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5.08 23:16
연재수 :
194 회
조회수 :
11,251
추천수 :
127
글자수 :
1,467,074

작성
23.10.14 10:55
조회
9
추천
0
글자
25쪽

106화 불신

DUMMY

106화 <불신>



“···페넥스. 이게 무슨 짓이죠?”


날카로운 목소리가 오두막에 울렸다.

까마귀의 검은 깃털이 오두막 내부를 채우며 소용돌이쳤다.

불타버린 종이. 부러진 펜촉.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눈을 매섭게 떴다.


“페넥스. 이건 분명 계약 위반일 텐데요.”


그에 맞서는 붉은 머리의 마인, 페넥스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한없이 오만한 눈빛으로 검은 머리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약 위반? 재미있는 말이군. 대체 내 행동 어디에 그런 낌새가 있다는 거지?”

“분명 계약에 응했을 텐데요. 저희가 준 정보와 그쪽이 가진 정보를 교환하기로요!”

“아. 기억났어. 봉황족의 보물 위치와 내가 가진 정보를 교환하기로 했었나?”

“그래요. 그래서 순순히 보물의 위치를 알려준 건데···!”

“하지만. 나는 너와 거래했지. 네 뒤에 있는 사람과 거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비겁하게! 맹세를 어기겠다는 건가요!”

“그럴 리가. 나는 확실하게 약속을 지키고 있다. 내 심장을 건 일인데 당연히 지켜야지. 내 노력이 보이지 않는 건가? 카라스 족의 여인이여.”

“이런 비겁한···!”


검은 머리의 여인, 클레인은 주먹을 떨었다.

하지만 화를 분출할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여유를 부리는 마왕군 사천왕 페넥스.

그의 앞에서는 까마귀도 참새가 될 뿐이었다. 혹은 날지 못하는 병아리인지도 모른다.


“이런. 아직 어린 너에게 한가지 충고를 주도록 하지. 마족과의 거래는 항상 주의하도록.”


빠득-

클레인은 이를 사리물었다.

그의 말대로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걸 후회했다.


-맹세하지. 나는 너와의 거래에 응하겠다.


설마 맹세에서 지칭한 ‘너’가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이카루스가 그녀를 이 먼 곳까지 보낸 노력과 시간이 무의미해졌다.


“자. 장난은 이쯤에서 그치도록 하지. 너는 이걸 받도록 해라.”


툭. 데굴.

잉크 펜이 바닥을 굴렀다.

클레인은 눈을 크게 뜬 것도 잠시, 선의를 베푼 그를 노려봤다.


“무슨 속셈이죠?”

“속셈? 그 표현은 틀렸다. 이건 너희에게 부르는 변덕. 혹은 선의라고 정정하도록 하지.”

“무얼 바라는 건가요.”

“딱히 바라는 건 없지만, 너희가 하는 게임. 조금 더 난이도 조정을 해야 할 거 같아서 말이다.”

“당신 눈에는 이게 게임으로 보인다는 말이군요.”

“너무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는 충분히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었고. 아무리 너희에게 애정이 가도 게임은 양측의 균형이 중요한 법이니까.”


클레인은 한 번 더 그를 쏘아봤다.

거기서 더 뭐라 하지 않는다.

한 왕국의 안위가 걸린 문제를 게임이라고 부르는 사내에게, 심지어 말을 정정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상대에게 평범한 대화가 통할 리 없었다.


“그러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펜을 잡았다.

대화 한마디 보다 그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쓰는 게 더 중요했다.

펜을 잡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번에도 황급히 종이에서 손을 떼었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죠!”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종이가 잿더미가 되었다.

이를 탓하자, 페넥스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너는 정말로 오락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내가 그들에게 허락하는 정보는 여기까지다.”


화르륵. 불에 탄 종이가 언제 잿더미가 됐냐는 듯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클레인이 적은 글씨까지 복구되었는데. 그중 일부가 변형되고 소멸했다.

본래 그녀가 전하고자 했던 정보의 반의반도 되지 않은 정보량.

고작 글씨 몇 개만이 종이 위에 남았다.


“딱. 이 정도. 이 정도는 허용해 주겠다. 이것도 분에 넘치는 정보지만··· 내 제자를 아끼는 너희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미친놈. 당신만큼은 그때 꼭 죽었어야 했는데.”

“이런. 나만이 아는 정보를 들은 것치고는 불합리한 처우로군. 내가 아니었다면 너희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삐이익-

페넥스가 손짓하자 클레인의 손에 묶여있던 보자기가 울었다.

보자기 한쪽이 불거지더니 그 안에서 새가 튀어나왔다.


“이걸. 네 주인에게 보내도록.”

“잠깐···!”

“반론은 듣지 않겠다.”


조금 전 글자를 바꾼 종이가 새의 다리에 묶였다.

새는 곧바로 창문 밖으로 날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저건. 내가 네 주인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같은 말을 전하는 전서구가 굳이 두 마리일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조금 전의 새는 페넥스가 이카루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거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본인이 보낸 전서구에게 직접 들으라는 언질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카라스족의 여인아.


병을 주고 약을 주는 것인지. 페넥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새가 일찍 도착하든 늦게 도착하든. 결과는 바뀌지 않으니.“



*****



가람 왕국.

알 사람은 아는 혼란한 시기였다.

그 혼란을 줄이기 위해 움직이던 발걸음이 자리에 멈췄다.


“캣니스. 기사단에 나쁜 놈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네. 기사단에 있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는 기사단 건물이 아니잖아.”


캣니스와 가더가 도착한 장소는 기사단이 아니었다.

호문쿨루스에 대해 거창한 추리를 펼쳐놓고는. 정작 본인은 다른 장소에 도착했다.

그 장소란, 그들 길드가 지내고 있는 곳. 베르 길드의 저택이었다.


“그쪽은 브레드 님에게 맡겼어요. 저는 또 여기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요.”


기사단으로 보낸 두 사람이 호문쿨루스를 해줄 거라 믿었다.

캣니스는 이곳에서 다른 일을 해야 했다.


“다행이에요. 그 사이에 결계를 넘어간 침입자는 없는 모양이에요.”


결계를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대문을 열었다.

정원에 발을 들이고 저택 안으로 곧장 향했다.


“실은 조금 전 이야기에서 빼먹은 게 있어요, 모험가 길드에서 티미 님을 만났어요.”

“티미를 만났다고?”

“네. 예전에 문지기님이 저에게 해줬던 말 기억하세요?”

“내가 했던 말?”

“티미 님은 위험을 느끼면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몸을 숨긴다는 이야기요. 마왕성에서도 줄곧 그렇게 지냈다고 하셨죠.”

“아. 그 말? 그래 맞아. 그런데 그게 왜?”

“티미 님이 아이를 데리고 창고 안에 있었어요. 모험가 길드의 창고에요.”


과거에 가더가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티미 만이 이번 위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겁쟁이고 낯선 장소를 싫어하는 그가 베르 길드를 떠난 걸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것도 아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짐을 짊어지면서요.”


혼자가 아니고 아이를 데리고 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베르 길드를 알아봐야 했다.


“우선 아이들을 찾아서 내보내죠. 가짜 브레드 님이 들어왔던 일을 생각해보면 당분간 아이들을 못 오게 막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알겠어. 오늘 아침에 온 아이들을 찾으면 되는 거지?”

“네. 자일리 님과 제 결계가 멀쩡한 것으로 보면 아직 별일은 없을 테지만요. 그렇다고 서로 엇갈려서도 안 되니 같이 찾도록 해요.”


캣니스는 가더와 함께 저택을 돌아다녔다.

아이들을 찾기 위해 제일 먼저 둘러본 곳은 로비였다.


“···없네요.”


아이들이 소꿉놀이할 때 사용하는 로비에 없었다.


“그러면 식당으로···”


영애 놀이할 때 사용하던 식당에 없었다.


“그러면 응접실···”


아이들은 여인의 불륜 놀이할 때 사용하는 응접실에도 없었다.


“이 층 방, 다락방, 옥상, 정원. 대체 어디에 있는 거죠? 이 아이들?”


아이들이 갈법한 곳을 모두 살폈는데 찾을 수 없었다.

혹여나 결계에 이상이 있었나 살펴봐도 침입자는 없었다.


“혹시 아이들이 벌써 집으로 돌아갔다던가···.”


집으로 돌아갔다면 다행이겠지만. 그 과정이 무사할지가 또 걱정이었다.


‘분명 그 아이의 집이···’


확실한 확인을 위해 부유한 아이의 집에 연락하려던 그때였다.


“캣니스. 찾은 거 같아.”

“어디요?!”


바로 통신석을 집어넣고 고개를 돌렸다.

가더가 가리킨 방향을 보자 아이 한 명이 있었다.

찬장과 부엌 선반 사이에 있는 작은 틈.

그 사이에 몸을 구긴 채 누워있었다.


“도대체 저기에는 어떻게 올라간 거예요···.”


캣니스는 미간 사이를 압박했다.

가더가 무릎을 꿇고. 그의 목 위에 캣니스가 올라타서 아이를 꺼냈다.


“아기님. 아기님.”


바닥에 내려와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이의 검은색 고양이 귀가 쫑긋 움직였다.

하지만 단지 귀만 움직였지, 눈을 뜰 생각이 좀처럼 없었다.


“아기님 일어나세요.”


캣니스가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아이를 깨웠다.

몇 번 더 귀를 움직이게 만들고 나서야 아이는 일어났다.


“으응차!”


깊은 잠을 잤는지 기지개를 켰다. 말똥말똥 뜬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후아아암. 언니 돌아왔어?”


아이는 캣니스의 속 타는 심정도 모르고 태연히 하품했다.

그래도 차마 아이에게 화낼 수 없었다.


“아기님. 왜 선반 위에 올라가 있었어요?”


아이를 나무라는 건 관두고, 저택에 있었던 일에 대해 질문했다.

아이는 귀를 쫑긋 세우며 대답했다.


“다 같이 숨바꼭질하느라 숨어있었어.”

“숨바꼭질이요?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데요?”

“대머리 아저씨랑 키 작은 오빠가 나가고 얼마 안 됐어. 술래인 아이비가 찾기 기다리다가 잠들어 버렸어.”

“그렇군요. 브레드 님이랑 자일리 님이 나가자마자···”


브레드와 자일리가 나간 시간이라면 아침의 일이었다.

지금은 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다.

그 긴 시간 동안 아이는 홀로 여기 잠잤다는 거다.


“그러면 아기님. 혹시 다른 친구들은 어디 갔는지 아세요?”

“모르겠어. 깨어있을 때는 아이비가 몇 번 지나간 걸 봤는데 지금은 잘 몰라.”


아이비라는 아이가 술래를 맡았다.

아이비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고양이 귀 아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실종에 초조해하며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였다.


“우선 집으로 돌아갔는지를 확인해야겠네요···.”


통신석을 꺼내서 아이들의 집에 연락을 돌렸다.

그러나 부모들에게서도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네. 네··· 그렇군요··· 저도 더 찾아볼게요.”


통신석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얼굴은 좀처럼 어둠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그 많은 아이 중 한 명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이들이 넓은 저택 어딘가에 있거나, 아니면 다른 길로 샜다는 것이다.


“아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명은 남을 걸 그랬어요.”


신세를 한탄하며 얼굴을 감쌌다.

워낙 똑 부러진 아이들이라 한없이 내버려 둔 게 문제였다.

외부의 문제에서만 안전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아이들이 사고를 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래도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이 층부터 다시 찾을 계획을 세웠다.


“언니. 언니.”


그때였다.

고양이 귀 아이가 망토를 잡아당겼다.

캣니스가 돌아보자 아이는 작은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아기님이 말이에요?”

“응. 나 숨바꼭질 무진장 잘해!”


이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고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아이들이 아직도 숨바꼭질하고 있다면, 이 아이의 도움이 절실했다.


“응. 이쪽이야. 이쪽.”


저택 내부를 쉬지 않고 탐험하던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었기에 남모를 장소에 숨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응. 여기야.”


그리고 그들은 정말 의외의 장소를 발견했다.

자일리의 탐색 마법으로도 파악하지 못한 비밀공간이 있었다.

그 위치는 창고로 사용하는 방이었다.

그런데 방의 바닥이 열리는 구조였다.

정사각형으로 된 바닥 문 아래에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밑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응, 여기는 다들 반칙이니까 숨지 말라고 했는데. 친구들이 틈만 나면 반칙 써서 숨었어.”


아이는 비밀 통로에 관해 느끼는 바가 없는지 곧장 발을 들였다.

캣니스는 황급히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아이를 뒤로 물리고, 새까만 계단 아래를 바라봤다.


“아기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평소에 아는 사람이 말을 걸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말고요.”

“하지만 언니는 내 힘이 필요한 거 아니었어?”

“여기를 알려준 것만으로 충분해요. 그러니까 이만···”

“여기 아래는 엄청 어둡고 길이 복잡해. 나는 냄새로 친구들을 찾을 수 있어!”


복잡하다는 말을 보아 평범한 통로가 아닌 모양이었다.

캣니스는 이 아래로 아이를 데려가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친구들이 이 안에 무진장 잘 숨어! 코 사용하면 반칙이랬는데, 언니가 찾아달라고 한 거니까 코 사용할게!”


결국 아이의 설득에 넘어갔다.

정말 이 밑이 미로 같은 공간이라면, 아이들을 찾는 일은 전문인력이 더 잘할 것이다.


“그래도 제 앞으로 나서면 안 돼요. 알겠죠?”

“응! 알았어!”


불안을 가득 안고 비밀공간으로 내려갔다.

신성력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계단을 모조리 밝혔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가자 세 개의 통로가 있었다.

확실히 아이의 도움 없이는 고난을 겪었을 일이었다.


“문지기님. 어디로 가야 할까요?”

“나한테 물어도 모르겠는데···.”

“이쪽! 이쪽이 제일 가까워.”


아이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서 왼쪽 통로를 밝게 비췄다.

꽤 튼튼한 돌로 통로가 되어 있었다.

동굴이 연상되는 긴 통로를 걸었다.

생쥐나 벌레 같은 게 간혹 보였지만, 그 외에는 딱히 위험할 게 없었다.


“거기 누구··· 앗 눈부셔!”


한참을 걷던 중.

통로가 왼쪽으로 꺾였을 때 한 얼굴을 발견했다.

붉은 여우 귀를 가진 여자아이가 눈을 가리고 쭈그려 앉았다.


“아이비! 찾았다!”


누가 술래인 건지 알 수 없는 모양새였다.

그래도 무사히 술래였던 아이를 찾았다.

캣니스는 아이를 무사히 찾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다른 아이들을 더 찾으면 되었다.


“저 아이비 님? 혹시 다른 친구분은 못 보셨어요?”

“우웅. 아니. 하지만 곧 찾을 거야. 세 판 모두 아이비가 이겼거든.”

“아. 벌써 세 판째군요···.”


아직 첫판째인 고양이 귀 아이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고양이 아이가 찾아도 안 보이니 멋대로 새로운 판을 시작한 듯하였다.

고양이 귀 아이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아이비를 비난했다.

그러는 가운데 캣니스는 신성력으로 비춘 통로 너머를 보았다.


“대체 여기는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걸까요?”


이곳 누구도 알 턱이 없기에 캣니스 혼자 고민해야 했다.


“아무래도 귀족 저택이었으니 비밀공간이나 비밀 통로가 있던 거 같네요.”


베르 길드로 인수하기 전까지는 꽤 유명한 귀족가였다.

하지만 수십 년 전 가람 왕국이 함락됐을 때, 귀족가는 멸문했고 남은 저택을 복원한 게 지금의 모습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만약 마왕군의 침공 때 멸문했던 게 아니라면은?’


캣니스는 통로의 끝을 향해 걸었다.

한 귀족가가 무력하게 멸문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때 전쟁을 겪고도 아직 남아있는 많은 귀족가처럼. 이들도 어떻게든 후계자를 살리려고 했을 거고, 부흥의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발버둥이 의미가 있었는지는. 현재의 저택 사정이 답을 알려줬지만 말이다.


“편히 잠드시기를···.”


통로 끝에 있는 건 거대한 내실이었다.

그 안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시간은 생각만큼 자비롭지 못했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두 개의 백골 시신.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또 하나의 백골 시신이 있다.

모종의 사유로 빛을 보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듯하였다.


“우와. 뭐야 여기? 아이비 이렇게 깊이 처음 와 봐.”

“언니. 언니. 이거.”


고양이 아이가 불렀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손가락뼈 밑으로 팬던트가 있었다.

귀족의 문양이 새겨진 팬던트 안에는 오래전에 그린 가족화가 있었다.


“부디 여신님의 보금자리에서 위로받기를 바랄게요.”

“바랄게요”


짧은 기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이라도 지하실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다행이었다.

죽은 이들의 자세한 사정은 책상 위에 놓인 일기장을 보면 될 듯하였다.

내실에서 등을 돌려 통로 쪽으로 나왔다.


“당장은 죽은 이보다 아이들을 우선해야겠죠.”


두 아이의 도움이 컸다. 지하실에 숨은 아이들을 금방 더 찾아냈다.

총 다섯 명의 아이를 찾아냈으니 여섯 명의 아이를 더 찾아내면 되었다.

그들은 왼쪽 통로를 전부 찾아봤으니. 원점으로 돌아가 다른 통로로 들어가기로 했다.


“반칙쟁이들! 여기에 숨는 거 반칙이라고 했잖아!”

“아니야! 마지막 판은 여기 숨는 거 허용하기로 했다고!”

“맞아! 네가 찾아도 안 보여서 집에 간 줄 알았지!”


정말로 걱정했던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캣니스는 투덕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네 사람이 남았으니 찾는 속도를 높였다.

곧 아이들이 마지막 아이까지 찾아냈다고 소리쳤다.


“언니. 이쪽이야! 이쪽!”


중앙 통로는 바깥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현재 찾고 있는 오른쪽 통로는 정체를 아직 몰랐다.

차후에 마저 조사해보자고 생각하며 아이들의 목소리를 쫓아간 그때였다.


“어? 누나도 있었네?”


캣니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마지막으로 찾은 아이의 모습이 어떤 형체와 겹쳐 보였다.

위화감의 정체를 자세히 확인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모두 이리로 오세요!”


아이들이 의문을 표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뒤로 물릴 뿐이었다.

캣니스가 경계 태세를 갖춘 이유는 하나였다.


“누나? 왜 그래요?”


보라색 눈동자 그리고 예쁘게 묶은 검은 머리카락.

마지막으로 찾은 아이의 모습이 그 아이를 닮았다.

아니, 이건 닮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때보다 훨씬 예쁜 모습이지만, 다가가서 안아 줄 수 없었다.

왜냐면 여기에 오기 전에 이 아이를 본 적이 있으니까.

창고 안에서 굶어 죽기 직전이었던 아이를 구해주었다.

그 아이는 지금 루나의 간호 아래에 쉬고 있을 터였다.

한 마디로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아이였다.


“언니. 갑자기 왜 무섭게···”

“그 아이에게 다가가지 말고 저에게 오세요!”


아이들을 감싸고 황금빛 막을 펼쳤다.

아이를 마주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떻게 이중으로 친 결계에도 들키지 않고 들어온 걸까.

불안감에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에 위험한 존재는 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며 눈앞의 아이와 대립했다.


“누나 왜 그래요···”

“다가오지 마세요!”


아이들을 더욱 뒤로 물렸다.

마지막으로 찾은 아이와는 거리를 뒀다.

신성력으로 창을 만들어서 목에 겨누었다.


“그 이상 다가오면 공격하겠어요. 아기님. 아니, 더러운 도플갱어.”


갸웃.

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얼핏 보기에는 목숨을 위협받는 아이가 취할 행동이 아니었다. 정말로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캣니스는 속지 않았다.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눈앞의 아이가 마물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누나 그 말은 이상해.”

“이상 할 거 없어요. 저는 이미 그 아이를 만났으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왜 나는 싫어하면서 그 아이들은 안아 주는 거야?”

“네?”


불현듯 불안한 직각이 찾아왔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캣니스는 서서히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 개성이 가득했던 아이들의 눈빛이 모두 똑같았다.


“흡···!”


섬뜩한 기분이 등줄기를 훑었다.

무의식중에 신성력까지 거두고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고 나서야 그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모두 내 가족인데 말이야.”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빛.

무표정한 아이의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고 곧 일제히 미소 지었다.

도저히 순수한 아이로 보이지 않는, 가면 같은 웃음이었다.


“문지기님! 이쪽으로요!”


캣니스는 가더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이들에게서 멀어져서 들어왔던 입구를 등졌다.

서로 말없이 대치하기만 하는 상황.

한 아이가 달려들자, 그 몸을 밀쳐내고 창을 휘둘렀다.


“아이들은! 원래 있던 아이들은 어떻게 한 거죠?!”


아이들의 거처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한 대치였는데, 그들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야 언니. 바로 뒤에 있잖아.”

“무슨···.”

“소리가 안 들려? 자, 우리 모두 조용히 있어 볼까?”


그들 사이에 소리가 사라졌다.

기나긴 적막함이 통로 안에 내려앉았다.

신성력을 운용하는 캣니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쿵쿵, 심장 소리만이 들리는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됐다.


“아기님들···?”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어린 목소리들.

캣니스는 앞을 경계하며 조심히 뒤로 이동했다.

그것들은 일정 거리를 두며 지하실 안쪽으로 따라왔다.


“아···”


그리고 캣니스는 잔인한 현실과 마주쳤다.

거대한 쇠창살 앞에 하염없이 서 있었다.

그것을 마주한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격한 감정을 참느라 주먹이 쉴 새 없이 떨렸다.


“언···니···”

“아기님들.”


캣니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황금빛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여지없이 드러나는 방안의 모습들.

이곳은 감옥이었다.

예전 귀족이 범죄자를 심문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었다.


“지금 구해줄게요.”


그리고 지금은 더러운 놀이에 이용되는 실험실이기도 하였다.

빈 유리병과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돌아다녔다.

불빛에 비친 그림자가 점점 몸집을 키웠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아주아주 끔찍한 실험실의 결과물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신성력이 닿자 동시에 발악하는 목소리들.

그 목소리는 하나의 형체에서 들려왔다.

간신히 목숨만 붙어있는 채 서로 뒤엉킨 검붉은색 살덩이들.

아이들로 반죽한 거대한 키메라였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사람에게 이로운 신성력이 오히려 고통이 되어 비명 질렀다.

캣니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만둬. 언니. 그건 말이야 더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거든.”


캣니스는 뒤를 돌았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깊은 분노를 보였다.

키메라를 치료하던 신성력이 창이 되어서, 가짜들을 일제히 겨누었다.

당장이라도 섬멸의 빛이 화살처럼 쏘아질 기세였다.


“있잖아. 언니. 언니의 추리 실력 대단했어.”


그때였다.

한 아이에게서 들린 목소리.

신성력을 조종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추리라니. 당신들이 그걸 어떻게···”

“하지만 말이야. 한 가지 깜빡한 거 알아?”


푸욱-

캣니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가에서 검은 피를 잔뜩 쏟아냈다.


“허윽.”


신성력을 사용할 정신이 없었다. 한 번 더 피를 토하며 제 가슴을 내려봤다.

아이로 변장한 마물이 어떻게 제 추리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이해했다.


“쿨럭.”


사람 같지 않은 손이 가슴을 뚫고 나왔다.

푸른색의 비늘이 난 괴물 같은 손.

손안에는 누구의 것인지 확실한 심장이 박동했다.

울컥. 피가 한 번 더 쏟아졌다.

신성력의 빛이 꺼지고 몸에 힘이 빠졌다.


“언니 덕분에 재밌게 놀았으니 알려줄게. 실제로 내가 맡을 예정이었던 자리는 다른 것으로 대체됐어.”

“어떻게···”

“그러니까 기사단으로 인원을 분배한 건 헛수고였어. 그리고 여기까지 달려온 건 좋은데. 해야 할 행동이 틀렸으니 이 부분은 감점.”


캣니스는 엎드려서 일어서지를 못했다.

희미한 정신 속에서 신성력으로 생명을 유지했다.


“꽤 날카로운 견해였어. 솔직히 들킨 줄 알았다고? 도시의 상황을 손쉽게 접하면서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치. 확실히 내가 처음 생각했던 곳이 누나가 추리했던 그 자리가 맞아.”


다른 목소리가 똑같은 말투로 아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맏이와 막내까지 번갈아가며 말했다.

그 기이한 현상의 종착점은 그녀의 뒤쪽이었다.


“아쉽게도 운은 내 편이었던 모양이야. 처음 추리했던 자리보다 더 좋은 자리가 마침 생겼거든.”


곧 죽을 거 같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한 번씩 지나친 다음에 말하는 그 사람을 바라봤다.


“그래서 소감은 어때? 누구보다 믿었던 사람에게 심장을 쥐어뜯긴 느낌은?”


가더의 얼굴이 그녀를 조롱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캣니스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손에 쥔 심장을 짓이기며 피로 바닥을 적셨다.

책상 앞으로 다가가서는 피와 찌꺼기를 비커 안에 담고 뒤돌았다.


“아. 혹시나 걱정하지 마. 너는 죽지 않을 거거든.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야.”


가더의 모습을 한 그것은 쇠창살 너머에 있는 키메라에게 다가갔다.

살덩이 안에 팔을 집어넣어 조금 전과 다른 심장을 꺼냈다.

심장이 뽑힌 아이들의 목소리가 비명 질렀다.

비명 속에서도 캣니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습당했을 때 마기도 체내로 주입됐는지. 신성력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이건 말이야. 내 심장을 복제한 거야. 이걸 인간에게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지 실험 중이었어.”


더 이상 가더의 모습이 아닌 그것이 다가왔다.

잿빛 같은 회색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그는 캣니스의 뚫린 가슴에 따끈따끈한 심장을 쑤셔 넣었다.


“부디 내가 원하는 결과를 보여줘.”


순식간에 동공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곧바로 거부 증상에 캣니스는 발작하였다.

놈은 무릎을 털고 일어나서, 제 발밑에서 꿈틀대는 생명을 내려봤다.


“나, 호문쿨루스의 실험 정신에 보답할 성과를 말이야.”


꾸민 것이 아니라 분명한 감정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유일하게 그를 눈치챈 성직자가 제압됐다.

이는 이카루스가 예견했던 일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최악인 상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추천과 좋아요 잊지마세요-!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37 114화 성녀 23.11.19 10 0 19쪽
136 113화 성녀 23.11.15 7 0 19쪽
135 112화 성녀 23.11.11 7 0 21쪽
134 111화 성녀 23.11.08 8 0 21쪽
133 110화 성녀 23.11.04 10 0 19쪽
132 109화 떨어진 과실 23.10.25 9 0 34쪽
131 108화 불신 23.10.21 7 0 25쪽
130 107화 불신 23.10.17 8 0 20쪽
» 106화 불신 23.10.14 10 0 25쪽
128 105화 불신 23.10.10 10 0 18쪽
127 104화 불신 23.10.07 9 0 19쪽
126 103화 불신 23.10.03 10 0 18쪽
125 102화 불신 23.09.30 10 0 24쪽
124 101화 불신 23.09.26 10 0 17쪽
123 100화 불신 23.09.23 12 0 15쪽
122 99화 휴식 23.09.20 13 0 13쪽
121 외전 서큐버스 여왕 23.09.16 15 0 29쪽
120 98화 서큐버스 여왕 23.09.12 14 0 13쪽
119 97화 서큐버스여왕 23.09.09 18 0 15쪽
118 96화 서큐버스 여왕 23.09.05 19 0 18쪽
117 95화 서큐버스 여왕 23.09.01 16 0 13쪽
116 94화 서큐버스 여왕 23.08.29 17 0 16쪽
115 93화 서큐버스 여왕 23.08.23 15 0 22쪽
114 92화 서큐버스 여왕 23.08.21 20 0 13쪽
113 91화 서큐버스 여왕 23.08.18 18 0 14쪽
112 90화 서큐버스 여왕 23.08.16 20 0 19쪽
111 외전 인연의 시작 終 23.08.14 16 0 22쪽
110 외전 인연의 시작9 23.08.11 20 0 18쪽
109 외전 인연의 시작8 23.08.09 17 0 17쪽
108 외전 인연의 시작7 23.08.07 20 0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