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린자의 시간 54
‘온다, 온다, 그래 그거야!’
-. 6월 11일 아파트 단지 내 보금자리 오후 02:10
읍사무소에서 내 아파트까지 한 십여 분 걸린 듯하다.
난 조급한 마음에 위험도 무릅쓰고 좁은 지름길을 달려 많은 시간을 단축했다. 그리고 녀석들에게 따라잡힐지도 모른다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내가 도착 한지 약 십여 분이 지난 뒤에야 녀석들이 아파트 앞을 지나치기 시작했다. 아마도 오는 방향이 서로 달라서 그랬을지도.
녀석들을 내 우측 시야에 두고 경주를 하듯 내달리며 막 도착한 참이다.
읍사무소에서 좀 더 시간을 지체했더라면, 아마도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어디에 선가 짱박혀 숨어있어야 될 판이었다.
‘그러면 살 수 있었을까?’
숨는다고 살 수 있겠느냔 건, 요즘 내가 믿고 있는 행운의 신만이 아실 일, 하지만 그분은 늘 행운과 불운을 동시에 주시는 분, 동전이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는 떨어져 봐야 아는 것, 역시 난 확실한 게 좋다.
소음보다 진동이 더욱 커다란 위압감을 주고, 그에 뒤따르는 녀석들의 물결이, 주변에 방치된 모든 것을 훑으며, 온통 주위를 들썩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녀석들에 선두가 보인다.
난 내 장애물이 아니 저 방벽이 제 역할을 해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빌었다.
한 달 반, 아니 거짐 두 달간의 노력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방벽이었다.
버텨야 한다, 버텨야 내가 산다. 또다시 녀석들에게 이곳을 내어줄 수는 없다.
초창기의 웨이브 모습을 뇌리에 떠올리며, 캠코더의 줌을 땡겨, 녀석들의 선두를 한 아름에 담아본다.
‘자 벽아 힘 좀 써보자!’
진동이 정점에 다다르고 소음과 함께 다가온 선두행렬, 녀석들은 초창기의 모습 그대로를 연출하며 그대로 그대로 전진해 오고 있었다.
녀석들이 다가섬에 따라 내 심장박동수도 그에 따라 급해진다. 그리고 그 속도가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
‘온다, 온다, 그래, 그래!’
녀석들의 선두가 방벽 앞을 곧장 지나쳐 갔다. 그리고 전진 또 전진하는 모습, 하지만 아직은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전에도 이러다가 갈라지며 점령당했었다.
만약 전처럼 이곳이 점령당하기라도 한다면, 단지 안은 커다란 녀석들의 독살(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전통적인 어로 방법 바닷가에 돌로 커다란 담을 쌓아 밀물에 밀려온 물고기를 잡는다.)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 안에 얼마나 많은 숫자가 갇히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해질 것이다.
두 번 다시 재기하는 건 요원한 일이 될 것이라고‥.
아니 세 번째던가‥?
나는 녀석들이 지나가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고대하며, 녀석들의 진행상황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렇게 십분, 이십 분,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시계가 5시 30분을 가리키던 순간, 녀석들의 행렬의 꼬리가 보이는가 싶더니, 그것마저 이내 몸통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래 그거야!’
나는 핏발이 선 눈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함께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살았다, 살았어!’
그날 저녁 관리사무소 안.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후레쉬 불빛 하나에 조명을 맡긴 채, 믹스커피 한잔을 종이컵에 타서 마시며,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의 웨이브는 종전과 똑같았다.
마치 물처럼 통로가 되는 곳을 흐르며, 나눠지고 뭉치기를 반복하는 모습, 또 걸리는 족족 모든 것을 파괴시키며, 나아가는 것도 예전과 동일했다.
내 방벽 또한 마찬가지, 녀석들은 그 앞을 지나치던 순간에도, 가끔씩 건드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뭐랄까 어깨로 툭 치며 계속해서 간을 봤다고나 할까?
웨이브의 물결은 방벽을 후려치며 튼튼한지 어쩐지 재보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장벽은 예상외로 튼튼했고, 녀석들은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내가 따로 한쪽에 쌓아둔, 녀석들의 봉분만을 탐하기 시작했다.
이 봉분은 그동안 내 방벽 앞에서, 처리한 것들을 모아 쌓아 놓은 것이었는데, 혹시나 녀석들이 파리처럼 꼬일까 싶어, 진입로 옆 도로 한 편에 모아둔 것으로, 이번에도 이것들은 웨이브의 희생양이 되어, 골 탑으로 승화돼 앙상하게 변해버렸다.
그렇게 웨이브는 소소하게 끝나 버리고, 내 장벽에 매달린 타이어는 굴러보지도 못했다.
두 달간의 성과가 제대로 빛을 본 셈, 장벽은 지금도 단단하게, 내 안전을 지켜주며 우두커니 서 있다.
이번의 웨이브, 처음과 달리 새로운 게 있다.
비슷한 행동과 모습들, 하지만 처음과 달리 녀석들의 숫자가 대폭 줄어있었다.
처음의 경우에 거의 아홉 시간 동안 이 근처 일대를 쑥대밭으로 훑어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 세 시간 반정도 난장을 펼치다가 그대로 떠나버렸다.
거의 반 토막 이상 수량에서 차이가 나는 것, 처음엔 누군가의 공격에 의해 그랬을 거라 예측해보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덩어리의 숫자가 차이가 너무 크다.
처음의 웨이브 숫자를 약 삼십만이라 가정하고, 이번에는 약 십만이라 예측하면, 그럼 이십만이란 숫자가 차이가 나는데, 이게 그 세 어떻게 가능한 숫자인가?
녀석들끼리 전쟁이라도 벌여 서로 잡아먹기라도 한 것일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 웨이브가 이곳을 지나간 지, 이제 고작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군대가 와서 폭격을 해도, 가능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숫자의 차이.
6.25 때의 인명피해가 약 40만이라고 하는데,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나는 한참 동안 고민에 고민을 하다, 녀석들의 무리가 서로 분리됐거나, 또 다른 새로운 무리가 나타난 거라고 결론지었다.
내가 따라다니며 확인한 것도 아니고,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또 녀석들이 똑같은 색의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봐서는 같은 무리인지, 다른 무리인지 확인할 수 없는 노릇.
나는 메모지에 이번 웨이브의 발생과 종료시각을 적으며, 전과 다른 내용마저 세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한가지, 처음 웨이브가 지난 후 이 근처 일대가 고요해졌다는 것.
‘그래 이때다, 지금이 적기야!’
어제 군부대의 위치를 알기 위해, 읍사무소로 향하던 도중, 녀석들의 제지를 여러 차례 받게 되자, 무장을 먼저 갖춘다는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대전으로 가나 예비군 부대로 이동하나, 일단 나서기는 매한가지의 일,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달랑 차 한 대 집어 타고, 군부대로 곧장 간다면, 내 안전은 그대로 보장이 될까? 그래서 나는 먼저 차량을 준비한 뒤, 무장을 하기로 계획을 변경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아마 그냥 가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모든 걸 준비할 시간도 상황도 어중간하다.
왜 이렇게 갑자기 급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이는 게 좋다.
부대가 너무 멀리 있다면 모르지만, 만약 가까운 곳이라면 시도해봄 직해 보였다.
‘네비로 한번 확인해 보면 알겠지.’
-. 6월 12일 아파트 단지 내 방벽 건너편 오전 08:00
“끼리릭, 끼리릭, 끽, 부릉~”
새벽같이 밥을 지어 먹고 한적한 거리로 나섰다.
어젯밤 찾아낸 네비들 중 가장 쌩쌩해 보이는 놈을 골라, 지금 달리는 차 안에 장착해 두었다.
나는 그동안 네비를 켜본 적이 없었다.
네비라 함은 GPS와 내장된 지도를 사용해 목적지까지의 길을 알려주는 장치다. 하지만 GPS신호가 없다면 무용지물인 물건, 지금도 GPS 신호가 수신이 될까?
전쟁이 발발하면 모든 휴대전화가 불통이 된다는 것쯤은 웬만한 상식을 가진 이는 모두다 아는 공공연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GPS는 어떨까?
아마도 내가 보기엔 방해전파를 쏘아댈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전쟁시가 아니다. 그럼 GPS 신호는 수신되는 게 정상이다. 물론 저 하늘 위의 GPS 발신 인공위성이 모조리 고장 나거나 떨어지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전파사에서 DC 12V의 아답타를 찾아서 네비에 꽂고, 발전기에 연결, 네비의 전원을 키며, 네비의 액정에 화면이 들어오자, GPS 신호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자동차에 연결된 그대로 사용하면 되겠지만, 녀석들의 웨이브가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네비에 액정화면이 들어오자 GPS 신호가 연결되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빙고!’
역시 GPS 신호는 살아있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리 산 97번지’
나는 낮에 찾아낸 다이어리 내에서, 군부대의 주소를 찾아 입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비에는 역시 그곳의 주소가 검색되지 않았다.
구글 지도나 노키아 맵도 국내에서는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운 실정, 더군다나 군부대는 전략시설이라 검색되지 않는다.
이것은 당연한 것, 부대의 위치가 네비에 나와 있다면, 적이 그곳의 좌표로 폭탄들을 마구마구 쏘아댈 것 아닌가!
나는 검색의 방법을 달리해, 다시금 내가 원하는 부대의 위치를 찾아댔다.
오남리 산 95번지, 오남리 산 94번지, 오남리 산 96번지‥.
위와 같은 방법으로 찾아대길 몇 차례, 드디어 인근의 주소 하나가 연결됐다.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리 산 101번지’
이곳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다지 멀지 않은 곳, 일단 그곳으로 이동해 그 근방을 샅샅이 뒤져보면, 내가 원하는 예비군 부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목표로 한 그곳 ‘제1271 예비군훈련대대’를 말이다.
어제의 이런 일련 과정을 거치며, 부대를 향할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어깨에 달랑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단창을 든 채 방벽 너머로 건너갔다.
배낭에는 자동차 배터리와 점프선 만이 들어있는 상태, 나는 차량을 수배하러 나온 길이다.
그렇게 한참을 주변의 둘러보며 차 키가 꽂혀진 차량을 선별해냈다.
힘 좋고 조용하며 개중 쓸만해 보이는 것, 눈으로 본다고 알 수 있으랴마는, 개중 마음에 드는 녀석을 골라, 평소 하던 대로 시동을 걸었다.
“끼리릭, 끼리릭, 끽, 부릉~”
잠시 반항을 하다 이내 순응하는 SUV 차량, 나는 서서히 차를 몰아가며, 내 아파트 진입로에 그대로 주차시켰다. 그리고 무기며 발전기 등 오늘 필요할 만한 공구들을 차의 뒷좌석에 싣고, 트렁크에 휘발유 말통 두 개와 경우 말통 두 개를 실어, 유사시의 연료부족에 대비코자 했다. 물론 가다 보면 널린 게 자동차니, 그때그때 뽑아서 써도 된다. 하지만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다. 또 따로 쓸 일도 있고.
내 무장도 온전히 다 챙겨왔다, 손에 익지 않은 m1 그랜드마저도 말이다.
앞으로의 진행이 어찌 될지 모르는 것, 만반의 준비는 내 생명을 지켜줄 것이다.
나는 연료 게이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끝으로, 오늘의 일과 준비를 끝마쳤다. 그리고는 서서히 나아가는 SUV 차량.
너무 빠른 것도, 느린 것도 좋지 않다. 그저 조용하게 움직이는 게 관건.
나는 네비의 경로를 어제 웨이브가 진행된 곳의 반대편으로 잡으며, 서서히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부대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과, 안전하게 무기를 가져오는 것 두 가지뿐, 오만가지 상념이 교차되는 순간이지만, 일단 주사위는 던져졌다.
‘자 가자, 그리고 성공하자!’
- 작가의말
오늘도 한 편 올립니다.
재미있게 보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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