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황제께서는 따라진 와인을 한잔 비우고 말씀하셨다.
“키야! 역시 이 맛이야. 망할 마누라. 와인 정도는 맘대로 먹게 해줘도 될 것을 왜 맨날 사람을 여기저기 눈치나 보게 만들고··· 황제가되고 나니 불편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래도 즉위 초기에는 눈치는 좀 보여도 어디 슬그머니 나가서 술한잔 얻어 먹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아무튼, 네 덕분에 한동안 눈독들이던 와인을 이제서야 맛보는 구나. 자, 이제 제법 술기운도 오르니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조금 예전 이야기부터 좀 꺼내야 할 것 같구나. 내가 카르브나 출신의 몰락한 황족 후손이라는 건 들었지?”
“아, 네··· 들었습니다.”
“뭐, 말이 좋아서 몰락한 황족 후손이지, 사실상 그냥 카르브나 시골 촌놈이었지 뭐. 증조 할아버지가 제국에 내전이 시작되던 시기에 황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참패하고 카르브나에 유배되면서 우리 집안은 그냥 대대로 거기 살게 되었지. 예전에는 그래도 망해도 황족이라고 조금 가진 것도 있던 모양인데··· 그나마도 죄다 털어 먹고, 내 대에 이르러서는 남은 것이라고는 쬐끄만 호밀밭이랑 다 쓰러져가는 시골 농가, 그리고 기르던 가축 몇마리가 전부였지. 그러니 황족이란 말도 죄다 그냥 물건너간 소리였지.”
그 정도로 몰락한 건가? 나는 예상치 못한 황제의 과거에 좀 당황했다. 그래도, 시골 귀족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나는 살짝 반박 비슷하게 그에게 말했다.
“그래도··· 황족이셨잖습니까? 아무리 몰락하셨어도 카르브나에서는 나름 인지도가 있으셨지 않나요? 그럼 생계도 그렇게 까지 궁핍하셨을리는···”
“에이, 아니라니깐. 황족은 무슨··· 몇대 전에 방계 황족이 밥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왠지 혈통에 대해서도 좀 논란이 있어.”
“네? 논란이라뇨?”
“그게··· 증조 할아버지가 유배되고 여기 와서 할아버지가 태어나셨는데, 할아버지가 과연 증조 할아버지의 자식이 맞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쉬쉬했다고 하더라구.”
“흔한 뒷담화겠죠. 귀족가에서 혈통을 호사거리로 삼아 잡담을 나누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까?”
“역시 그렇겠지? 우리 카밀라는 이해해주네.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에 증조 할아버지가 유배되기 전에 받은 형벌이 다름아닌 거세형이었거든. 근데, 여기 온지 얼마 안되서 증조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덜컥 낳으시는 바람에, 어느 동네 놈팽이랑 바람이 난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는데··· 역시 헛소문이었겠지?”
아뇨. 그거 헛소문 아니네. 여보셔! 황제 양반! 그 놈팽이가 사실은 당신 진짜 증조 할아버지라고!!! 상식적으로 그래야 말이 되잖아!!! 내가 그렇게 어이없이 알게 된 황제의 출생의 비밀을 듣고 뒷목이 아파오며 절규를 참는 동안 황제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뭐, 그래서 덕분에 황족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이곳 콘스탄틴노플에서는 완전히 잊혀진 신세였고, 그냥 어린 시절에 나는 카르브나의 평범한 호밀 자영농이었지. 아니, 평범 이하인가? 가족들도 다들 어린 시절에 돌림병으로 죽고, 나만 홀로 남아서 그리 크지도 않은 밭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손에 쥐는 것은 얼마되지 않았으니··· 사실상 지주 댁 농노들보다도 못한 처지였지. 그래서, 그 시절에는 어떻게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이든 더 해서 입에 풀칠을 해야 했었지.
근데 다행스럽게도··· 나도 나름 호밀밭을 가진 농사꾼이다 보니, 그 지방에 호밀을 키우는 자영농들의 조합이 있었는데··· 거기서 곡물을 상단에 매매하거나, 혹은 정부 납품을 하는 등의 일을 해줄 직원을 필요로 했어. 그래서 내가 지원했지. 어차피 밭에서 나오는 건 몇푼되지도 않는 상황이니, 거기 매달렸다가는 딱 굶어죽기 좋았거든. 그래서, 조합 어르신들에게 내가 수확한 곡물들 판로를 개척개척 다닐 테니 납품을 따내는 것에 대해 수수료를 주는 식으로 써달라고 했지.
조합에서는 큰 기대를 안했지만 그래도 일단 고용을 해줬어. 그래서··· 그때부터는 밭은 대충 옆집에 빌려주고, 조합에서 호밀 영업사원으로 일하게 되었지. 근데 일을 해보니, 은근히 그게 적성에 맞더라구. 나는 뭐랄까 밭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 보다는 사람들 만나서 안면트고 서로 친해져서 거래 트는 일이 천성이더라구. 그래서, 나름 열심히 일했어. 예전에는 그냥 지역 상단들이나 지방 관청에만 납품되던 상품을 여기저기 발품 팔면서 판로를 개척하니, 돈도 벌고, 나름 인맥도 생기는 것이 쏠쏠했지.
그러면서 내가 그때 만난 최고의 인연이 바로··· 지금의 황후였지.”
“응? 황후 마마를 그때 만나셨다구요? 저는 듣기로는 황후 마마는··· 베니스 출신이라 들었는데요?”
“맞아. 정확하게 말하면··· 제국에 귀화한 베니스 상인이 들인 불가리아 첩 사이에서 본 것이 황후였지. 그때 황후는 자기 집안 상단에서 운영하던 곡물 수매 사업에서 경리 담당자로 있었는데··· 항상, 깐깐한 태도 덕분에 다들 상대하기를 꺼려했지. 사실, 내가 영업 사원으로 뽑힌 이유도, 나름 조합의 간부들이 하도 까다롭게 구는 황후와의 거래를 진저리를 내서 대신 상대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도 큰 모양이야. 그런 이유였지만, 나는 나름 즐거웠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젊었던 시절에도 황후는 대단한 미인이었거든.”
나는··· 황제의 어이없는 이유에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태도에 대해서, 황후 마마가 폐하를 곱게 봐주시던가요?”
“아니, 그럴리가 있나? 당연히··· 눈물이 쏙 빠지도록 지독하게 면박당했지. 우와··· 독설 찰지데. 심장 약한 사람이 황후랑 차마시다가 숨을 거뒀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지독하게 사람을 매도하더라구. 당연히 거래도 완전 박살나고··· 형편없이 당해버렸지. 무슨 시궁창 구더기 보는 시선으로 보면서 살벌하게 내쫓더라구.”
왠지··· 황제 하는 짓거리 보면 나라도 그랬을 것 같기는 하다.
“근데··· 어떻게 황후마마의 마음을 돌리신 거에요?”
“돌리기는··· 계속 매도당했지. 갈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나날이 독설이 더 업그레이드 되는 것을 느끼면서.”
어처구니 없음도 이 정도면 정말··· 그런데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의외로 만나자는 것에 대해서는 거절하지는 않더라구. 뭐, 본인 말로는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여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종종 약속을 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상단 상담실에 도착하면, 평소보다도 더 화가 난 얼굴로 보자마자 화를 버럭내는 황후가 있었지. 아마··· 나름 말은 그렇게 해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어지는 걸 보고 속에 불이 올라온 모양이야. 그걸 보고 알았지. 아, 이 사람은 내가 마음에는 안차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건 아니구나 하고 말이야.”
아뇨. 누구라도 약속 시간에 늦으면 그렇게 화내는 것이 정상이겠죠. 남자들이란 정말···
“근데, 그때쯤에 황후에 대한 어떤 소식이 들려왔어. 아까 황후가 귀화한 베니스 상인의 첩의 자식이란 얘기를 들었지? 뭐랄까나··· 황후는 유흥가에서 춤을 추던 모친의 핏줄이라는 것에 조금 콤플렉스가튼 것이 있었나 보더라구. 그래서, 부친에게 실력으로 인정받으려고 나름 경리 공부를 열심히 해서 상단에 일에 종사했던 건데··· 의외로 유능한 그녀에 대해, 이복 형제들은 물론 부친도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성가신 그녀를 상단에서 내치기 위해서 거절하기 힘든 큰 거래 상대인 지방 지주의 자식과 정략 결혼을 주선한 모양이더라구. 그래서··· 그 상단의 악질 경리가 드디어 시집간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다들 환호했지.”
“엥? 그··· 그런 일이? 그럼 황후 마마께서는 어떻게 폐하와···”
나의 질문에 황제는 웃으며 추억에 잠기듯이 말을 했다.
“하아··· 뭐, 나는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지. 뭐랄까, 나만 보면 성질부터 부리던 여자였지만, 왠지 일에 대해서는 진지하고, 터무니 없다고 생각되는 제안도 나름 효율성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는 상대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름 시달리면서 정이 들어서 그런지 이제 시집가면 다시 상단에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좀 울적하더라구. 그래서··· 한잔 하고 취기에 별 생각없이 상단 사무실에 들렸는데, 야근을 하고 있던 그녀를 만났지. 그리고 조금 놀랐어.”
“네? 왜요?”
“그녀가··· 울고 있더라구. 물론, 나를 보고선 황급히 눈물을 닦고 영업시간 끝났다고 취객은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소리치기는 했지만. 근데··· 그걸 보고 어떻게 발걸음을 돌려. 괜히 이 핑계 저 핑계 대고선 자리 잡고 앉아서 운을 떼었더니,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보면서 말도 안되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잘못되었다며 가족들을 비난하더라구. 그걸 보면서, 취기 탓이었을까? 나는 그냥 빈말로 이렇게 말했어. 혹시··· 그렇게 내키지 않는다면, 차라리 도망쳐 버릴래요? 나랑 같이?”
“에엑!!! 정말로 그렇게 말하셨다구요?”
“그래··· 그땐 내가 정말 미쳤지. 그리고··· 황후도 내가 미쳤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 말에 대한 황후의 답변은 언행일치로··· 옆에 있던 불쏘시개를 들고선 사정없이 나를 두들겨 패는 것이었지.
‘야, 이 미친 새끼야!!! 내가 우스워 보여? 만만해 보여? 네까짓 가진 것도 없는 거렁뱅이가 함부로 수작부려도 될 만큼 싸보여?!!’
그렇게 분노를 터트리며 사정없이 나를 두들겨 패더라구.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뭔가 하는 말이 핀트가 이상해지더라구.
‘뱃편은 있어?!!! 여비는? 없다고? 에라이 미친 놈아!!! 전에 준 납품 대금은? 뭐? 조합에 금고에? 삥땅 친거 아니었어? 이 더럽게 정직한 색꺄!!! 그런 일에만 성실하지 마! 쥐뿔도 없는 주제에 무슨 도망은 무슨 개수작이야···!!!’
그리고도 쥐여 패는 건 멈추지 않다가··· 나중에 가서는···
‘자! 잘봐바. 여기서 케르손까지 가는 뱃편은 다음주 수요일. 하지만 정기선을 타면 들키니 당연히 밀수선에 타서 중간에 기항지에서 갈아타고··· 뭐해!!! 적어! 준비해야 할 것은, 가짜 신분증이랑 세례 증명서랑··· 응? 세례 증명서는 왜 필요하냐고? 애 낳으면 사생아 만들꺼냐!!! 이 씨부럴 놈아!!!’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케르손으로 손잡고 야반 도주하고 있더라구. 아, 역시··· 술이 웬수. 그런 말은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다시 생각해봐도 뒷목 땡기네.”
아무렴 나보다 뒷목이 더 땡기실려구? 아니··· 신성 동맹에게 사탄과 리리스로 여겨지는 미친 황제와 베니스의 독거미가 결혼한 경위가··· 고작 저거라구? 아오··· 저걸 누가 믿어?!!! 그리고 술이 웬수인 걸 알면 그만 처먹어!!! 그리고 다시 한모금 와인으로 목을 축인 황제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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