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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의 서재입니다.

실직한 마왕성 문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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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이
작품등록일 :
2022.10.2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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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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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이름 없는 성녀

DUMMY

124화 <이름 없는 성녀>



28년 전, 마왕군의 군대가 프로텐시아 연합국 대부분을 집어삼켰어요.

그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사람들의 비명만이 남았죠.

다행히 여러 나라의 조력 덕분에 영토 일부를 되찾는 데 성공했어요.

하지만 이미 마기가 침식당한 땅에는 풀 하나 자라지 않게 되었죠.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은 오염된 땅에서라도 터전을 꾸리고자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몰랐어요.

마기는 토지를 오염하는 데서 그치지 않음을요.


“이번에는 누구야?”

“저번에 죽은 옆집 할아버지네 손녀 있잖아.”

“아이고. 아직 어린 게 안되기도 했지.”

“이게 대체 몇 번째야?”


피난민들의 삶은 황폐했어요.

어떻게든 살고자 하였지만 쉽지 않았죠.

바위와 바다에서도 자라는 강인한 식물을 심었어요. 동물들에게는 사람도 먹지 못한 좋은 물과 풀을 먹였어요.

그러나 전부 병을 앓고 죽어갔어요.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도 당연하다는 듯이 빛을 빼앗겼죠.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우리는 다음 희생자를 기다리는 듯했어요.

프로텐시아 여신의 축복인 번영과는 많이 떨어진 삶이었어요.


“가자. 일리나.”

“엄마. 아빠는?”

“오늘 늦게 오실 거야. 우리 같이 아빠를 맞이할 준비 하자.”

“응!”


제 아버지는 장의사였답니다.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그 혼을 달래어 땅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셨죠.

죽은 이가 있는 날이면 아버지는 밤늦게 돌아왔어요. 제가 잠들 때면 돌아와서 이마에 입 맞추고 하시곤 하였답니다.


“일리나. 오늘도 행복하니?”

“응. 행복해질 거야.”


마을 사람들은 그런 우리에게 많이 기댔어요.

전쟁의 피해 속에서 유일하게 몸에 불편한 점이 없는 가족이었고, 식사량이 적어서 구호 물품이 많이 남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이 마을에서 우리 가족에게 기대는 이유는, 어머니가 유일하게 마기를 몰아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었죠.


“큰 바위 옆집이 비었어. 그렇게 말렸는데도 병간호 들다가 함께 간 모양이야.”

“가을이 되면 추수할 수 있을 거 같아. 마기가 더 잠식하지 않는 가정하에.”


부모님 두 분 모두 바빴지만, 가끔 세 사람이 모일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아버지는 어느 집이 비었고, 어머니는 올해의 오염된 땅에 관해서 이야기하곤 했어요.

저녁 식사 이후에는 모두 모여서 두 눈을 감고 기도했답니다.

프로텐시아님께서 우리에게 번영의 축복을 내려주길 바라면서요.


“일리나~ 여기 추수하는 일 좀 도와줘!”

“네~”

“일리나. 아들이 아파서 그런데 오늘 저녁에 와줄 수 있을까?”

“늦게라도 괜찮다면요!”


시간은 빠르게 흘렀어요.

어느덧 저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어요. 제 몫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죠.

열세 살의 저는 네 살의 제가 꿈꾸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되었어요.

항상 사람들을 지탱해주고 믿음을 주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 두 분을 가까이서 봐왔다는 지난날은 정말로 축복받은 시간이었답니다.


“열이 많이 오르네요. 금방울 꽃의 꽃잎과 겨울나무의 뿌리 즙을 짜내서 먹이도록 하세요.”

“저기 혹시 그건···.”

“약손이요? 당연히 해드려야죠. 잠깐 가족분들은 뒤로 물러서 주시겠어요?”


아버지께 물려받은 약학지식과 어머니를 닮은 신성력은 두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어요.

눈이 어두운 저를 불안해하던 마을 사람들도 어느 순간부터 믿고 따라줬어요.

어릴 적부터 꿈꾸던 이상향과 제 능력이 같다는 건 정말로 감사한 일이에요. 이토록 많은 사람의 행복을 제 손으로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꿈에 다가갈수록 실패 또한 있었답니다. 그리고 실패는 다시 채울 수 없는 아픔을 의미했죠.


“제가··· 제가 더 뛰어났더라면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일리나. 네 잘못이 아니야. 그저 시간이 없었을 뿐이야.”


제 노력이 과실을 맺지 못할 때마다 부모님들은 저에게 아픔을 견디는 법을 알려줬어요.

며칠 동안이나 제 곁에서 토닥이고 위로해줬답니다.


“일리나. 항상 너 혼자서 끌어안을 필요가 없단다.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 없어. 이 아빠도 엄마도 언제나 네 곁에 있어.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하렴.”


언제나 주변에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마라. 아픔을 덜어줄 고마운 사람을 만나라. 그리하면 어떤 아픔이 와도 우리는 견딜 수 있단다.

항상 보살펴주시는 부모님의 말씀을 따라 아픔을 이겨냈어요. 그 이후에도 한 번 두 번 비슷한 아픔이 찾아왔죠.

하지만 어느덧 저는 강해졌어요. 아픔을 겪고 일어설 때마다 더 단단해졌어요.

더 이상 실패는 저를 아프게 만들지 못했죠. 슬픔을 이겨내는 법을 터득한 거예요.


“일리나··· 일리나···!”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정체불명의 열병이 저에게 찾아왔어요.

몸이 뜨겁고 심장이 터질 듯 뛰며 목이 마르고 눈물이 메마를 틈이 없었죠.


“엄마··· 아파··· 너무 아파···.”


마음의 아픔을 이겨내는 법은 알았어도 몸의 아픔은 아직 견딜 수 없더군요.

원인 모를 병으로 앓은 저 때문에 부모님도 밤새도록 침대 앞을 지켰어요.


“신이시여 부디··· 일리나를··· 일리나만큼은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두 분은 며칠 동안 저를 위해 눈물 흘렸고, 목이 아프도록 기도했어요.

어떻게든 가느다란 실 같은 의식만 간신히 붙잡던 일주일 후, 제 아픔을 끝내줄 꿈이 찾아왔어요.


“일리나. 정신이 드니?”

“엄마. 꿈을 꾸었어요···.”


열병이 가라앉은 날, 저는 이야기했어요. 제 꿈에 나온 모든 일을 전부 목소리에 담았죠.


“신기한 사람이 있었어요.”


꿈에서 본 풍경은 처음 보는 세상이었답니다.

눈이 불편한 저였는데도 모든 걸 보았어요.

수풀 한 가운데서 햇빛을 받는 장소가 있었어요.

뱀과 다람쥐가 도토리로 산수를 하고, 곰과 사슴이 함께 잠을 청하고 있었죠.

마치 종의 다툼이랄 게 없는 초월적인 공간이었죠. 그런 공간에서 저는 신비한 사람과 마주했어요.


[일리나. 어서 와. 네가 이 공간에 발을 들이기를 기다렸어.]


분명 입을 열고 말하는데 귀로 듣는 거 같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가슴 깊이 울리는 느낌에 눈물이 나왔죠.

꿈속의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어요. 그리고 저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죠.

줄곧 그녀가 기대고 있던 바위가 움직였어요.

놀랍게도 그건 바위가 아니라 아주아주 거대한 고양잇과 맹수였죠.


[두려워할 필요 없어.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해 준비된 자리이니.]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공포가 제 몸을 묶었어요. 다리가 꼬여 넘어질 정도로 무서웠죠.

그런데 그녀에게 한마디 듣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어느새 숨도 못 쉴 정도로 두려웠던 존재에게 손을 내미는 제가 있었어요.

처음 보는 맹수의 털은 보드라웠어요. 영원히 그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제가 신기했어요.


[일리나. 네 꿈을 내가 안다. 이제 모든 사람을 번영으로 이끌 거라.]


이어진 한 마디가 저에게 주어졌어요.

가슴 깊이 차오르는 풍족함과 함께 눈을 떴어요.

이후의 일은 부모님도 아는 사실들이었죠.


“여보. 이건···.”

“일리나 걱정하지 말렴.”


그런데 제 꿈 이야기가 허무맹랑해서였을까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분위기가 심각했어요.


“일리나. 우리는 네 선택을 존중할 거야. 네가 원하는 일을 해라.”


평소에도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었어요. 하지만 이번만큼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 적은 없었죠.


“그래. 일리나. 운명에 휘둘리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렴.”


어머니는 저를 꼭 안아주셨어요. 오늘따라 사랑에 슬픔이 섞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죠.

그래도 저도 조용히 어머니를 마주 끌어안았어요. 그날은 이해하지 못해도 언젠가 알 수 있으리라는 기분과 함께요.


“일리나 네가 이 마을에 태어난 게 우리에게 정말로 축복이란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열여덟 살의 생일이 지났어요.

제 열여덟 살의 생일을 축하하듯 종전의 소식이 마을을 달렸어요.

마왕군이 물러난 이후로 마을은 많이 달라졌어요. 죽음만이 가득했던 땅에 생명이 태어났죠.

사람들의 울음소리만 들리던 세상에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다 타버린 재처럼 푸석했던 땅이 산들산들 흔들리는 풀잎 밑으로 자취를 감췄어요.

무엇보다 변한 건 사람들이었어요.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그들의 얼굴에 피어난 행복이 보였으니까요.

내일만을 꿈꾸던 어두운 목소리들이 일 년 뒤에 피어날 꽃과 나무를 그리며 즐거워해요. 이제는 모두가 우리의 땅이 축복받았다고 입을 열었죠.


“저기··· 혹시 이 마을에······.”


옛 저주받은 땅 위에 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생겼어요.

더 이상 저주받은 땅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죠.


“계십니까?”

“···누구시죠?”

“제 이름은 이현. 프로텐시아 님의 어린 양들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입니다. 성녀님을 신전까지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반갑지 않은 손님도 찾아왔어요.

처음 들어보는 형식의 이름. 처음 보는 신전의 기사. 어른의 목소리인데도 어린 느낌이 나는 기사님은 첫 만남부터 이상한 말을 했어요.


“성녀님. 모시러 왔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대신전 소속 성기사.

신탁의 주인공인 성녀를 찾으러 왔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이곳에 성녀는 없었어요. 저와 제 가족이 전부였으니까요.

당연히 그의 존재가 부담되었어요. 인제 와서 말하자면 문전 박대했죠.


“집을 잘못 찾아오셨네요. 지금 집에는 부모님이 안 계세요. 그리고 기사님 앞에 있는 사람도 기사님이 찾는 분이 아니라 평범한 맹인이에요.”

“아닙니다.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성녀님이야말로 수신께서 교단을 일으키기 위해 내려주신 성인이십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사람을 헷갈렸네요. 저는 이 척박한 땅에서 의원 노릇을 하는 데 만족할 정도로 그릇이 작은 사람이에요. 기사님이 누구를 찾는지 모르겠지만 부디 조심히 돌아가도록 하세요.”

“하지만 성녀님. 제 신성이 말합니다. 지금 교단에서 필요하신 분은···”

“돌아가시라고요!”


이 척박한 땅에 걸음 와주신 기사님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대신전의 성기사님을 반기기는커녕 문을 닫고 걸어 잠갔으니까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때 저는 기사님을 배려할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심장이 뛰고 속이 울렁거렸죠. 기사님이 한 말이 무엇인지 마주한 순간부터 고개 돌리기 위해 필사적이었어요.

그가 말한 대로 우리의 신성이 운명을 알려 줬으니까요.

기사를 따라가야 한다는 직감이 제 몸을 옭아맸으니까요.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저는 담이 크지 못해요. 성녀라는 자리에 앉으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결국 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숨기기 위해서 마음 깊은 곳에 숨었어요.

부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문 앞에 기대어 있었죠.


“엄마. 그 사람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두 분께 제 이기적인 마음을 드러냈어요.

제 이기심에도 두 분은 꼭 안아주고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셨죠.

그날은 두 분의 사랑 안에서 밤을 보냈고, 새 아침이 금방 찾아왔어요.

기사님은 어제에 스쳐 가듯 말한 약속대로 집 앞에 서 있었죠.


“엄마··· 그 사람이 왔어요···.”

“쉿- 걱정하지 일리나.”


그때의 저는 정말로 비겁했네요. 제 일에서 도망쳐서 두 분께 기대기만 했으니까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저리 꺼져! 다시는 내 딸아이에게 찾아오지 마!”


기사님에게도 기대기만 했네요.

저희가 아무리 험하게 반응해도 기사님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요.

오늘 기사님이 떠났지만. 우리 가족은 안심하지 못했어요.

기사님은 내일 온다는 말을 남겼고 고작 며칠 머무를 사람 같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래도 옮길 때가 된 거 같아.”


어김없이 기사님이 왔다 간 여드레 밤.

아버지께서 결단을 내렸어요. 더 이 마을에서 시간을 끌었다가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거라 여겼기에 내린 판단이었죠.

그날 밤 우리는 마을을 벗어났어요. 비록 전쟁에 쫓기고 쫓겨서 다다른 마을이었지만, 이 몇 년간 정착한 시간은 마음 한편을 아리게 만들었답니다.




제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추천과 좋아요 잊지마세요-!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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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132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9 8 0 15쪽
154 131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6 9 0 15쪽
153 130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22 11 0 14쪽
152 129화 떠도는 이야기와 장사꾼 24.01.19 11 0 13쪽
151 128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7 12 0 11쪽
150 127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11 0 13쪽
149 126화 이름 없는 성녀 24.01.15 6 0 22쪽
148 125화 이름없는 성녀 24.01.10 6 0 14쪽
» 124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8 8 0 12쪽
146 123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3 10 0 16쪽
145 122화 이름 없는 성녀 24.01.01 8 0 13쪽
144 121화 이름 없는 성녀 23.12.29 10 0 14쪽
143 120화 여정 그리고 일행 23.12.27 7 0 17쪽
142 <2부> 119화 여정 그리고 일행 23.12.25 8 0 24쪽
141 118화 작별 23.12.13 6 0 22쪽
140 117화 재판 23.12.06 9 0 21쪽
139 116화 재판 23.11.30 10 0 20쪽
138 115화 재판 23.11.22 12 0 21쪽
137 114화 성녀 23.11.19 10 0 19쪽
136 113화 성녀 23.11.15 7 0 19쪽
135 112화 성녀 23.11.11 8 0 21쪽
134 111화 성녀 23.11.08 10 0 21쪽
133 110화 성녀 23.11.04 13 0 19쪽
132 109화 떨어진 과실 23.10.25 10 0 34쪽
131 108화 불신 23.10.21 8 0 25쪽
130 107화 불신 23.10.17 8 0 20쪽
129 106화 불신 23.10.14 12 0 25쪽
128 105화 불신 23.10.10 10 0 18쪽
127 104화 불신 23.10.07 9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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