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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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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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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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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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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108화 불신

DUMMY

108화 <불신>



가람 왕국 수도에서 떨어진 산.

이제는 산이 된 거대한 골렘의 흔적 위에 그녀가 지켜보고 있었다.

불길과 분노에 휩싸인 도시를 놓치지 않고 전부 보았다.

그 대혼란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보던 그녀는 유유히 입을 열었다.


“그걸 네임드라고 하더라고. 이변, 변종, 이름 붙여진 자, 규격 외의 관찰 요망 대상.”


언젠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한 마족이 말했다.

고지식한 그 남자가 설명하기로는 하등 쓰레기가 출세했다는 정도의 취급이었다.

하지만 출세한 쓰레기 취급받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는 있었다.


“그중 하나가 너. 그리고 너만큼은 아니지만, 특별 취급을 받던 게 마왕성 지하에 있나 봐.”


서큐버스 여왕 릴리트.

그녀는 페넥스의 부탁으로 가람 왕국에 찾아왔었다.

지금은 산 위에서 태연하게 왕국의 멸망을 지켜보았다.


“걔는 신랄하게 평가하고는 그걸 굳이 찾아보라고 하더라고. 뭐. 지금 사태를 보면 그럴만했지만 말이야.”


사천왕조차 내부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마왕성의 지하 감옥.

그 내부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이는 전대 마왕 아몬뿐이었다.

그리고 그 지식 일부를 조금이나마 조사한 페넥스가 이번 일을 예측했다.


“저 징그러운 건 슬라임과 도플갱어 사이의 존재? 자세히 설명하기 난해하지만 그런 존재라고 말했더라.”


도플갱어의 숲에서 태어난 기이한 변종.

슬라임과 비슷한 수준의 생명력과 도플갱어의 복제 능력을 지녔다.

그 결과, 시간만 충분하다면 스스로 군대를 이룰 수 있는 괴물이 탄생했다.

그리고 괴물은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진 단계에 만족하지 않았다.


“네가 나타나기 훨씬 전의 일이었어. 나도 얼핏 기억나는데 꽤 고생이었지?”


마왕성에서도 골칫덩이로 여겨지는 녀석의 존재.

네임드는 자신의 위치를 시험하기 위해 마왕성을 습격했다.

그 습격은 전대 마왕이 직접 나선 뒤에야 완전히 수습됐다.


“물론 마왕성은 저만큼의 피해가 없었지만 말이야. 무리 지어 생활하는 특성이 있을수록 깨기 힘들거든 저거.”


마족은 개인의 능력이 워낙 특출나다.

힘이 센 도플갱어 따위에게 당할 일이 없었다.

소속감만 있지 유대감 따윈 개나 줘버린 마왕군 특성상. 도끼부터 휘둘러서 판결했다.


“물론 몇몇 잔해가 남았지만, 아몬 님이 잘 정리해주셨지.”


마왕성에서도 역시나 약한 개체들의 자리를 빼앗고 후일을 도모하려 했다.

마왕 아몬이 그 수법을 간파해 전부 불태웠다.


“그리고 본체를 사로잡아서 지하 감옥에 가둬두었다지? 그러면 정말 여기 사람들 불쌍하다~ 마왕성이 통째로 날아가는 일만 없었어도 저게 나갈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야.”


마왕성 지하에 봉인되어 있던 위험인자들.

그것을 묶어둔 족쇄를 인류 스스로 끊어먹었다.


“인류의 위협을 제 손으로 풀어주다니 말이야. 정말로 멍청한 짓이지 않아?”


릴리트는 양팔을 활짝 벌려서 전화에 휩쓸린 도시를 가리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의 불길은 더더욱 커졌다.


“마왕군은 정복욕을 충족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침범하지. 그러면 마족에게도 멸시받는 저것은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계획을 세워 도시를 함락하지만, 정복도 복수도 아닌 전쟁의 의미.


“그냥 즐거움이야. 녀석에게는 이게 하나의 오락이라고.”


그저 제 능력을 시험하고 싶은 하나의 게임이었다.

과거 마왕성에 쳐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디까지 힘이 통하나 시험해보았다.


“뭐. 이 말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과거 릴리트가 호기심을 못 참고 왕국 하나를 정복한 것과 같은 부류였다.

그렇게 릴리트 본인이 그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은 왕국 하나로 만족 못 하겠지. 왜냐면 저건 갖지 못하는 것을 궁금해하지만. 결국 제 손으로 망가뜨릴 테니까.”


그건 도플갱어의 본질과 같았다.

아무리 이름이 있어도, 능력이 달라도. 더러운 태생은 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호문쿨루스는 제대로 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걸까?”


아무리 인간과 닮으려고 인간은 되지 못하는 마물.

가여운 마물이 힘에 취하여 벌인 일.


“이곳을 망치면 다음 장소로 향하겠지. 모든 것을 망치고 나서야 제 존재의 공허함을 깨우칠까?”


릴리트는 도시가 불타는 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아니면 이미 제 공허함을 인지하고. 그것을 채울 수단을 찾고 있는 걸까.”


뽀드득.

릴리트가 한참 즐거워하던 와중이었다.

산 위에 쌓인 눈이 뭉개지는 소리가 났다.

여태까지 릴리트의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이가 발걸음을 옮겼다.

릴리트는 웃음을 멈추고 그쪽을 쳐다봤다.


“가려고?”

“응.”

“내가 무모한 일이라고 몇 번이나 설명하지 않았나?”


의문이 가득한 붉은 눈동자가 더욱 붉은 눈동자를 보았다.

입에서는 꽤 신랄한 말로 그의 행동을 비난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제일 먼저 몰매를 맞을 건 너야. 내가 친히 빼줬는데 굳이 저기로 되돌아가겠다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노파심에 충고하는데 너무 감정적으로 살지 마. 결국 피곤하고 후회하는 건 미래의 너 자신이라고.”


서서히 어스름이 내려오는 석양 사이로 릴리트의 단호한 표정이 비쳤다.

사뭇 진지한 릴리트는 자신이 데리고 온 대상에게 진심으로 충고하였다.


“그래도 저기에 갈 거야?”

“갈 거야. 캣니스가 저기에 있으니.”

“너 때문에 그 아이가 더 아파할지라도?”


릴리트는 이미 혼란의 끝을 알고 있었다.

이번 결말은 모두가 상처 입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족이라는 줄어들지 않는 격차가 창이 되어 들이밀 것이다.


“릴리트 님. 애초에 이 정도로 포기할 거면 인간계로 나오지도 않았어.”


그러나 아무리 충고해도 들어먹지 않았다.

릴리트가 억지로 데리고 온 남자는 도시 한곳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하여간에 누굴 닮아서 이렇게 고집이 센지.”


그 집착에 릴리트도 두 손을 들었다.

멋대로 하라며 고개 돌렸다.


“선택은 네 몫이니까 마음대로 해. 나는 너에게 한 가지 편한 제안을 했을 뿐이야.”


일찍이 릴리트는 가더를 빼냈다.

이제는 두 사람 다 이런 도시 다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 됐다.

그런데도 가더는 고집스럽게 떠나기를 거부했다.


“하여간 고집쟁이 같으니.”


과거에 맺어둔 계약의 우선순위가 다른 계약에 밀려났다.

이제 가더의 행동을 제약할 건 어디에도 없었다.


“난 충분히 말했어. 이 이상 어울려봤자 다치는 건 너라고.”


가더는 절벽 끝에 섰다.

잠시 도시를 지켜보더니. 곧, 다리가 허공을 딛고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니 나중에 나보고 혼자 빠져나갔다고 뭐라 하기 없기다!”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가더는 한 걸음 내디뎠다.

벼랑에 부딪치는 바람 사이에 몸을 묻었다.

떨어지는 동안에 검은색 머리카락이 서서히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머리카락이 허리춤에 닿을 정도로 길어지고 옷에 딱 맞던 몸이 부피를 줄였다.

이내 허리끈을 졸라매고 셔츠를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캣니스···.”


하얀 여인이 지면에 다다랐다.

곧 지면 위의 어두운 액체로 빠져 내려갔다.



*****



“살려줘! 살려줘-!”


도시는 아비규환이었다.

기사단이 괜한 걱정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서로가 마물이 아니냐고 소리 질렀다. 무언가 방안을 가지고 움직였던 기사단도 결국 똑같아졌다.

상대의 사정에 망설이고 연민에 물들며 결국에는 혼란에 빠져 폭력을 행했다.

이 도시는 광기에 물들었다.

그들은 무의식중에 눈치챘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사람의 마음이 아님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압도적인 폭력임을.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난 아니야! 난 아니라고!”


도시에 한 남자가 있었다.

쇠갈퀴를 휘두르며 본인의 무고를 비명처럼 외쳤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힘이 강한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압박했다.


“아니라고! 아니야!”


약한 자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나약한 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곳보다 안전할 줄 알았던 도시 안에서 야생의 규칙이 적용됐다.


“왜. 대체 왜. 대체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해!”


남자는 눈물겨운 소리를 지르며 절규했다. 휘두르던 쇠갈퀴 막대마저 부러지자 절망했다.

서서히 인영이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의 손에 처형당할 예정이었다.

일찍이 그가 그러했듯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마물에게 속은 사람들 사이에서 죽는다.


“미. 미안해. 여보. 나는 이렇게 먼저···”


남자는 사람들의 분노어린 표정을 지켜보며 삶의 끈을 놓았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가짜의 얼굴을 보며 눈물 흘렸다.

이 단계에서 남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가짜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노라고. 그저 자신을 사람이라고 믿는 도플갱어인지도 모르겠노라고.

그렇다면 이 상황은 꽤 괜찮은 이야기였다.

도플갱어를 처단하는 용감한 시민들.

남자가 정말로 사람이 아니었다면 멋진 이야기였을 거다.

쿵-

바람에 문이 닫히는 거 같은 커다란 소리.

곧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죽을 줄 알았지만 멀쩡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더 이상 남자를 해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마수···?”


왜냐면 조금 전까지 남자를 압박하던 몇몇의 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새까맣고, 이상한, 여러 개의 눈알이 달린 검은 짐승이었다.

늑대의 주둥이 같은 그것이 바닥에서 솟아나더니 사람을 먹어 치웠다.

수십 개의 눈알을 돌려서 남자를 보았다.


“으아아! 으아아악!”


곧바로 비명을 질렀다.

잘린 머리 여러 개가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다섯 명이 사라지니 지켜보던 사람 중 한 명이 외쳤다.


“저, 저 녀석이 수를 썼다! 도플갱어라는 게 들키니 본체를 드러내서···”


쿵-

두 번째였다.

조금 전까지 소리치던 노인의 몸이 사라졌다.

맨 처음 무고를 증명하던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히끅.”


거리 건너편에 하얀 머리카락 밑으로 붉은 눈을 가진 여성이 서 있었다.

여성의 붉은 눈을 보자 절로 온몸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저 저놈이 마수를 부렸다!”

“괴, 괴물이야!”

“도, 도플갱어 말고도 괴물이 있었어!”

“엄마! 무서워! 살려줘!”

“누가! 누가 제발 도와줘!”


많은 눈알을 가진 짐승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온 도시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도, 무고를 증명하던 사람도, 누군가를 몰아세우던 사람도. 전부 가라지 않고 먹어 치웠다.


“이건 대체!”


당황한 건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 모험가 쪽도 마찬가지였다.

늑대의 주둥이를 닮은 그것에게 여사제가 잡아먹혔다.

어떠한 저항도 없이 떨어지는 금빛 머리카락.

여사제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대체 이 도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혼란은 더욱 극적으로 치달았다.

혼란이 거리 위의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저택의 음습한 지하 공간에도 혼란은 찾아왔다.


“대체 뭐야···.”


모든 일의 주동자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호문쿨루스의 분신과 이어진 눈알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대체 이건!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호문쿨루스가 분신의 시야를 돌리는 족족 새까맣게 변했다.

바깥에 있는 도플갱어들이 하나둘 비명횡사했다.

비밀리에 숨겨놨던 씨앗들도 여지없이 발각되어 사라졌다.

항상 마지막에는 익숙한 마계의 기운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그에게서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모습은 사라졌다.

눈에 띄게 당황하며 초조해했다.

지하실과 바깥과 이어진 유일한 통로를 바라봤다.

까득, 호문쿨루스는 어금니를 갈았다.


“그년이야. 사천왕 릴리트! 그년이 무슨 수를 쓴 게 분명해!”


이 정도의 마기를 지닌 인물이라면 그녀밖에 없다.

아주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놓쳐버린 서큐버스 여왕.

자신의 계획을 망칠 수 있는 유일한 골칫거리가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서큐버스 릴리트! 그 서큐버스가 많이 약해진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어!”


당황은 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호문쿨루스는 기억했다.

제 본체를 보고 도망간 그녀를, 어째선지 옛날만큼 힘이 없는 그녀를.

그렇다면 그것의 마력을 삼켜서 더 많은 복제품을 만들면 된다.

더 늦기 전에 그것을 사로잡으면 되었다.


“어디냐! 어딨어! 대체 어디에 있어 이 음탕한 여자!”


사라져가는 분신의 시야로 위치를 추적했다.

분신들이 사라지는 장소를 조사하여 위치를 특정했다.

하나둘 연결이 끊기고 가장 가까운 분신의 연결마저 끊겼다.

마침내 위치를 알아냈는데 웃을 수가 없었다.


“바로··· 앞이라고···?”


저택 안을 돌아다니던 아이 하나가 죽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두려움을 동반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니야. 그 여자가 아니야. 이건 대체 누구···!”


쿵.

그 순간, 심장이 뛰었다.

마물의 본능이 생존의 위험을 눈치챘다.

쿵쿵.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위기를 알아차린 순간 머리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그, 그래. 너도 있었지. 목줄이 걸린 처량한 동류.”


한 끗 차이였다.

거대한 짐승이 목덜미에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다.

만약 마지막 순간에 판단을 잘못했다면, 바닥을 구르는 사체에 본인이 포함되었을 거다.


“움직이지 마! 이 여자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 거야?”


인간의 형체를 잃어버린 여사제를 인질 삼았다.

호문쿨루스는 그것의 머리카락을 잡아끌어서 칼을 들이밀었다.


“난 다 알고 있어. 다 간파하고 있었다고. 이 여자를 손에 넣으면 넌 내 말을 따르는 개에 불가하다는 걸 말이야!”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짐승의 주인을 향해 말했다.

통로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경계했다.


“움직이지 마! 우선 이 괴물부터 치워! 설마 네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아무래도 너에 대한 위험성을 상향조정 해야겠어.”


끈적이는 액체와 함께 짐승의 주둥이가 멀어졌다.

짐승은 바닥으로 녹아내려서 통로의 어둠 쪽으로 돌아갔다.

호문쿨루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최대한 겁먹은 사실을 숨겨가며 어둠 너머에 있는 붉은 눈에 명령했다.


“위험성을 상향조정 했지만. 단지 그뿐이야! 너는 이제 내 말을 들어야 할 개에 불과하지!”


천천히 앞으로 나와라.

호문쿨루스가 명령한 말을 따라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그래. 그렇게. 아주 착한 아이야.”


촛불 아래서 상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얀 머리카락의 여성이 그를 보고 있었다.

서큐버스 여왕과 사라진 또 다른 변수.

그래도 그와 대면했을 때의 준비는 이미 끝내놓았다.


“자. 멍멍아. 여기 이거 보이지? 네가 따르는 주인님이야. 그리고 저기 있는 건 네 주인이 아끼는 아이들이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상하관계를 각인시켜주려고 열심이었다.

그런데 상대의 눈이 다른 곳을 향하였다.

바닥을 적신 피, 비커에 담긴 심장 그리고 쇠창살 너머의 키메라, 마물과 뒤섞인 캣니스의 상태.

호문쿨루스는 여사제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어딜 한눈을 파는 거야! 지금 네 주인이 위험한데 다른 곳을 볼 여유가 있어?”


인질의 얼굴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가 다른 곳을 보지 않게, 손수 칼로 피를 내서 도와주었다.


“그래. 그렇지! 다른 곳이 아니라 주인을 봐야···”


쿵-

그때, 짐승의 거대한 턱이 맞물렸다.

호문쿨루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캣니스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던 왼쪽 팔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너, 너 미쳤어?”


억지로 여유를 가장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휩쓸려 나갔다.

피가 튄 얼굴에 공포가 가득했다.

단검으로 인질의 목을 겨냥했다.


“나를 공격하면 이 여자를 가만히 둘 줄 알···”


쿵-

또 한 번 큰소리가 났다.

땅을 딛고 있던 몸의 중심이 단번에 무너졌다.

그의 몸에서 한쪽 다리가 사라졌다.

엎어진 바닥에는 이빨과 눈알이 가득한 검은색의 무언가가 있었다.


“이,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한쪽 팔과 다리를 잃은 호문쿨루스가 소리쳤다.

마력의 파동이 일어나면서 여러 사물이 넘어지고 쏟아졌다.


“분수를 알려주마!”


사물이란, 이 지하실을 꾸미는 모든 것,

촛불, 촛대, 서랍, 돌, 탁자, 슬리퍼, 철장, 쇠사슬 등등.

수많은 사물로 위장했던 분신이 크기를 키워서 달려들었다.

그것들은 성인 남자 정도는 쉽게 해치울 전투용 분신이었다.


“조금 쓸만한 거 같아서 써먹으려 했더니 필요 없어졌어! 당장 지금! 여기서 죽어버려!”


분신들의 손이 날카롭게 바뀌며 그를 덮쳤다.

비좁은 지하실을 가득 채울 정도의 물량이 쏟아졌다.


“사천왕 따위도 이길 수 있는 게 지금의 나다! 그런데 감히! 하찮은 마족 따위가 이 나를 두고 신경전을 벌여?”


비좁은 분신 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그 너머에 있는 황금빛 시험관을 손에 쥐었다.


“원래라면 다른 놈에게 쓰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여사제의 심장에서 추출한 신성력.

신성력이 담긴 시험관을 분신에 둘러싸인 대상에게 던졌다.


“죽어!”


한순간 시야가 빛나고. 강제로 억눌러놨던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

분신들이 전부 불타버릴 정도로 강대한 힘이 방 안을 휩쓸었다.


“크. 크아아악!”


그런 힘이 가까이서 터졌으니 호문쿨루스 본인도 무사하지 못했다.

눈이 불타는 격통에 몸부림쳤다.

그래도 고통과 다르게 표정은 착실히 입꼬리를 올렸다.


“하. 하하. 해치웠다! 주제도 모르고 까불었기는!”


호문쿨루스는 잘린 팔과 다리를 재생시키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 많던 분신들이 통째로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비록 이곳에 숨겨뒀던 전투용 분신을 전부 잃었지만, 호문쿨루스는 웃었다.


“영광으로 여겨라! 이건 너 따위에게 쓸 힘이 아니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변수를 제거했음에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본래 시험관은 사천왕에게 쓸 물건이었지만 아쉬워하지 않았다.

조금 힘들지 몰라도, 신성력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꺄아아아악-!”


그런데 싸움에서 이겼다는 희열이 오래가지 못했다.

익숙한 비명과 함께 기쁨이 잦아들었다.

기쁨이 있던 자리를 채우는 건 거대한 불안감이었다.

쿵. 쿵. 심장이 뛰었다.

호문쿨루스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보았다.

먼지가 걷히면서 드러난 광경.

철장 안에 두었던 키메라가 거대한 개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안 돼요··· 제발··· 문지기님 안 돼요···.”


조금 전까지 자신이 했던 역할을 대신하는 이가 있었다.

여사제가 호문쿨루스가 아닌 다른 이의 다리에 매달려 애원했다.

이빨 달린 짐승들이 쇠창살 속의 키메라를 전부 먹어 치웠다.


“그만, 그만···! 제발 그만둬 주세요 문지기님···!”


여사제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그가 있었다.

이 순간 호문쿨루스는 깨달았다.

이건 계산 착오였다. 자신이 계산할 수 있던 범위가 아니었다.

아무리 목줄을 채워놨다고 해도, 목줄을 든 주인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해도. 저건 감히 한낱 창조물이 길들일 수 없는 짐승이었다.


“문지기님··· 제발··· 아. 아. 아아악···!”


이제 가더는 여사제의 몸에 붙여놨던 악마의 날개를 뜯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의 뿔도, 와이번의 비늘도 전부 거슬린다는 듯이 뜯어냈다.


“문지기님. 아파요··· 제발··· 제발··· 그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가 애원하자 움직임이 멈췄다.

몸에 생긴 이물질을 전부 해치울 것처럼 굴더니, 놀라울 정도로 얌전히 있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해주세요 문지기님···.”


가더의 품에 안겨서 통곡하는 캣니스.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그는 알고 있는 듯하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캣니스.”

“아이들을··· 아이들을 어떻게···”

“캣니스. 똑바로 봐.”


가더가 제 손에 있는 것을 똑바로 보여줬다.

키메라에게 붙어있던 붉은 리본을 들이밀었다.


“이미 늦었어. 저건 되돌릴 수 없었어.”

“아. 아아··· 아아아···!”


캣니스가 줄곧 외면하던 진실을 마주했다.

키메라 실험으로 망가진 아이들은 소생할 수 없다. 단순히 정화와 치유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된 신체였다.

그런데도 캣니스가 힘을 쓰지 않은 이유는 미련을 놓지 못했을 뿐이었다.


“문지기님 저는, 저는··· 노력했어요···!”


캣니스는 가더의 옷깃을 붙잡고 소리쳤다.

이에 가더가 짧게 답변했다.


“그래, 알고 있어.”

“제가 아이들을 죽게 한 게 아니에요!”

“알고 있어.”

“믿어주세요. 저는··· 저는 최선을 다했···”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캣니스가 쓰러졌다.

망가진 몸으로 무리하고 있었으니 갑자기 기절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본인의 것이 아닌 심장. 본인의 것이 아닌 신체.

지금껏 버틸 수 있던 것도 타고난 신성력과 강인한 정신력 덕분이라고 해도 좋았다.


“너는 항상 나를 보면 울고 있는 거 같아.”


가더는 캣니스의 눈가에 남은 핏자국과 눈물 자국을 지웠다.

그리고 지금껏 얌전했던 기운이 흉포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또 너를 몰아세운 건 누구일까.”


아름다운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살기가 지하실을 채웠다.

온전한 정신을 미치게 할 정도의 기운이었다.

호문쿨루스는 제자리에서 입을 꾹 다물었다. 흉포한 기운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꺽. 꺽. 마, 말도 안 돼.’


언젠가 마왕성에서 겪었던 절망을 다시금 떠올렸다.


‘또 실패하는 거야?’


수십 년 전, 마왕성에서 겪었던 패배를 떠올렸다.

언제나 남을 흉내 내기만 할 줄 알며 살던 도플갱어 숲의 형제들. 그 중 유일하게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아는 특별한 존재가 그였다

자신만이 다르게 태어난 이유는 생물의 정점에 서기 위함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생각을 마왕에게 부정당했다.

마왕이 사라지고 나서야 제 세상이 찾아왔다고 생각했거늘···.

결국 이번에도 그게 아니었다.

과거도 지금에도 당연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언제나 특별한 존재는 자신인 줄 알았지만 정말로 특별한 존재는 달리 있었음을.

이번에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하, 하하하! 이 역겨운 천재 놈들! 그래! 나를 죽이려고? 그런데 이건 어쩌나? 나는 죽지 않아! 그 잘난 마왕도 나를 죽이지 못해서 감옥에 가둬놨지! 아직 밖에는 내 분신이···!”


터벅.

발소리가 들리자 무의식중에 뒷걸음질 쳤다.

가더가 걷는 길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호문쿨루스는 방금 자신이 물러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존심에 상처 입어서 소리쳤다.


“내 분신은 아직 많다 우쭐대지 마라! 지금은 내가 졌지만 언젠가는 너를 뛰어넘고···”


터벅.

발소리가 길어질수록 뒷걸음질도 길어졌다.

분명 상대의 눈은 자신에게 향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더, 더 이상 내 화를 돋우지 마! 잘 들어! 내 분노가 두렵다면 지금 당장 내 앞에 고개 숙이고 잘못을 빌어! 그러면 내가 특별히 너만큼은···”


쿵-

호문쿨루스의 머릿속에 수많은 이명이 들렸다.

절로 머리를 감싸며 쭈그려 앉았다.

그는 곧 어디서 소리가 났는지를 이해했다.

수많은 분신과의 연결고리가 모두 끊어졌다.


“어, 어, 어, 어떻게···”


터벅.

발소리가 다가온다.

그것은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닮았다.

호문쿨루스는 다리가 풀려서 넘어졌다. 엉덩방아 찧은 채 위를 올려다봤다.

눈에는 희망은 없었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정해진 순간을 체감했다.


“분신이 많고, 화를 돋우지 말고 어쩌고.”


내려다보는 가더가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빌어 어쩌고.”

“힉! 히익! 자, 잘못했어요!”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릴리트 님이 한 말 중 하나는 확실하네.”


호문쿨루스는 손바닥을 비볐다.

엎드려서 빌고 가더의 바짓가랑이도 잡았다.

우스꽝스러운 소리도 내고 광대짓도 하였다.


“이건 확실히 글러 먹었어.”


그러나 얼굴만큼은 잘못을 비는 표정이 아니었다.

호문쿨루스의 표정은 잔뜩 뒤섞여 있었다.

한쪽 눈은 웃고 한쪽 눈은 울고 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지만 내려가 있기도 한 괴상한 표정이었다.


“한 번 더 보기 역겨울 정도야.”


어떤 아이가 찰흙을 만지며 어떤 표정을 짓게 할지 고민하다가 망쳐버린 듯한 얼굴.

가더의 손바닥 아래로 말라붙은 나무뿌리가 솟아났다.

나무뿌리는 서서히 손잡이 형태로 변하더니 검붉은 날의 도끼가 되었다.


“사, 살려···”


하얀 머리카락 아래로 빛나는 붉은 눈동자.

그보다 더 붉은 도끼가, 엎드려 비는 사내를 무심히 내려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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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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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133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31 12 0 21쪽
155 132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9 8 0 15쪽
154 131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6 8 0 15쪽
153 130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2 11 0 14쪽
152 129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19 11 0 13쪽
151 128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7 11 0 11쪽
150 127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11 0 13쪽
149 126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6 0 22쪽
148 125화 이름없는 성녀 24.01.10 6 0 14쪽
147 124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8 7 0 12쪽
146 123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3 10 0 16쪽
145 122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1 8 0 13쪽
144 121화 이름 없는 성녀 23.12.29 10 0 14쪽
143 120화 여정 그리고 일행 23.12.27 6 0 17쪽
142 <2부> 119화 여정 그리고 일행 23.12.25 8 0 24쪽
141 118화 작별 23.12.13 6 0 22쪽
140 117화 재판 23.12.06 9 0 21쪽
139 116화 재판 23.11.30 10 0 20쪽
138 115화 재판 23.11.22 11 0 21쪽
137 114화 성녀 23.11.19 10 0 19쪽
136 113화 성녀 23.11.15 7 0 19쪽
135 112화 성녀 23.11.11 8 0 21쪽
134 111화 성녀 23.11.08 10 0 21쪽
133 110화 성녀 23.11.04 12 0 19쪽
132 109화 떨어진 과실 23.10.25 10 0 34쪽
» 108화 불신 23.10.21 8 0 25쪽
130 107화 불신 23.10.17 8 0 20쪽
129 106화 불신 23.10.14 12 0 25쪽
128 105화 불신 23.10.10 10 0 18쪽
127 104화 불신 23.10.07 9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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