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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 이야기

깊은 상흔의 잔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최근연재일 :
2023.02.28 15:54
연재수 :
18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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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9
추천수 :
478
글자수 :
747,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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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07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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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3화_ 진실(3)

DUMMY

카니엘은 그녀가 한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그녀가 신분 높은 귀족이거나, 아니면 일리오스 제국의 마법사 군단 출신이라 생각했기에 방금 들은 말은 정말 상상 밖의 것이었다.


“.. 네가 대륙의 공적? 5년 전에 처형당한?”


충격적인 사실에 카니엘은 그렇게 말을 더듬었고, 동시에 잡고 있던 그녀의 손 또한 놓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카니엘의 손이 떨어지자 순식간에 공포감에 휩쌓인 벨리안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아아.. 농담이지? 무슨 말도 안되는.. 대륙의 공적은 이미 처형당했는데?”


카니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가 어서 빨리 부정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벨리안느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카니엘의 불안한 마음은 더욱 커져갔다.


“이자벨... 아니.. 진짜 이름이 뭐든 제발 말 좀 해봐!”


불안한 마음은 두려움을 불렀고, 두려움은 이성을 마비시켰다.


때문에 카니엘은 저도 모르게 벨리안느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면서 큰 소리로 외쳤고, 벨리안느는 그 손길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카니엘이 이성을 되찾고 붙잡았던 손을 떼고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훔치고도 살아남아야 하는 소녀가 있었지.

죽을 고비를 몇 십번이나 넘기면서 비참하게 목숨을 연명하던 소녀는 5년 전, 결국 사형대에 오르게 되었어.

하지만 그 순간 세상에서 유일하게 소녀를 이해한 사람에 의해 새롭게 살 기회를 얻게 되었지. 그렇게해서 여태껏 살아온 소녀...

그 소녀가 바로 나야, 카니엘 내가 벨리안느 이얀이라고!

네 가족들...뿐만 아니라 대륙의 수많은 생명들의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이 바로 나란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땅을 내려보고 있던 벨리안느가 고개를 치켜들었고, 그 순간 카니엘은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큰 위안을 주었던 연갈색의 눈동자.

그랬던 그녀의 눈빛이 눈물에 희석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 움직임 이외 세상 모든 것이 멈춰버린듯 했다.


오직 모닥불의 일렁이는 불꽃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줬지만 두 사람 모두 얼어붙은 듯한 마법 같은 순간도 잠시.


“대륙의 공적.. 벨리안느 이얀?”


처음으로 카니엘 입에서 그녀의 본명과 동시에 수식어처럼 붙어다니는 그녀의 또다른 이름이 함께 불렸다.


그렇게 카니엘은 저도 모르게 눈앞의 존재가 자신의 가족을 간접적으로 죽인 사람으로 인식하였던 것이었다.


“미안해.. 카니엘... 정말로 미안해.”


그것을 깨달은 벨리안느는 나뭇잎 쌓인 바닥에 눈물을 후두둑 쏟아내며 속죄의 말을 해야했다.


그리고 다시금 이어진 긴 침묵.

누구도 함부로 먼저 입을 열 수가 없는 상황.

서로가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새삼 깨달으며, 그 관계가 틀어진 것에 슬퍼했지만 동시에 카니엘은 형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그 악몽.

그리고 무기력하게 형의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벌하듯 인형에게 복수하는 것만이 전부였던 과거의 그림자.


하지만 이자벨.. 아니, 벨리안느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그 과거의 그림자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냈다.


그렇게 분노와 절망, 그리고 연민과 애정, 그 모든 감정 끝에 벨리안느가 있음을 알아차린 카니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는 벨리안느를 잠시 내려보다 저도 모르게 옆에 세워져 있는 검을 움켜쥔 카니엘이었다. 그러자 익숙한 살의가 검을 쥔 손바닥을 타고 온 몸으로 전달되었고, 그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뒤로 주춤거렸다.


그러다 인형을 만났을 때처럼 폭주하여 그녀를 베어 버릴까 두려워졌고, 그렇게 카니엘은 도망치듯 벨리안느로부터 멀어져야했다.


/////


카니엘은 어느새 자신이 호숫가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조용히 들려오는 물결 소리와 그와 함께 실려온 바람이 얼굴을 휘감았으나, 그것뿐.


오후에 봤던 아름다운 풍경은 어둠에 묻혀 찾을 수 없었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하늘과 호수에 뜬, 멀어져버린 두 개의 달뿐이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자 카니엘은 호수가 모래에 털썩 주저앉았고, 그렇게 멍하니 심연과 마주하며 그보다 깊은 생각에 빠졌다.


대륙의 공적, 벨리안느 이얀.


카니엘에게 있어 그 존재는 무혼반란 이야기 서두에 나오는 역사속 인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때문에 인형에게 마법을 부여했다는 이해못할 책속의 설명처럼, 자신의 이해범위 밖의 사람으로만 생각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랬던 대륙의 공적이 이제 자신의 삶속에 녹아든 존재가 되었다.


때문에 더 이상 과거의 기준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고,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했지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고뇌에 빠져있길 수분.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고개를 재빨리 돌린 카니엘은, 마음 한켠의 기대와 달리 테일리아가 서 있는 것을 보게되었다.


“.... 다 들었어?”


카니엘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옆에 앉는 그녀에게 마음을 털어놓고자 했다.


“가서 위로를 해주는 거다.”


평소 때와는 다르게 사뭇 진지한 테일리아의 목소리.


“.....그래야 하나? 잘 모르겠는데..”


“인간 세상에서 무혼반란이 그렇게 큰 사건이었나? 우리 종족도 그 비극에 대해서 듣기는 했었다만..”


“대륙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지. 사망자는 헤아릴 수도 없고... 내 가족을 포함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어쨌든 그렇다고 이자벨... 아니 아무튼, 그녀를 내버려 두면 안되는 것이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테일리아가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자 갑갑한 나머지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신경질을 낸 카니엘이었다.


그러나 테일리아는 평소와 달리 그의 행동에 발끈하지 않고 굉장히 차분한 태도으로 그의 마음이 정리되길 기다렸다.


“사실...”


그렇게 호수와 하늘에 뜬 달이 원래 있던 곳에서 꽤 멀어졌을 무렵, 어느정도 생각이 정리된 카니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가족 일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가족을 죽인 것이 무엇인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봤고, 너무나 잘 알던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벨리안느를 용서해도 될까?

그녀가 직접 죽인 것이 아니어도 정말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일까?”


“.... 일단 벨을 위로해주는 것이다. 내일부터 따로 다닐 것도 아니고..”


“네가 대신 해주겠어? 지금 당장은...”


“내가 감당할 수 없어 칼을 찾은 것이다. 칼이 떠나자마자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테일리아의 말을 듣자 카니엘은 울컥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입장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쉽사리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정말 일순간이긴 했으나, 그녀를 바라보며 검을 잡았을 때 느낀 살의가 되살아날까 두려웠다.


“카니엘. 그녀의 이름이 이자벨이든 벨리안느든 난 계속 벨이라 부를 것이다. 표기법이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발음은 같으니 상관없겠지.”


“마음대로 해..”


말장난처럼 보이는 호칭 이야기가 뜬금없이 나오자, 시큰둥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고, 한편으로 그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려한 자신이 한심스러워지던 찰나.


“벨이 어떤 이름이 불렸던, 결국 내가 어떻게 부를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


그 뜻밖의 말에 카니엘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륙의 공적이라 칭하던 사람들과 책들에서 그녀를 어떻게 묘사했던가?

무뚝뚝하지만 감정을 내비칠땐 숨김이 없고, 특히 먹을 것 앞에서 진심인 그녀의 이야기가 단 한줄이라도 써 있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적어도 자신은‘대륙의 공적’이란 말을 사용해선 안된다고 판단했으나, 그럼에도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은 여전했다.


“그럼 내가 일단 먼저 돌아갈테니 칼도 곧바로 따라오는 것이다. 지금 제정신 아닐 벨을 혼자두는 것만큼 위험한....”


테일리아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그리고 카니엘 또한 주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 뭐지?”


테일리아에게 확인차 질문은 던진 카니엘은 곧 바로 경직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을 꿰뚫고 들려오는 길고 날카로운 뿔피리 소리.

그리고 이어서 밤하늘 위로 떠오른 흰색의 신호탄.


적국의 신호탄 체계를 세세히 외우고 있었기에 그 새하얀 불빛을 만들어낸 정체 파악한 카니엘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길리아스.....”


이어서 새삼스레 떠오른 흰색 신호탄의 의미.


‘적 발견’을 뜻하는 그 불빛이 숙영지 근처에서 피어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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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5) 21.10.22 42 0 9쪽
154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4) 21.09.28 29 0 10쪽
153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3) 21.09.16 30 0 11쪽
152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2) 21.09.10 29 0 11쪽
151 [3권] 12장 합수(合水) 2화_ 마력의 눈물(1) 21.09.06 32 0 9쪽
150 [3권] 12장 합수(合水) 1화_ 구심력 (5) 21.09.01 36 0 11쪽
149 [3권] 12장 합수(合水) 1화_ 구심력 (4) 21.08.27 31 0 8쪽
148 [3권] 12장 합수(合水) 1화_ 구심력 (3) 21.08.27 40 0 9쪽
147 [3권] 12장 합수(合水) 1화_ 구심력 (2) 21.08.13 33 0 9쪽
146 [3권] 12장 합수(合水) 1화_ 구심력 (1) 21.08.09 31 0 9쪽
145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3화_ 진실(9) 21.07.30 35 0 15쪽
144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3화_ 진실(8) 21.07.26 25 0 9쪽
143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3화_ 진실(7) 21.07.21 28 0 11쪽
142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3화_ 진실(6) 21.07.16 28 0 8쪽
141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3화_ 진실(5) 21.07.14 32 0 9쪽
140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3화_ 진실(4) 21.07.14 26 0 8쪽
»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3화_ 진실(3) 21.07.07 28 0 9쪽
138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3화_ 진실(2) 21.07.05 30 0 10쪽
137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3화_ 진실(1) 21.06.30 34 0 10쪽
136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2화_ 고해(5) 21.06.24 34 0 8쪽
135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2화_ 고해(4) 21.06.15 30 0 11쪽
134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2화_ 고해(3) 21.06.11 31 0 8쪽
133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2화_ 고해(2) 21.06.11 26 0 8쪽
132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2화_ 고해(1) 21.06.10 29 0 7쪽
131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1화 과거의 유물 (5) 21.06.09 31 0 10쪽
130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1화 과거의 유물 (4) 21.06.08 32 0 8쪽
129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1화 과거의 유물 (3) 21.06.07 30 0 9쪽
128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1화 과거의 유물 (2) 21.06.04 28 1 9쪽
127 [3권] 11장. 시초의 마을_ 1화 과거의 유물 (1) 21.06.02 33 0 11쪽
126 [3권] 10장. 미지(未知)에서_ 3화_ 변화의 틀(2) 21.05.31 33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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