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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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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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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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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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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떨어진 과실

DUMMY

109화 <떨어진 과실>



“이야, 이번 일은 엄청 큰일이었어.”


모험가 길드장의 이 층.

모험가 길드의 집무실이었다.

하얀 머리 소년의 모습인 길드장은 오늘 받은 서류의 끝단을 맞췄다.


“설마 네가 보낸 편지에 그런 의미가 담긴 줄 몰랐어. 아. 네가 보낸 게 아니니까 몰랐던 게 당연하려나?”


끝단을 맞춘 서류를 책상 너머에 있는 인물에게 건네었다.

그러자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인 클레인은 서류를 받기를 거부했다.


“왜애~ 잘 풀렸잖아~ 이게 다 우리 부길드장님이 잘해줘서 그런 거···”


아양 섞인 말에도 눈빛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책망하는 낌새도 있었다.

모험가 길드장 이카루스는 조금 전까지 가볍게 굴던 행동을 고쳤다.


“미안해. 아무리 급했어도 너 혼자 보냈으면 안 됐는데.”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이번 기회에 저를 처리하려는 속셈인가 내내 생각했어요.”

“그만큼 내가 없어서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했어. 실제로 위험했고 말이야. 그래도 클레인의 수고 덕분에 이 정도 피해로 끝낼 수 있었어, 고마워.”


일전에 이카루스는 클레인 홀로 사천왕에게 보냈다.

그에게서 조언은 얻었기에 왕국 멸망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했다.


“···베르 길드는요?”


그러나 애초에 그녀를 보냈을 때 가정했던 최상의 결과도 아니었다.

낮게 가라앉은 클레인의 목소리가 현 상황을 대변해주었다.


“아. 미안. 기분 나빴어?”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그들은 아직인가해서요···.”


그들은 베르 길드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렸다.

현재 베르 길드는 이번 사태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것이 좋은 영향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문제였다.

현재 베르 길드는 모험가 길드의 권고로 대외적인 활동을 중지하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 그들이라면 분명 일어설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요···.”


클레인은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하지만 굳이 눈으로 보고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었다.


“그래도 영웅이나 다름없는데. 이런 취급은 불합리한 거 같아요.”


불과 몇 주 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클레인이 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불에 그슬린 거리와 복구가 덜 된 건물들.

슬픔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처참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모두에게 사랑받던 여사제의 상태였다.

캣니스가 단순히 거리로 나갔다가 피범벅이 돼서 모험가 길드를 방문했다.


“캣니스 씨의 그거··· 정말로 나을 수 있는 거겠죠···?”

“신력도 신성력도 소용없더라. 본인의 말로는 몸 상태가 좋을 때 도려내면 된다던데.”


간단한 응급조치를 하면서 살핀 캣니스의 얼굴.

무슨 험한 일을 당한 건지 상태가 심각했다.

도저히 클레인이 도시를 떠나기 전에 봤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후우. 안 그래도 힘든 사람들인데 다들 너무하네요.”

“그러게. 다들 지능이 도플갱어랑 뒤바뀐 게 아닐지 의심될 정도야. 차라리 그랬으면 토벌할 텐데 말이야.”

“그런 말은 좋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동감할게요. 정말 어리석어요.”


클레인은 서류를 책장 안에 넣었다.

찻잔이 준비된 탁자로 갔다.

특별히 제작된 기구에 검은 가루와 데운 물을 부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커피를 어두운 얼굴로 보았다.


“언젠가 두 철학자가 다툰 적이 있죠. 사람의 본성은 선하냐 악하냐···.”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어두웠다.


“정말로 이럴 때엔 사람의 본질이 선하지 않다고 믿게 되네요.”


뚝뚝.

검은 방울이 하나둘 내려와서 찻잔을 채웠다.

그 액체가 지난번에 보았던 검붉은 피를 연상시켰다.

그녀에 대한 취급에 비하면 사천왕에게 전령으로 보내진 자신의 처지는 훨씬 형편 좋았다.


-괜찮아요. 다들 금방 일어설 거예요.


얼굴 반쪽이 딱딱한 바위 같은 것으로 덮여있던 모습. 인간 같지 않은 송곳니와 뿔이 달렸다.

여사제는 흉측한 모습이 된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도 타인의 마음부터 헤아렸다.


-제가 봐도 흉측한데. 다른 사람이 보면 오죽할까요.


그런 불합리한 취급에도 미소 지었다.

정말로 그 정신력은 대단하지만 질릴 정도였다.

캣니스의 안일한 대응에 화가 났는지, 셰인과 바네샤 그리고 루나는 분노했다.

그러나 화를 내준 건 그들뿐이었다.

평소에 불화를 못 참던 모험가들도 이번만큼은 침묵했다.

오히려 심한 일을 당한 캣니스를 탓하는 눈빛으로 보던 모험가도 있었다.


“그래요. 마치···”


마치, 너 때문이라는 듯이.


“그들이 잘 이겨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네요.”


커피를 내리고 남은 찌꺼기를 버렸다.

커피를 받은 잔을 두 찻잔으로 나누어서 자리를 비켰다.

하나는 이카루스를 위해 준비한 커피. 또 하나는 클레인 본인을 위한 커피.

진한 커피 향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오늘도 그들의 밤은 커피 향기로 가득할 예정이었다.



*****



“후우. 자네. 그렇게 조심하라 했는데 또 몰래 나갔군.”

“하하하··· 죄송해요···.”

“바뀌지 않을 사과는 됐네.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인 일이지.”


브레드는 문 앞에서 비켜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밖에 나갔다 돌아온 그녀를 지켜봤다.

캣니스는 잔뜩 몸을 움츠리며 문턱을 넘었다.

인식 저해 마법이 걸린 망토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머리에는 뭘 그리 붙이고 다니는 건가?”

“아. 달걀 껍데기예요. 다 털은 줄 알았는데 남아있었나 보네요.”

“자네···.”

“저, 정말로 달걀을 맞은 게 다였어요! 다른 험한 일 같은 건 없었어요!”


브레드는 착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이 작은 여사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근심이 가득했다.


“몸 상태는 지금 어떤가?”

“아, 괜찮아요. 이제 몇 부분만 더 고치면 돼요.”

“그렇군. 그래도 처음에 많이 걱정했는데. 고칠 수 있다니 다행일세.”


그들은 매일 같이 반복되는 형식적인 대화를 하였다.

그래도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증세가 좋아지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입을 열기만 해도 쇳소리가 섞여 나오던 이전에 비하면 훨씬 좋았다.

틈만 나면 발작하고 피를 토하는 모습보다는 다행이었다.

아직 눈에 보이는 곳이나 보이지 않는 곳이나. 고쳐야 할 부분은 한참 남았지만 말이다.

브레드는 착잡한 심정으로 여사제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무슨 하실 말씀이 있나요?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계시네요.”

“···내가 그렇게 티가 나는가?”

“네, 굉장히요. 평소보다 심장 박동수도 빨라요.”

“정말. 자네 눈썰미는 속일 수가 없군,”


브레드는 가슴의 끝을 풀어서 안쪽에 넣어둔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루마리를 봉해둔 끈에는 왕궁의 인장이 있었다.


“이것 때문일세.”


캣니스가 두루마리의 존재에 의아하던 중에, 그것을 건네었다.


“이건 뭔가요?”

“칼투스 14세가 얼굴을 한 번 비췄으면 한다더군.”


왕실의 서신. 칼투스 14세의 전언이다.


“브레드 님 하지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건 왕실의 법도에 어긋나잖아요.”

“그도 이번 사태에 대해 알고 있을 거네. 아픈 몸을 이끌고 찾아갔는데 뭐라 하지 않을 테지.”

“···꽤 형편 좋은 이야기를 하시네요. 제가 아는 브레드 님은 예의 하나는 깍듯하시던 분이었는데요.”

“나는 언제나 상대가 배려할만한 대상일 때에만 그러하네. 상대가 우리에게 배려를 바라였으니, 우리 또한 배려를 바라여도 문제없을 테지.”

“결국 막무가내로 행동하겠다는 거네요.”


캣니스는 그의 발언에 고개 저었다.

망토 때문에 브레드는 그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여사제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자네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 건 참으로 억울한 일이군.”


브레드가 억울한 취급에 눈을 가늘게 떴다. 캣니스는 얼른 시치미 떼고 고개 돌렸다.


“그래서 대답은 어떻지?”


왕실에서 보낸 초대장.

몸 상태를 핑계로 거절하는 방법도 있긴 하였다.

애초에 핑계도 아니고 사실에 기반하였으니 문책도 받지 않을 상황이었다.


“갈게요. 평소에 신세 지는 분에게 못 갈 상태는 아니어서요.”


하지만 캣니스는 가기로 선택했다.

브레드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알겠네. 그러면 그리 말해두겠네.”

“기한은 십사 일. 두 주 동안 최대한 얼굴 중심으로 고칠게요.”

“그래 주겠나? 이 일 때문에 무리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고 싶어서 하는 일인걸요. 그리고 몸도 할 수 있는 데까지만 고치고 갈 거니까요.”


십사 일 후의 약속을 잡고 두 사람은 멀어졌다.

브레드는 계단을 올라가는 여사제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봤다.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그날 비에 젖어있던 여사제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정말로 괜찮은 거면 좋겠군.”


브레드는 아직도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베르 길드가 하락세를 걷기 시작한 몇 주 전.

모든 사람들의 원망이 시작된 그날의 일을 기억하였다.



*****



때는 기사단과 협력하여 도시 곳곳에 도사리는 도플갱어와 맞서던 때였다.

사실상 난항을 겪고 있던 제압 작전 중에, 돌연히 나타난 검은 짐승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시민들은 도플갱어뿐 아니라 새로이 등장한 검은 마물에게도 두려움을 느꼈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세계의 종말이라며 비명을 질렀다.


“브레드 공. 그 꼬마는 어떻게 하고 혼자 옵니까?”

“잠시 쉬는 게 좋을 듯하여 기사단에게 맡기고 왔네.”

“그 말인즉슨. 그쪽 상황은 어땠습니까?”

“아마 여기와 다를 게 없을 거네.”


브레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상황을 모두 확인한 뒤에 뱉은 말은 여태까지와 다를 게 없었다.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군.”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브레드도 현 상황에 당황했다.

이 새까만 마물이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을 집어삼키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표현하기로 정말 눈 깜짝할 새였습니다. 잠깐 한눈을 팔았더니 옆에 있던 동료를 먹어 치우더군요.”


모험가 라군 역시 새까만 마물을 보았다.

또한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단지 그것이 특정 사람에게는 관심 주지 않는다는 사실만 알았다.


“개의 주둥이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제게 관심도 주지 않고는 머리만 남겨둔 채 사라졌습니다.”


여전히 새까만 마물의 정체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의심 가는 정황이 생겼다.


“조금 낙관적인 생각이긴 합니다만···. 그것은 마치 도플갱어만을 노리는 거 같았습니다.”


갑작스러운 동료의 죽음에 혼란이 온 것도 잠시.

죽은 존재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그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피로 얼룩진 동료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없었다.


“자네도 그렇게 느꼈나? 사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네.”


브레드가 그 사실을 느끼게 된 정황은, 흔한 지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동료 이상인 여사제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 일이 있는 직후. 함께 있던 자일리는 숨 쉬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브레드 본인 또한 손을 떨면서 얼굴을 감쌀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여기서 브레드가 겪은 일과 라군의 이야기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근처를 지나가던 이카루스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혼란을 진정하지 못했을 거라는 점이었다.


“라군. 아직 확실치 않지만 말하겠네. 이놈들은 도플갱어와 습성이 비슷하지만. 명백히 다른 존재라네.”

“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마 시체 중에는 얼굴이 있는 자도 있을 걸세. 하지만 당황하지 말게. 분명 그것들은 가짜일 터이니.”


이건 이카루스가 직접 한 말이었다.

그는 자신과 똑 닮은 시체를 들고 다녔다.

그걸 무슨 종 흔들 듯이 딸랑딸랑 보여주면서 여기저기 같은 문제라고 알려줬다.


-설마 편지를 그자가 직접 보냈다는 걸 이제야 깨닫다니요.


브레드는 이카루스에게서 본인의 분신을 잡은 계기를 들었다.

이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은 도플갱어가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일반인에게까지 퍼진 게 문제라고 한다.

심지어 이 사단을 만든 소문의 근원지는 모험가였는데, 정작 자신이 초대하지 않은 모험가까지 이 일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모험가를 찾아가 진술을 들은 결과, 이카루스 본인이 사람들에게 주의 주라고 알렸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그 시간에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 부분에서 이카루스가 이상함을 느끼고, 함정을 설치한 뒤 본인의 분신이 걸리기를 기다렸다.


“그랬더니 신기한 걸 얻었다면서, 보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보여줄 테니 언제든지 찾아오라더군.”

“그런! 도플갱어인지 알 수 없는 도플갱어라니요! 혹시 길드장이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안타깝게도 얼굴이 있는 시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그도 검은 짐승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보이더군.”

“그렇습니까. 이거 참 문제입니다.”


당장 눈앞의 혼란은 해결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대로였다.

어째서 새까만 마물은 사람들을 집어삼키는가에 대해서는 브레드와 라군끼리 생각해야 했다.


“만약 길드장의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더 그럴듯해지지 않습니까?”


사실 그들은 검은 마물에 대해서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리긴 했다.


“정말로 놈은 도플갱어만을 찾아서 잡아먹은 거 같습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놈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네.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도플갱어만을 잡아먹겠나?”

“천적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평범한 도플갱어가 아니랬으니 특별식을 노리는 마수 같은 거라든지요.”

“머리만 남겨놓은 행동도 이상하네. 마치 일부러 놈의 정체를 알려주기 위함인 거 같지 않은가.”

“브레드 공. 그건 너무 앞서가는 거 같습니다. 우리도 생선을 먹을 때도 머리는 발라 먹지 않습니까.”


검은 마물의 행동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을 가졌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라군은 마족이 인간 편을 든다는 것만으로 상당한 창의력을 짜낸 상태였다.


“우선 지인들을 찾아봐야겠군. 아무래도 도시 전역에서 벌어진 일인 모양이니.”

“그러면 같이 갑시다. 비록 동 등급 모험가가 금 등급 모험가를 걱정하냐면서 놀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딸내미가 걱정되니 찾아야겠습니다.”


지인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장소를 옮겼다.

거리는 그들이 알던 풍경과 많이 달라졌다.

부서진 진열장, 무너진 간판, 뻥 뚫린 외벽, 거리를 돌아다니는 잔해들.

무엇보다 거리에 비탄이 흘러넘쳤다.

사람들은 스스로 저지른 죗값에 오열하고, 죽은 도플갱어를 사람으로 착각하여 슬퍼하였다.

믿고 있던 거짓에 속아서 울부짖는 이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누군가 짜둔 거대한 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자들이었다.


“비가 내리는군.”


건물 일부가 불타서 이곳저곳 옮겨붙은 불씨가 있었다.

그래도 비가 내리니 큰 화재로 번질 걱정은 없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라군은 그토록 찾던 지인과 만났다.


“뭐야? 아직 살아있었네?”

“그게 아비에게 할 소리냐?”


라나는 꿀밤조차 쉽게 맞아주지 않았다.

혀를 삐죽 내밀고는 질척거리는 바닥으로 움직였다.

그대로 제 아비인 라군을 지나치더니 비를 맞아 홀딱 젖은 브레드 앞에 나란히 섰다.


“아저씨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자네도 무사해서 다행일세.”


그녀답지 않은 손수건으로 브레드의 젖은 머리를 닦았다.

그들의 인사는 여기까지였다.

위기 대처가 빠른 모험가답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검은 짐승? 그 마물을 말한 거면 당연히 봤어.”


라나는 제 뒤쪽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한 모험가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갑자기 그게 재 애인을 먹어버렸어. 결혼까지 이야기를 나눴다는데 안타깝게 됐지.”

“그렇군···.”


브레드는 모험가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여성의 머리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코입이 제대로 달린 여성의 머리.

이 여성은 이카루스가 말한 도플갱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섣부른 판단으로 절망을 안겨줘서는 안 됐다.

그렇기에 첫 사상자일 수도 있는 가능성만을 간직한 채, 조용히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비가 더 거세지기 전에 자네들도 들어가게.”

“항상 머무는 저택으로 가는 겁니까?”

“그러하네. 아마 내가 찾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을 듯싶으니.”


캣니스와 가더가 어디에 있는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직감이 그곳에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였다.


“잠깐만 아저씨.”


그런데 라나가 떠나는 브레드를 붙잡았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나도 같이 가.”

“야. 너 갑자기 왜 그러냐?”

“아빠도 같이 가.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브레드는 팔을 잡은 라나를 보았다.

눈동자 안에 담긴 감정을 읽어냈다.

불안과 걱정이 담긴, 장난기가 쏙 빠진 현역 모험가의 눈빛이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모험가의 직감인가?”

“어···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야. 그냥 느낌이 싸해서 그래.”

“그렇군. 원하는 대로 하게. 어쩌면 차 한 잔 대접할 수 없는 상황일 지도 모르지만 말이네.”


투두둑.

브레드는 입고 있던 셔츠를 뜯어냈다.

그것의 물기를 꽉 짜낸 뒤, 빗속에도 따라오겠다는 라나의 머리에 씌웠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 미안하군.”

“···아니야. 완전 충분해.”


라나는 붉어진 얼굴을 헌 옷 아래에 숨기고 달렸다.

그들은 브레드를 선두로 빗속을 해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아빠는 그 새까만 게 뭔지 아는 거야?”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겠냐? ···당장은 우리에게 도움이 됐다는 거밖에 모른다.”

“그렇구나···. 실은 말이야. 나랑 같이 다니다 죽은 그 여자가 마지막에 이상한 낌새를 보였거든.”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 험담하는 건 별로였지만, 라나는 이야기했다.

어쩌면 기우에 불과할지 몰라도 왠지 이야기해야 할 거 같았다.


“그 모험가의 약혼녀 말이야···.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서더니 겁먹은 표정을 짓더라고.”


라나는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미래의 약혼녀는 마치, 곧 제게 닥칠 죽음을 안 것처럼 멈춰 서서 소리쳤다.

마지막에 외친 목소리가 아직도 라나의 기억에 남았다.


“‘이 괴물···’이라고.”


그들은 침묵했다.

당장 뭐라 판단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했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을 거의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그 여자도 마물이 아니었을까 싶어. 허무맹랑한 이야기긴 한데, 자꾸만 같이 행동하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거든.”


라나만이 현 상황을 헤아리지 못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죽은 여성의 존재가 마음속에 이상한 흔적을 남겼다.

약혼녀를 잃고 슬퍼하는 모험가를 보면 이러면 안 되는데, 여성이 죽고 나서야 안심하는 본인을 이상하게 여겼다.


“나는 혹시 죽어서도 사람을 복제하는 존재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 참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 사람의 감각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나도 미쳐가나 봐. 스스로 이기적이란 건 아는데 점점 정도를 넘어가는 거 같아. 아빠가 생각해도 그렇지 않아?”


라나는 쓸쓸하게 말하고는 입매를 문질렀다.

남의 죽음에 기뻐하고 합리화하려는. 그런 자신을 혐오하는 감정을 담았다.

라군은 그런 딸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브레드 공.”

“그렇게 하게.”


더 이상 말 않기에는 자식의 슬픔을 보기 힘들었다.


“그래. 네 말대로다.”

“그렇지? 나 정말 미친 거 같지?”

“그쪽이 아니다 이 바보 같은 딸아. 정말로 놈 중에서 죽어서도 얼굴이 남는 개체가 존재했다.”


라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군의 말에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씩 웃었다.


“굳이 나 때문에 그런 말 안 해도 되거든 바보 아빠.”

“거짓말이 아니라네. 내 쪽도 그러했고, 이카루스가 직접 확인한 일이니.”

“네?”


라나는 앞을 보았다.

여전히 바쁘게 달리는 브레드까지 사실이라 말했다.

그들의 말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긴가민가하다가, 곧 헛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돼. 정말로 그런 게 있다고?”

“아마도 변이종일 터이지. 이번 사태를 보면 네임드의 존재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까지 되는 상황이네.”

“허. 평생 한 번도 보기 힘들다는 네임드를 여기서? 미쳤네. 이건 잠깐 즐기는 수준이 아니었잖아.”


그제야 라나는 기껏해야 숨바꼭질이라 여겼던 지난 생각이 한심해졌다.

네임드라면, 모험가가 드래곤 급의 사투를 생각해야 하는 상대였다.

아니면 온 대륙이 나서서 마왕급 전투를 해야 될 지도 모른다.

네임드란 인류 역사에서 항상 그런 존재였다.


“어쩐지 이상한 일투성이더니만···.”


그래도 줄곧 이상하게 여겼던 의문에 해답을 얻었다.

이제야 속이 후련하면서도 씁쓸했다.


“그러면 여기 있는 남정네들도 도플갱어가 아니기를 바라야겠네?”


라나는 픽 웃음을 흘렸다.

다른 두 사람도 그녀의 농담에 힘입어 미소 지었다.

그들은 더 속도를 높여서 베르 길드로 향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거세졌다.


“여기인 거지···?”


달리느라 숨이 찬 가슴이 오르내렸다.

이마에 흐르는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을 닦았다.

라나는 빗속에서도 뚜렷이 존재하는 거대한 저택을 보았다.

브레드의 거대한 등에서 벗어나서는 거친 숨을 뱉어내며 말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다 뭐야?”


저택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이 궂은 날씨에, 굳이 이 인파가, 이 길목을 막고 서 있었다.

그들은 저택 안까지 뚫고 들어갈 길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아무리 알랑거려도 사람들은 길을 내주지 않았다.


“저기! 잠깐만 비켜봐! 우리 지금 안으로 들어가야···”


라나가 참다못해 소리친 그때였다.


“이 괴물!”


호통이 울려 퍼졌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이 빗속을 뚫고도 원성 어린 목소리가 똑바로 들렸다.

슬픔도, 분노도. 사람들이 전부 누군가에게 쏟아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려던 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내가 봤어! 내가 봤다고! 저 괴물 놈이 내 아내를 집어삼켰어!”


억울한 심정을 토해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앞으로 찾아올 폭풍의 전조 같았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지지 않을 만큼 거셌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되어 이 일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런 빌어 처먹을 연놈들 같으니! 그동안 우리를 다 속이고 있던 거야!”

“괴물 놈! 괴물 놈···! 내 아이를 어떻게 한 거야! 당장 내 아이를 돌려줘!”

“돌려내! 돌려내! 당장 전부 돌려내라고!”


이쯤 되니 상황을 모르던 세 사람도 기이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수십 명의 사람에게 둘러싸였을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죽여! 죽여야 해! 저 악마를 살려서 내보내면 안 돼!”


손에 쥔 물건을 안쪽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자칫 맞으면 즉사할 수도 있는 물건들을 전력으로 던졌다.

라나와 라군이 사람들을 말려봤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에 더 반발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 기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을듯싶던 그때였다.


“지금 이게 뭣들 하는 짓인가!”


그 순간, 사람들의 목소리를 덮을 만큼의 노성이 울려 퍼졌다.

브레드가 상급 모험가다운 투기를 드러냈다,


“브, 브레드 머슬릿이다!”


그가 내보내는 압박감에 소란이 잠들었다.

바로 옆에 있던 라나와 라군을 비롯하여, 멀리서 감정을 토해내느라 바쁘던 사람들마저 일순 숨을 참았다.

금 등급 모험가의 폭력적인 존재감에 빗소리조차 잠시 멈춘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을 둘러보며 다시 한번 외쳤다.


“자네들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이렇게 몰아세우는가!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벌이는 건가!”

“저, 저게 내 딸을···!”

“그것을 왜 누구보다 사태 해결에 앞선 이들에게 따지는가! 누구보다 이 일에 마음을 쓴 것이 바로 저들이었거늘!”


브레드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넘어졌다.

상황을 통제한 그는 창백한 안색인 라나와 라군을 지나쳐서 인파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금 그대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네! 슬플 터이지. 괴로울 터이지. 화가 나고 답답하고 미칠 거 같겠지!”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을 막는 군중은 없었다.

다들 옆으로 비켜서서 그가 가는 길을 열었다.

사람들이 길을 연 중앙에는 역시나 있을 거라 예상했던 두 인물이 있었다.

망토를 품에 안고 있는 가더의 여성체.

그리고 몸 전체를 뒤집어쓴 망토 안에서 고통을 참아내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대들이 보기에는 이 행동이 옳다고 보는 건가! 이 행동이 정말로 떠난 이들을 위한 참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분노한 눈빛이 인파를 마주했다.

수많은 돌덩이가 깔린 장소 위에 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픈 이의 발목을 붙잡고! 가지 못하게 붙들어 놓는 것이! 정녕 그들이 원하는 일이냐고 물었다!”


제 능력만이 전부인 모험가 상위에 오른 남자, 브레드 머슬릿.

그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데 용기 있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보게나. 결국 그대들은 이 정도 감정으로 화를 내고 있던 걸세.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까지 나락으로 끌어들이는 한심한 짓거리였네.”


그의 말에 반박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진 그들은 고개 숙였다.

브레드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베르 길드의 두 사람이 지나갈 길을 열었다.


“우, 웃기지 마! 누구 마음대로 떠나려고 해!”


그러나 많은 사람 중 한 명쯤은 다른 마음을 품는 법이다.

떠나는 그들에게 돌덩이 하나가 날아왔다.

브레드는 곧장 돌덩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돌덩이를 막아선 물체가 있었다.


“이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새까만 생물이 돌덩이를 대신 막아냈다.

줄곧 의문이었던 검은 마물의 존재.

녀석이 돌덩이를 막고는 바닥으로 사라졌다.

브레드는 그제야 깨달았다.

녀석은 이곳에 있는 한 사람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검은 마물은 아예 미지의 존재가 아니었다.


“봐! 저거 봐! 내가 계속 말했잖아! 녀석이 부린 저게 사람들을 삼켰다고!”


팔을 뻗은 가더의 모습은 날아든 돌덩이를 잡으려 했다기에는 부자연스러웠다.

그가 팔을 뻗은 직후에 일어난 일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 됐다.

기회를 잡은 갯과 수인은 잘 보라며 소리쳤다.

돌덩이를 머리 위로 올려서 다시 한번 던졌다.


“저놈이야! 저놈이라고! 저놈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야!”


한번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술렁였다.

그만큼 가더가 보인 행동은 큰 여파를 불러왔다.

사람들의 관심이 브레드에게서 검은 마물을 조종한 이에게로 돌아갔다.


“마족! 마인이야! 마인이 우리 사이에 숨어있었다고!”


알 사람은 알지만, 대부분이 모르고 있던 사실,

가더의 정체가 사람들 사이를 한 번 더 술렁이게 하였다.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전쟁 중에도 안전했던 도시에 어떻게 마물이 들어왔겠어!”

“지금 보니까 저 여자 불길한 붉은 눈이야! 마족이야! 마족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인 게 분명해!”

“없애야 해. 저 불길한 것을 마을에서 쫓아내야 해!”


사람들은 한 번 내렸던 무기들을 다시 들었다.

그들은 단합하여 마인을 쫓아낼 생각을 꾸렸다.

점점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자 같이 온 두 부녀 모험가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어이! 당신들 미쳤어? 저게 우리를 도와줬는데 왜 화를 내는 거야?”

“진정하게 다들! 브레드 공이 전부 설명해줄 걸세!”

“이 머저리들! 누가 적인지도 분간 못 하는 거냐? 한심한 놈들아!”


라군과 라나가 사람들을 말리려 애썼다.

하지만 한 번 무기를 든 군중은 팔을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기어코 피를 볼 생각이었다. 슬픔과 증오가 그들의 눈을 가렸다.


“마인이라고! 우리는 전부 속고 있었어! 브레드 머슬릿! 당신도 인간이라면 어서 이쪽으로 와서 서!”


아까부터 하이에나 수인이 소리쳤다.

그는 가더의 정체를 폭로하고, 사람들에게 미움받게 하였으면서 끝내 증오로 눈동자를 번뜩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를 탐정이나 은인으로 여기는 듯하였다.

하지만 브레드는 그를 향해 일갈했다.


“가엾기 짝이 없군.”

“뭐라고?!”

“그대의 상처니까 굳이 말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지금 하는 행동은 추하다 못해 가엾을 정도로군.”


브레드는 여전히 가더의 편에 섰다.

하이에나 수인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치아를 드러냈다.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마인은 죽어야 해! 더럽고 지저분하고 역겨운 존재들이라고 저것들은!”

“내가 보기에는 지금 그대의 행동도 다를 바가 없네. 제 상처를 마주 보지도 못할 거면서 사람들 속에 숨어있는 게 우습군.”

“하! 멋대로 떠들어라! 나는 말이야. 똑똑히 보았거든. 저 마인이 품에 안은 망토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말이야!”


브레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기어코 선을 넘겠냐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이였다면 여기까지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이제야 알겠어! 너도 한통속이었구나! 저기 있는 마인들의 똘마니였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렇게 됐으니 사실대로 말하겠네만, 이 자리에 있는 마족은 여기 한 명뿐일세. 다른 한 명은 모두가 알듯이 가녀린 여사제이고.”

“하. 끝까지 시치미를 떼시겠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나를 말리지 마. 이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겠으니까!”


하이에나 수인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팔을 브레드가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사람들을 등에 업은 그를 말리는 건 불가능했다.

불안과 원성을 마주하던 브레드는 결국 하이에나 수인을 놓아주었다.


“잘 봐. 이게 이 더러운 놈들의 속셈이야!”


수인의 행동은 과감했다.

가더가 안고 있던 망토의 머리 부분을 들춘 것이다.

그런데 망토 안에 숨어있던 모습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브레드 또한 팔짱을 풀 정도의 일이었다.


“이거 봐. 이거 보라고! 이래도 우리가 이것들을 살려둬야 할 이유가 있어?!”


검붉은색으로 얼룩진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건 브레드가 알던 여사제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족이 사제를 흉내 내면서까지 숨어든 이유가 뭐겠냐고 다들!”


캣니스의 얼굴 반쪽이 비늘 같은 것으로 덮여있었다. 한쪽 귀는 파충류 마물의 물갈퀴 같은 게 달려있었다.

이마에는 부러진 뿔이 달려있었고, 송곳니는 흡혈귀가 연상될 정도로 날카로웠다.


“역겨운 마족들. 용사들에게 토벌이나 돼버릴 것이지.”


하이에나 수인은 눈에 드러난 진실과 사람들을 등에 업고 기고만장했다.

사람들의 암묵적인 동의까지 얻으니 행동은 더욱 과감해졌다.


“그래서 기분이 어떻지? 더러운 마족아?”


수인이 키가 비슷한 가더의 어깨를 밀치며 조롱했다.

어깨를 건드린 상대의 눈빛이 살벌해진 것을 확인하고도 코웃음 쳤다.


“자. 여기 이렇게나 보는 눈이 많아. 아까 했던 짓 다시 해 보든가.”


상대가 가더의 여성체라 그런지, 어떤 존재를 건드는지도 모르는 모습이었다.

남성체의 그였다면 하지 못했을 도발을 서슴없이 행했다.


“자 해봐. 하라고. 속셈을 드러내 이 악마야!”


그가 노리는 수는 하나였다.

검은 마물을 다시 한번 보여줘서 사람들에게 미움받기를 원한 것이다.

하지만 가더는 귀찮아하는 표정 이외에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 반응이 하이에나의 성미를 건드렸다.


“어디서 얌전한 척이야 이 더러운 마족이!”


결국 하이에나 수인은 정도를 넘었다.

가만히 안겨있던 캣니스의 이마에 난 뿔을 붙잡았다.

캣니스에게서 신음성이 흘러나왔고, 그 순간 가더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뭘 소중히 껴안고 있어! 그래봤자 더러운 너희들을 치료해줄 곳은 어디에도···”

“그만두게! 나의 우상이여!”


순식간에 하이에나 수인을 덮치는 검은 마물.

그건 이전에 보았던 주둥이만 달린 모습이 아니었다.

비바람을 막을 정도로 거대한 덩치.

저택만큼이나 거대해 보이는 그것이, 선을 넘은 수인을 넘어트렸다.


“헉!”


앞발 하나로 수인의 전신을 뭉개고도 남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그것이 주둥이를 벌렸다.

보기만 해도 사람의 감정쯤은 가볍게 압도하는 모습에, 소리 지르며 쓰러지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악!”


그러나 사람들의 비명은 당사자에 비하면 한 없이 작았다.

조금 전까지 도발을 서슴지 않던 하이에나 수인이 당장 졸도할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머리 위로 괴물의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수십 개의 눈알이 그를 보았다.

그곳에 감정은 없었다.

그저 상대를 먹어 치우고 싶은 탐욕만 비춰 보였다.


“살려줘! 살려달라고! 내가 잘못했어!”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쳐도 소용없자, 결국 미워하던 대상에게까지 도움을 구했다.

뒤늦게 사과했지만, 그것에게 사람의 온정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사, 살려···”


사람들을 등에 업고 저질렀지만, 정작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더 크게 벌어지는 마물의 주둥이를 코앞에서 직관하였다.

형용하기 힘든 공포가 수인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던 그때였다.


“안···돼요, 문지기님···.”


나지막이 들린 목소리와 함께 검은 짐승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확실히 있던 존재가 허상처럼 사라졌다.

그 너머에는 여전히 가더가 서 있었다.

이제는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해?”

“네?”

“비켜.”

“네? 네!”


하이에나 수인이 얼른 도망쳤다.

비에 흠뻑 젖은 가더가 다른 곳에 눈짓했다.


“대머리. 신전까지 안내해.”


어떠한 유감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과 목소리.

브레드는 잠시 가더를 지켜보다가 움직였다.


“다들 비키게.”


전처럼 부탁하거나 살기를 내뿜을 필요는 없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트고 비켜섰다.

그 길을 앞장서던 브레드는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듯 한마디 하였다.


“그대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섣불리 일을 저질렀네. 진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분명 후회하게 될 걸세.”


왕국을 구한 은인을 함부로 대한 일.

진실 알게 되면 후회할 거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등졌다.

그들이 떠날 때까지도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빗소리가 베르 길드의 정원을 채우는 전부였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추천과 좋아요 잊지마세요-!


작가의말

과실이 떨어지면, 날개 펼친 까마귀는 누명을 얻네요.

오늘도 제 글에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주 올릴 글은 이번 화가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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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113화 성녀 23.11.15 7 0 19쪽
135 112화 성녀 23.11.11 8 0 21쪽
134 111화 성녀 23.11.08 10 0 21쪽
133 110화 성녀 23.11.04 12 0 19쪽
» 109화 떨어진 과실 23.10.25 10 0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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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107화 불신 23.10.17 8 0 20쪽
129 106화 불신 23.10.14 12 0 25쪽
128 105화 불신 23.10.10 10 0 18쪽
127 104화 불신 23.10.07 9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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