나 시골에 살던 시절과 달라진 것도 없어서 말이죠. 나름 맨날 칼싸움하고, 밖에 천막에서 자는 거 할만하던데요? 그리고 엄마 잔소리도 좀 덜 들을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구요.”
아, 그건 인정. 그러면서 바실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렇게 별도의 우대 없이 신병으로 근무를 하다 보니 조금씩 군의 분위기가 좋아지더라구요. 우선, 내부적으로 만연한 병영 부조리가 많이 사라졌어요. 군대 내부에서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공동 황제가 유년병으로 훈련하고 있다더라. 그런 소문이 도니깐, 각자 부대에서 만연하던 부조리한 행위들을 자제하기 시작하더라구요. 혹시나 자기 부대에 훈련받는 유년병들 중에 하나가 총사령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사람이라면 우선 긴장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공동 황제가 신병 대우로 바닥부터 같이 복무한다는 소문이 도니깐, 중앙군과 내전을 진압한 지도부에 불만이 있던 테마 지방군 병사들의 반기가 조금씩 누그러 들더라구요. 그래서, 덕분에 제가 훈련을 받는 동안 군이 조금씩 자체적으로 기강을 갖춰가고 군대 내부에서 테마간에 벌어지던 갈등도 조금씩 수그러 들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본적인 불만은 잠재적으로 남아 있었는데, 어느 날 그것마저도 해소하는 계기가 있었어요. 그건, 어느 저녁 식사에서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죠.
저는 그때 훈련을 마치고 병영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어디서 조금 향수를 자극하는 냄새가 나더라구요. 그래서, 그 냄새를 쫓아서 가보니··· 거기는 평소에 가장 지도부에 반감이 심한 부대가 주둔한 곳이었어요. 한때 내전에서 가장 열심히 부역한 부대여서, 평소에 군사 고문들과 교관들도 거기만은 저에게 가지 말라고 한 곳인데··· 생각치도 못한 냄새에 이끌려 거기에 가게 되었죠. 그리고 거기서 결국 그 냄새의 원인을 발견했죠. 그건 바로··· 처음에 말씀드린 선지국이었어요.”
결국 그 문제의 선지국이 등장했다. 그런데 대체··· 여기서 무슨 군사적인 요인이 있다는 거야?
“대체,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사실, 선짓국은 좀 미묘한 음식이죠. 짐승의 피를 받아 굳힌 다음에 끓이거나 구워서 먹는 음식이라 종교와 지역에 따라서는 혐오하는 사람도 많죠. 맛도 그다지 대단한 편은 아니고, 다만 고기를 구할 수 없는 가난한 집에서 고기 대신 먹는 경우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좋은 음식이란 평을 듣지는 못하죠. 하지만··· 저는 그걸 엄청 좋아했어요. 카르브나의 시골에 살던 시절에, 종종 고기를 먹고 싶다고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면 엄마는 고기를 사주지는 못하는 대신 어디서 구해온 선지로 국을 끓여주시거나 구워주셨죠.
뭐, 가난해서 고기 대신이기는 했지만 그 얼마 안되는 선지라도 먹으면서 고기를 대신하던 시절은 나름 행복했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선짓국에 대해 좋은 기억이 많죠. 하지만, 콘스탄틴노플에 와서 태자가 되고 이어서 공동 황제가 되니 오히려 먹을 일이 흔치 않게 된 음식이 바로 그거였어요. 근데, 한동안 못먹던 음식을 우연히 훈련을 마친 후에 냄새를 맡게 된거죠. 그 향수를 자극하는 맛이 머리 속에서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저는 위험하다는 경고도 무시하고 그 부대에 들어가서 식사를 들려는 병사들 틈에 끼어들었어요.
부대원들은 그걸 저녁으로 먹으려다가, 갑자기 난입해서 들어온 저를 보고 크게 당황하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그런 병사들의 당황스러움보다 오랜만에 본 선짓국에 대한 마음이 컸죠. 그래서 그들에게 부탁했죠.
‘혹시 좀 남으면 저도 같이 먹어도 될까요?’
그러자··· 그들 중에 우두머리 격인 고참 병사가 말하더라구요. 조금 빈정대는 투로···
‘아니, 귀하신 공동 황제께서 이런 조잡한 음식을 반란군 찌꺼기들과 함께 드시겠다는 겁니까?’
‘네? 뭐가 문제라도 있나요? 저,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던 시절부터 선지 구운 것도 좋아하고 국으로 끓여도 좋아하는데요. 좀 주시면 안될까요? 기왕이면 양파도 좀 넣으면 더 좋구요.’
잠시··· 긴장된 분위기에서 침묵이 감돌더라구요. 그리고 한참 후에, 제게 질문을 던진 고참병사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치더군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한때 내전 시기에 귀족가를 위해 싸웠던 병사들. 그들이 새롭게 지도부라고 들어선 이들이 곱게 보일리가 없다. 그리고 그 곱게 보이지 않는 자들의 정점에 선 소년이··· 비아냥 대는 자신들의 틈에 와서 평범한 백성처럼 굴고 있다. 그게 어떻게 보일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나는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을 바실에게 말했다.
“자신들을 그런 식으로 기만하지 말라고 소리쳤나요?”
그러나··· 답변은 이번에도 내 기대를 벗어났다.
“아뇨. 양파는 사도다! 진정한 선지국의 맛은 올리브에서 나온다! 라고 소리치더라구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발언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말도 안된다고 소리쳤고, 거기도 지지 않고 반박했죠. 그러다 결국 서로 납득할 수 없으니 실력을 겨뤄보자고 하고선, 한밤중에 서로 자기 방식으로 끓인 요리 대회가 열렸죠. 훗! 당연히 결과는 저의 승리. 선짓국에 올리브라니··· 그 무슨 언어도단을. 그래서 그렇게 한바탕 신나게 선짓국 대회를 절이고 난 다음부터··· 왠지 모르게 반감이 심하던 그 부대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리고··· 그 이후로 대회에 이기고 끓인 선짓국을 하도 맛나게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병사들이 저를 보고 선짓국 왕자(Blood Soup Prince)라고 부르며 전보다 친하게 대해 주더라구요. 그래서, 덕분에 오랫동안 중앙에 반감을 가진 테마의 병사들이 조금씩 내전의 갈등을 잊고선 저를 매개로 해서 다시 중앙에 협력하며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리고 어느샌가, 제 별명은 제가 훈련장을 떠난 이후로 너무 길다고 생각했는지 그걸 줄여 부른 모양이더라구요.
그리고 그 줄여 부른 이름이 바로 혈태자(Blood Prince), 근데 그것도 나중 가면 아군에서는 별로 안쓰여지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외부의 적들에게는 그 이름이 뭔가 다른 의미로 좀 전해진 모양이더라구요. 그래서··· 아마 공녀님도 그런 오해를 하시게 된 것 같고, 저도 처음 들어보는 별명에 당황해 버린 것 같아요. 하하하··· 알고 보니 좀 재밌는 사연이죠? 응? 근데 공녀님은 왜 뒷목을 잡고 불편한 표정을 지으세요?”
아니··· 이 답답한 반란군 출신 테마 병사 놈들아··· 지금 눈 앞에 너희들 주인 때려잡고 위에 군림한 놈이 경계도 없이 알짤거리고 있잖아? 그런 상황에서 올리브 따위가 뭣이 중헌디!!!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갈아타니깐 니놈들이 내전에서 진거잖아!!! 아오! 그리고 우린 저런 놈들한테도 진거고··· 거기다가, 그 별명의 근원이 겨우 그런 이유라고? 에라이, 미친 놈들아!!! 너희들 전부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할꺼야!!!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의 소리는 그저 목구멍에서만 맴돌 뿐이었고, 나를 보고 갸웃거리는 바실을 보고 나는 애써 진정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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