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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관용구?”
“네··· 그러니깐, 제국 외교 문서 기준에 명시된, 문화와 종교가 다른 적성국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우월한 지위에서 외교 협상을 벌일 경우에 사용할 문구에 대해서 표준 양식으로 만들어 놓은 거죠. 고대 게르만 부족들과의 전쟁에서 이어진 전통입니다. 그들은 전쟁을 마치고 모든 싸울 수 있는 전사들이 다 죽으면, 꽃이라 불리는 그들의 종교 지도자를 겸하는 여성 지도자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형식으로 종전이 이뤄지곤 했는데··· 그 당시에 사용되던 전통 문구 양식이 사문화 된 지금도 남아 있는거죠.”
“엥? 뭐야 그럼··· 제국이 항상 다른 나라에 외교 협상을 할때면··· 우선 닥치고 기집애부터 인질로 내놔라! 라고 요구하면서 협상을 시작했다는 거냐?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뇨··· 그건 아니죠. 이것이 사문화된 외교 문구라는 건 각국의 모든 외교관들이 다 알고 있기에, 항상 서신을 받은 후에 보내는 답신 사절은 그 요구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지만, 그건 들어줄 수 없고 대신 좀더 실질적인 대가를 지불하겠다. 그러면 우리 제국 측에서도 정 그렇다면 귀국의 명예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부족하지만 그걸 수용하겠다··· 라고 답신을 하면서 협상을 진행하죠. 항상 이런 식으로 협상을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근데··· 설마··· 답신 사절이 그걸 전하지 않은 건가요?”
그 바실이라는 남자는 왠지 나와 총사령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걸 들은 나는··· 정말 뒤로 넘어가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대답을 할 수 없게··· 머리가 없는 상태로 돌려보냈죠. 그리고 정리해 보죠··· 지금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어느 외교 초보가 멋도 모르고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문서 실수 덕분이라는 건가요?”
총사령관은 말이 없었다. 그저··· 먼산으로 시선을 돌리고, 억지로 우리들의 시선을 외면하며 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본 바실은 총사령관에게 물었다.
“저기··· 사령관님? 공녀님이 물어보시는데요···”
“으아아앙!!!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난 최선을 다했어! 하기 싫고 참모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데도, 밤잠 설쳐가며 열심히 문서 작성 했어!!! 근데 사고나면 왜 나보고만 책임지라는 거야!!! 다 싫어! 누가 나 좀 집에 보내줘!!!”
그걸 보며··· 나는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하하하··· 이게 뭐야? 바이에른과의 동맹을 차단하기 위해 세기의 신부에 훼방을 놓으려는 제국의 책략? 공작님, 헛다리 짚으셨어요··· 지금 얘들··· 그런 건 아무런 관심도 없는 놈들이라구요. 그리고··· 지금 정말로 집에 돌아가고 싶은 것은 나라고!!! 이 망할 자식아!!! 대체 난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아가씨의 대역으로 여기에··· 차마, 그걸 입밖에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분만 삭히고 있는데··· 그 상황을 본 바실이 말했다.
“저기··· 총사령관님. 기분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수습은 어떻게든 하셔야죠. 뭐, 일단 보아하니, 총사령관님에게 하달된 다른 외교 협상 조건들은 다들 헝가리에서 동의한 모양이네요. 그렇다면··· 결국 남은 것은 지금 여기 계신 공녀님의 신변인데··· 어쩌죠? 역시 그냥 돌려보내야 하려나요?”
“야! 미쳤어? 지금 이 상황을 훤히 봤고, 우리가 보내라고 해서 왔는데 어떻게 돌려보내? 제국의 명예에 똥칠할 일 있어?”
똥칠할 명예가 있기는 하냐?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바실이 말했다.
“그러면··· 어쩌시려구요? 해결 방법은 있으세요?”
“끄응··· 결국, 이건 모두 외교에 문외한인 나한테 이런 일을 맡긴 탓이지. 그러니··· 이 일에 대한 해결은 내가 아닌 윗선으로 넘긴다. 바실, 내일 너 콘스탄틴노플로 귀환한다고 했었지?”
“아, 넵. 임무 마치고 귀환 예정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네가 좀 수고를 해라. 발칸 방면군 총사령관으로 명한다. 내일 너는 황성으로 귀환하는 길에 지금 여기 사절로서 온 카밀라 공녀와 동행해서 돌아가라. 그리고 곧바로 이 경과에 대해 부콜레온에 고하고 의사 결정을 받도록 해라.”
그의 말에 바실이 말했다.
“아, 역시··· 황제 폐하에게 직접···”
“그래. 지금으로서는··· 그 무엇도 간단히 결론내릴 수 없다. 결국 그녀에 대한 조치는 폐하가 내리시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결론이겠지.”
나는··· 숨을 죽였다. 지금까지 지나치게 가벼워진 분위기에 다시 긴장감마저 흐르는 것 같았다. 콘스탄틴노플의 미친 황제··· 그에게 나를 데려간다고? 어쩌면··· 지금 본전을 다 드러내서 지나치게 가벼워 보이는 혈태자와는 달리··· 여전히 그들에게 무거운 의미로 여겨지고 있는 그의 존재가 더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엄청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얼마전 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공작가의 하녀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시련을 하나 넘기는 듯 하다가 또 왜···
가능하다면 돌아가고 싶다. 그들의 실수로 치부하고 입다물겠다고 한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그곳에는 내가 머물 곳이 이미 없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사람들도 나를 더 집에서 더 먼 이국의 땅으로 데려가려 하고 있다. 방금 전 나타나 왠지 듣던 거랑 달리 어리숙한 혈태자와는 달리 좋은 느낌이던 바실은 야속하게도 그 명령에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공녀님을 모시고 황성까지 안전하게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믿고 맡기겠다.”
그리고 총사령관에게 경례를 한 바실은 나를 보며 말했다.
“자, 오늘 머무실 곳을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공녀님···”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 바실 기다려라.”
“네? 더 당부하실 말씀이라도···”
나는 순간 긴장했다. 뭐지? 그런데 그때였다. 그는 바실이 나가려는 반대 방향으로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숙소는 저쪽이다.”
“아··· 하지만, 귀빈용 막사는 동쪽에 설치를 했습니다만.”
“그래. 거기는 서쪽이다.”
순간··· 왠지 모를 침묵이 감돌았다. 뭐지··· 이 자식은 또 왜 이러지? 나는 머쓱해하면서 머리를 긁적이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안내하는 바실을 보면서 왠지 이 녀석도 조금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왠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길게 느껴졌던 시간을 마치고··· 나는 바실의 안내를 받아 내가 머물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는 시녀장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녀는 들어오는 나를 보고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 나에게 다가와 속삭이듯이 말했다.
“어떻게 되었느냐? 그가 뭐라고 하더냐?”
나는··· 지금 내가 겪은 일들을 그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아니, 일단··· 그 말도 안되는 사정을 믿기는 하려나? 그래서, 나는 최대한 내용을 생략하고 결론만 말했다.
“아··· 일단은, 저를 콘스탄틴노플에 보내 황제에게 제 처우에 대한 결정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흠··· 과연. 역시 만만치 않군. 다짜고짜 템즈의 꽃을 전리품 취급하며 범하려고 드는 놈이었다면, 차라리 다루기가 편했을텐데···”
아뇨. 조금 만만해 보여요. 하지만··· 나는 내가 그에게 범해지는 걸 오히려 바랬던 것 같은 시녀장의 말에 조금 기분이 상해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주위를 의식했는지 더 길게 물어보지는 않고 중요한 사실들만을 확인하고 우리는 잠이 들었다. 침대는 야전에 놓인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뭐, 아가씨라면 불편함을 느끼실지도 모르지만, 나 같은 하녀들이야 뭐···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잠은 잘 오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어떤 운명을 겪게 되는 걸까? 그런 고민에 쉽게 잠들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러면서 왠지 오늘 일에 대해서 여러 차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뭔가, 어리숙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나에 대해 조금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그래도 그나마 조금 편해 보이던 사람··· 내일부터 나를 수행하라는 명을 받고 콘스탄틴노플까지 동행하게 될 바실에 대해서 왠지 생각이 많이 났다. 카알 공자님이나 혈태자 만큼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은 아닌데도 그 편안함을 느끼게 만드는 소박한 모습탓일까? 나는 그래도 왠지 나를 안내하며 우호적으로 대하던 그에게 조금 마음이 쓰이는 것을 느꼈다.
“저런··· 숙면을 취하지 못하셨나 보군요. 역시··· 지금 처하신 상황이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저희들의 과실로 이런 어이없는 경우에 공녀님을 처하게 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다음 날, 떠날 차비를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나를 보며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차피··· 조국을 위해 돌아갈 다리를 끊고 온 몸입니다. 더한 것도 각오했는데, 겨우 그런 일 정도야···. 어차피 황제 폐하를 뵙고 우리 나라에 대한 관용을 베풀어주심을 청하는 것은 공녀로서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책무입니다. 개념치 마시고 그대는 그대의 책무를 다하십시오.”
나의 말을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황성에 도달하는 여정이 불편하지 않게 수행하겠습니다. 이제 출발하시죠. 총사령관님도 배웅하러 나오셨습니다.”
그의 말처럼··· 혈태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군장을 차린 모습으로 참모들과 고급 장교들과 함께 출발하는 대열을 향해 걸어왔다. 그를 보며 바실이 말했다.
“발칸 방면군 총사령관님에게 현지 파견 임무 수행 종료 후 지원 해제를 신고합니다. 그리고 새로 받은 템즈의 꽃을 어전까지 수행하는 임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할 것을 신고합니다.”
“그래. 그 동안 여기서 수고가 많았다. 가서 폐하에게 잘 보고드리도록 해라. 그리고 카밀라 공녀··· 그대도 잘 가시오. 많이 불쾌할지도 모르겠지만, 부디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은 알아줬으면 좋겠소.”
고의가 아니겠지. 그런 바보짓이 고의면 어떻게 하냐? 나는 대체 어떻게 십자군을 미로크슈에서 뭉게버렸는지 이제는 연상조차 잘 안되는 혈태자를 보며 말없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바실이 말했다.
“자, 출발이다. 목적지는 콘스탄틴노플이다. 가자.”
그런데 그때였다. 혈태자가 말했다.
“바실, 잠시만···”
“어? 왜 그러십니까? 달리 더 당부하실 일이라도···”
순간 행진을 멈춘 혈태자는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거기는 부다페스트 방향이다. 콘스탄틴노플은 반대쪽이다.”
“······”
잠시 동안···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나··· 무사히 콘스탄틴노플에 갈 수 있을까? 왠지 가는 도중에, 미친 황제를 어서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헤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느끼며··· 나는 다시 한번, 집에 좀 가고 싶은 기분을 사무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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