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린자의 시간 47
-. 5월 5일 아파트 관리사무소 오후 6:00
아파트 단지 내에 따로 지어진 2층 건물의 1층인 이곳은, 보통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사무실의 실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몇 개의 의자와 책상 등 사무기기와 서류철들이 꽃혀진 책장과 집기들, 정 가운데에 회의용 탁자와 쇼파세트가 있었으며 일반적인 사무실과는 다른 몇 가지가 눈에 띄었다.
실내의 한쪽 벽면을 여러 가지 판넬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의 위치표시장치라던가, 각가지 장치의 제어상태가 표시되는 판넬, 화재를 감시하고 알리기 위한 수신기들이 위치해 있었지만 작동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곳 관리사무소의 내부는 평소의 모습을 버리고 색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책상과 의자들도 모두 벽면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고, 쇼파도 긴 3인용 쇼파 하나와 정 중앙의 탁자를 제외하곤, 모조리 한쪽 벽면으로 밀쳐져, 가운데 공간이 널찍하게 비워져 있었다.
민우는 맥주며 소주,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안줏거리들을 슈퍼에서 가져다가 탁자 위에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색다른 움직임을 몇 가지 더 선보이더니 어디선가 라면 박스를 가져다가 창문을 가려대는 모습마저 취했다.
실내에 위치한 양쪽 창문(외곽 진입로 쪽과 그 정 반대편 아파트 동이 보이는 쪽으로 두 개의 유리창문이 나 있음)이 청테이프의 힘에 의지한 라면 박스에 의해 가려지자, 안 그래도 어두워져 가던 실내가 완전히 깜깜하게 어두워져 버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덜덜거리는 진동음, 그것만이 어두워진 실내를 외롭지 않도록 보살피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조금 있으면 곧 어두워질 시간에, 어두워질 실내의 유리창을 저런 식으로 가려둔 이유는 뭘까?
이곳에서 불피우고 밥해 먹으려고? 아니면 술 먹고 그냥 여기서 자려고? 잘 때 코 고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이윽고 누군가의 궁금증을 단번에 풀어주려는 듯, 갑자기 실내를 가로지르며 쏘아지는 한 줄기 빛, 이 빛은 실내 한쪽 벽면을 파란빛으로 물들이더니 이윽고 현란하게 바뀌며 여러 가지 장면들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쓴 것일까?
민우는 머리에 헤드폰을 쓴 채로 쇼파에 앉으며 캔맥주에 손을 댔다.
‘캬~, 이게 정말 사람 사는 맛이지!’
시원하게 시아시(차게 한다는 일본어, 본래는 히야시가 맞음)된 캔맥주를 들이키고, 이내 한 모금을 더하며 입안을 온통 시원함으로 채우더니, 마른 오징어를 찢어대며 입안에 넣고 질겅거리며, 눈과 귀에 펼쳐지는 호사를 즐기기 시작하였다.
나는 지금 영화를 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시원한 캔맥주와 함께‥.
내가 이렇게 호사를 누리게 된 것은 이미 예전에 예정된 일이었다.
내가 철물점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물건 하나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이 물건은 보통은 철물점에 있을만한 물건이 아니었지만, 웬일인지 모르게 그곳에 놓여있었고, 나는 이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엄청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작동이 잘 되는지 확인한 이후 처음 해보는 게, 맥주를 시원하게 하고 이렇게 영화를 보는 짓으로, 내가 이런 행동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내가 찾아낸 물건이 휴대용 발전기이기 때문이었다.
이 휴대용 발전기는 주로 전기가 없는 곳에서 작업을 하거나 노점상 등에서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 쓰이는 게 보통이었는데, 예전 같으면 인터넷으로 구하던가 청계천 공구상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물건으로 뜻밖에도 이곳 철물점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나중에 이걸 가지러 철물점에 들렀을 때 손잡이에 붙어있는 쪽지를 보았는데, 쪽지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읽다 보니 왜 이게 이곳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오뎅집 이씨가 맡긴 거 찾아온 것, 고치는 값 오만 원 내가 대신 냈으니 꼭 받아낼 것, 영수증 주라면 주고 다음부터는 술 처먹지 말고 그런 심부름 좀 시키지 말라고 할 것, 이상 마누라 남편이 씀.’
이곳에 휴대용 발전기가 있게 된 사정이야 내가 알바는 아니었다.
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물건을 가지러 갔을 때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쪽지가 놓여져 있던 탓에 읽어보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 휴대용 발전기를 잠시 설명하자면 약 2KW의 용량에 220v 콘센트가 하나 달려있었고, 4~5시간 정도 연속해서 사용이 가능하며, 4.2L의 연료통을 가지고 있다고 옆에 표딱지에 쓰여져 있었다.
오랜 기간 사용된 탓인지 기스도 많았고 제대로 움직일까 내심 불안하기도 했지만, 이미 한번 고친 뒤라 선지 시동도 잘 걸렸고 전압 또한 이상 없었다.
다만 귀찮은 노릇이라면 연료가 떨어지면 부어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발전기가 먹는 휘발유 정도야 널려있는 자동차에서 뽑아도 충분할 것이었다.
냉장고가 200w, 컴퓨터가 350w, 빔프로젝터가 300w 총 850w로 발전기의 2KW에도 전혀 미치지 않았으니 이대로 사용해도 발전기는 문제없었다.
잠시 떠오른 잡생각을 떨치며 벽면에 펼쳐진 영화에 집중했다. 이윽고 영화에서 멋진 액션장면이 펼쳐지자 나도 모르게 손발을 휘두르며 술과 안주에 유혹의 손길을 보냈다.
내가 보려던 영화의 dvd와 빔프로젝터는 전파사의 진열장 한쪽에서 찾아낸 물건이었다.
빔프로젝터야 단지 내 동들을 정리하면서 가끔 한두 번 볼 수 있는 물건이었는데, 겨울에 발생한 동파 때문인지 전자제품들은 거의가 가망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전파사 물건이야 그럴 일도 없었고 중고 제품도 취급하곤 했었는지 개중 쓸만한 걸 가져다가 설치해둔 것이었다.
컴퓨터와 빔프로젝터를 dvi방식(컴퓨터 그래픽카드의 dvi 단자와 빔프로젝터의 dvi 단자에 dvi 케이블로 연결)으로 연결하고 컴퓨터를 부팅시킨 뒤 굴러다니던 dvd 하나를 컴퓨터 시디롬에 곧바로 집어넣었다. 이윽고 컴퓨터에서 dvd를 실행시키려던 순간 갑자기 눈에 띄는 단축 아이콘 하나 ‘movie 폴더’, 호기심에 나는 손을 가져다 대었고 이내 곧 내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누군가가 야근하며 보기 위해 영화파일들을 넣어놓은 모양인데, 지금 보는 영화도 그 파일을 실행시킨 것으로 취향마저 나와 비슷해서 지금 엉덩이를 들썩이는 중이었다.
스크린은 지금 이곳 벽면에 설치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설치될 예정에도 없었다.
설치하겠다고 한다면야 떼어오면 그만이겠지만, 그냥 대충 하얀 벽면을 스크린 대용으로 이용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게 예상 밖으로 괜찮아서 스크린을 떼어올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물론 그런 것에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점이 컸다.
지금 휴대용 발전기의 하나뿐인 콘센트는 하나의 5구 멀티탭을 시작으로 빈 구멍이 없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문어발은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또다시 가지를 치며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원래 이렇게 전기를 사용하면 화재의 위험이 있어 권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야 기술자가 아닌가 계산해 보지 않더라도 척 보면 알 수 있다.
총알이 주인공인 영화 한 편의 감상을 끝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휴대용 발전기에 전원을 껐다.
내가 휴대용 발전기에 전원을 내린 이유는 발전기에 기름이 떨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나는 맘 편히 영화를 계속 보기 위해서 미리 휴대용 발전기의 연료를 채워두기로 했다.
헤드폰을 벗고 옆에 놓아둔 충전용 후레쉬를 켠 뒤, 휘발유가 든 말 통을 가져다가 휴대용 발전기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하룻 동안의 고된 노동과 영화가 끝날 동안 마셔댄 캔맥주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기름 냄새마저 합류를 하였다.
청테이프와 박스를 제거하며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던 중,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휴대용 발전기를 가동시키기 시작하였다.
“드르륵~ 드릉~”
휴대용 발전기 상단의 연료캡(숨구멍)을 on으로 바꾸고 스타팅 레버를 잡아당기며 시동을 걸어대기 시작했는데, 스타팅 레버를 두 번 잡아당길 필요도 없이 단번에 시동이 걸리며 발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컴퓨터를 다시 부팅시키며 영화를 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는데, 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나자 골라둔 영화파일 하나를 실행시키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커다랗게 펼쳐지는 웅장한 화면이 시작되었고 그곳에는 집채만 한 늑대인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빔프로젝터의 스크린 방향을 관리사무소의 벽면이 아닌 아파트 외벽을 향해 쏘아대는 중이었다. 그것도 가로가 아닌 세로로 눕혀서 말이다.
자동차만 한 쥐들이 외벽을 따라 올라가고 버스만 한 토끼들이 그 뒤를 따라 도망간다. 이내 달려오는 말을 탄 기사들의 모습 웅장한 그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내가 지금 하는 짓은 예전에 본 영화의 명장면을 그대로 따라서 재연해본 것이었다.
예전부터 해보고 싶은 것, 아무나 해볼 수 없는 것, 나는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었다가 널찍한 아파트 외벽을 보곤 엉겁결에 시도해본 것이었는데, 술김에 저지른 것도 간댕이가 부은 것도 맞았다. 하지만 요사이가 아니면 언제 이런 걸 해보겠는가.
방벽도 완성됐고 그나마 녀석들도 별로 안 보이는 중이지 않는가, 술김에 저지른 일이라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참으로 멋있다.
눈도 즐겁고 마음도 즐겁다.
나는 커다란 화면을 술과 함께 만끽하며 한참을 즐기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민우가 잠든 고요한 밤 아파트 외벽엔 영화 상영이 한창으로 하지만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저 발전기만 계속해서 돌고 있었다. 그리고 나직이 민우의 소리가 뒤따랐다.
“드르렁~, 푸-, 드르렁~, 푸-.”
- 작가의말
매일 두편씩 신작하나와 교정작 하나를 해내려다 보니 머리가 쥐어 터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쉬려고 했는데 기다리 시는 분이 계시는것 같아 딱딱해진 머리를 굴려가며 부랴부라 한편 적어서 올려보는 저입니다.
부디 재미지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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