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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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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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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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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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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2부> 119화 여정 그리고 일행

DUMMY

119화 <여정 그리고 일행>



“야호! 오랜만이네 꼬마야~”

“꼬마라니. 내 얼굴에 진 주름이 보이지 않는 건가?”

“어휴. 꼬마면 언제나 꼬마지. 주름이 무슨 대수야?”


가람왕국의 궁전.

왕실 응접실에 네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한쪽은 칼투스 14세와 그의 첫째 아들. 다른 한쪽은 프로텐시아 신전의 대사제와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나랏일을 위해 바쁜 시간도 마다하고 자리에 모였다.


“아. 나는 따뜻한 차 말고 가벼운 과일주로 부탁드려용~”


이카루스가 다과를 준비하는 사용인에게 부탁했다.

국왕이 이미 이카루스의 취향을 파악해둔 터라 어렵지 않게 다과를 차렸다.


“대사제님도 오랜만이네. 이렇게 보니 또 얼굴이 반가워?”

“번영이 함께하길.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카루스 님.”


대사제가 여느 때처럼 정중히 축복문을 입에 담았다.

며칠 전까지 수심 깊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강아지 귀는 평온하게 누워있었다.


“허어. 그런데 이카루스. 그대는 어렸을 적 모습에서 좀처럼 변하지 않는군.”

“그야 나는 천인족이니까. 웬만한 악마보다 더 오래 산다고? 오히려 내 쪽은 너희가 너무 빨리빨리 변해서 아쉽다고 느끼는데?”

“허허. 늙는 것도 서러운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에게 한 소리 듣는 거 같아서 더욱 서럽군.”

“켁. 할아버지 같은 말투 하기는. 곧 죽을 날도 아닌데, 옛날처럼 내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이카루스 님~ 이라고 귀엽게 불러보지 그래?”


푸흡.

이카루스의 농담에 반응한 건 국왕이 아니었다.

가람 왕국의 첫째 왕자가 향긋한 차를 삼키지 못하고 뿜어냈다.


“어이, 뜨거우니 조심해서 마셔. 칼투스 15세야.”

“이 아이의 이름은 칼투스가 아니네만?”

“네 어릴 적 모습과 쏙 닮았서 그냥 불러본 거야. 기분 상하지 않았지? 칼투스 15세?”

“네. 저는 괜찮습니다, 이카루스 씨.”


왕자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국왕은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내 어렸을 적처럼 내 아들을 데리고 놀리지 말게.”

“내가 언제 놀렸다고 그래? 오랜 사이에 서운하게. 오히려 네가 나만 했을 때 나를 쫓아다니면서 괴롭혔던 거 같은데?”

“끄응. 한 마디도 안 지는 능구렁이 같으니. 내가 이렇게 늙는 동안 네 놈은 얻은 게 못된 말투밖에 없는 모양이군.”

“뭐야? 너무하네~ 내가 뭐 어쨌다고~ 여전히 고집만 센 너구리 심보보다는 훨씬 나은데 말이야.”


서로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말꼬리를 물고 또 물고 늘어졌다.

그러다가 잠깐 침묵하고, 동시에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이카루스여. 모험가 길드는 어떤가? 그들이 떠나고도 활발하게 돌아가나?”

“뭐. 그럭저럭이지. 모험가들이 대규모 은퇴 선언한 점은 아쉬운데, 그 자리를 채워줄 신규 모험가들이 꽤 들어왔어.”

“흐음. 그건 참으로 부럽군. 좋은 인재가 있다면 왕성 쪽으로도 소개해주면 안 되나?”

“어허. 어딜 날로 먹으려고? 안되지 안돼. 전부 내 실적이라고.”


또 한 번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잔을 부딪칠 때는 대사제도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신전 쪽은 어때? 내가 듣기로는 우리 모험가 길드보다 대호황이라며?”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 덕분이죠. 프로텐시아의 성역이 복원된 일이 크게 한몫했습니다.”

“그래? 나도 언제 한 번 목욕재계 받아봐야겠다.”

“언제든지 환영하겠습니다. 대신 저번처럼 우리 사제들의 일에 훼방 놓지 말아 주세요.”


그들은 웃으면서 왕국의 정세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한때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시절을 못 떠올릴 정도로 왕국은 빠르게 활기를 되찾아갔다.

이 모든 건 누군가가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해준 덕분이었다.


“확실히 그들에게는 큰 은혜를 입었어.”


나라를 구한 은인을 위해 건배했다.

한 왕국의 권력자들에게 큰 은혜를 남기고 떠난 이들을 잊지 못 하리라.

그들은 오랫동안 베르길드와 있었던 추억을 회상했다.



*****



“에이취-”

“어머. 감기야? 너무 고된 일을 시킨걸까? 브레드.”

“크응. 아닐세. 잠깐 잿가루가 들어가서 그러했네. 이 몸뚱이는 아인프로스트에서도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어두운 하늘 아래서 모닥불이 타올랐다.

근육질 덩치 세 명이 나란히 앉아서 불을 지켰다.


“그런데 게이로드. 오늘로 며칠째이지?”

“오늘로 닷새째야 브레드~ 정말로 수고가 많아~”

“그렇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시간 참 빠르게 흐르는군.”


브레드는 새삼 흘러간 시간에 놀라워했다.

일전에 베르길드는 성녀의 여정에 함께 나섰다.

그리고 어느덧 가람 왕국 국경을 지나 다음 나라에 가까웠다.

가람 왕국이 모험가의 도시라는 별칭이 있다면, 이번에 들릴 나라에는 풍요의 도시라는 별칭이 있었다.


“최대한 빨리 리친스에 들려서 정비 하도록 하지. 아쿠아여, 새 도시에서 이름을 사용할 텐가?”


브레드의 물음에, 왕궁에서 제공한 고급 마차 문이 열렸다.

푹신푹신한 의자에 누운 아쿠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귀찮아. 대답하기도 귀찮아···.”

“아쿠아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네? 괜찮다면 같이 지내게 해줘.”

“음. 볼 때마다 저 말을 해석하는 건 놀라운 경지로군. 그대들이 수고가 많네. 게로드, 게이로드여.”


게르드가 게으른 성녀를 위해 손수 담요를 덮어주었다. 게이로드는 따뜻한 마력석을 쥐여주고 마차 문을 닫았다.

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성녀의 여정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다.

앱솔루트 왕국에서 그들을 고용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땠는가 캣니스여?”


브레드는 모닥불을 뒤적이다가 숲 쪽을 바라봤다.

곧바로 어두운 숲 아래서 여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안에서 푸른 눈동자가 또렷이 빛났다.


“불청객은 무엇이었나?”

“고블린 셋이었어요, 이번에는 성녀님을 노린 게 아니라 약탈 목적으로 나타난 듯해요.”

“고블린인가. 하위 마물인 그들이 정찰대일 가능성은 없는가?”

“몸에서 무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아마 소수로 활동하는 떠돌이인 듯해요.”


불청객의 정체를 읊는 캣니스의 등 뒤로, 새까만 남자도 모습을 드러냈다.

가더는 캣니스의 머리에 묻은 피딱지를 떨어트렸다.


“고마워요, 문지기님.”

“이 정도로 뭘.”


그들이 거점 근처로 산책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성녀와 관련되어 알려진 소문.

성녀의 심장을 먹으면 영생한다는 소문 때문에 여러 번 수고했다.


“아. 다 됐어요, 문지기님.”


아직은 모두가 나설 정도의 문제는 찾아오지 않았다.

캣니스와 가더 두 사람만이 전부 정리했다.

그렇다 보니 항상 옷차림이 엉망이 되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피 묻은 외관을 정리하고 나서야 모닥불 근처로 다가왔다.


“그나저나 이제는 괜찮아 보이는군. 며칠 전만 해도 보는 내가 다 어색했는데 말이지.”

“잠깐 혼란스러운 일을 겪어서요. 지금은 보시다시피 괜찮아졌어요.”


캣니스는 곁에 있는 가더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며칠 전에 눈만 마주쳐도 자리를 피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왔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애매했다.


“캣니스여. 아직 발등에 남아있다네.”

“아. 그렇네요. 더러운 건 지워야겠죠.”


정화의 힘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새삼 캣니스의 신성력에 감탄한 브레드는 모닥불 안에서 물통을 꺼냈다.

꼴꼴꼴, 찻잎을 넣은 컵에 물을 따랐다.

충분히 찻물이 우러나올 때까지 통나무 옆에 두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생각인가?”

“무얼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우리를 따라오는 추격자를.”


캣니스는 아, 입을 벌리고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아 건너편에 앉았다.

브레드와 마찬가지로 컵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찻물이 식기를 기다리며 바닥에 두었다.


“브레드 님도 알고 계셨군요.”

“그러하네. 상당한 실력이지만 모를 수가 없지.”

“그러면 말 나온 김에 정해야겠네요. 과연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요.”


찬 공기만큼 적막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들은 차가 식을 때까지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시간 동안 충분히 고민했다.

두 사람 다 대화하지 않고서 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면 이대로 정해도 되겠는가? 게르드여.”

“안전하다면야 문제는 없지. 그렇지 아쿠아?”

“졸려.”

“괜찮다고 하네. 내키는 대로 해.”


그들의 고용주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브레드는 식은 차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닥불 있는 거점에 비해 어두운 숲 앞에 섰다.

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들었는가 라나여! 그만 숨고 이제 나오게나!”


푸드득, 새가 날고 들짐승이 달아났다.

한 남자의 만행으로 숲속이 소란스러웠다.

그런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 딱 하나 다른 소리가 들렸다.

우드득, 나무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우와, 깜짝 놀랐잖아요. 아저씨.”


너구리 수인 라나.

격투가지만 레인저 역할도 하는 자답게 남의 뒤를 밟는 기술이 훌륭했다.

지난 닷새 동안 거리를 두고 미행한 라나는 조금 전 큰소리로 나무 위에서 떨어질 뻔한 걸 간신히 나뭇가지를 잡고 버텼다.


“미안하군. 그래도 일단 이리 와서 몸을 녹이지. 당장은 뭐라 추궁하지 않을 테니 부담 갖지 말게.”


브레드가 모닥불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생이 너구리 수인이고, 옷을 두껍게 입었다지만 겨울은 춥다.

모험가들 사이에서 미행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래도 아는 사이인 만큼 선의를 베풀었다.

얕은 감기로 코를 훌쩍이던 라나는 그의 호의를 감사히 받았다.


“여기요. 차를 마시면 추위가 갈 거예요.”

“미안해. 신경 써줘서 고마워.”


모닥불 앞에 앉은 라나는 따뜻한 차로 몸을 녹였다.

한겨울의 미행이라니. 추위에 강한 수인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멍청한 짓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우리를 쫓아온 건가?”

“···아저씨. 추궁하지 않는다면서요.”

“추궁이 아닐세. 걱정하는 거지. 무모한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라나는 어쩐지 브레드에게 속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제 처지를 알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별 이유 없어요. 그냥 제가 따라가고 싶어서 따라온 거죠.”

“라군이 허락했을 거 같지는 않다만.”

“제 나이가 몇인데 아버지 허락을 맡아요? 또 이 년이 괴상한 짓을 하는구나 여기시겠죠.”


조금도 거리낌 없는 대답에 브레드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젊은 처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무리 다 큰 라나의 행동을 제약할 수 없다지만. 모험가가 다른 모험가의 뒤를 밟다니,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만약 자네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또는 이들이 자비롭지 않았다면. 그 대가로 죽음까지 고려했어야 할 일이네.”


브레드의 나무라는 목소리에 노여움이 담겼다.

그만큼 이번 행동은 용서하기 힘든 만행이며, 모험가가 두 번 다시 해서는 안 될 금제였다.

이런 말을 어느 정도 예측했던 라나는 풀이 죽어서 너구리 귀가 축 처졌다.


“미안해요. 하지만 따라오지 않고서는 못 견디어서···.”

“차라리 먼저 말해 주지 그랬나. 그랬다면 홀로 위험을 감수하고 추위에 떨 필요 없지 않은가.”

“저도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어요. 그런데 하필 클레인 언니가 접수처를 지키고 있는 바람에···.”

“설마 모험가 길드에도 말하지 않은 건가? 앞으로 들릴 도시에서 길드의 말이 없다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모르는 건가?”

“알아요. 아주 잘 알아요. 도시를 이동할 때는 미리 말해둬야 한다는 거 안다고요.”


반복되는 훈육에 라나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모험가는 도시를 이동할 때 미리 말을 해두어야만 입국 절차와 충돌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라나도 안다.

이런 간단한 사실도 모를까 봐 잔소리하는 건가요? 소심하게 반항했다.


“이래 보여도 금 등급이에요. 당연히 길드장에게 따로 말해놨어요. 저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아저씨랑 다니고 싶었던 건데, 자꾸 아이 취급하면 속상해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브레드 한 사람만 보고 이번 여정을 따라다니기로 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특한 마음을 브레드는 곱게 받아줄 수 없었다.


“라나여. 그런 이유라면 돌아가게. 그런 사적인 감정으로 따라다니는 걸 허락할 만큼 우리는 관대하지 않네.”


허용하는 건 다음 도시까지.

그곳에서 마차를 타고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이 말이 현실이 되리라는 사실을 눈치챈 라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싫어요! 왜요? 조금 전까지는 따라와도 괜찮은 것처럼 말했잖아요!”


곧장 반발했다.

조금 전의 말이 크나큰 상처라도 된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여전히 결정을 바꾸지 않을 브레드의 얼굴 앞에서 본인의 의견을 펼쳤다.


“나 이래 보여도 능력 있어요. 성녀 호위에서 레인저 역할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요!”

“안타깝게도 우리 호위에 레인저가 필요 없네. 지금껏 지켜봤다면 알지 않은가? 함정간파와 정찰 정도는 기본으로 할 줄 아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그렇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성녀의 곁을 지킬 한 사람 정도는 필요하지 않아요?”

“게르드와 게이로드가 밀착하여 맡고 있네. 이 이상의 인력 배치는 불필요하지.”

“그러면 싸울 인력이 필요하겠죠! 나 아저씨만큼은 못하지만 잘 싸울 수 있어요!”

“라나여. 자네가 보기에 이 이상의 전력이 필요해 보이는가?”


목소리까지 높여 하는 말을 전부 반박당했다.

브레드가 한 모든 말이 옳았기에, 라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만 저도 뭔가 할 일이···”


오기가 생겨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푹. 고개 숙였다.

라나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이 파티에 자신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이 고집을 포기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렇지! 여자. 여자가 저 용사 한 명이잖아요. 아무리 용사라지만 사제면 한계가 있겠죠? 목욕할 때나 변소 볼 때는 어쩌게요? 그러니 성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실력 좋은 여자인 제가 있어야···!”


결국 빈틈을 찾아내어 파고든 라나였다.

어떻게든 자신을 데리고 갈 명분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쉽게 포기할 모습을 보이지 않자, 브레드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브레드도 강하게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미숙한 모험가를 꾸짖어야 했다.


“솔직히 말하지. 지금 자네는 그냥 걸림돌일세. 그저 동행할 자들을 찾는 거라면 모르겠네만 이런 식으로 빌붙으려고 하는 행동은 민폐일세.”

“아까 말했듯이 도움이 되면 되잖아요! 식량도 내가 구하고 불침번도 내가 설게요! 그러니까 나도 아저씨랑 함께 여행하면···”

“몇 번이고 말했네만 필요 없네. 지금 그대는 사적인 감정으로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 걸림돌이 되려는···”

“브레드 님.”


브레드의 언성이 점점 커지던 그때였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말을 멈췄다.


“조금 지나치셨어요.”


캣니스가 고개 저으며 나무랐다.

그제야 브레드는 조금 전의 말이 과했음을 인지했다.

동료 덕분에 마음을 진정하고, 라나를 보았다.

그제야 그렇게 강인해 보였던 라나가 주먹을 꽉 쥔 채 눈물 흘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나도 내가 부족한 걸 알아. 이 행동이 아저씨에게 빌붙으려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너무 지나치게 라나를 몰아세웠음을 뒤늦게 후회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나도 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


라나는 한눈에 봐도 감정 상했지만, 힘든 감정을 꾹꾹 눌러 가며 말을 꺼냈다.

그제야 브레드는 그녀가 따라오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려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멋대로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려 했다는. 본인의 억측으로 그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부러웠어. 부러웠다고. 나도, 나도 아저씨처럼 정상적인 파티에 잠깐이라도 있고 싶었다고···”


금 등급 모험가라는 명성에 한 눈 팔려서 한 가지 사실을 이해해주지 못했다.

모험가가 금 등급 평가를 받은 중요한 시기.

그러한 시기에 금 등급 모험가가 고향 땅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었다.

무언가 심한 일을 겪은 게 아니고서야.


“···여기 오기 전에 같이 있던 파티는 어떻게 됐나?”


브레드는 상대에게 실례되는 말인 줄 알지만 물었다.

이렇게 그들의 뒤를 따라온 데에는 절박한 마음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옛날에 헤어지고, 그나마 멀쩡한 애들도 용병으로 활동 중이에요···.”

“그렇군. 모험이 잘 안 풀린 거로군.”


두 사람 다 모험가였기에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모험가라면 당연히 아는 이야기였다.

기존의 파티와 어울리지 않는 한 명이 퇴출당해서 방랑하는 이야기. 혹은 함께했던 동료가 더 이상 모험할 수 없는 이야기거나 말이다.


“받아주는 곳은 없었나?”

“있긴 했어. 그런데 던전 탐사가 잘 안 풀려서···”


그 일에 대해서도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이미 라나의 표정이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웃는 얼굴 아래에 감춰진 절박한 심정이 브레드의 굳센 마음을 흔들었다.


“이번 여행. 많이 안 바랄 테니 이번 여행만 함께 하게 해줘요···. 내가 걸림돌이라는 걸 아는데. 이런 걸 부탁할 사람이 아저씨밖에 없다고요!”


궁지에 몰린 자의 비명을 들은 브레드는 팔짱 꼈다.

대충 그녀가 직면한 상황이 짐작됐다.

사고였는지 아니면 실력 차이였는지 모르지만 원래 파티를 잃고 라나는 혼자가 됐다.

모험의 실패로 혼자가 된 그녀는 낮은 등급의 모험가들과 모험을 감행했다.

그러나 회심의 모험 결과도 처참했고, 더 이상 어느 파티에도 낄 수 없는 외톨이가 된 것이다.

이 업계에서는 인맥이 좁으면 함께할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갓 금 등급에 오른 자는 더더욱 말할 필요 없다.

누구도 파티를 짜주지 않으니 모험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사정은 딱하게 됐군. 하나 대형 길드에 들어가면 활동할 수 있었을 터인데? 좋은 대접을 마다하고 굳이 나와 함께 하려는 이유가 뭔가?”

“어떻게든 발버둥 치느라 실적이 좋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쓰레기 같은 길드에 들어간 일도 한몫했고요···.”

“조급한 나머지 신용이 없는 길드에 들어가는 악수를 뒀군.”

“맞아요. 그러니 부탁이에요 아저씨. 아저씨 길드는 친절하잖아요. 민폐라는 건 아는데, 제발 불쌍한 후배 하나 구하는 셈 치고 저 좀 도와줘요!”

“정확히 그대는 이 여정에서 무얼 바라는 건가?”

“실은 나, 명령에 따라 활동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아저씨가 알려줬으면 해요. 명령받는 처지에서 파티와 합을 맞추는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브레드는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확실히 지금까지 라나가 보여준 모습은 리더로서 어울리지만, 명령으로 움직이는 파티원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성향이 모험가의 활동에 악영향을 끼치고, 이렇게 도움을 청할 정도면 심각한 문제이긴 하였다.


“진짜! 진짜로! 나 매일 같이 불침번도 설 수 있어!”


결국 말이 돌고 돌았는데, 이건 제 몸을 팔아서 하는 예행연습이었다.

인력을 제공하고 가르침 받는. 모험가에게 있어서 흔히 있는 거래였다.

제대로 된 모험가라면 받아들인다.

후임 양성과 모험가로서 인맥은 모험가가 거부해선 안 될 덕목이었다.


“라나여 그대의 마음은 잘 알았네.”

“그러면···!”

“하나 받아들이고 말고는 다른 문제일세.”


브레드는 측은지심 가득한 눈빛으로 라나를 보았다.

그도 생각 같아서는 이 부탁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무언가를 알려주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이번 여정은 그냥 여정이 아니다.


“게르드, 게이로드여. 사정이 이런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어디까지나 먼저 수락한 임무의 연장선.

정하는 건 라나나 베르길드가 아니었다.


“그대들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면 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함께 해.”


그런데, 브레드의 말을 끊고 답변한 건 모험가 형제가 아니었다.

분명 닫아두었던 마차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사람 한 명 추가된다고 문제 돼봤자 얼마나 된다고 그래?”


마차 안에서 아쿠아가 말했다.

비록 여전히 누워있는 모습이었지만, 충분히 그녀치고는 배려 넘치고 위엄있는 행위였다.


“여자가 늘어나는 건 찬···성··· 졸려······.”


마차 문이 다시 닫혔다.

브레드와 게르드 그리고 게이로드는 서로 마주 봤다.

아쿠아의 치부가 어떻든 간에, 조금 전의 답변을 더 정확히 했다.


“아쿠아가 그러라고 하네?”

“우리는 아쿠아의 말이면 돼.”


사실상 동행을 허락하는 말.

긍정적인 답변에 라나의 얼굴이 활짝 폈다.

라나는 쌍둥이 모험가에게서 연신 고개를 숙이고, 브레드에게 달려가 냅다 안겼다.


“성녀님, 아저씨들 진짜 고마워! 내가 이 빚 언젠가 꼭 갚을게!”


민머리에 연신 키스를 갈기는 라나.

라나의 얼굴은 며칠의 고생이 무색할 정도로 밝았다.

그 기뻐하는 모습에 브레드도 미소 지었다.

그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기쁜 감정과 별개로, 슬슬 민머리에 키스하는 일이 멋쩍어지던 그때였다.


“라나 님은 우리와 함께하는 방면으로 정해졌네요, 그러면 다른 한 사람에 대한 처우는 어떻게 할까요?”


꿈틀, 조금 전까지 풀어져 있던 브레드의 눈썹이 경직됐다.

그뿐 아니라 키스를 갈기던 라나, 마차 문을 확실히 닫고 돌아온 모험가 형제도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 뭐라고···?”


캣니스를 제외한 네 사람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제자리에 굳었다.

특히 브레드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캣니스여. 무슨 말인가? 설마 다른 미행이 또 있다는 이야기인가?”

“네. 있어요. 저는 처음부터 ‘그들’이라고 말했는걸요?”


직접 미행하던 라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주위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브레드와 미스릴 모험가들도 당황했다.

그만큼 캣니스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일이다.

그 말의 심각성을 모르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그 미행자는 아직도 근처에 있는가?”

“네. 있어요. 아마 부르면 바로 나올 거예요.”


그 말에는 상대방과 대화가 통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행자의 존재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오직 한 사람. 캣니스가 아니었다면 무슨 일을 당해도 눈치채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들이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불러주게. 무슨 목적인지는 알아야겠으니.”


다들 성녀가 탄 마차를 지키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위험 요소와 마주하기 전에 바짝 긴장했다.

이에 캣니스는 여전히 초연한 태도로 주위를 둘러봤다.


“들으셨죠? 이만 나오세요.”


캣니스의 부름과 함께 숲의 바람이 기이하게 흘러갔다. 기이한 바람으로 모닥불의 불씨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이는 정상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인위적인 무언가에 의한 영향이었다.

곧, 어둠이 위태롭던 모닥불을 집어삼켰다.


“저건 마족···?”


그리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방금 동행한 라나가 당황하며 말했다.

이윽고 다 꺼진 줄 알았던 모닥불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모닥불 앞에는 조금 전까지 없던 이가 앉아있었다.


“오랜만이야. 자리를 마련해줘서 고마워, 하얀 사제.”


검붉은 머리카락 밑으로 우수한 외모가 돋보였다.

붉은 눈동자의 여성은 베르길드를 잘 알고 있었고, 베르길드도 여성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릴리트.”


절대로 한 번 보고 잊어버릴 수 없는 여성, 서큐버스 여왕 릴리트.

가람 왕국을 떠난 그들 앞에, 사천왕 중 한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추천과 좋아요 잊지마세요-!


작가의말

후후후후후후 학점 망했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이번 방학 동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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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133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31 12 0 21쪽
155 132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9 8 0 15쪽
154 131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6 9 0 15쪽
153 130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2 11 0 14쪽
152 129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19 11 0 13쪽
151 128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7 12 0 11쪽
150 127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11 0 13쪽
149 126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7 0 22쪽
148 125화 이름없는 성녀 24.01.10 7 0 14쪽
147 124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8 8 0 12쪽
146 123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3 11 0 16쪽
145 122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1 9 0 13쪽
144 121화 이름 없는 성녀 23.12.29 11 0 14쪽
143 120화 여정 그리고 일행 23.12.27 7 0 17쪽
» <2부> 119화 여정 그리고 일행 23.12.25 9 0 24쪽
141 118화 작별 23.12.13 7 0 22쪽
140 117화 재판 23.12.06 9 0 21쪽
139 116화 재판 23.11.30 10 0 20쪽
138 115화 재판 23.11.22 12 0 21쪽
137 114화 성녀 23.11.19 11 0 19쪽
136 113화 성녀 23.11.15 8 0 19쪽
135 112화 성녀 23.11.11 8 0 21쪽
134 111화 성녀 23.11.08 10 0 21쪽
133 110화 성녀 23.11.04 13 0 19쪽
132 109화 떨어진 과실 23.10.25 10 0 34쪽
131 108화 불신 23.10.21 8 0 25쪽
130 107화 불신 23.10.17 9 0 20쪽
129 106화 불신 23.10.14 12 0 25쪽
128 105화 불신 23.10.10 10 0 18쪽
127 104화 불신 23.10.07 10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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