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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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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7.0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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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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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26화 이름 없는 성녀

DUMMY

126화 <이름 없는 성녀>



“아쿠아 님! 일어나셨네요!”


아침이 찾아오자 캣니스가 아쿠아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여느 때와 같은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그러나 아쿠아의 반응은 캣니스의 태도와 정반대였다.

그녀를 보면서 오만상을 지었다.


“잠깐 환기 좀 할게요. 어디 불편한 점은 더 없으세요?”


얼굴부터 불편해한다는 게 보였다.

그래도 캣니스는 그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행동했다.

커튼을 열자마자 아쿠아를 소멸시킬 기세로 햇빛이 들이닥쳤다.

이틀 전에 먹구름 낀 하늘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쿠아는 다짜고짜 커튼을 열어젖힌 여사제를 지그시 보았다.

조금 더 자면 안 되냐는 무언의 호소를 보냈다.


“다들 걱정했어요. 미스릴 모험가님들께 내려갈 준비를 도우라 할까요?”


그러나 씨알도 안 먹혔다.

제 마음을 알면서 모른 체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 재잘재잘 떠들기 바빴다.

이에 더 오만상이 된 아쿠아는 문득 캣니스 뒤쪽을 보았다.


“어머. 다행이네요. 이리 빨리 완치하다니요.”


안 그래도 오만상인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 안에는 경멸의 기색조차 담긴 듯하였다.

그에 반해 캣니스는 목소리의 주인을 뒤돌아보며 화색이 됐다.


“신자님! 신자님도 일어나셨네요? 신자님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후후. 제가 뭘 도운 게 있나요? 그저 신들께서 어여쁜 창조물을 보살펴주신 덕분이죠.”

“천만에요! 물론 여신님의 은혜도 있겠지만, 신자님께서 주신 도움이 없어지지는 않아요! 이 은혜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갚을게요!”


두 신봉자의 열렬한 감사 미루기를 뒤로 하고.

아쿠아는 잠이 다 깬 얼굴로 혼자서 셔츠 단추를 여몄다.


“그래서 저희는 리친스 왕국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거기까지 해줄래?”


은혜를 갚겠다는 말로. 은혜를 얻을 때까지의 일을 전부 설명하는 여사제에게 일갈했다.

평범한 셔츠와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아쿠아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로 보고 있었다.


“어··· 사제복은 어디에 두고요?”


당장 말보다 아쿠아의 옷차림에 더 신경 쓰는 캣니스.


“몰라. 나가 나가. 시끄러우니까 이만 나가.”


캣니스를 방 밖으로 쫓아냈다.


“게르드 님과 게이로드 님을 불러올게요!”


분명 아침을 조용히 보내자는 의미에서 내보냈다.

그러나 토도도독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여실히 들려왔다.

말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 여사제 때문에 아쿠아는 한숨 쉬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야영하는 게 편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후후. 귀여운 사제님이네요.”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어머. 그렇다곤 해도 귀여운 건 사실인걸요.”


왠지 꽃향기가 물씬 나는 말투에 아쿠아는 질렸다.

자신이 같은 말투를 한다고 쓸데없는 가정을 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보통은 비슷한 나이대에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인데 어쩐지 더 멀어지고 싶다는 느낌이었다.


“아쿠아 씨도 아주 귀엽답니다?”

“필요 없어!”



*****



“하룻밤 더 머물다 가라니. 정말로 선한 분들이세요. 그렇죠?”


오늘 하루도 알차게 보냈다.

마구간이나 길 정리, 부서진 집을 수리하고 집 안을 먼지 하나 없이 말끔히 청소했다.

마치 새집처럼 반들거리는 집으로 꾸몄는데. 하룻밤 더 머물러달라고 부탁하기에 잘 준비했다.


“넌 왜 여기서 자는데?”

“혹시 밤 중에 또 아플지 모르니까요.”


아무리 원래 몸 상태를 되찾았더라도 원인 불명인 열병이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 출발 안 하기로 하였다.


“사실 아쿠아 님도 아쿠아 님이지만, 신세 진 분들이니 뭐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었어요.”


본인의 몸이 아파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아쿠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제 침대 옆에서 이불을 까는 캣니스의 모습을 불만스럽게 쳐다봤다.


“어머. 선객이 와 있었네요?”


이번 방문자까지는 무시 못 하겠는지 미간이 일그러졌다.

막 베개에 기대던 머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너는 왜 왔어?”

“저의 집에서 제가 못 갈 곳이 어디 있을까요?”


눈이 없는 거지. 발이 없는 게 아니랍니다~


부인의 이어지는 말에 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 반응에 부인은 짓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후후. 농담이에요. 어제 못했던 이야기를 이어 할까 해서요.”


그리 말하는 부인의 손에도 이불이 있었다.

이불을 펴던 캣니스는 행동을 멈추었다.


“어··· 음···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렇지만. 아쿠아 님은 낯을 가리잖아요.”


전혀 고민할 이유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아쿠아 모습 어디에서 낯을 가리는 모습이 있다는 걸까?


“또 예전처럼 신실한 인상을 남긴다고. 밤새도록 기도하는 건 환자에게 좋지 못한···”


더 대화를 이어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피곤해진 아쿠아는 팔을 들어서 손가락 끝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나가.”

“이럴 수가. 어떻게 집주인인 저를 내쫓을 수가···”

“너 말고 너! 캣니스 네가 나가라고!”


방을 나갈 대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캣니스가 놀란 눈빛을 지었다.

아쿠아의 단호한 표정과 펴다 만 이불을 번갈아보더니, 울상이 되어서 순순히 이불을 접었다.

캣니스는 제 몸집보다 큰 이불을 들고 나가며 마지막으로 뒤를 흘겨봤다.


“친구가 생겼다고. 가족은 돌보지도 않는···”

“시끄러워! 나가!”


얼굴에 정통으로 베개가 들어갔다.

캣니스는 베개에 얼굴을 밀착한 채로 방을 나갔다.

어떻게 한 건지 모를 요령이었다.


탁-


문이 닫히자 적막이 찾아왔다.

싸늘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불을 까는 사람이 있었다.

부인은 이부자리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주름 하나 없이 깔린 자리에 만족하며 아쿠아를 돌아봤다.


“비행 성녀시군요. 아쿠아 씨는?”

“뜬금없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아쿠아는 기분이 나쁜 그대로 부인을 쏘아봤다.

하나 눈이 보이지 않는 상대기에 어떠한 반응도 이끌 수 없었다.

결국 혼자서만 나쁜 기분을 간직했다.

조용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방에 찾아왔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말하라고 언질 줬다.

이에 부인은 이불 위에 다소곳이 앉으며 앞선 질문에 미소 지었다.


“그러면 어제의 이야기를 이어 하도록 해요.”



*****



‘추워···.’


늦가을의 추위는 얕볼 것이 아니었어요.

마구간 비슷한 방에서는 더더욱 가벼이 여겨서 안 될 종류였죠.

소리도, 감각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 속.

저는 말 같은 짐승을 위해 준비된 지푸라기 위에서 가만히 엎드린 채 떨었어요.


‘엄마··· 아빠는···’


탈출이라는 건 불가능했어요. 허약한 몸, 눈도 안 보이는 맹인이 거기서 무얼 하겠나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추위. 혹은 겁에 질려 엎드린 채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도하는 일뿐이었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차가운 공기가 밤이 되었음을 알렸어요.

밤이 되자 더 차가워진 공기.

시간은 언제나 견디는 자의 것이라지만, 그때의 추위는 영원 같은 시간과 함께 저를 괴롭게 만들었죠.


“성녀님.”


그때였어요.

정신마저 아득해지는 시간 속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성녀님. 저예요.”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남자.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간절했던 남자. 미운 마음 같은 건 단번에 사라지게 해준 성기사의 목소리였어요.


“기사님! 저희 엄마가···!”

“일리나 언니! 너무 웃긴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거 같았죠.

하나의 인기척에 두 목소리. 둘 중 누가 진짜인지는 나중에 깔깔대는 목소리가 알려줬어요.


“일리나~ 우리 가엾은 언니. 아직도 백마 탄 왕자님을 그리워하는 거야?”

“리나···.”


리나. 이번 마을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동생.

제가 사랑하던 동생은 어째선지 기사님의 목소리를 따라 하고 있었어요.


저벅저벅-


지푸라기를 밟고 다가온 그녀는 제 얼굴을 잡았어요.

제 상처를 쓰다듬으면서 입맛을 다시는, 제가 모르는 그녀가 제 앞에 있었어요.


“꿈 깨, 언니. 언니가 기다리던 백마 탄 왕자님도 까마귀밥이 됐을 테니까.”

“무슨···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이라니 언니? 무슨 짓은 언니네 가족이 했잖아?”


그 말이 제 가슴 어딘가에 난 상처를 후비는 듯했어요.

지난 행적이 제 목을 조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리나. 제대로 말해. 그 기사님을 어떻게 했어?”

“아아. 언니랑 사귀는 사이 그런 건 아니었지? 그러면 너무 슬플 거 같아. 왜냐면 언니는 모두에게 사랑받아야 하잖아. 언니도 우리를 사랑해야 하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대체 기사님을 어떻게 했어!”

“응. 그야. 죽어겠지?”

“뭐?”

“언니가 기다리는 기사님은 죽었을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어요.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솟구쳤죠.


“거짓말··· 기사님이 왜···”

“정확히 말하자면 죽을 거야. 아저씨들이 침대 위에 잠들어 있던 사람을 들고 숲으로 갔거든.”

“숲?”

“응. 혹시라도 증거가 남으면 곤란하니까. 호숫가 같은 데서 처리하지 않겠어?”


처리.

어떻게 같은 사람을 두고 그리 말할 수 있을까요?

어제까지 같이 웃고 어울렸던 같은 인종이라고 믿기 힘들었어요.

그래요. 그것은 마치 악마를 마주한 기분이었어요.

그것이 악마가 아니라면 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너, 저주받을 거야.”

“아니. 우리는 축복을 쟁취했는걸?”

“내가 너희를 죽을 때까지 저주할 거라고!”

“언니가 주는 저주가 이 마을의 옛날보다 두렵지 않아.”

“리나! 여신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벌할 거야!”

“아아. 시끄러워. 잠자던 아저씨 다 깨겠다.”

“리나! 리나! 언젠가! 언젠가 반드시-”

“응. 언니. 부디 우리 마을을 축복해줘?”


천 비슷한 걸로 재갈 물렸어요. 소의 오물, 지린내 비슷한 게 나는 재갈이었죠.

저는 어떻게든 그녀를 해치고 싶었어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했죠.

하나 이번에도 저는 너무나 무력했어요.

손발이 묶인 채로도 달려들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문이 닫혔어요.

리나가 나간 소리였어요.

저는 발버둥쳤어요.

원망과 분노. 목 막힌 비명이 다시 혼자가 되었음을 알려주었답니다.


“여신님께서··· 벌을 주실 거야··· 못된 사람들에게 천벌을 내릴 거야···.”


앞서 말한 대로 이 마을 사람들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어요.

그렇게 지치도록 소리친 시간이 얼마나 또 지났을까요.

또 한 번 문소리가 들렸어요.


덜컹-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터라 격하게 환영하지 못했어요.

그 대신 제 머릿속은 한 가지 행동만을 떠올리며 기다렸어요.


‘물 거야.’


재갈을 풀어버리는 순간 물어버리려 했어요.

상대의 손이든 귀든 코든 얼굴이든. 어디가 됐든 씹어버릴 심산이었죠.

이래 봬도 외조부가 인간과 고양이 수인과의 혼혈이에요. 턱 힘 하나는 자신 있답니다.

저를 마냥 평범하고 가녀린 인간 여자로 보는 상대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에는 딱 좋은 처방이었죠.


“성녀님.”


리나가 찾아왔어요.

제가 눈이 보이지 않지,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요?

설마 같은 방식으로 또 저를 속이려 들 줄은 몰랐어요.

이번에도 제가 그 가짜 목소리에 매달린다고 생각한 걸까요.


“성녀님. 구하러 왔습니다.”


우스웠어요. 대체 어디까지 저를 놀릴 심산인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저는 반응하지 않고. 그 목에 치명상을 입힐 기회를 기다렸죠.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잠이나 자고 있었다니. 성기사 실격입니다.”


자박자박.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죠.

저는 여전히 잠든 척을 했어요.


“···성녀님. 제멋대로 옥체에 손을 대는 점. 나중에 따로 벌을 받겠습니다.”


사락-


답답했던 재갈이 풀렸어요.

상대와 거리도 충분했어요.

몇 시간 동안 홀로 남아서 계획했던 일을 실행할 때가 되었죠.

몸을 날렸어요. 입을 벌렸어요. 리나의 가녀린 목에 이를 박아넣을 심산이었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완벽하다고 여겼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요.

목의 두께가 두꺼웠어요.

신발 밑창으로 꾹꾹 밟은 것 같은 질긴 육포 같았어요.

냄새도 달랐어요.

지금껏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리나의 향기와 지금 향기는 굉장히 달랐어요.

아니. 애초에 리나라고 착각조차 하지 못할, 남자의 향기가 났답니다.


“성녀님 죄송합니다. 이 죄. 이 못난 몸을 얼마든지 부숴도 좋습니다.”


리나가 기사님으로 꾸미고 찾아왔던 때만큼 큰 충격이 있었어요.

저는 얼른 목에서 얼굴을 치웠어요. 움직일 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두 팔이 먼저 뻗어갔어요.

눈, 코, 입, 귀. 상대의 얼굴을 만졌어요.

그리고 한 가지 깨달았죠.


“기, 기사님?”


이번에는 가짜가 아니었답니다. 진짜 기사님이었답니다.


“어, 어, 어, 어떻게?”

“조금 전 잠에서 깨어 성녀님의 위험을 알았습니다.”

“아, 아니. 도대체 어떻게 살아난 거죠?”


그 말에 양손이 한쪽으로 기울었어요. 기사님이 고개를 기울인 탓이었죠.

기사님은 한참 눈썹 부분을 찡그리더니, 잠시 뒤 원상태로 고개를 되돌렸어요.


“제가 죽었다고 들은 거군요. 대답은 별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 살아있습니다.”

“그게 무슨···”

“저를 죽이려는 자들이 많은데 제가 죽지 않은 이유가 궁금한 겁니까? 이 또한 별거 없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산 생명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말문이 턱 막혔어요.

뭔가 제 질문과 살짝 어긋난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가 전하려는 바를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어요.


“···몇 명이 죽었나요?”

“더 이상 성녀님을 해할 자는 없습니다.”

“어떻게 확신하나요?”

“제가 그리 만들겠습니다.”


뭔가 대화가 맞지 않았죠.

그러나 그런 거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성녀님?”


저는 잠깐 그의 품에 기대었어요. 긴장이 풀리니 안도와 비슷한 피로가 찾아왔어요.

그러나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었죠.

감정과 피로를 덜어내고 다시 고개 들었어요.


“기사님.”


그가 저를 신전으로 데려가는 일이 우선이라면. 저에게 당장 중요한 건 하나. 제 무사했으면 하는 사람들을 찾아야 했어요.

이를 위해서라면. 앞이 보이는 기사님의 도움이 절실했죠.


“이기심이라는 거 알아요. 성녀조차 되지 않으려 하면서. 분에 겨운 소리인 거 아는데요···.”

“말씀하십시오. 성녀님.”

“부모님을··· 저를 지키다가 떨어진 부모님을 뵙고 싶어요···.”


산속에서 화살에 맞은 아버지를, 머리를 맞아 기절하기 직전까지 들렸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그로서는 들어줄 필요 없는 말인 걸 알면서도. 간절한 마음에 그저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죠.


“···명 받들겠습니다.”


다행히 기사님은 순순히 한마디 하고 일어섰어요.

그런데 기사님의 숨결에서 어딘가 화가 난 느낌이 들었어요.

덜컥 겁이 났어요.

아직 어렸던 저는 제자리서 굳었어요.

아무래도 과한 부탁을 한 거 같다. 주제도 모르고 기사님을 부리다니 경솔했다 등,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오갔죠.


“성녀님. 죄송합니다. 미숙한 자가 살기도 주체 못 해서 겁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원인이 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죠.

아니, 사실 저 때문에 화가 난 건 맞는데 음 뭐라 할까요?

어쨌든 설명하긴 힘들지만 제가 처한 상황에 화가 난 느낌이었어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저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죠.


“잡으십시오.”

“네?”

“비록 험한 산속이라곤 해도 당장은 제 곁이 어디보다도 안전할 겁니다.”


역시 성기사답게 사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줄 알았어요.

여성을 대하는 자세에서 완벽함이 있었죠.

저는 기사님의 손을 잡고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갔어요.

마구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머리카락이 나부꼈어요.


“기사님!”


자유로운 공기가 제 몸을 스치던 그때였어요.

반갑지 않은 인기척이 문 근처에서 느껴졌죠.


“뭐, 뭐야?! 너 왜 살아있는-”


퍽-


“커흡!”


저는 곧장 기사님과 손을 떼고 입을 가렸어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일어난 상황에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아서였죠.


“어떡할까요?”

“네?”

“더 손을 볼까요?”


방금 소리로 보아 뼈가 부러졌다고 확신했죠.

열린 문이 있던 자리에 다른 이가 있었어요.

멀쩡히 서 있던 사람의 숨소리가 지금은 무릎 아래에서 들리는 걸 보아 상태가 좋지 못할 터였죠.


“콜록, 콜록. 아파! 아프다고!”


예전 같았으면 얼른 손을 뻗었겠죠.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답니다.

이 밤중에 리나는 무슨 용건으로 또 저를 찾아온 걸까요?

저는 아픈 리나를 두고 망설이다가 두 손 모아서 기도했어요.


“여신님께 청합니다.”

“고, 고마워. 언니···.”

“그녀에게 낫지 않는 상처를 주세요.”

“어?”

“이번 사냥감을 놓치지 않게. 제 마음속 영의 풍족함을 위해. 절대로 사냥에 실패하지 않는 축복을 내려주세요.”


프로텐시아님의 축복은 사냥과 번영.

제멋대로 사심을 쏟아 넣은 축복문은, 아주 오래전 성기사분들이 마물과 싸울 때의 축복이었어요.

이 축복은 사냥감에게 영원한 상처를 남기며. 죽을 때까지 축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죠.

물론 상대의 격에 따라 효과가 다르지만,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축복이 이것밖에 없기에 저질렀어요.


“어, 언니. 뭐한 거야?”


마치 옛날 관계로 돌아간 목소리였어요.

겁에 질린 채 살고 싶어서 뭐라도 하겠다고 도움을 청하던 목소리였죠.

저는 그런 아이의 앞에 앉았어요.

겁먹은 얼굴을 감쌌어요. 제 말에 이상함을 느낀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죠.


“리나야. 겁먹지 마.”

“으응. 언니. 나 겁 안 먹었어···. 그러니 알려줘. 지금 뭐 한 거야···?”

“여신님의 축복이야. 네가 그렇게 바라던 여신님의 축복.”


분위기에 잘 휩쓸리고, 자기 주관이 좁은 아이라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았죠.

제 예상대로 리나의 얼굴에는 재미난 감촉이 생겼답니다.


“리나야. 리나가 말했지? 내게 어떠한 말을 들어도 예전 삶만큼은 무섭지 않다고? 네 말이 사실인지 증명해줘. 네가 그렇게 바라던 여신님의 축복과 함께.”

“아아. 아아. 아아아-!”

“저런. 상치 입은 오소리 같구나. 짐승 주제에 사람의 비명이라니. 가여워라.”


더 볼 일은 없었어요.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죠.

당연하게도 리나는 저에게 달려들었어요.

물론. 마지막 발악에 불과했지만요.


“그러면 모시겠습니다.”

“네···.”


기사님이 다시 저를 이끌었어요.

마음 단단히 먹고 일을 저질렀음에도 아주 작게 남은 응어리에 관해서는 언질 주지 않았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제 곁에 있고. 제가 필요할 때 도움을 주었어요.

제 악행을 보고도 참으로 한결같은 기사님이었답니다.


“···찾았습니다.”


지난 기억을 되짚어가며 산행하던 중, 다행히 원하던 바를 금방 이뤘어요.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 낙엽이 쓸리고 나뭇가지가 부딪치는 소리.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있었죠.


“성녀님. 원하신다면 기대셔도···”

“사실 알고 있었어요.”


저는 몸을 낮췄어요.

현실이 너무나 추워서 눈을 감았어요.

손을 뻗었어요. 저보다 더 세상을 보지 못할 눈을 꼼꼼하게 닫았죠.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아요.”


의사이자 장의사였던 아버지.

고인의 마지막을 지키며, 살아생전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곁을 지켜주던 아버지였어요.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에는 아무도 없었네요.

그래도 원하는 바를 이뤘으니 한은 푼 형태가 된 걸까요?

그런 위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여전히 손끝에 닿는 눈꺼풀은 저에 대한 걱정을 담고 있는 거 같았답니다.

한과 성불.

아버지께서 항상 강조하시던 그 말들을 정작 본인은 지키지 못했네요.

정말로 한 가장의 신념이 우습게 되었어요.


“편히 가세요. 누군가의··· 저의 영원한 위인이시여.”


저는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기렸어요. 항상 들어왔던 목소리를 따라 했어요.


[생에 마지막이 외롭다고 여긴 누군가의 위인이시여. 마음 편히 가세요.]


[당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그대의 올바른 삶을 뜻하고 있으니. 편히 잠드소서.]


[그대 가는 길을 노래하니 오해하여 슬퍼 마소서.]


[사랑하는. 사랑하는 이여.]


[사랑하는 나의 아빠. 고마웠어요.]


그렇게 저는 아버지를 보내줬어요. 딸을 위해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은 위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그리고 차마 아버지를 이 땅에 내버려 둘 수 없던 저는, 뼛가루를 모아서 도자기 안에 담았어요.

언젠가 이 마을을 떠나 좋은 자리가 보이면 그곳에서 묻을 생각이었죠.

아니면 평생 모시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요.


“성녀님.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죽은 자.

산 자라면 또 산 자를 위해 움직여야죠.

어느새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저는, 이 마을에서 제일 좋은 여관에 들어갔어요.


“놀라지 않게 미리 말씀드리자면···”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게요.”


활짝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갔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평생 어둠 속에서 주눅 들고 살 거 같았거든요.

그렇기에 당찬 걸음으로 제일 좋은 방으로 들어갔어요.


“어서 오렴. 일리나.”


연약한 목소리. 그러나 확실한 힘이 담겨있었어요.

저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국 나온 말은 나약한 한마디더군요.


“다녀왔어요. 엄마.”


아마 그때 어머니는 기사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겠죠.

하지만 여전히 저를 향해 웃어주시며 팔을 벌려주시는 어머니였답니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런 느낌이 있었으니까요.

눈이 보이지 않아도 엄마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엄마··· 엄마···!”


그날 저는 하나 남은 제 가족의 품에 안겼어요. 울고 웃으며 다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인제 와서 말하지만 어린아이 같았네요.

그래도 그때에는 그런 생각 할 틈도 없이 참으로 많은 감정을 쏟아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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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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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133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31 12 0 21쪽
155 132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9 8 0 15쪽
154 131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6 9 0 15쪽
153 130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2 11 0 14쪽
152 129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19 11 0 13쪽
151 128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7 12 0 11쪽
150 127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11 0 13쪽
» 126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7 0 22쪽
148 125화 이름없는 성녀 24.01.10 7 0 14쪽
147 124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8 8 0 12쪽
146 123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3 11 0 16쪽
145 122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1 8 0 13쪽
144 121화 이름 없는 성녀 23.12.29 10 0 14쪽
143 120화 여정 그리고 일행 23.12.27 7 0 17쪽
142 <2부> 119화 여정 그리고 일행 23.12.25 8 0 24쪽
141 118화 작별 23.12.13 7 0 22쪽
140 117화 재판 23.12.06 9 0 21쪽
139 116화 재판 23.11.30 10 0 20쪽
138 115화 재판 23.11.22 12 0 21쪽
137 114화 성녀 23.11.19 11 0 19쪽
136 113화 성녀 23.11.15 8 0 19쪽
135 112화 성녀 23.11.11 8 0 21쪽
134 111화 성녀 23.11.08 10 0 21쪽
133 110화 성녀 23.11.04 13 0 19쪽
132 109화 떨어진 과실 23.10.25 10 0 34쪽
131 108화 불신 23.10.21 8 0 25쪽
130 107화 불신 23.10.17 8 0 20쪽
129 106화 불신 23.10.14 12 0 25쪽
128 105화 불신 23.10.10 10 0 18쪽
127 104화 불신 23.10.07 10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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