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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최근연재일 :
2024.06.04 00: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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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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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112화 성녀

DUMMY

112화 <성녀>



“와. 가람 왕국의 궁전은 이렇게 생겼군요.”


세올이 감격하며 말했다.

새하얀 앱솔루트 왕국의 궁전에 비해 가람 왕국 궁전은 색채가 많았다.

갈색 벽 위로 붉은색과 노란색의 조화로 칠해져 있었다. 동양에서나 볼법한 지붕 끝 장식도 있었다.

익숙한 건축 방법과 낯선 건축 방법의 조화에 감격하던 그의 곁에는 베르 길드의 일원도 함께였다.


“이쪽입니다.”


그들을 왕성까지 데리고 온 대신이 말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왕성 내부를 완벽하게 안내했다.

점잖은 대신의 몸짓에 머쓱해진 세올은 얌전히 뒤따랐다.


“아니. 그런데 너는. 왜 우리 가는 길에 따라오는 거야?”


그런 세올이 못마땅한 자일리가 한 마디 했다.

이에 세올은 마냥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에이. 그야 저는 도련님의 호위잖습니까? 당연히 어떠한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곳에 뒤따라야 합니다!”

“뻥 치지 마! 그냥 성녀를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면서! 몇 달씩이나 나를 방치해놓고 호위는 얼어 죽을!”


조용하나 싶더니 또 시작이었다.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동안 금방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가서 어느 방 앞에 섰다.

대신이 문을 두드려서 허락받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흡. 저분이 바로···.”

“조용히 좀 해. 세올.”


바깥이 훤히 보이는 발코니가 달린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궁전의 주인도 발코니 안에 함께였다.


“또 보는군, 친우여.”

“오늘도 건강해서 다행일세 칼투스 14세여.”


갈색 턱수염이 풍성한 국왕이 그들을 반겼다.

브레드는 망설이지 않고 다가가 악수했다.

다른 일행도 허리 숙여 인사하고 미리 준비해둔 발코니 자리에 가서 앉았다.

다 함께 잠시 후에 있을 성녀의 퍼레이드를 기다렸다.


“와아. 역시 성녀는 성녀구나. 모인 사람들 수 좀 봐.”


자일리의 말에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발코니 난간 너머로 보이는 가람 왕국의 도시 풍경.

부정적인 감정에 지쳐있던 사람들이 성녀를 보기 위해서 거리에 나왔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분위기까지 크게 밝지는 않지만, 얼마 전의 일을 떠올리면 충분히 긍정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성녀는 언제···”

“저기 오는군.”


재촉하기 무섭게 브레드가 눈매를 좁혔다.

그 말을 시작으로 거대한 나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왔어! 왔어! 진짜로 왔다고!”

“진정하세요 도련님! 저도 보고 있습니다!”


차마 자리가 자리인지라 일어서지 못하는 엉덩이만 들썩였다. 그만큼 두 사람은 성녀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었다.

곧 수많은 함성과 함께 꽃가루가 휘날렸다.

도로 정중앙에 마차가 움직이고 그 주변을 기사들이 둘러싼 채 걸어왔다.

성녀를 호위하는 무리와 그들을 지켜보는 무리.

혹시라도 그들 사이에 충돌이 있을까 봐. 호위들은 무기와 무구로 무장하여 성녀가 걸을 길과 걷고 난 길을 정리했다.


“와. 완전 대박.”


그들이 걷는 모습을 볼 뿐인데 팔에 소름이 끼치는 웅장함이 있었다.

연신 감탄사를 뱉는 자일리와 세올을 비롯하여, 브레드도 오랜만에 피가 끓는지 전투광다운 미소 지었다.

브레드는 왕국의 기사와 성녀의 호위들의 얼굴을 기억하며 당장 들끓는 기분을 잠재웠다.


“잠깐. 저자들은···”


그러던 와중, 행렬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금방 제 실수를 깨닫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설마 미스릴 등급의 모험가인 저들이 껴있을 줄은 몰랐군.”


성녀가 탄 퍼레이드용 마차 위에 탄 두 인물. 익숙한 모험가를 보고 짧게 실소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간질거리는 투기와 반가움이 있지만. 최대한 인내한 채 의자 팔걸이를 꽉 쥐었다.


“저게 성녀···.”


여전히 자일리와 세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차 위에 앉은 여인을 바라보며 벅찬 감동을 느꼈다.


“이 세올, 가문의 영광입니다.”


셀레브리디 교단의 위대한 성녀.

신의 말씀을 듣는다는 거룩한 위인.

본 얼굴은 하얀 사제복과 베일에 숨겨져 있지만, 기도하는 모습에서 성녀의 신성함을 확실히 느꼈다.

무교인 세올도, 마법사인 자일리도, 그 존재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픔에 허덕이던 거리의 사람들조차 지금은 퍼레이드를 조용히 바라볼 정도였다.


“도착했네요.”


캣니스가 짧게 말했다.

그들이 성 앞까지 다다르자 칼투스 14세의 차례가 되었다.

칼투스 14세는 연단에 서서 성 밖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어서 오게. 거룩한 신의 대리자여. 셀레브리디 교단의 성녀여. 우리 가람 왕국은 그대들의 방문을 환영하네.”


함성이 길게 이어졌다.

성녀 일행들이 감사의 인사를 올림과 함께 성문이 열렸다.

가람 왕국을 찾아온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손님을 안으로 들인 칼투스 14세는 본격적으로 반기기 위해 안쪽으로 돌아왔다.


“그대들은 일이 끝나면 부르겠네.”


그 한마디를 남기고 나갔다.

남은 인원들은 저마다 가슴에 남은 여운을 맛보았다.


“정말 엄청났습니다. 어서 빨리 이 일을 동생들에게 자랑하고 싶군요.”

“와. 진짜 대박이다. 그렇지 않아 캣니스?”


잔뜩 신이 난 세올과 자일리 그리고 복잡한 표정인 브레드와 캣니스.

가더만이 성녀의 퍼레이드를 보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광경을 보았음에도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은 이들.

국왕이 호출하기 전까지 간단히 티 타임을 대접받는 와중에도, 여전히 다른 이유로 침묵이 감도는 시간이었다.



*****



맨 처음 안내받은 방에서 벗어났다.

새빨간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었다.

안내를 맡은 시종을 따라서 여러 초상화와 진귀한 물품이 전시된 복도를 지나갔다,


“들어가시지요.”


응접실을 지키던 시종이 문을 열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방문자를 보았다.

칼투스 14세와 궁전의 시종들. 그리고 성녀와 성녀의 일행. 국왕과 성녀가 한 테이블에 앉아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오. 어서 오게 내 친우여.”


방에 들어서자마자 국왕이 말했다. 성녀와 일행도 그들을 보고 반겨주었다.


“어머나. 저 오빠야 기억나?”

“그래그래. 정말 오랜만에 보는 미남이다~”


시선을 낚아챈 것만큼이나, 행동 또한 심상치 않은 성녀의 일행.

민망할 정도로 근육질 몸에 달라붙는 상의를 걸치고, 연지를 바른 입술은 새빨갰다.


“브레드 머슬릿. 아직 은퇴하지 않았나 봐?”

“하긴 은퇴하기에는 한창때니 말이야~”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상당히 긴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두 사람 다 쌍둥이처럼 닮았고, 노란색 눈동자와 갈색 눈동자가 그나마 한눈에 알아본 다른 점이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브레드를 두고 품평하였는데. 브레드는 그 시선을 기꺼이 받았다.


“···도련님 눈치채셨습니까?”

“응. 저 변태들 상당한 실력자야···.”


성녀가 앉은 의자 뒤에 서 있는 쌍둥이 용병.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흘렸다.


“그리고 저 꼬마야. 이목구비를 보니 미래가 기대되는걸?”

“저 남색 머리카락. 남색 눈동자. 톨스 가문에 잘생긴 아이가 태어났구나.”


멀리서 자일리를 보며 혀로 입술을 훑었다.

이에 자일리는 부르르 몸을 떨면서 세올 뒤로 숨었다.

그러나 호위의 임무를 까먹은 세올은 오히려 자일리를 앞으로 밀었다.


“게르드 씨, 게이로드 씨. 너무 아이를 겁주지 마세요.”


옥구슬 구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녀가 두 사람을 나무란 것이다.

이에 자일리와 세올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에 반해 게르드와 게이로드는 쓴 소리에 토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어머. 아쿠아도 참. 우리가 언제 아이에게 겁을 줬다는 거니?”

“아쿠아. 그런 식으로 우리를 매도하면 못써요~ 우리는 멋진 남자를 봐서 조금 기분이 들뜬 것뿐이란다?”

“네. 두 분의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할게요. 부디 저를 용서해주시겠어요?”

“아쿠아의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지~ 그렇지? 게이로드.”


방에 들어서자마자 심상치 않은 환영을 받았다.

시종이 안내해준 자리로 가서 앉았다.

국왕은 자리에 앉은 베르 길드 일원들을 바라보았다.

곧 그들의 인원수가 맞지 않음을 알고 눈썹을 추켜세웠다.


“브레드. 인원이 부족한 거 같네만?”


약간의 노여움을 담아서 말했다.

왕궁에서 부른 사람은 네 사람.

한 명 호위가 얹어졌으니 다섯 사람이 와야 하는데. 세 사람만 왔다.


“미안하군. 두 사람은 잠시 다른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네. 그들이 내 판단을 믿는다고 하였으니 이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면 될 듯하네.”


브레드가 자리를 비운 이를 대신해 설명했다.

가더와 캣니스가 다른 일로 자리를 비웠음을 알렸다.

이는 사전에 의논되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성녀 쪽은 마음씨 좋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받아들이자 국왕도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우선 자기소개를 해야겠지. 나는 베르 길드의 길드장, 금 등급 모험가 브레드 머슬릿이네.”

“나, 나는! 베르 길드의 천재 마법사 자일리 톨스야!”

“저는 톨스 가문의 기사 세올 카이스트라고 합니다.”


그들의 소개가 끝나자, 성녀는 베일 너머로 미소 지었다.

세올과 자일리는 한 번 더 얼굴이 붉어져 헛기침을 뱉었다.


“어머 귀엽기도 해라.”

“아직 아가들이네?”


게르드와 게이로드는 한마디씩 하였다.

성녀가 그들을 돌아보자, 두 모험가가 어깨를 으쓱였다.

베르 길드가 말한 것처럼 똑같이 자신들을 소개했다.


“반가워, 나는 미스릴 등급 모험가 게르드라고 해.”

“같은 등급인 모험가 게이로드야.”


그들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우아하게 움직였다.

손을 내밀고, 그 위에 얹어진 손을 마주 잡았다.


“어머. 보드라운 살결.”

“이쪽은 거친 맛이 있는걸?”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쓰다듬자, 자일리와 세올은 황급히 손을 뗐다.

허공에 입맞춤을 보내고 돌아가는 그들을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개성이 넘치는 분들이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니에요.”


성녀가 곤란한 기색으로 일행을 두둔했다.

성녀 또한 제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고개 숙였다.


“반가워요. 일행의 무례는 대신 사과드릴게요. 저는 셀레브리디 교단의 여섯 번째 날개, 아쿠아 센츄어리라고 해요.”


여전히 옥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자기소개를 마친 성녀는 다시 베일 아래로 미소 지었다.

국왕까지 자기소개를 할 필요는 없기에 바로 본격적인 이야기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자잘한 이야기로 진행하다가, 칼투스 14세의 끄덕임과 함께 본론으로 넘어갔다.


“성녀여. 실례인 줄 안다만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겠네. 부디 그대가 이번에 우리가 겪은 불합리한 상황을 도와주었으면 하네.”


평화롭던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갑작스레 개인적인 용건을 꺼냈음에도 성녀는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저 명성다운 자비로운 모습으로 브레드를 돌아봤다.


“어머. 그렇군요.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손을 내어드려야죠.”


그렇게 말하고는 양쪽의 미스릴 등급 모험가를 바라봤다.

그들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자, 성녀는 마저 대답했다.


“그러면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진행된 이야기는 꽤 긴 이야기였다.

브레드는 이 나라를 덮친 재앙과 습격 그리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풀었다.

성녀는 길거리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놀란 기색을 보였다.

도플갱어가 연관되어 있다는 말에는 진지하게 고심하였고.

이 일의 흑막이 네임드였다는 사실에는 입을 틀어막기까지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나라가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을 듣고는, 본인의 일처럼 슬퍼하였다.


“그래서 부탁하네. 부디 나의 길드가 뒤집어쓴 오명을 풀어주게.”


브레드가 진심을 담아 고개 숙였다.

이에 성녀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짧게 심호흡했다.


“신께서는 진실한 사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사랑으로 보답받을 수 있도록 저도 같이 힘쓰겠습니다.”

“감사하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도록 하겠네.”

“은혜는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신께서는 불우한 자를 돕는데 대가를 바라지 않으니까요.”


성녀는 밝은 미소와 함께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선뜻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했고, 대가조차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여신께서 말씀하시길. 제 이름은 누구보다 낮은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불합리한 처우를 받은 이들에게 신의 이름을 빌려준다. 감사는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 올곧게 지내온 삶과 이곳으로 안내해준 신의 은혜 덕분이라고 말했다.

과연 칼투스 14세가 예견했던 대로, 성녀라는 이름에 걸맞은 여인이었다.

일전에 걱정을 품었던 게 무의미했다.


“그러면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하다가 멈췄던 우리 이야기를 계속해도 될까?”


한 번 흐름이 끊겼던 이야기를 게르드 게이로드 형제가 계속하기를 원했다.

이후의 이야기는 모험가가 느낀 심상치 않은 대륙 상황, 나라를 운영하는 국왕의 이야기, 성녀의 신실한 조언을 듣는 것이 다였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서 만찬의 준비를 알렸다.

해가 저물자 슬슬 자리를 옮길 분위기가 되었다.


“브레드여. 성녀여. 이제 만찬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건 어떠한가? 왕국의 자랑스러운 주방장이 성심성의 다하여 준비했네.”


국왕이 시종을 불렀다.

곧바로 만찬장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아, 죄송합니다. 국왕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단식하는 시기라 양해 부탁드려요.”


국왕이 눈썹을 올렸다.

게르드 게이로드 형제가 성녀의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단식으로 성녀가 만찬에 불참한다.

당연히 강요하지 못하지만, 많은 이가 눈에 띄게 아쉬워하였다.


“그렇군. 이 부분을 미리 배려하지 못한 점 사과하지.”

“괜찮아요. 부디 제가 없더라도 즐거운 만찬을 보내주세요.”

“별궁에는 내 따로 시종을 보내지. 밤 중에 불편한 점이 있다면 마다하지 말고 말하게.”

“국왕님의 배려에 감사드려요. 그러면 즐거운 밤 보내세요.”


성녀는 그들과 헤어졌다.

내일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따로 준비해둔 별궁으로 돌아갔다.

국왕은 아쉬워하는 몇몇을 달래며 방을 나왔다.


“그러면 우리는 만찬장으로 향하도록 하지.”


국왕과 베르 길드 그리고 성녀의 호위 역을 맡은 이들이 만찬장으로 향했다.

만찬장에는 타 나라에서 이곳까지 호위한 다른 인원도 있었다.

나라에 몇 안 되는 성대한 행사였기에, 만찬의 음식 구성은 어느 때보다 호화로웠다.

미스릴 등급의 두 모험가를 필두로 즐거운 만찬이 시작됐다.



*****



“흥~ 흐흥~ 흐흐흥~”


성녀를 위해 마련된 방.

방 안에 콧소리가 가득 찼다.

향긋한 꽃향기와 비누 향기가 공중에 떠다녔다.


“왜 이리 즐겁냐고요? 안 즐거울 리 없잖아요. 이렇게 떠받들어지는 삶이 얼마나 좋은데요~”


한 사람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젖은 노란색 머리카락 밑으로 녹색 눈동자가 생글거렸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셀레브리디 교단의 성녀.

이러한 중얼거림이 들통나면, 성녀의 체면이 말이 아닐 터였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은 누구? 바로바로 나 아쿠아 센츄어리~”


그래도 지금만큼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성녀가 직접 전개한 결계를 해제하지 않는 한, 방안에서 노래를 부르든 소리를 지르든 바깥에서 알아차릴 수 없었다.

물론 불시에 습격이 이뤄진다면 큰일인 행동이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껏 여정에 나선 동안 한 번도 위험한 적이 없었다.


“교단의 성녀를 습격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꽃향기가 나는 욕조에서 나와 가운을 둘렀다. 머리에 수건을 얹고 시원한 샴페인을 들이켰다.

호위들과 멀리 떨어졌음에도 걱정이 없었다.

신전에서 걱정한 바와 달리 스토커나 적대 세력을 만난 적이 없다. 생명의 위협도 느껴보지 못했고, 오히려 온 세상이 그녀를 환영하고 반기고 호의적이었다.


“그래. 이게 내가 바라던 삶이야.”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신전과 성녀로서의 압박감 그리고 위기감에서 벗어나 본인을 드러내기까지에 이르렀다.


“평생 이랬으면 좋겠어~”


왕국의 비호 아래 안전한 자유를 누린다.

안전한 자유.

절대적인 안전.

성녀는 완벽한 시간에 만족하며 이불 속으로 빠져들었다.


덜컹-


“히꾹!”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조금 전까지 평화롭던 방 안.

창밖에서 난 소리가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부쉈다.

창문과 이어진 발코니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평화롭기만 하던 날에 문제가 생겼다.


“누, 누구세요? 게르드? 게이로드?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나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기분은 서늘한 공기에 처박혔다.

아직 덜 마른 머리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언가 몸을 보호할 수단을 찾아 헤맸는데. 사제복조차 착용하지 않은 무방비한 속 드레스 차림이었다.

어쩔 수 없이 탁자 위에 놓인 나이프라도 들었다,


“나, 무기 들었다? 안 나가면 가만 안 둘 거다?”


영문 모를 인기척과 대치하면서 긴장감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와중. 촛불이 훅 꺼졌다.


“히꾹···!”


성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창문 너머에 있는 인기척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았다.

달빛을 등진 그림자가 커튼에 비쳤다.

적어도 들짐승이나 길 잃은 아이의 그림자는 아니었다.

성인. 그것도 상당히 키 큰 남성의 그림자.

그 사실을 인지하자 나이프를 쥔 손이 떨렸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위기감이 전신을 훑었다.


“너··· 너···! 누군지 몰라도 사람 잘못 봤어!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다면 오산이라고!”


두려움을 무시하기 위해 나이프를 더 길게 뻗었다.

그러나 성녀의 위협에도 커튼 너머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인기척을 넘어선 시선까지 느껴졌다.

그 순간, 방금 씻은 게 무색할 정도로 식은땀이 흘렀다.


“지,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용서해줄 수 있는···”


덜컹-


상대방이 움직였다.

커튼에 비친 그림자가 점점 거대해졌다.

성녀는 곧바로 나이프를 놓았다.

부딪친 의자가 넘어지든 말든 장롱을 향해 달렸다.


“왜··· 왜 안 열리는 거야···!”


그러나 덜컹 덜컹 소리를 내며 장롱이 열리지 않았다.

긴장감에 뛰는 심장 소리가 쿵쿵, 머리까지 울렸다.


“열려··· 열리라고···!”


손잡이를 붙잡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커튼에 드리운 그림자가 선명해졌다.

지금이라도 결계를 풀고 도움을 청할까. 망설였다.


“제발 열러···”


그러나 그러기에는 늦었다.

놈은 창문을 열었고 문까지는 거리가 멀었다.

바보같이 속 드레스 차림으로 수치심을 감수하지 않은 지난 일을 후회했다.

어쩔 수 없이 욕실과 방 사이에 있는 장롱에 의지해야만 했다.


“제발 좀 열려!”


지난 후회를 담아서 안간힘을 쓰자 장롱이 열렸다.

성녀는 얼른 화색이 되어 장롱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드르륵-


신원 미상의 인물이 확실한 침입자가 되었다.

방 안을 걷는 소리가 장롱 안까지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 이게 뭐야! 갑자기 왜 내가 이런 험한 일을 겪어야 해?’


성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눈을 꼭 감았다.

빛을 내던 신성력은 꺼버린 지 오래였다.

들키면 살해당할 거라는 압박감 때문에 바깥 상황을 살필 엄두조차 못 내었다.

그저 좁디좁은 장롱에 웅크린 채로 오들오들 떨었다.


‘게르드, 게이로드 빨리 와줘.’


방 안에 펼쳐둔 결계는 해제했다.

문밖의 시종이 무언가를 알아채 주기를 바랐다.


‘제발 제발···!’


덜커덩-


방 안에 있는 문 하나가 열리는 소리였다.

식은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더욱 눈을 감고,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덜컹-


누군지 모를 인기척은 숙소를 죄다 뒤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듯이 계속 방안을 돌아다녔다.

만약 장롱의 문이 열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성녀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빨리 저 침입자가 떠나줬으면 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과 다르게 침입자는 방을 떠날 기색이 없었다.

뚜벅뚜벅.

오히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몸의 떨림도 심해져갔다.


‘···빛?’


그런데 문득, 닫힌 눈꺼풀 너머로도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빛없이 못 찾아서 촛불을 켰구나!’


한참을 돌아다녀도 찾지 못하자 불을 켠 게 분명했다.

그건 잠입의 기본도 모르는 하수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똑, 똑바로 기억해주겠어!’


이왕 이렇게 된 일.

성녀는 침입자가 떠나기 전에 얼굴을 기억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용감하게 뜨이기 시작한 눈꺼풀 사이로 약한 빛이 들어왔다.


‘어? 그런데 빛이 이상한데···.’


어쩐지 빛이 오는 방향이 이상했다.

장롱 너머에서 오는 은은한 빛이 아니라 얼굴 옆에서 오는 거 같았다.


‘서, 설마···.’


식은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성녀는 제발 기분 탓이기를 빌며 천천히 고개 돌렸다.


“아.”

“아.”


푸른 눈동자의 유령이 저를 보고 있었다.

성녀의 안색이 단번에 나빠졌다.

질끈 눈을 감고는 속으로 세상이 떠나갈 듯 비명을 삼켰다.


“아. 하하하. 또 말 안 들었다고 이런 식으로 사람 놀리기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키고 푸른 눈의 유령에게 손을 뻗었다.

분명 손이 닿지 않을 거라는. 필사적인 현실 도피의 일환이었다.


“누가 이런 거 백 번 보여줘도 놀랄 줄 알고···”

“아얏! 아파요!”


볼이 꼬집힌 유령이 소리쳤다.

성녀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래졌다.

입술 끝을 파르르 떨고 성녀라고 생각지 못할 한 마디를 뱉었다.


“아. 이런, 염병···.”


누구보다 선하다는 성녀가 욕설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는 눈이 완전히 뒤집혀 쓰러졌다.

쓰러지기 직전에 푸른 눈의 유령이 걱정하는 얼굴이 보였다.

장롱의 문도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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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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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123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3 10 0 16쪽
145 122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1 8 0 13쪽
144 121화 이름 없는 성녀 23.12.29 9 0 14쪽
143 120화 여정 그리고 일행 23.12.27 6 0 17쪽
142 <2부> 119화 여정 그리고 일행 23.12.25 8 0 24쪽
141 118화 작별 23.12.13 6 0 22쪽
140 117화 재판 23.12.06 8 0 21쪽
139 116화 재판 23.11.30 8 0 20쪽
138 115화 재판 23.11.22 11 0 21쪽
137 114화 성녀 23.11.19 10 0 19쪽
136 113화 성녀 23.11.15 7 0 19쪽
» 112화 성녀 23.11.11 8 0 21쪽
134 111화 성녀 23.11.08 8 0 21쪽
133 110화 성녀 23.11.04 10 0 19쪽
132 109화 떨어진 과실 23.10.25 9 0 34쪽
131 108화 불신 23.10.21 7 0 25쪽
130 107화 불신 23.10.17 8 0 20쪽
129 106화 불신 23.10.14 12 0 25쪽
128 105화 불신 23.10.10 10 0 18쪽
127 104화 불신 23.10.07 9 0 19쪽
126 103화 불신 23.10.03 10 0 18쪽
125 102화 불신 23.09.30 10 0 24쪽
124 101화 불신 23.09.26 10 0 17쪽
123 100화 불신 23.09.23 12 0 15쪽
122 99화 휴식 23.09.20 13 0 13쪽
121 외전 서큐버스 여왕 23.09.16 15 0 29쪽
120 98화 서큐버스 여왕 23.09.12 14 0 13쪽
119 97화 서큐버스여왕 23.09.09 18 0 15쪽
118 96화 서큐버스 여왕 23.09.05 19 0 18쪽
117 95화 서큐버스 여왕 23.09.01 16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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