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린자의 시간 48
다음 날 아침
무언가가 창밖을 두드리는 느낌에 찌푸린 얼굴로 잠에서 깨었다.
창을 열어놓고 쇼파에서 잔 덕분인지 머리도 아프고 몸도 찌뿌뚱하다.
숙취 때문인지, 아니면 감기 기운 덕분인지, 으슬거리며 몸이 추워지는 게 제 컨디션이 아닌 모양이다.
몸뚱어리를 추스르며 창밖을 내다보는데, 두드려대는 저 소리는 비가 오는 중이었다.
술김에 이불도 없이 무슨 천 쪼가리만을 덮고서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습기 어린 새벽 추위에, 손바닥으로 온몸을 비벼대며, 아무래도 오늘 아침은 즉석 북어국이라도 끓여야겠다 싶다. 물론 고춧가루도 팍팍 풀어서 말이다.
‘어?’
나는 찌뿌뚱한 몸 때문에 뭔가가 이상한 걸 감지하지 못했다.
뭔가가 좀 이상했는데, 뭐가 이상한지를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곧 내가 깨어난 이곳이 원래의 내 잠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내 보금자리는 유사시를 대비해 최후의 보루로 남겨놓은 곳으로, 몇 달을 버티기에 충분할 정도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이 쌓여있었고, 잠만은 늘상 꼭 그곳에서 해결하며, 만약에 일어날 사태에 대비하곤 했었다. 물론 내 코골이가 가장 큰 이유이긴 했지만, 이곳에도 잠자리를 마련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 게다가 창문까지 열려있지 않는가.
1층인 이곳이었다.
내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밖에 녀석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등 이상할게 하나도 없는 그런 위급한 순간이었다.
‘엿 됐다!’
지금의 내 상황이 이렇다면, 그 옛날 있었던 베란다에서의 일처럼, 지금 이곳이 조용하긴 하지만, 방벽앞은 난장판이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즉석 국 생각을 저 세상으로 날려버리곤 부랴부랴 무기만을 챙겨 들기 시작하였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될 텐데‥.’
방벽에 현관문을 두르는 일은, 이제 막 그 일이 시작하는 단계여서, 지금 현재의 방벽이 어느 정도 버텨줄지는, 장담을 할 수가 없는 조금은 애매한 상태였다.
방벽이 무사하기를 기도하며 이상하면 곧바로 내 보금자리로 튀기 위해, 방벽이 있는 곳을 멀찍이서 빙 돌아가며 방벽의 이상 유무를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어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이는 내 방벽의 모습과 그 주위의 풍경들, 방벽은 멀쩡히 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고 녀석들의 숫자는 내 예상보다는 너무 적었다.
“삐걱~, 꺽-”
녀석들의 힘을 버텨내는 방벽 아 참으로 믿음직스러웠다.
다행히도 출몰한 녀석들은 스물이 채 못 되는 것 같은 상황, 더 많은 숫자였다면 어찌 됐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보는 방벽의 지금 모습 이 상태라면, 앞으로도 50마리 정도는 거뜬히 막아낼 성 싶었다.
내리는 비를 쫄딱 맞으며 방벽 너머에서 힘써대는 녀석들, 저놈들도 젖었고 나도 젖었다.
비를 피해 관리사무소로 되돌아온 뒤, 그곳 한켠에 비치된 우비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는 한 손에 장창을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비 내리는 방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비 오는데 참 고생들이 많어?”
시덥지 않은 농담을 던져보는 나.
녀석들을 무신경으로 대하기로 결정을 내린 뒤로는 이렇듯 긴장을 풀며 혼잣말을 해대곤 했다. 물론 내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만 말이다.
쓰고 있는 우산을 왼손에 든 그 상태로 장창을 쥔 오른손 손아귀에 힘을 주기 시작하였다.
지금 상황에선 활보다는 장창이 좋다.
방벽 너머 기다리는 녀석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녀석들에 대한 그 예의는 아닐 터, 안전난간의 두 번째 단 빈틈 사이에 장창의 끝을 가만히 집어넣고서, 그 사이 공간으로 보이는 머리통 하나를 그 목표로 삼아서, 들입다 장창의 끝을 무성의하게 내찌르기 시작하였다.
“퍽!, 퍽!, 퍽!”
찌르고 빼고 한걸음 옮기다가, 찌르고 빼고 한걸음 옮겼다.
이렇게 찌르기를 반복하길 몇 차례, 나는 한순간 이동하기를 멈추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중이지?’
예전 같으면 벌벌 떨며 소중한 한 번씩을 행사했을 나였을 텐데, 지금 보이는 내 모습은 노련한 목수의 망치질 같지 않은가.
왼손에 든 우산하며, 난간에 기댄 채 무성의하게 내지르는 장창질, 시시껄렁한 농담 질에, 무감하게 걸어대는 마지막 내 발걸음까지, 지금의 나의 모습 그 어디에서도 진지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성이 사라진 건가?’
비가 떨어지는 장창을 쥔 손을 말없이 묵묵히 내려보다가 이내 뭔지 모를 결심 하나를 굳힌 듯 다시금 손아귀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맘이라도 편한 게 장땡이지!’
이전과 같은 움직임을 다시 하기 시작하며 대신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그들을 대하기 시작하였다.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놈들에 대한 예의라 다짐하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서 있는 녀석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또 이곳을 향해 이동하는 녀석들도 없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쓰러져 있는 녀석들과 하염없이 내리는 비뿐이었다.
지금 내리는 이 비가 밤새 내린 비였는지 술 취해 곯아 떨어진 내가 알아차릴 리 만무했다. 하지만 이 비 덕분에 덜 몰린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녀석들에 대한 처리가 끝나자 거칠게 우비를 벗겨 내기 시작하였다.
녀석들을 처리하느라 비옷을 입은 채로 움직여댔더니, 우비 안이 열기로 가득 차 후끈 달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까는 춥다고 난리더니 지금은 덥다고 지랄이었다.
나는 슈퍼 안으로 들어가 샴푸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 샴푸의 뚜껑을 따서 머리에 소량씩 짜대기 시작했다.
이 얼마만의 샤워란 말인가?
이 근방에 물이라곤 생수들뿐이었다. 하지만 생수로 목욕을 할 수 없는 일, 그나마 요사이엔 그 사정이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전에야 세수마저도 거의 할 수가 없던 상태.
그럼 지금은?
물티슈를 사용해 거의 매일 하고 있었고, 이도 매일 한 번씩 닦는 등 청결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 아니면 언제 또다시 샤워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비가 내리는 방벽뒤 진입로 한가운데 서서, 머리에 거품을 일으키며 홀딱쇼를 펼치고 있었다.
아 시원하고 아 개운하다.
“보골보골~, 에취~, 보골보골~”
지금 내 앞에는 고춧가루가 잔뜩 들어간 즉석 북어국이 맛있게 끓고 있다.
창문을 열고 잔데다가, 비 오는 날 날 굳이까지, 했더니 급기야 몸에 무리라도 갔는지, 머리에 열도나고 으실으실한 게 한속이 든 것 같았다.
아무래도 밥 좀 먹고 약국에라도 들려야 할 것 같았다.
감기약을 좀, 아! 종합 비타민제도 필요하다. 그리고 피로 회복제도.
나이가 늘면 약도 덩달아 늘어난다더니 내 꼴이 딱 그 짝이다. 하지만 골골대는 것보다는 백배는 낫다.
밥이 익기를 기다리며 오늘의 상황을 복기해 보았다.
비가 내렸다지만 난 창문을 열어 놓고 코를 골며 잤다.
평상시의 모습이라면 방벽 앞은 좀비로 그득 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의외로 한산했고 나에게 별다른 위협마저도 주지 못했다.
‘웨이브가 지나간 뒤 정말로 한산해진 모양인데?’
내가 아직 나서보지 못한 세상 저 바깥은 의외로 안전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도 나만의 추측일 뿐 확인된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래도 한 번쯤은 나가보기라도 해야지?’
이곳의 방벽에 업그레이드가 끝나면 그때는 꼭 한번 시도해볼 마음을 품었다.
밥과 국을 탁자 위에 올리며, 밥이 든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가, 얼굴에 쏟아지는 새하얀 연기에, 기침으로 온통 주위를 침으로 뒤덮어 버렸다.
‘에이 씨‥.’
하지만 어쩌랴 내껀데, 이내 숟가락을 가져다 국을 한 수저 뜨는 나였다.
‘그래도 국물은 끝내주네!’
약이란 평소엔 필요없는 존재지만 이처럼 가끔씩 필요한 경우가 생긴다.
기계도 가끔씩은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데, 하물며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었다. 물론 사람의 손길도 그립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약의 기운이 더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다.
지금의 내 상태는 콧물이 질질에 머리가 메롱인 상태로, 혼자인 이곳에서 돌봐주는 이도 없는데, 몸 상태마저 안 좋다면 권장할만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식사를 끝마치고 약국에 들렀다.
약국은 아직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처녀지, 강화유리로 된 출입구를 노크하듯 두들기며 혹시 안에 누가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노크 소리에도 실내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보이지 않았고, 이곳에 올 때 가지고 온 휴대용 발전기를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어제 깜빡 잠이 든 터라 발전기의 휘발유가 떨어진 상태, 휘발유를 보충해서 가져온 발전기는 오늘도 경쾌하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강화유리로 가로막혀진 약국으로 들어가려면 유리문을 부시는 수 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강화유리는 충격이 가해지면 거미줄의 형태로 깨진 뒤에 아래로 쏟아져 내린다.
자동차의 앞 유리처럼 깨져도 서로 붙어있으면 좋으련만, 강화 유리는 깨지게 되면 쏟아지는 게 문제였다.
유리테이프나 청테이프를 붙인 뒤에 깨뜨리면 좀 낫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그 방법 대신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내가 사용할 도구는 4인치의 그라인더(고속으로 회전하는 연삭숫돌이 달린 회전공구, 4인치가 주로 쓰인다.) 였다.
철물점이나 전파사에는 없는 물건이었지만, 아파트의 관리사무소에는 이것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지고 온 그라인더를 가지고 빈틈 사이에 찔러 넣어서 갈아대려던 그 순간, 아뿔싸 실수다. 그라인더의 날이 짧았다‥.
7인치의 그라인더였다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았을 텐데, 강철로 된 문턱이 생각보다 튀어나와 있어선지, 4인치의 그라인더 날은 잠금장치 안쪽까지 닿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는 7인치 그라인더가 없다.
7인치 그라인더를 찾아내려면 큰 배관공사를 하는 공사현장이나 종로의 공구상가에서나 있을법한 물건이다.
‘쇠톱으로 잘라내야 하나? 아니면 드릴로?’
관리사무소에 있던 공구 중 전동 드릴을 가져다가 잠금장치에 구멍을 뚫어서 망가뜨려 볼까 생각하다가, 난 자물쇠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까막눈이라 그냥 강화유리문을 깨뜨려버리기로 결정하였다.
몸도 아픈데 쇠톱질은 절대 사양이었다.
강화유리문 일부분을 문구점에서 가져온 유리테이프로 붙이고, 철물점에서 가지고 온 중망치를 가지고 널찍이 떨어져서 문을 향해 내던졌다.
“딱-, 따닥-”
중망치는 소리만 요란했지 강화유리로 된 유리문을 깨지는 못했다.
너무 소란을 피우는 것도 좋지 않다고 판단해서, 훨씬 단단하고 무거운 것을 가지고 단숨에 깨버리기로 순간 마음을 먹었다.
나는 철물점에서 오함마(외벽 등을 부술 때 쓰는 대형망치)를 가져다가 강화유리문에 자루 채 들입다 내던져 버렸다.
“퍽-, 파삭-, 쏴~”
강화유리문에 거미줄을 만들며 약국 실내로 파고들어 간 오함마, 테이프가 붙여진 유리문은 덩어리를 이루며 떨어져 내렸고, 그 이외의 나머지들은 알갱이가 되어 바닥으로 쏟아졌다.
“짜가락-, 짝-”
깨진 유리를 밟으며 안으로 들어가니, 안쪽에 진열된 진열장 일부가 오함마에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파손되어있었고, 약국의 바닥 여기저기에 알약들이 쏟아져 내려, 유리조각들과 함께 약국 바닥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찾아낼 약은 종합감기약과 종합 비타민제, 종합피로회복제였다.
모든 약에 종합 자가 들어가는 걸 보니 약 성분이 많은 게 좋은 걸로 생각하는 나였다.
하기사 나는 약에 관해서는 젬병이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일반인이 약에 대해 잘 알면 약사 아니면 약에 찌들어 사는 환자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니라면 패스~.
나는 약 상자에 적힌 무조건 큰 글씨만을 정보로 하여, 내게 필요한 약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는데, 영어로 씌여진 것은 무조건 건너뛰고, 눈에 띄는 종합 글자 중에 유통기한이 남아있는 걸 선택했다.
이런 과정을 통과해 내 손에 쥐어진 몇 가지의 약 상자들 중 그중에 한 가지만이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전혀 다른 품목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아구라.
이름만 들어본 거라 호기심 삼아 집어보았다.
내가 이 파란 걸 어디다 쓰겠냐 싶었지만, 사람이 호기심이란 게 또 그렇지가 않지 않은가.
나는 뻥 뚤린 약국에 청테이프 신공을 펼치는 것으로 약국의 방문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이제 약 먹고 푹자면 금세 나으리라.
낫고 나면 또다시 중노동이 기다렸지만, 방벽은 최대한 빨리 완성되는 편이 나았다.
언제 또다시 녀석들의 웨이브가 이곳을 향해 지나칠지 모른다.
나는 내 보금자리로 되돌아가기 전에, 문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서 방문한 녀석 셋을,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간단히 녀석들을 처리하고 나서는, 발걸음을 되돌려 이동해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저 멀리서 들리는 휴대용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소리.
‘머리가 멍청하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발전기를 끄고 옮겨 놓기 위해 다시금 발걸음을 약국으로 되돌리는 중이었다.
‘아, 이제 좀 쉬고 싶다.’
- 작가의말
이번편은 잡다하게 내용이 기네요.
오늘도 한편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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