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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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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7.0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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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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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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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110화 성녀

DUMMY

110화 <성녀>



궁전에 마련된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자가 찾아왔다.

칼투스 14세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가람 왕국의 국왕이시여.”


제일 먼저 들어온 여사제가 인사를 올렸다.

사제복의 밑단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한 발을 뒤로 뺐다.

예전에 비하면 훨씬 예법에 능통한 모습에 국왕은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자세가 훌륭하군. 어디서 가르침이라도 받은 건가?”

“모험가 길드의 부길드장에게서 배웠습니다. 이 주라는 기다림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준비를 해봤습니다.”


다시 발을 가까이 붙이고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망토에 가려져 있지만 미소 짓고 있음이 분명했다.


“크흠. 저번에 급히 부른 일은 정말로 미안했네. 짐이 사과할 테니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게.”

“제가 어찌 국왕님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마음에 둔 것이 없으니 뜻대로 하시지요.”

“끄응. 영악한 것들 사이에 있다 보니, 사제의 말도 이상하게 들리니 참으로 문제로군. 그런 의미에서 브레드 자네가 항상 부러울 따름이지.”


뒤이어서 브레드도 들어왔다.

브레드는 곧장 국왕과 악수하고 건너편에 마련된 솜 의자에 앉았다.

일련의 행위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몇 번이고 방문한 자다웠다.

왕궁의 시녀가 그들을 대접할 차를 준비하는 동안 국왕은 캣니스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용사여.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게.”

“국왕님···. 그 호칭은 조금 바꿔주면 안 될까요?”

“걱정하지 말게. 여기에는 우리뿐이니 말이지.”


달그락.

캣니스는 시녀가 찻잔을 놓는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저들밖에 없다는 국왕의 말과 다르게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으니 문제였다.


“저··· 국왕님··· 역시 호칭을 바꿔주시는 게···”

“흠. 그렇게 신경 쓰이는가? 불편하다는데 어떡하겠는가 아가사.”

“그렇군요. 제가 그렇게나 부담스러운가요 아가씨?”


차를 따르던 궁인이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궁인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리자 캣니스는 일순 숨을 삼켰다.


“···장난이 지나치시네요, 두 분 모두.”


그 잠깐 사이에 지친 숨을 토해냈다.

캣니스가 쓴 망토 밑으로 국왕을 째려보는 눈빛이 있었다.


“어라? 벌써 들킨 거야?”

“허허허. 참말로 안 들키리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공주여.”

“진짜 그래? 우씨. 완벽한 변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너구리 귀가 쫑긋 세워졌다.

스무 살 근처의 나이인 너구리 수인 궁인. 사실 그녀는 가람 왕국의 공주님이었다.

위로는 두 형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며, 궁인으로 변장하면서까지 캣니스를 만나려 한 철없는 공주이기도 하였다.


“완벽한 변장이라기에는 국왕님과 너무 닮으셨어요. 공주님.”

“진짜? 이상하다? 주위에서는 아버지랑 전혀 안 닮았다고 하던데.”

“···주변에서 그렇게 말해요?”

“응. 전혀 안 닮았대. 실은 엄청난 미남이 내 친아빠가 아니냐고 말했어.”


캣니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수인의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어도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대체 어느 나라에서 국왕의 딸에게 국왕과 안 닮았다는 말을 내놓을 수 있을까.

대답을 한참 고민하다가 피곤해졌다. 미간 사이를 가볍게 압박했다.


“···닮으셨어요. 특히 국왕님이 일할 때랑 눈매가 닮았어요.”


솔직히 캣니스의 의견도 어느 용감한 사람과 비슷하긴 하였다.

똘망똘망하게 생긴 공주에 비해 복슬복슬한 턱수염의 국왕은 너무나 푸근했다.

그런데도 캣니스가 국왕과 닮은 점을 알아볼 수 있던 이유는, 이전에 만났던 2왕자와의 대면 때문이었다.

공주와 왕자의 인상을 대조하기만 해도 둘이 남매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흠. 알아보라고 힌트를 준 거긴 한데. 너 정말로 예리하구나?”

“허허 우리 공주가 무려 대륙을 구한 용사에게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간악한 마족들을 상대하며 활약하려면 저 정도 눈썰미는 당연하지.”

“그래? 그 잘난 눈썰미가 있어서 우리 오빠를 걷어찬 건가?”


대화 중에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진 말.

캣니스는 차향을 음미하다 콜록 사레들렸다.


“···네? 네?!”

“정말이지. 내 또래한테 추파라니. 그 인간도 글렀네. 글렀어.”


아무렇지 않게 제 오빠를 험담한다.

공주의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이후부터 캣니스는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일국의 왕자를 찼다는 말도 안 되는 모함부터 시작해서 개인 취향을 묻는 둥. 끝도 없이 샘솟는 궁금증을 물어왔다.


“그래서? 어때? 다른 남자라도 있어?”


당연히 정신없는 와중에 오는 질문 전부를 답하지 못하였다.

캣니스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지켜보던 칼투스 14세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사가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구나. 이토록 용사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을 보니.”

“흥. 그러니 아버지가 적당히 대단했어야죠. 맨날 만나는 사람마다 ‘현왕님의 딸!’이라고 소리친다고.”


국왕의 개입에 아가사의 수다는 칭얼거림으로 바뀌었다.

한심한 공주 역할로 악명 높은 영애에게 약점 잡히려고 해도, 국왕의 명성 때문에 그럴 기미가 생기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그러면 공주님은 나쁜 영애에게 휘둘리고 싶은 거예요?”

“응! 맞아! 처음에는 어울리다가 그쪽 약점을 잡아서 내 친구로 만들려고.”

“약점을 잡아서 친구로 만들어요···?”

“응. 둘도 없는 친구가 될 거야.”


물론 이게 평범하지 않다는 걸 본인만 모르는 듯하였다.

캣니스는 생각했다. 과연 그걸 친구가 된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고민하는 얼굴에 혼란이 가득했지만, 정작 공주의 아버지는 익숙한 듯하였다.


“현왕이라. 정말 들을 때마다 부끄러운 칭호라 생각하지 않나 브레드여. 나는 결국 그들에게 복종을 선택한 한심한 왕일 뿐인데.”


오히려 이 혼란 속에서 지난 인생을 되돌아봤다.

공주의 칭얼거림 속에서 자아 성찰하다니.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놀라운 능력이었다.


“칼투스 14세여. 그대의 업적은 더 칭송해도 되는 종류가 분명하네. 비록 그때의 나는 젖먹이 시절에 불과했지만, 아직도 음유시인을 통해 들려오는 무용담을 들어보면 위대한 영웅의 반열에 올라도 부족함이 없네.”


브레드가 울적해진 그를 위로했다.

이에 국왕은 그렇다고 답하며 위안을 얻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찻잔을 들었다.

지난 세월을 헤아리며 차향을 음미했다.

잔잔하고 포근한 느낌이 감돌았다. 이미 서로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해한 분위기였다.


“이 분위기 뭐야? 하여간에 아버지는 틈만 나면 이상한 소리로 분위기를 망친다니까.”


기분이 상한 공주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이 기뻐할수록 공주는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아아. 정말 즐겁군. 언제나 이런 날만 이어지면 정말 행복할 테지.”


국왕은 실로 만족스러워했다.

기뻐하는 모습으로 이제는 마냥 어리지 않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순간처럼 언제나 그대들이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이어진 말과 함께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에 가라앉은 분위기에서는 공주조차 입을 열지 못했다.

그만큼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두 모험가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았고. 또 그것을 어떤 심정으로 말하는지 알기에 조용히 경청했다.


“하얀 사제여. 짐이 망토 안의 얼굴을 보아도 괜찮은가.”


한 나라의 국왕이 일개 모험가를 존중하며 말한다.

캣니스는 이에 화답하듯 회색 망토를 머리 뒤로 넘겼다.


“뭐야? 예쁘기만 한데?”


끼어든 공주의 말에 캣니스는 미소 지었다.

브레드도 오랜만에 본 캣니스의 얼굴은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기 온다고 노력했어요.”


비늘이 가득했던 얼굴에는 약간의 흉터만 남았다.

일전에 키메라 실험에 쓰였던 마물의 흔적은 온데간데없다.

이 정도면 상처가 다 나았다고 봐도 될 상태였다.

흉측했던 모습 대부분이 사라지고 본래의 모습을 상당히 되찾았다.


“진척이 있다니 다행이군. 그러면 이제 몸이 다 나은 건가?”


국왕의 물음에 캣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왼쪽 눈가를 만져서 한쪽 눈동자 색이 다름을 강조하였다.


“아직 이 눈과 심장이 남아있어요.”

“심장···?”


공주가 처음으로 충격이 깃든 얼굴을 하였다.

시녀 복의 가슴 부분을 꽉 붙잡더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에 국왕은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픈 표정을 짓는 공주의 몸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신전은 그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건가?”

“그런 말씀 마세요. 신전은 마족화를 견딜 신성력을 충분히 제공했어요. 남은 일은 제가 천천히 시간을 들이면 해결될 일이에요. 저 말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테고요.”

“···정말 그대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번 일도 그렇고, 앞으로도 말이지.”


국왕은 탄식과 함께 풍성한 갈색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근심 어린 얼굴로 그들을 마주했다.


“안타까워. 정말로 안타까워···.”

“아버지···?”


스스로 혼잣말하는 모습은, 마치 해야 할 말이 있지만 차마 못 하는 사람 같았다.

이에 브레드와 캣니스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칼투스 14세여. 혹시 무슨 말이 하고 싶거든 그대를 탓할 일은 없으니 편히 이야기해주게.”

“여신님께 맹세코 국왕님을 비난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편히 이야기해주세요.”


그들의 말에 국왕은 눈을 감았다.

굉장히 피로감이 짙은 얼굴로 한 번 더 숨을 내쉬었다.

공주인 아가사는 국왕의 힘이 되어주려는 듯, 팔걸이 위에 손을 감쌌다.

이내 침묵하던 국왕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떠났으면 하네.”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어떠한 말이 나와도 받아들일 거라고 결심했다.

하지만 국왕이 말을 꺼렸던 만큼. 이번 말을 선뜻 반길 수 없었다.


“그대들이 이미 충분히 겪었듯이 현 왕국의 상황이 좋지 못하네.”


일전에 겪었던 두 번의 재난과는 다름을 강조하였다.

이번 일로 왕국의 사람들이 의지하던 무언가가 꺾여버렸다.


“마치 몇백 년 전의 마녀사냥같이. 모든 일이 끝나도 악몽이 끝나지 못하네.”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캣니스도 잘 알았다.

사람들은 이 일을 종결시켜줄 존재를 원했다.

그것이 구원자이든, 흑막이든, 아니면 죄 없는 희생자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네.”


마족.

이번 일의 원흉이자 인류의 원적.

사람들은 마족과 연관되는 모든 것을 증오하기 시작하였다.


“시작은 단순한 해코지일지 모르지.”


집단에서 따돌리고, 물건을 팔지 않고, 매도를 서슴지 않으며, 돌까지 던지는 건 사소한 해코지에 불과하다.


“이 감정의 파도는 점점 더 커질 것이네.”


이미 왕국은 이번 일의 사망자를 특정하여 대규모 수색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생존자를 발견할 때도 있었고, 사망을 확신시켜주기도 하였다.

그때의 검은 마물이 적이 아니라고 밝혀진 상황인데도. 그들의 기억 속에는 마족이 제 가족을 위협한 존재로 각인되었다.


“악역이 정해졌으니 횃불과 대못을 들 거네.”


마족에 대한 미움이 뿌리내렸다.

캣니스와 가더가 희생자로 낙인찍혔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테지.”


감정의 범람은 잃은 게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빨리 터질 것이다.

만약 그 범람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지금이 유일한 시기였다.


“그래서 떠나야 하는 거군요.”


모든 말을 경청한 캣니스가 말했다.

사정이 복잡했지만, 결국 국왕이 손 쓰는 게 불가능하기 전에 왕국을 떠나란 소리였다.


“국왕께서는 저희를 생각해서 하신 말씀이네요.”

“아니. 틀리네. 왕국의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그대들을 이용하는 거네.”

“아니요. 국왕님은 저희를 위한 최선을 다하고 계세요.”


캣니스는 잘못된 말을 똑바로 수정했다.

은근슬쩍 본인의 잘못으로 넘어가려 한 국왕의 행동을 나무랐다.


“왕실 기사단도, 신전도, 모험가 길드도 전부 최선을 다했어요.”


모두가 최선을 다했음을 강조했다.

최선을 다한 게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결과가 되었음을 그들은 안다.

그런데 그 실패의 책임감을 왕이라는 이유로 혼자 짊어지려 하니. 아무리 왕이어도 잘못된 행동이라고 질책했다.


“일전에 이카루스 님 앞에서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지금 한 번 더 국왕님께 말할게요.”


캣니스는 단호한 태도로 본인의 뜻을 밝혔다.

브레드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탄식했다.


“이번 일은 그저···”


-모험에 실패했을 뿐인 일인 걸요.


지난번 모험가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와 같았다.

듣는 이가 절로 고개 돌릴 말이었다.

모험의 실패는 모험만큼이나 알 수 없는 일투성이.

제법 형편 좋은 이야기로 들리지만, 누군가에게는 잔혹한 종류의 말이었다.


“지금은 그 뒷일을 수습하는 단계예요. 당장은 힘들고 괴롭겠지만 이 일을 이겨내야만 다음 모험을 할 수 있어요. 아픈 부분을 도려내야 한다면 기꺼이 그래야겠죠. 설령 그것이 사람 간의 관계라고 할지라도요.”


이것 또한 모험의 일환.

모험의 실패는 언제나 괴롭다.

이런 고통을 견디고 일어서야만 모험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국왕은 이해했지만, 공주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아직 세상을 다 모르는 공주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니 국왕님처럼 혼자 잘못을 끌어안는 건 옳지 못해요. 우리는 지금 홀로 활동했던 게 아니잖아요.”


어쩌면 진리와도 같은 말이었다. 실패에 대한 책임감은 구성원 전부가 짊어진다.

비록 실질적인 책임은 다르더라도 함께라서 견딜 수 있다. 그렇기에 모험가의 파티이고 친구임을 밝혔다.


“국왕님은 국왕님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셨어요. 덕분에 모든 사람이 저희를 미워하지는 않잖아요.”


국왕은 본인의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다고 여겼지만 캣니스는 그러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그 증거로 베르 길드를 미워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남몰래 베르 길드로 찾아와 감사의 말을 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 국왕님은 지금처럼 국왕님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시는 일을 하세요. 저희는 모험가답게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테니까요.”


칼투스 14세는 캣니스의 공세에 주먹을 쥐었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는 브레드를 보더니, 그제야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금 전 설교에 대한 감사가 담긴 눈빛이 다시 캣니스 쪽을 바라봤다.


“하얀 사제여. 용사여. 내 친우의 길드원인 그대여. 그대는 정말로 강인한 정신력을 갖고 있군.”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렸을 적부터 동경하던 모험가임을 톡톡히 느꼈다.


“짐이 그대들에게 왕국을 떠나달라고 말했지만, 당장 그리고 영원히 떠나달라는 말은 아니었네.”


국왕은 공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가사 공주는 기꺼이 구릿빛 두루마리를 건네었다.


“이건 현재 극비로 치는 이야기이네. 지금껏 몇몇 대신만 알고 있지. 그리고 이제는 자네들도 알게 될 이야기이네.”

“극비라니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어요!”

“걱정하지 말게. 영원한 비밀이 아니고 조만간 온 국민이 알게 될 일이었니. 그저 이야기하기 전에 그대들이 알아줬으면 해서 그러네.”


국왕은 직접 두루마리의 끈을 풀어서 건네었다.

브레드와 캣니스는 심각한 얼굴로 두루마리를 받았다.

두루마리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이 크게 뜨였다.

특히 캣니스는 당황스러워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두루마리의 내용은 극비로 취급할 만했다.


“조만간 셀레브리디 교단의 성녀가 이 왕국을 방문할 거네.”


셀레브리디 교단의 성녀. 아쿠아 센츄어리가 가람 왕국을 방문한다.


“그 자리에서 그대들의 죄질을 판단해주기를 부탁하겠네.”


국왕은 약속했다.

성녀에게 부탁하여 그들의 무고를 입증하겠다.

사실상 이미 그들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저 성녀의 명성에 힘입어서 시민들의 잘못된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자리였다.


“그리고 여기서 그대들에게 부탁하겠네.”


하지만 결국 임시방편인 이야기.

완벽하게 군중을 통제하는 방법이 아님을 국왕은 알고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쌓아둔 둑은 언젠가 터지기에 그들에게 떠나기를 권고한 것이다.


“때마침 성녀의 순례를 도와줄 인력이 필요하지. 그 일을 그대들이 맡아 주었으면 한다네.”


무사히 떠나고 언젠가 돌아올 수 있을 여지를 재판에서 만든다.

그 시간이 짧은 세월이 아니기에 가람 왕국을 떠날 것을 권했다.

그리고 굳이 그들에게 성녀의 호위를 맡기는 이유는, 아무리 증오에 미친 사람들이라도 성녀의 순례에서 수작을 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왕국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기회가 이번밖에 없을 터이니···.”


원래라면 나라를 구한 포상을 해야 하지만, 지금 시기에는 민심이 흔들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왕국을 떠나기에는 지금이 안성맞춤인 시기였다.


“그렇군. 칼투스 14세여. 그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잘 알았네. 우리의 앞날을 위해서는 이 나라를 떠나는 거로군.”

“일이 이렇게 돼서 정말 면목이 없네. 그대들이 지내던 저택은 사람을 보내서 항상 청결을 유지하도록 하지.”

“그래도 당장 결정을 내릴 수 없기에 시간을 조금 주었으면 하는군. 그래도 괜찮은가? 칼투스 14세여.”


국왕은 그에게 얼마든지 고민하라며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허락된 시간은 길지 못하였다.

성녀의 방문까지 앞으로 남은 건 고작 사 일. 그 안에 모든 결정과 준비를 끝내놔야 했다.


“저 국왕님?”

“말하게 용사여.”

“그런데 그 방법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지 않나요?”


완벽한 줄 안 계획이었는데, 캣니스가 돌연 의문을 제기했다.

더 문제 될 부분을 모르던 국왕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지?”

“그··· 성녀님이 재판을 여는 문제인데. 과연 성녀님이 참석해줄까요?”

“허허. 대체 무슨 걱정을 하나 했더니.”


국왕은 괜한 걱정으로 치부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없이 너그러운 눈빛을 보냈다.


“무려 셀레브리디의 성녀 아닌가. 명성을 들어본 바로는 신실하고, 성실하며, 불의를 참지 못하는 편이라고 하더군. 그런 훌륭한 자가 짐이 직접 요청한 말을 거부할 리 없으니, 재판에 관한 건은 걱정하지 말게.”

“네, 네. 그렇겠죠···?”


국왕은 불안해하는 캣니스에게 확실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여전히 캣니스의 반응은 이상했다.

의문문으로 말을 끝내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 이상한 반응을 눈치챈 브레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브레드는 생각했다.

셀레브리디 교단의 성녀, 아쿠아 센츄어리.

그녀의 신실함과 성실함은 브레드 또한 알 정도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런데도 캣니스는 그녀의 협력에 불안해하고 있다.

무려 셀레브리디 교단의 한 주축이었던 인물이.


‘마치 지금 그녀의 반응은···’


성녀도 열한 장의 날개 중 한 명이기에 캣니스와 말 한번 섞지 않았을 리 없다.

생각하지 못했던 막연한 불안감이 슬금슬금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렇죠. 신실하고 성실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녀님이었죠. 아쿠아 님은···”


캣니스로 하여금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인물이라니.

그녀와 덩달아서 브레드도 불안한 목 넘김을 보였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추천과 좋아요 잊지마세요-!


작가의말

죄송합니다. 컨디션 관리 실패로 이번주도 한 편만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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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126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6 0 22쪽
148 125화 이름없는 성녀 24.01.10 6 0 14쪽
147 124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8 7 0 12쪽
146 123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3 10 0 16쪽
145 122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1 8 0 13쪽
144 121화 이름 없는 성녀 23.12.29 10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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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118화 작별 23.12.13 6 0 22쪽
140 117화 재판 23.12.06 9 0 21쪽
139 116화 재판 23.11.30 10 0 20쪽
138 115화 재판 23.11.22 11 0 21쪽
137 114화 성녀 23.11.19 10 0 19쪽
136 113화 성녀 23.11.15 7 0 19쪽
135 112화 성녀 23.11.11 8 0 21쪽
134 111화 성녀 23.11.08 10 0 21쪽
» 110화 성녀 23.11.04 13 0 19쪽
132 109화 떨어진 과실 23.10.25 10 0 34쪽
131 108화 불신 23.10.21 8 0 25쪽
130 107화 불신 23.10.17 8 0 20쪽
129 106화 불신 23.10.14 12 0 25쪽
128 105화 불신 23.10.10 10 0 18쪽
127 104화 불신 23.10.07 9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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