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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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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최근연재일 :
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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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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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은인께 드릴 것은(3)

DUMMY

"아까 전에 큰 소리가 들리더니, 바깥에 다시 소란이 일더구나. 그건 무슨 일이지?"

"별 거 아닙니다. 그저, 저와 얽혀진 골치 아픈 문제를 하나 풀었을 뿐이에요."


현우는 가지고 온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이야기했다.

키노시타 가의 선조가 분한 늑대의 혼령들은 설원을 지배하는 호랑이에 의해 단박에 목숨이 끊어졌다.

곧바로 현우와 그의 정령을 둘러싼 하얀 공간은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고, 마법사 앞에 나타난 것은 시들어져 거무튀튀해진 벚나무 가지 뿐이었다.

나뭇가지를 물고 있던 이상한 하얀색의 가면 또한 가운데를 기점으로 금이 갔으며, 두 개의 뿔 또한 그 중 하나가 부러진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윽고 종 선생에 의해 달려온 타다요시에게 현우는 일의 전말을 설명했다. 그의 눈은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와 다르게 좀 더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앞을 가리며 그의 정신을 희롱하던 분홍 천이 사라져서일까, 타다요시는 사쿠라가 묘사했던 가주 이전의 삶과 닳은 모습을 보이며, 조금은 후련한 듯 현우에게 답했다.


"어쨌든 이걸로 제가 딸에게 몹쓸 꼴을 더 보이진 않게 되었군요. 당신이 정말로, 계속 전해지던 귀인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전 그... 성이 아닌 걸요."

"뭐, 가문의 어르신들이 그토록 울부짖던 그 핏줄은 이미 죽고 없을지도 모르죠. 당장에 선조 분들의 일기에서 보면, 왕가 또한 전멸했다고 하던데요. 그나마 이렇게 다른 대륙으로 건너와 살게 된 것도 기적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저쪽에도 여러 나라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미쳤다. 여전히 어려우면서도 이따금씩 호기심이 끌리는 주제이기도 했다. 현우 또한 지금보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아들임에도 왜 모습이 이렇게 다른가 하는 데에서 큰 의심을 가진 바가 있었으니.

결국 어머니에게 물어볼 염두는 나지 않아 마을의 약제사인 마그누스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고, 현우는 그의 아비 쪽이 바다 건너 온 자들의 핏줄이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복잡하고도 기구한 인생 이야기입니다."

"그건 그렇고, 사실 마법사 님을 손님으로 모신 건 맞으나, 어찌 보면 저희 저택의 보물에 폐를 끼친 것이 되겠군요. 이것을 그냥 묻고 가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보이는 바만 놓고 보자면 타다요시의 말이 타당했다. 남은 사비라도 털어야 하는가 싶어 현우는 애꿎은 손목만 긁적거릴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행히 키노시타 가문의 가주는 단순한 말장난이었다며 에두르는 등 그 밖에도 많은 사건들이 적잖아 있었다.


"그렇게 된 것이로군. 아직 거동은 이렇게 불편해도 귀는 여전히 열고 있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데 잘 해결되었나 보구나."


귀가 긴 젊은 사내는 이불을 들쳐 현우에게 다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시일이 꽤 지났는데도 여전히 푸르뎅뎅한 피부, 뼈까지는 아니어도 확실히 근육은 많이 상한 것으로 보였다.

마법사는 품에서 액체가 담긴 병을 꺼냈다. 분명히 뚜껑을 닫아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안은 금새 은은한 들꽃 냄새로 가득 찼다.


"이거라도 드시면 확실히 나아질 겁니다. 아직 약효는 남아있을 거에요."


현우가 내민 작은 병을 보고 황 노인이 물었다. 마법사는 예전에 어렵사리 구했던 회복 물약이라며, 마셔도 괜찮고 상처에 발라도 효과가 있을 거라 답했다.

과연,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하듯 노인은 뱃속에서부터 싱그러운 느낌이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척 보기에도 고가의 것이 분명했다.


"이런 귀중한 것을 내게 써도 되겠나?"

"이미 한번 뚜껑을 딴 이상 몇 년이고 보관할 수는 없었겠죠. 나중에 변질되었을지도 모르고요."


사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현우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설마 왕이 서랍에서 직접 꺼내 준 것인데 벌써 효능이 떨어졌을 리가. 아직 반년도 지나지 않았을 뿐더러, 현우는 마법물약학 실습 당시에 배웠던 것을 떠올리면 답이 보였다.


고급 포션의 경우에는 바탕이 되는 액체는 기본적으로 성수를 사용한다. 현우가 알기로 성수가 세월에 변질되었단 소리는 단 한번도 듣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가 받은 것은 왕에게 진상된 것. 이 나라의 주인이자 모든 왕국민의 위에서 그들을 지키는 가장 큰 방패였다. 그에게 바쳐지는 것은 어느 하나 최상급의 품질이 아닌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그 사실을 마법사가 입 바깥으로 내뱉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현우는 그저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았다. 그 미소에 황규는 허탈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나저나 세 번째 조건까지 지킬 줄은 몰랐다. 원래는 내 입으로 말한 바 사장된 조건이라 했거늘, 마법사라 그런가 자네는 이미 일이 이렇게 될 줄을 짐작하고 있던 겐가?"

"설마요. 제가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면 당장에 대학을 그만두고 어디 신전에 들어가 예언자 일이나 하고 있었겠죠. 미래를 안다 하여 노인께서는 종이 만드는 일을 그만 두실 생각이십니까?"

"전혀. 내가 실언을 했군. 미안하네. 아무튼, 협회를 물리쳐달라는 요구사항을 들어준 것에 대해서는 고맙구만."

"별 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황 노인은 찬찬히 현우와 시선을 맞추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진한 피 덕분에 쇠심줄마냥 질기고도 긴 삶을 살아오면서, 노인은 아무리 감정을 숨기는 데 유능한 자라 할지라도 마음 속 깊이 숨어있는 것을 끝까지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눈은 예로부터 마음의 창이라 불렸던 부위였다.

탄탄한 피부거죽이나 생생한 머리카락과 다르게, 황 노인의 눈은 수많은 풍파에 깎여나가며 그 자체로 많은 시간이 어린 확대경이 되었다.

그는 굳이 안경을 쓰지 않아도 원한다면 마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숲의 나무, 그 위에서 지저귀는 새 또한 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제 아무리 술수에 능한 마법사라 할지라도 진심인지 아닌지 정도는.


"자네는 거의 항상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고 있군."


확인이 가능했다.


"제가 먼저 상대를 믿지 않으면, 누가 저를 믿어주겠습니까? 제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재능은 오지 않아서요. 누가 봐도 티가 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자네를 믿어주지. 첫 번째 조건과 세 번째 조건, 자네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한 것으로 지겠어. 그렇다면 마지막 조건이자 가장 중요한 게 남는군."


현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가지고 온 보따리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아마 원서를 가지고 왔어도 황 노인은 분명히 그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곳 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의 바로 직계 자손이 아니던가. 그것도 아들이라는. 겉 나이는 현우와 비슷하게 보여도 황 노인은 분명히 명연의 할머니, 그 이상으로 동쪽 대륙의 문자에 해박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귀중한 책을 함부로 가져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책장에 있던 것이라며 그의 어머니가 조심스레 반대를 표하기도 했기에, 현우가 선택했던 것은 종이에 그것을 옮겨서 적는 방법이었다.


"그게 자네가 가지고 온 두 번째 조건에 대한 해답인가?"

"네. 혹시 몰라 두 가지 경우를 준비했습니다."


현우가 가지고 온 것은 두 개의 두루마리였다. 하나는 그가 찾아낸 원서 그대로의 글씨를 그리듯이 베껴서 가지고 온 것, 다른 하나는 명연의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왕국의 문자로 풀어 쓴 해독본이었다.


"어디, 두 개를 모두 내놔 보거라. 몸은 다쳤어도 머리는 여전히 쓸만하니까, 아직도 아버지께서 내게 한자를 가르쳐주신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오른다."


두루마리의 초반을 훑어보던 귀가 긴 사내가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뽕나무를 쓰는 것은 우리도 알아봤던 것이다. 레이야마에 있던 이들이 예전에는 뽕나무로 나무를 만들기도 했다 하더군. 마침 이곳 대륙에 자생하는 것도 있었고, 씨앗을 가지고 온 이들이 새로이 싹을 틔워낸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방법으로선 글렀어."

"왜 그렇습니까?"

"뽕나무를 베어 종이로 만드는 것보다, 그 잎으로 누에를 길러 실을 뽑아내는 것이 훨씬 더 비싸게 먹히니까 그렇지."


아, 현우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설마 다른 용도로도 사용하고 있을 줄은.

그러고 보니 명연이 가지고 있던 직물 또한 그런 종류의 것들로 만들어진 것. 이미 금화를 벌 수 있는 것을 굳이 은화를 벌 것으로 바꿀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것 뿐이면 조금 실망스러울 지도 모른다. 뽕나무가 레이야마 주변에 없는 건 아니지만, 종이의 원료로 사용하기엔 부담스럽다."

"아뇨.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거면 만족하실 지도 몰라요."


마법사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사뭇 그 태도가 견실하기 그지없어, 황규는 마법사를 믿고 다시 두루마리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현우가 말했듯이, 자신 또한 그를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큰 결실로 이어졌다.


"귀리(Oats)로... 종이를 만든다라."

"조선의 북쪽에는 국경을 침범하는 야만인들이 있어, 왕께서 그들을 파악하고자 사람을 보내 정탐을 명했다. 이 장 모(某)도 그 중 한 명이었으니, 이곳에서 보이는 여러 풍습이 있어 그 중 도움이 될만한 것을 이곳에 적는다."

"...한자도 읽을 줄 알더냐."

"아비가 넌지시 알려준 겁니다."


황 노인은 두루마리의 밑으로 내려가는 눈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야기였기에. 그간 했던 고생들이 그의 등을 떠밀었고, 이내 종이를 만드는 노인은 두루마리를 덮고 말했다.


"확실히 재미있는 사실이다. 귀리면 곡물로 재배하기도 하니 그 양이 부족하진 않을 터에, 껍질만 어떻게 모은다고 하면 비용이 크게 들진 않겠구나."

"이걸로 모든 원료를 대체할 수 없다는 건 날아오면서 생각해보니 알겠더군요. 그래도."

"부족한 부분 정도는 채울 수 있을 게다. 넝마주이들이 울상을 지을 수도 있겠군. 물론 시행착오는 겪어봐야 그 난이도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나, 이미 숱한 도전과 실패를 겪은 종이 공장 사람들이다. 이 정도는 무리가 아니다."

"가장 재미있는 사실은 따로 있습니다."

"하, 말장난 말인가?"


현우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두루마리의 끝을 가리켰다.


"황지(黃紙). 아마 귀리의 색깔 때문에 누런 종이라는 이름이 붙었겠지만, 다르게 보면 어르신의 종이(Hwang's paper)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요?"


* * *


노인은 흔쾌히 두 번째 조건까지 만족했노라 이야기했고, 현우는 기쁜 마음으로 마드라드에 종이를 공급하는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도중 왕실의 영토에서 나오는 특산품이었기에 왕실과의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마드라드 또한 왕국의 지원을 받는 곳이기에 별 탈은 없을 거라 후작은 말했다. 혹여 마찰이 빚어지지 않도록 하인츠 후작은 현우에게 거래의 처리를 약속하였다.


그는 이곳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인츠 기사단에 넣으면 좋을 법한 인재도 발견하기도 했고, 비스훈트 남작을 왕실 지지파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계산이 끝난 까닭이었다.

잠시간의 유희로 많은 이익을 번 데다가, 돌아갈 때도 다시 현우가 그를 안고 하늘을 날기로 약속했으니 염려가 없었다. 얼마나 기꺼운 일이겠는가.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새로이 발견된 종이의 제작 방법을 왕국과 왕실에 공유하며 생산량 중 일부를 하인츠 후작가에도 공급해줄 것을 현우와 황 노인에게 약속 받은 데다가.


"자네가 준 팔찌는 바로 왕실 마법병단과 아드리안에게 보내도록 하지. 나라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집단이니, 대비해두는 게 당연하다. 어디서 이런 것을 찾았는지, 그리고 이걸로 나와 거래를 하고자 한 이유는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하마."


현우가 아껴두던 팔찌를 후작에게 건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후작이 여기까지 찾아올 필요도, 그리고 애초에 군부대신이나 되는 자가 일개 마법사, 그것도 아직 마드라드에 입학한지 일년도 되지 않은 신입을 만나줄 리가 없었으리라.


모든 것이 일단락되었다. 통신 마법을 모르는 탓에, 현우는 마드라드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지 못했다.

물론 미네바에서 이온으로 공간 이동을 사용할 당시, 잠시 마드라드에 들리는 것도 고려를 해본 사항이었다. 신지의 일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을 꾹 참고 몸을 던져서 하늘을 가로질렀기에 지금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았던가.


에블린도, 그리고 루크도 모두 현우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진 마법사였다. 애초에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사람을 모아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고, 한 번 믿기로 했으면 끝까지 믿는 그의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현우는 자신에게 마련된 방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스르륵.


"누구세요?"

"저에요, 컬쉬 언더우드."


키노시타 사쿠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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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197화. 폭풍은 두 번 몰아치나니(3) 20.03.27 31 0 13쪽
196 196화. 폭풍은 두 번 몰아치나니(2) +2 20.03.26 32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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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194화. 밝혀지는 정체들(2) 20.03.24 27 0 13쪽
193 193화. 밝혀지는 정체들(1) 20.03.23 31 0 14쪽
192 192화. 네거티브, 네거티브(2) 20.03.20 41 0 13쪽
191 191화. 네거티브, 네거티브(1) 20.03.18 38 0 13쪽
190 190화. 드러나는 결과(2) 20.03.17 34 0 14쪽
189 189화. 드러나는 결과(1) 20.03.16 39 0 14쪽
188 188화. 이합집산(3) 20.03.13 36 0 14쪽
187 187화. 이합집산(2) 20.03.12 33 0 13쪽
186 186화. 이합집산(1) 20.03.11 34 0 14쪽
185 185화. 당신을 떨어뜨리려고(2) 20.03.10 36 0 13쪽
184 184화. 당신을 떨어뜨리려고(1) 20.03.09 34 0 14쪽
183 183화. 마탑정쟁의 시작(2) 20.03.06 37 0 14쪽
182 182화. 마탑정쟁의 시작(1) 20.03.05 41 0 13쪽
181 181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3) 20.03.04 31 0 13쪽
180 180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2) 20.03.03 46 0 13쪽
179 179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1) 20.03.02 37 0 14쪽
178 178화. 은인께 드릴 것은(4) 20.02.28 36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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