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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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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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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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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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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171. 괴물의 앞

DUMMY

과학도로서 지나치게 폭급한 일은 지양하고자 하는 그녀였다. 그럴 일도 없었겠지만, 이곳이 현실 세계라고 한다면 그녀에게 이와 비슷한 힘이 주어져도 훨씬 신중할 테다.


크어어어어어어어.


멀리서 짐승이 울부짖는다. 지렁이가 우는 소리였다. 지렁이가, 울기도 하나? 궁금해지지만 놈의 생김새는 눈도 없는 벌레의 그것이었다. 지렁이를 거대하게 확대를 해둔 모양인데, 워낙 거대해서 현실감이 없다. 그러나 그 속에는 소리를 내는 기관도 있고, 뭐 여러모로 복잡한 게 있는듯. 저번에 잡을 때도 괴성이 나기는 했다.


쿠쿠쿵, 하고 주변의 지반이 떨렸다. 하늘에 있는 그들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검은 용은 그 몸을 바깥으로 빼내려 하고 있었다. 동굴 절벽을 바라보고, 화살과 번개의 창으로 겨눈 그들이다. 절벽 입구 근처의 암반이 떨린다. 진동. 거대한 괴물이 움직이는 것을 알게끔 도와준다. 떨림이 점차 커졌고, 최태현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새의 등 위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맞춘 채 조준을 끝냈다. 이미 일정하게 움직이는 새의 등을 계산했고, 그에 따라 계속해서 자신의 근육을 조정하는 것이다.


화살촉. 자철시에 물든 푸른 기운은 점점 더 정밀해지고 작아졌으며, 거대한 힘으로 바뀌어갔다. 파워 샷, 차지 샷을 비롯해 온갖 스킬들이 한번에 쓰이고 있었다. 궁술사로서 가지는 십 수 종 이상의 패시브 스킬들이 그의 조준을 보정했고, 화살을 쏘고 있는 자세에서의 근력과 순발력을 더해주었다.

같은 스텟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쏘는 그 동작에서는 최태현이 훨씬 거대한 힘을 빠르게 잘 낸다. 그것들이 반복 행동을 통한 스킬의 묘용이었다.


제냐도 최태현도 기감을 활성화시켰다. 동굴의 어둠 속을 바라본다. 내부로부터 뭔가가 쏟아지듯 나온다.


릿샤는, 그 십 여 초 동안 스킬을 마무리했다.


번개가 무수하게 쏟아졌다. 그녀의 팔로부터 시작된 번개들이었다. 마치 농후한 액체처럼 보이기도 하는 뇌정의 기운들이 그녀가 만들어낸 폭풍에 스며든다. 구체는 애초의 그것보다 조금 더 작아졌다.

완벽한 파괴를 위해서 형상을 응축시키고 있는 것이다.

둥그런 구체. 어마어마한 MP를 품고 있었고, 이미 대형 파괴를 일삼을 폭탄이나 다름없는 물질이었다.


릿샤가 갖고 있는 녹림원은 단기적으로 100,000여 정도의 MP를 보관 후 꺼내어 쓸 수 있는 보구였다. 충전 시기와 사용 시기가 많이 떨어지면 가용한 저장량은 50,000 정도로 떨어지고, 그게 일반적인 사용 시의 용량이었다.


결전의 때가 확실하다면, 그 직전에 자신의 MP를 모두 쏟아부어 전투 준비를 하는 게 가능한 셈이다. 이번 검은 용의 토벌은 시기가 확실히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기에, 그만한 MP를 모두 가져왔다.

동시 영창으로 중첩 스킬을 만들고 있다. 그녀의 천재적인 두뇌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복합 기술을 완성해냈다. 여러 종의 스킬들이 뒤섞여서 한 개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질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MP의 손실율도 거의 없었고, 시너지만이 존재했다. 오롯이 거대한 파괴를 위해서. 그게 그녀가 추구하고 있는 방향성이었다.


검은 용.

놈을 잡기 위해서 직전의 사냥에서는 그야말로 피똥을 쌌다.

아니, 싸지는 않았지만. 더럽게 힘들었다는 의미에서의 비유이다. 릿샤는 모르지만 ‘호아킨은 그랬을 지도 모르지······.’ 라고 하기엔, 현실이 아니라 비련의 시나리오라는 게임 속이라 그런 일은 달리 없었다.

생리적 현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게임성을 추가해 보정해주는 셈이다. 퀘스트 씬의 묘사 중에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 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 플레이어가 그런 일을 겪고 감각을 당하게끔 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트라우마가 될 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실제로 구현한다면 정말 아주 오랫동안은 찜찜한 기분에 시달려야 할 정도로 현실적인 감각의 구현이 가능한 세계였다.


MP를 한 번에 전부 사용하지 않더라도, 순식간에 과도한 양이 손실되면 MP고갈에 빠지기도 한다. 그녀는 위장이 거의 다 찰 정도로 MP포션을 마신 상태였지만 중첩 스킬을 위해서 써내는 기세가 너무 대단했다. 머리는 이미 현기증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지럼증, 구토 증세. 메스꺼움. 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들이 캐릭터에게 나타났다. 그녀가 그런 느낌들을 전부 선명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캐릭터의 조작이 이상해진다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릿샤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버텼다. 유저 개인의 피지컬로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말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고수급으로 넘어갈수록, 워메이지들에게 MP고갈로 인한 현기증은 늘 달고 사는 벗같은 존재였다. 점차 MP고갈을 많이 겪을수록 현기증에 내성도 생기고, 관련한 패시브 스킬마저 있었다. 완벽하게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신체의 어느 기관에 이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고, 정신 에너지를 쓰다보니 일어나는 현상이었기에. MP를 과도하게 쓰지 않고 요양을 취하는 것 외에는 딱히 치료법도 없었다.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기는 것과, MP 고갈로 캐릭터 아바타가 이상 행동을 보일 때마다 그에 맞춰 머릿속에서 행동을 보정해서 움직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둔하게 움직일 것을 예상해서 더 빠르게 반응하고, 강하게 힘을 쓴다던가 말이다.


그녀의 앞에 선 폭풍의 구체는 도리어 조용해졌다.


그건 마치, 릿샤라는 여성이 평소에 가져 온 어떤 슬픔의 양을 나타내는 것처럼도 보였다. 폭풍을 빚어내는 마녀라니. 그럴싸하지 않은가. 마녀라는 표현은 그녀에게 있어서 조금 지나친 것이 될 테였고. 그저 살면서 응어리졌던 많은 후회나 원념들을 발산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릿샤라고 다를 바 없었고. 오히려 그녀는 조금 더 유별날 성격과 좋은 머리 때문에 많이 받는 면이 있었다.


릿샤의 머리가 붉게 물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고 그냥 선천적인 것이었지만.


쿠르르르,


하고 땅이 울어댄다. 안쪽에서 거대한 괴생물체가 나오려 하고 있기에 그렇다. 곧 지진과 같은 잔떨림이 일대에 나타난다. 아주 먼 지역까지 퍼지는 울림은 아니었다. 동굴 절벽을 근방으로, 길어야 수십에서 수 백여 미터 정도에 서 있는 자들만 느낄 테였다.


검은 용이 거대한 동굴의 입구를 꽉 채우면서, 돌 부스러기를 흩어내며 튀어나왔다.


검은 용이 그 동굴을 자신의 집으로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오래도록 드나들었다면 자신의 몸집에 맞추어서 돌굴의 입구 크기가 더 늘어났을 텐데. 혹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동굴이 아니라 최근 검은 용이 암석을 씹어 삼키고 자신의 집을 만든 것일 지도 몰랐고.


청명한 하늘 아래. 데슈칸 산맥. 사람들은 오질 못하는 마경의 심부. 그 허공과 대비되는 깎아지는 듯한 절벽에서 검은 것이 튀어나온다.


‘검은 용’이라는 이름답게, 빛을 빨아들이는 형상이었다. 모든 검은색은 그렇기는 하다만. 특별히 더 검었다는 뜻이다. 시커멓다. 저기만 채색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몸의 굴곡 역시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보면 돌기나 주름 따위가 보이는데, 멀리서는 그저 시커먼 형체가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인다.


“크어어어어어어!”


사나운 육식 동물이 울부짖는다고 생각될 정도의 굉음이 그것의 성대로부터 튀어나왔다. 지렁이에게 성대가 있나? 대충 소리를 만드는 발화 기관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것을 대강 성대라고 부르기로 하자.


검은 용의 지름은 상당했다. 흑사와 비교했을 때, 조금 더 큰 모양이었다. 이제 그러면 길이를 보아야 할 테다. 지구상 최대의 동물인 흰수염고래의 가장 큰 부피와 체적 등. 그만한 크기를 대형종의 한계라고 본다.

거기서 넘어가서,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생물의 크기부터 ‘거대형’으로 취급한다.


검은 용은 종적 한계가 딱히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몹은 아니었다. 있기야 하다만, 다른 네임드 몹에 비해서 덜하다. 고수 정도 되는 이들 다섯 명이 잡으러 왔지만,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제냐는 동굴에서 튀어나오는 검은 그림자를 노려보았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보기 좋아 보이는 꼴은 아니었다. 조금 징그럽기도 하고. 이질적이고, 괴상하다. 거기다 흉폭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거대한 흙지렁이라니. 대형 덤프 트럭보다도 큰 덩치였다. 그만한 덩치를 가지고 끝도 없이 길게 뻗어나온다.


아마 ‘거대형’인 것 같았다. 체격이 커졌다는 말은 HP를 비롯해 온갖 물리 스텟들이 커졌다는 말과도 같다. 결국 ‘강해졌다’는 뜻과 그리 차이가 없다. 검은 용을 토벌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이 커졌다는 말이고.

레벨이 올랐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이들만으로 잡을 수 있을까. 이미 일은 터졌다. 검은 용은 그들이 자극하기도 전에, 이미 활동 시간이 되었는지 깨어나 바깥으로 웅크렸던 몸을 꺼냈다. 기지개를 피는 것 같았지만, 참으로 보기 어려운 장관이었다. 절벽이 떨었다. 나오고 있는 도중이었는데, 그것은 동굴의 바깥 멀리 허공으로 몸을 뻗는다.


그 밧줄같은 몸체 안에 들어 있는 힘이 아주 강력한지, 그리고 뒤쪽으로 남아 있는 자신의 몸뚱이가 아주 긴 건지. 먼 허공까지 뻣뻣하게 뻗는다. 공중에 날고 있는 어지간한 새도 그대로 씹어 먹을 수 있을듯한 꼴이었다.


릿샤와 호아킨이 지난 날의 경험을 살려 아주 먼 거리에 자리를 잡자고 한 건 충분히 그럴만한 조언이었다. 어설프게 근처를 날고 있었다가는, 그대로 검은 용의 몸뚱이에 휩쓸려 게임 오버를 당했을 수도 있었다.


라이엔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로서는 인연이 없는 생물체였다. 고수급이었지만, 자신보다 격하의 상대들을 잡아왔다. 라이엔 개인으로 보자면 레벨이 높은 몬스터들이었다만, 썬더스와 함께하는 사냥 방법을 그녀의 총 전투력으로 계산하면 격하였다.

그녀에게 있어 테이밍 스킬은 아주 특출난 무기였다. 그녀 스스로도 뛰어난 의지력을 가진 지휘관이기도 했고.

썬더스는 그런 그녀의 최고의 파트너이자 도구가 되어준다.


상대가 반응할 수 없는 높은 상공에서, 순간적으로 음속을 넘는 정도의 속도로 날아들어 질량 공격을 해낸다. 그녀가 갖고 있는 온갖 스킬과 초상력은 그 순간의 충격을 견뎌내고, 제대로 공격을 하기 위해서 세팅된 것들이었다.


한 순간의 공격만으로 그녀는 상당히 높은 레벨의 적까지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상성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공격력을 상회하는 방어력이나 체력을 갖고, 또 그녀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공격 수단이 있다면 적절한 사냥감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자신이 공략할 수 있는 일부의 몬스터들을 상대로만 쌓아 올린 경험치였고, 그 전략의 노련함은 그녀에게 높은 경험치로 돌아왔다.


정확히 말해서 전투 클래스가 아니다, 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설명하고 싶었다. 그냥 썬더스의 등 뒤에 타서 여기저기를 날아다닌고 싶을 뿐인 것이다. 여행자라는 말이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이 게임 내에서는 말이다.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면 하고는 싶었지만, 워낙 국제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싸늘하기도 했고. 여성 혼자 돌아다니기에 힘든 구석이 있었다. 돈이라도 많다면 모르겠지만. 대개 안전한 지방은 비싼 면이 있다.


열심히 일을 하고, 4, 50대 즈음에는 돈을 모아 퇴직을 하는 게 꿈이었다. 퇴직금을 합쳐서 작은 가게라도 하나 차리는 것이다. 책방도 좋았고, 가상현실 기기로 다양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서비스하는 VR기계방도 좋았다. 아무거나. 동네에서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사업체라면 무엇이든 좋다. 그것도 많은 준비가 필요한 일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게 라이엔, 아윈의 오랜 꿈이었다. 그를 위해서 지금은 선배들에게 늘 갈굼을 당하고 있는 시절을 견뎌야 한다. 못견딜 정도도 아니었고, 인격적으로는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적정선의 워라밸에서 조금 더 빡센 편이라는 게 약간의 힘든 점이었다.


라이엔은 도망치고 싶다, 혹은 상황이 정 안좋아지면 냉큼 튀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썬더스와 브라운에 대한 통제를 다시금 확인한다. 두 마리의 괴조들은 검은 용이라는 네임드 몹의 등장에도 떨지 않았고,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테이머가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견고한 신뢰와 더불어 강력한 테이밍 스킬의 끈으로 이어져 있는 펫과 테이머의 유대는, 불구덩이 속에도 의지만 있다면 같이 뛰어들만큼 강한 것이었다. 전투를 같이 치러야 한다는 건 그런 의미다. 어려워 보이는 난관도 함께 뚫어내야 한다.

여태껏 라이엔도 나름대로 어려운 난관들을 많이 뚫어내며 성장해왔다. 그걸 즐기지 않을 뿐이다. 검은 용의 위세는, 시커맸다.

이상한 말이다.


아주 빛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푸른 하늘 아래에, 느닷없이 잘못 그림이라도 그린 것 같은 시커먼 그림자가 요동쳤다. 그 움직임의 기척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정력은 상당한 위용이었다. 육체적인 힘 외에도 검은 용이 뿜어내는 MP의 양이 상당했다. 라이엔 역시 초상술사이고, 마물술사로서 MP를 어느 정도는 느낀다. 검은 용의 기척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두려움이 퍼져나갔다.


저만한 크기의 네임드 몹들이 종종 갖는 피어Fear류의 스킬 때문이었다. 초월방어력이 좀 낮다거나, 레벨이 낮은 이들이 자주 영향을 받는다. 관련한 저항 스킬들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말했듯 그녀는 전투가 주 전공이 아닌 것이다. 자신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스킬들만 쏙쏙 골라서 익히고, 레벨을 높여왔다.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은 상당히 부족한 게 라이엔이었다.


그녀의 뒤에 탄 최태현은,


시위를 당기고 있던 자세를 풀었다. 검지와 엄지가 놓였고, 그 사이에 잡혀 있던 화살은 장력의 영향을 받아 그대로 미사일처럼 날았다.

정말 미사일처럼 날았다. 추진력을 뒤로 뿜어냈고, 화살대 전체에서 스스로를 앞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했다. 기력술의 응용이었다. 기력술 역시 그렇게 써먹을 수는 있었다. 궁술사들의 최종기라고 할만한 기술들이었다.


일반적인 기력술사들, 근접 전사들 역시 자신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힘을 기력술을 응용해 만들어낸다. 궁술사들은 기력술사이지만 활과 화살에 끝없이 집중하는 존재들이었다. 일반적인 기력술사들에 비해서 조금 더 지속력이 높은 기력들을 다루었다. 그건 그들이 다루는 ‘기력’의 특질이었다.


자신의 몸뚱이를 다루는 것에 한계를 가지는 근접 전사들에 비해서. 궁술가들은 화살을 통해 허공에서 예술을 그려낸다. 관성을 제어하고, 추진력을 부여하고. 방향을 틀어낸다. 지금 최태현의 기력들, MP들이 하는 일은 오롯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것이었다. 다행히 검은 용의 몸뚱아리는 아주 컸고, 비대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지금 막 동굴 바깥으로 대가리를 꺼냈을 뿐이었고, 온전히 주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자신을 노리는 다섯 명의 사냥꾼들이 포진한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검은 용으로서는 비극에 가까운 상황이다. 사냥꾼들의 입장에서는 호조였고, 기회를 놓친다면 이후의 싸움이 쓸데없이 길어질 수도 있었다. 쓸데없는 전투는 무의미한 부상을 낳는다.


전투 클래스의 캐릭터이니만큼, 초인 그 이상의 회복력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계산을 잘못해서 전투 중 HP가 0이 되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릿샤가 조금 회복 스킬을 쓰기는 한다만 그 외에는 회복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네임드 몹을 사냥하러 온것이니만큼 아티팩트와 소모품 류에서 조금 챙겨오기는 했다. 마냥 믿고 있을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이만한 베테랑들의 HP를 모조리 회복시킬만한 아이템들은 값이 상당히 비싸다.

다섯 명 전부가 치명상, 중상을 입는다면 회복약이 부족해서 가만히 게임 오버를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충전 가능한, 지속적인 회복 수단은 릿샤의 미약한 회복 스킬이 전부다. 그녀에게 MP만 끝없이 공급을 해주면 어쨌든 치료는 해줄 테다. 아주 느리고 미미하겠지만.


일단 살아만 남고 도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신체 일부가 결손되더라도 큰 문제 없이 메꿀 수 있었다. 돈이 문제이기는 했지만, 지금 구매해서 온 온갖 소모품들의 비용을 생각하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 오히려 한 번의 전투를 위해서 구비한 모든 장비품 따위의 값이 더 비쌀 테다.


최태현의 화살. 자철시가 허공을 찢었다. 쌔애액, 하고 파공성을 내면서 날았다. 빛줄기 하나는 검은 용에게 가 닿는다. 순식간의 일이었고, 거체를 가진 괴물은 반응하지 못했다. 자철시의 촉이 검은 용의 목덜미같은 데를 찔렀다. 수 백 여 미터였으나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빠른 시간만에 도달을 했고, 최태현의 온갖 기력이 응축되어 있던 화살촉은 부드럽게 검은 용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검은 색의 흙지렁이라고 하지만 놈의 방어력은 상당했다. 거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신체 강도 또한 있었고,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방어 기능이 벌레에게 자체적으로 존재했다. ‘스킬’ 류일 것이다.


‘강철 피부’를 비롯해 온갖 종류의 패시브 스킬들을 뚫어내면서, 자철시는 반 이상이 검은 용의 몸뚱이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쑤욱, 하고 들어갔고. 1, 2초 정도 이후에 대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하는 폭음이 먼 거리에 있는 최태현과 제냐, 릿샤 등에게도 들렸다. 자욱한 폭연이 그 근처에서 터지듯 뿜어져나왔고, 검은 용의 근처 살점들이 흩어져 땅에 떨어진다.


“키이이이이!”


검은 용이 신음을 냈다.

연기가 걷혔다. 걷히기 전부터도, 검은 용의 거체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화살이 맞은 부분에, 사람으로 치면 이미 온 몸이 날아갔을 수준의 손실이 있었을 뿐이다. 그건 거대한 몸뚱아리 전체에 비해서는 그다지 큰 부분이 아니었다. HP로 보더라도 큰 손실은 아닐 테다. 그대로 관통력이 더 좋아서 몸체 심부를 터뜨렸다면 몰랐을까.


검은 용은 짜증이 난다는 듯 허공에서 몸을 뒤틀었고, 그게 동굴 내측에 있는 더 많은 몸체와 연결되어 있으니 암석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였다. 암반이 떨린다. 검은 용은 뱀이 대가리를 세우는 것처럼, 몸을 더욱 위로 세우며 릿샤나 제냐 등, 사냥꾼들이 있는 쪽으로 계속해서 뻗어온다.


아마 닿기는 어려울 테다. 거대형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크기가 산과 같지는 않지 않겠는가. 뻣뻣하게 일자로 유지할 수 있는 길이가 아무리 길어도 결국 신체 길이는 넘지 못할 것이고. 확실히 그 일부는 암반에 붙어서 지지대 역할을 해주어야 할 것이었다.


자철시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검은 용의 피부 겉면으로 보호막이 있는 것 같았다. 대개 거대한 생물체들은 그러하다. 특히 네임드 몹들은.

검은 용은 생긴만큼이나 터프한 녀석이었고. 자철시는 최초의 한방이었으므로, 일반적인 암석 절벽에서 터졌을 때보다 훨씬 적은 폭발력만을 보였다. 검은 용의 MP가 그 위력을 반감시킨 셈이다.


제냐 역시 묶어두었던 뇌정의 창을 놓아주었다.


그의 앞에서 형성되어 둥둥 떠 있던 놈이다. 푸르른, 눈을 찌르듯한 광량으로 허공에 존재감을 내뿜던 창.

번개의 창이 허공을 내달렸다. 주변의 대기를 불태우면서 나아간다. 실제의 번개처럼 화려한 질주는 아니다. 달리 말하면, 제냐가 의지력으로 MP들을 잘 제어했다는 뜻이었다. 난폭하게 열기를 주변으로 뻗치지 않았고, 뇌정의 창의 진행로 바로 근처로만 열기가 뻗는다. 공기를 집어삼키고 팽창시키고. 시끄러운 소음이 나타났다. 벼락이 주변을 울렸지만 위력에 비한다면 크지 않은 소리였다.


뇌전 계열의 스킬답게, 순식간에 뻗어나간다. 조금쯤 그 몸을 뒤틀면서, 복잡한 궤적을 그리면서도 결국에는 두 점을 잇는 일직선상의 결론에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각도가 변하더라도 결국은 노린 바 궤적의 끝지점에 닿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뇌전 계열의 원소술들이 피하기가 까다롭다.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난변화처럼 보이는 뒤틀림 탓에 어디를 노린 것인지 정확하게 추측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검은 용은 피하고 자시고 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괴물은 심기가 불편했고, 그 거대한 몸뚱이로 허공에 검은 그림을 그려내듯이 이리저리 뒤틀고 춤을 출 뿐이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력의 춤이었고, 뇌정의 창은 수월하게 다가가 검은 용의 뱃거죽 즈음을 맞추었다. 거기가 정확히 뱃가죽인지도 모르겠다. 검은 용은 원래가 지렁이이기도 했고, 생김새가 괴랄해서 정확한 신체 부위를 나눠 보기가 어려웠다.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대가리와 몸통, 그리고 아마 보지는 못했으나 꼬리 정도 뿐이다.


지금 위를 보고 있는지 아래를 보고 있는지도 헷갈리는 꼬라지다. 입은 거대하게 벌려서 소리를 토해낸다. 정확히 가운데 즈음이 갈라졌고, 그 안쪽으로 깊은 동굴과 같은 어둠이 검은 용의 몸 속으로 더욱이 보였다.

거대한 가시같은 이빨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고, 거기에 검은 용의 MP가 흐른다. 아무리 단단한 암석질이라 하더라도 씹어 삼키고, 흙으로 토해내기 위해 있는 이빨이다. 사람이 씹혀 들어갔다가는 제 형상을 유지하기 물론 어려웠다. 아주 초인적이며 특별한 스킬적 수단을 가진 고수급이 들어가는 게 아니고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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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212. 조금 시간이…. 24.03.10 14 1 17쪽
212 211. 한 번 불꽃처럼(악의) 24.03.08 15 1 21쪽
211 210. 미치광이는 그네를 거꾸로 탄다. 24.03.07 15 1 21쪽
210 209. 이동移動 24.03.06 14 1 20쪽
209 208. 지루한 옮김, 라이엔의 상념 24.03.05 17 1 21쪽
208 207. 지루한 옮김 24.03.05 16 1 14쪽
207 206. 퍼레이드parade 24.03.04 15 1 19쪽
206 205. 거북이 사냥 24.03.03 18 1 36쪽
205 204.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24.03.01 13 1 12쪽
204 203. 화살막이 24.03.01 14 1 19쪽
203 202. 방패, Shield 24.01.07 19 1 14쪽
202 201. 짜증 24.01.07 13 1 24쪽
201 200. 공습 24.01.06 15 1 22쪽
200 199. 필멸창 24.01.06 11 1 20쪽
199 198. 둘러 앉아서 24.01.05 17 1 14쪽
198 197. "…시작인가?" 24.01.05 16 2 23쪽
197 196. 띄어쓰기 24.01.05 12 2 15쪽
196 195. 호아킨은 웃었다. 24.01.05 9 2 11쪽
195 194. 귀퉁이 24.01.03 14 2 12쪽
194 193. 가즈아 24.01.03 15 2 14쪽
193 192. 독주 24.01.02 16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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