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대형수상함 님의 서재입니다.

대한제국 전함이 일제를 찢음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새글

대형수상함
작품등록일 :
2024.07.29 13:23
최근연재일 :
2024.09.19 19:00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710,125
추천수 :
23,778
글자수 :
377,776

작성
24.08.11 19:00
조회
12,663
추천
412
글자
24쪽

폭풍 속으로 (2)

DUMMY

이순신함의 사관실.


거친 풍랑을 헤치느라 흔들리는 책상 사이로 수많은 장교들이 모여 앉았다.


전투기 통제관 임승철 소령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상석에 가장 가까이 앉은 항해장이 좌중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들 모였습니까?”

“2등 포술장은?”

“지금 함교 당직이십니다.”

“부장님은 근무 중이시고?”

“예, 장갑 함교에 계십니다.”


작전 중에 주요 장교들을 죄다 사관실에 부르다니.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비록 공습도 끝나고 폭풍으로 함대도 숨겼지만 이순신함은 엄연히 작전 행동 중이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살얼음판 같은 상황.

그런 와중에 주요 장교를 전부 불러 모으다니.


함장 성격상 그냥 불렀을 리는 없다.

필시 무언가 중요한 공지가 있다는 뜻인데···.


대체 얼마나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당연한 결과입니다.”


승철이 불안한 기색에 몸서리치는 사이.


안경을 고쳐 쓴 작전관이 날카로운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작전 종료 후 귀항을 논의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마치 혼자서 진실을 통달한 양 고개를 주억거리는 작전관.


늘 그렇듯 주변 장교들이 표정을 찌푸리고 포술장이 화난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간단한 논리입니다. 지휘부 소멸에 함대의 피해는 벌써 구축함 2척 상실. 공중전의 결과로 보듯 항공대의 피해도 만만치 않으니 작전을 지속할 수 없는 거지요.”


자기 직속 선배 앞에서도 잘난 듯 떠드는 꼴을 보고 승철은 왜 저 인간이 여태껏 소령에서 진급을 못 했는지 알 거 같았다.


“그래서? 기껏 나와 놓고선 얻어터지기만 하고 돌아가자고? 선전포고 없이 공격당한 것도 분해 죽겠는데 이게 말이 되나!”

“마냥 틀린 말은 아닙니다. 통제관, 공중전의 결과가 어찌 되었던가?”


항해장의 물음에 승철은 입을 열었다.


“왜놈들이 신형 전투기를 투입한 모양인데, 그게 성능이 좀···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사실 이마저도 많이 순화한 표현.

실제로는 거의 압도적이다.


아직도 패닉에 빠진 편대장들의 비명이 무전망으로 울려 퍼지는 게 생생히 떠오른다.


일방적으로 사냥당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뒤늦게 전투에 참가한 그 조종사 한 명을 제외하고선.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순 없소!”


쾅―!


책상을 내리친 장교가 좌중의 시선을 모으며 열변을 토했다.


흰 머리가 지긋한 노장교, 기관장.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장교들이 또 시작이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30년 만의 기회거늘! 지금이야말로 갑진년의 원수를 갚고 이 땅의 도리를 바로잡을 기회가 아니겠소!”

“기관장님, 아무리 이순신함이라도 전력 차가 있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필사즉생의 정신으로 가야지! 이런 상황일수록 제장들은 더더욱 충무공을 본받아···.”

“400년 전 위인을 들먹인다고 해서 우리의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닙니다. 여기 뭐 귀선이라도 끌고 왔습니까?”

“작전관! 그 말본새가 그게 뭔가?!”


논쟁이 격해지는 사관실.


한숨을 내쉰 항해장이 말석에서 눈치를 살피던 통신관에게 시선을 돌린다.


“통신관, 일본 애들이 계속 우리 쫓는 중이라 했지?”

“예? 아, 예··· 그, 1함대인가 하는 애들도 오는 거 같고···1항함도 계속 남아 있는 거 같습니다만···.”

“1함대라면 나가토와 무츠겠군. 여러분, 일본 최강의 전함 두 척이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 순간,

좌중이 일제히 침묵했다.


이순신함에 비하면 구식이라도 41cm 주포를 8문이나 장비한 두 거함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물론 이순신함의 전투력이라면 이길 수 있지만 그들에 더해 이전처럼 공습까지 당하면 승산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시정이 안 좋아서야 근접전을 강요받을 텐데, 제아무리 이순신함이라도 1만 미터 이내에서 41cm 포를 맞으면 장갑이 뚫리고 말 겁니다.”

“레이더로 보고 때리면 돼!”

“선배님, 그거 탄착 관측하려면 결국 탐조등이든 관측함이든 써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풍랑이 심해서야 결국 거기서 거기라고 봅니다.”


냉철한 지적에 호전적인 포술장도 결국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항해장, 그래서 도망가자는 말이야? 저 망할 쪽바리 새끼들이 지금 우리 꽁무니 쫓는데. 얻어터지기만 하고 이대로 내빼자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함장님의 결단을 기다려야겠지요.”

“그래, 결단 말이지.”


한 목소리가 끼어들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사관실 대문 너머,


팔짱을 끼고 선 함장이 문가에 몸을 기댄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순신함 함장,

정운룡이다.


“귀관들의 걱정은 이해한다. 솔직히 좋은 상황은 아니지. 지휘부는 전멸. 함대 기함은 우리가 떠맡았고 전력은 벌써 줄어들었어. 반면 상대는 건재하지.”


긴장한 듯 침묵하는 사관실.


하지만 그는 여유롭게 뒷짐까지 진 채 걸어오며 말했다.


“이 상태로 연합함대 거의 전체를 상대하라고 하면 미친 짓인 게 분명하지.”


탁―

책상 위에 한 손을 올린 채 장교들을 바라본다.


모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길 수 있다.”


이어지는 한마디에 그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현재 본 함을 상대하기 위해 일본 해군은 가용 가능한 한 거의 모든 주력함을 이끌고 나왔다. 정면 승부라면 승산은 없지만, 반대로 적의 주요 표적을 각개격파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지.”


자신 있게 선언한 함장은 사관실 한가운데를 걸어가 작전 지도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단호한 손으로 동중국해의 해로를 가리켰다.


“등화관제와 전파 침묵을 통한 극도의 은밀 기동으로 태풍을 돌파한다. 함대의 기동력은 아직 건재하니 적의 저속 전함은 충분히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파도를 받았는지 이순신함이 흔들린다.


바닥이 기울었지만 함장은 마치 갑판에 발을 붙인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적의 주력 함대를 따돌리고 나면 이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적 표적을 공략할 것이다.”


오키나와를 지나 남중국해에 가까운 쪽을 가리킨 함장.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고―


“제1항공함대. 우리는 일본 항공모함을 사냥한다.”


이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무리입니다. 적의 항공모함은 분명 항공 작전의 곤란함을 이유로 물러났을 겁니다. 속도도 빠르고 거리도 먼 적을 어느 세월에 추적하여 격파하겠습니까?”

“연합함대가 나가토와 무츠만으로 이순신함에 대항할 것이라 보나? 46cm 함포를 장비한 이 세계 최강의 거함을?”


함장의 지적에 항해장은 입을 다물었다.


“저시정 상황이라도 놈들의 1급 전력이자 기함을 위험에 빠트리지는 않을 거야. 당연히 반드시 승리하도록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있다고 봐야 해. 그게 제1항공함대겠지.”

“그렇다고 해도 기상 상태가 이렇다면 항모는 후방에 위치할 겁니다. 제아무리 발진 태세를 유지한다고 해도 이런 해역 한가운데 있을 리가···.”

“태풍의 바깥으로 빠져나가겠지. 그렇다면 진로를 예측하기도 쉬운 게 아닌가?”


그렇게 대꾸하곤 함장은 전혀 예상 못 한 인물을 불렀다.


“작전관. 통신관의 무전 내용을 토대로 적 함대의 진로를 예측할 수 있나? 대략적인 방향이라도 좋네.”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옮겨간다.


당황한 듯 안경을 고쳐 쓰는 작전관. 그도 자기를 지목할 줄은 몰랐는지 헛기침을 하곤 말을 잇는다.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가능하다는 말이군. 좋아.”


함장의 대답을 들으며 승철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 바로 통신관과 작업에 들어가게.”

“알겠습니다.”

“어, 예?”


담담히 자리를 나서는 작전관.

얼 타던 통신관은 뒤늦게 눈치를 보곤 작전관을 따라갔다.


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태도.

기분 나쁘지만 묘하게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것도 지휘관의 덕목인가?


“포술장. 30km 거리에서 적 항공모함을 2~3번의 사격 안에 맞힐 수 있나? 반드시 초전에 적의 갑판을 타격해야 하네.”

“한 번에라도 맞히겠습니다!”


작전관과 달리 자신만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포술장.


“기관장, 교전 시 최대한 과부하 상태로 함을 운용할 생각이네. 가능하겠나?”

“임금과 국모를 시해한 흉적을 토벌하는 대업을 앞두고, 신하된 자가 어찌 제 몸을 돌볼 수가 있소이까? 소장의 목숨과 맞바꾸더라도 반드시 명을 이해하겠소이다!”


이쪽도 포술장과 비슷한 과.


마지막으로 함장의 눈은 항해장을 향했다.


“항해장.”

“예.”


별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마주칠 뿐.

무슨 말을 하려나 궁금해지려던 차.


“부탁하네.”

“···함장님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눈을 감은 항해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모두를 돌아본 함장이 작전 지도를 등지고 선언했다.


“지금부터 전 함대에 알린다. 제13기동부대는 레이더를 비롯한 모든 전파 방출을 금하고 오로지 필수적인 수기와 등화만 사용하여 적의 탐지를 피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작전.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태풍 속에서 함대를 찾는 건 매우 어렵지만, 들키게 되면 꼼짝없이 근접전이다. 그리되면 대한제국 유일의 기동부대가 한 번에 전멸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할 수 있을까?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았다.


해내야만 한다는 걸.


“함장님. 좌표 계산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

사관실 문을 열고 작전관과 통신관이 돌아왔다.


그새 계산을 마쳤다고?


승철은 눈을 휘동그래 뜬 채 바라봤지만 함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히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대략적으로 이 부근입니다만, 예상대로라면 중간에 적의 유력한 수상 함대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보고서를 본 항해장이 지도 위에 선을 긋는다.


통신 감청과 주요 항로, 아군 구축함의 마지막 위치 보고 등을 기반으로 한 예상 경로.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일본 주력 제1함대.

최단 경로로 내달릴 경우, 높은 확률로 그들과 마주친다.


지도를 보던 항해장이 손을 뻗는다.


“우회를 위해서는 이쪽 항로로 가야···.”

“아니, 돌파한다.”


그러나 함장은 고개를 저었다.


“전 함대에 기함의 지시대로 행동하도록 전해주게.”


이어지는 함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승철은 다시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동중국해 해상.

일본 해군 제1함대 기함 ‘나가토’.


불탑처럼 솟은 함교, 통칭 ‘파고다마스트’의 꼭대기.


제1함교에 선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먹구름 낀 바다 위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시정은 밤부터 새벽까지 큰 차이가 없었다.


어두운 밤바다에선 제아무리 큰 거함이라도 등화를 켜지 않으면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불을 켜더라도 그 불빛만 보일 뿐. 함선의 모습은 새까만 도화지마냥 배경에 물들어 흐리게조차 보이지 않는다.


야간 시력을 연마한 일본 해군의 견시원들도 이렇게 풍랑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적을 발견하는 건 매우 어렵다.


“무전 신호 탐지되는 건 없나?”

“예. 완전히 조용합니다.”

“무전 침묵으로 숨어서 가나 보군.”


참모장의 대답에 한숨을 쉬는 야마모토.


하필 이럴 때에 태풍이라니.

운도 지지리 없는 경우다.


적 항공대도 격멸했고 호위대에도 피해를 줬다.

앞으로 한 번의 공습이면 무조건 발을 묶을 수 있었는데.


내심 분을 삼킨 제독은 이내 그 감정을 숨기고 함대에 명령했다.


“함대, 단횡진으로. 수색 범위를 넓힌다.”


단횡진은 함대가 뱃머리를 양옆으로 나란히 늘어선 진형.


마치 전열보병처럼 일렬로 전진하는 방법이다.


함대 전체의 수색 범위는 넓어지지만 함선의 앞쪽에 있는 무장밖에 쓸 수 없어 화력이 줄어든다.


“제독, 그러다 적을 마주치면 불리한 진형으로 싸울 수도 있습니다.”

“수적으로는 우리 연합함대가 우세하다.”


제1함대에 소속된 전함은 나가토, 무츠 외에도 제2전대의 전함 이세, 휴우가, 거기에 구식이지만 14인치(356mm)포를 12문 장비한 후소와 야마시로까지.


총합 6척이다.

반면 적 전함이 공격할 수 있는 전함은 한 번에 하나뿐.


제아무리 46cm 포라도 포격만으로 전함을 일격에 격침하는 건 탄약고 유폭이 아니면 매우 어렵다.


1~2척 손해를 각오하고 달려들면 승리는 어렵지 않으리.


화력이 부족한 건 상관없다. 무력화만 시키면 오히려 좋다. 무엇을 위해 그 배의 함명을 미리 정해두었겠는가?


오히려 지금 중요한 건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가 아니었다.


저 이순신함을 따라잡을 수 있느냐였다.


“적 함대라면 필리핀해 방면으로 빠져나갈 생각을 하겠지.”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해군성이 첩보로 입수한 당초 작전 계획을 떠올려보면 적 함대는 태평양의 통상파괴전을 노릴 것이다. 아니면 북상하여 본국으로 후퇴하든가.


중국 영해로 도망치는 방법도 있지만 그쪽에는 대만 주둔군이 기다리고 있다. 대만에는 아직 해군항공대가 건재하다.


필리핀 공략 작전에 상당한 역량을 투입했다고 해도, 여전히 수많은 항공기가 남아있거늘.


1차 공습에서 항공기의 위력을 실감한 적 함대라면 함부로 대만 근처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구모 기동부대는? 아직도 남중국해 방면으로 피난 중인가?”

“예, 그것이··· 태풍이 심하여 비전투손실을 염려하여 일시적으로 이탈한다고···.”

“대만에서 기다리면 될 것을···.”

“풍랑이 심한 해역에 함대를 묶어두는 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게 아닐는지요?”


야마모토는 불편한 듯 눈을 찌푸렸다.


황국의 흥망이 이 초전의 승리에 달려있거늘.

감투정신이 부족하다.


그 연합함대 사령장관마저도 기함을 이끌고 최선두에 나서는데. 일본 최강의 항모 기동부대를 이끄는 자가 어찌 이리도 소극적으로 행동하는가?


태풍만 아니었어도 그는 1항함을 앞세워 선두를 정찰하고 이순신함의 발을 묶었을 것이다.


거기에 운이 좋으면 격침까지 노려봤겠지만.


저 고리타분한 수뢰전의 명수는 그 절호의 기회를 내팽개쳤다.


물론 태풍 속에서 항공 작전이 가능하다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으리라. 허나 야마모토는 내심 그가 총애하는 항공파 제독, 오자와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항공파 제독들이 바라고 바라던 항공모함 부대의 지휘관 자리거늘. 고작 연공서열 때문에 저 문외한 제독이 꿰차고 있다는 게 그저 마음에 안 들 뿐이었다.


애당초 오자와였으면 1차 공습에서 확실히 이순신의 숨통을···.


“제독! 1수전에서 긴급 보고입니다!”


그 순간,


나구모에 대한 원한의 서 팔만대장경을 작성하던 야마모토의 잡념이 흩어졌다.


이어지는 통신관의 보고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좌현 220에서 250 사이, 거리 약 1만 이상! 미상의 선박 다수 발견!”

“적 함대인가?”

“이 날씨에 관측이라니. 역시 수뢰전대 견시원입니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참모장.


일본 해군 견시원들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깜깜한 한밤중에도 적함을 발견한 정도로 단련되었다.


물론 대한제국 해군 따위의 야간 기습이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 훗날 서구 열강과의 결전에 대비한 안배였다.


듣기로는 대한제국 해군의 견시들도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라 하던데.


그래도 내심 참모장은 일본 해군이 한 수 위일 거라고 생각했다.


“좌현 220이라 했나?”

“예, 아마 저쪽입니다.”


쌍안경을 들고 좌현의 수평선을 바라보는 지휘부 인원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저 멀리 등화처럼 보이는 게 반짝거렸다.


“알림! 선박 등화 다수 관측!”

“등화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야마모토.

다시금 의문의 불빛 무리를 자세히 바라보는 제독.


그리고···.


“이봐, 저건 어선이잖나.”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수색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야마모토는 실망한 얼굴로 쌍안경을 내렸다.


수평선상에 띠를 이루며 이어진 낮은 등화.

필시 어망을 거두던 중 태풍에 휘말린 이들이겠지.


태평양의 어선은 정말 흔하게 보이는 NPC 같은 존재였다.


전시에 웬 어업이냐 싶지만 저들 중에는 아직 전쟁이 난 줄도 모르는 이들이 많으리라.


등화 불도 이런 폭풍 속의 야밤이라면 더더욱 흩어지지 않기 위해 켜고 다니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또 혹시 모른다.

어선인 척 지나가려는 함대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터.


참모장의 의견을 따를까 고민하던 제독은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제정신이라면 우리랑 붙겠다고 다가올 리가 없지. 그것도 등화관제도 안 하고서 말이야.”

“하지만 진짜 어선이라면 구조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구조 요청도 없지 않나? 쓸데없이 시간을 들이다가는 우리 함대의 위치가 들통날 수 있네. 서둘러야 해. 이순신함의 속도는 나가토보다 빠르니까.”

“확실히··· 그것도 그렇습니다.”


언제 이순신함이 추격을 피해 도망갈지 모르는 마당에 저런 민간 선박 따위의 안위를 걱정할 틈은 없었다.


사실 1항공함대가 앞장섰다면 이럴 걱정도 없었다.

항공모함과 공고급 순양전함의 속도는 이순신함보다 빠르니까.


역시 1항함이 추격을 이어갔어야 하는데.

망할 태풍 같으니!


만일 이순신함이 필리핀해로 빠져나와 통상파괴전에 돌입하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매우 복잡해진다.


“답답하구만. 모처럼 희소식인가 했더니.”

“너무 걱정 마시죠, 제독. 놈들도 아직 추격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겁니다.”


지휘관은 늘 평정을 유지해야 하건만.

그는 조바심을 감출 수 없었다.


부르르,


주먹 쥔 손을 떨던 그는 이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들었다.


“그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 함대, 기관 전속으로!”

“기관 전속!”


등화를 지나치고 전속력으로 나아가는 함대.

창밖으로 연신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문득 참모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사츠마의 일화가 떠오르는군요.”

“전함 말인가?”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 말입니다.”


참모장은 어두운 바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적에게 포위된 위험한 상황에서 역으로 적의 중심부로 돌파를 시도해 탈출했다고 하지요.”

“시마즈의 퇴각 말이군.”


야마모토 또한 알고 있는 일화다.


임진왜란 이후 벌어진 일본의 내전,

세키가하라 전투의 유명한 사건.


퇴로가 막힌 군대가 적중돌파로 포위망을 벗어난 일.

그야말로 감투정신의 표본 아닌가?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일지도 모르네.”


사츠마라는 이름에 담긴 뜻을 떠올리며.

야마모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수평선상의 등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모른 채.


***


며칠 후.

남중국해 해상.


제1항공함대 기함 ‘아카기’.


“태풍이 북상했다고?”

“예, 이대로 조선반도 남쪽으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좋아, 곧장 추격을 이어간다!”


좁다란 함교 안.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이지만, 비바람이 그치는 걸 본 나구모는 신이 난 듯 소리쳤다.


“망할 밤송이 장관이 우리더러 놀고 있냐고 불만이 가득이야. 당장이라도 ‘사츠마’를 잡아서 그 양반 앞에 대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제1항공함대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가?

연합함대 총원이 건투를 기원하고 있다.


이따위 전문을 직통으로 보내는데 머리에 피가 안 쏠릴 지휘관이 있을까.


“반드시 2차 공격대로 끝장을 내겠습니다.”


항공참모 겐다 중령 또한 이번에야말로 이순신을 격침시키겠노라고 만만이었다.


적의 항공대는 지난 전투로 많이 걷어냈으니 이번 공습은 급강하 폭격기 중심.


폭탄으로 상부 구조물을 박살 내면 그다음은 뇌격기를 집중 투입해 숨통을 끊을 예정이다.


제아무리 방공포화가 막강해도 잘 연계된 항공기 다수가 동시에 들이닥치면 그 어떤 전함도 버틸 수 없다.


이번에야말로 그 사실을 증명하리라.


“정찰기를 이리 많이 투입해도 괜찮겠습니까?”

“적의 항공 세력은 미미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아낄 필요 없네.”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소장이 물었으나 나구모는 단호히 말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사령장관이 직접 재촉하는데 꾸물거릴 수는 없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내쫓을 궁리 만만인 사람이니까.


“겐다 군. 적의 함대가 가까이 있지는 않겠지?”

“제1함대의 보고에 따르면 제주도 근해에 조선의 주력 함대가 집결했다고 합니다. 필시··· ‘사츠마’의 구원을 위한 게 아니겠습니까?”


여유롭게 대답하는 겐다 중령.


그의 말대로 함대는 제주도 남단으로 향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1항함과의 거리는 최소 300km는 떨어져 있으리라.

그야말로 일방적인 대타격을 가할 수 있는 위치.


설마 이 부근에 있더라도 지금 함재기를 띄워 수색하면 금방 발견할 수 있으리라.


만일 100km, 아니 80km 거리에 있더라도 1항함의 기동력이면 금방 도망칠 수 있다.


확실히 항공모함의 이점은 대단하다.


함대파 장교인 나구모조차 이런 식으로 싸운다면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우, 우현 견시 보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평선상에 함영! 방위 080! 거리 2만! 이건··· 전함입니다!”

“뭐라고?!”


아카기 함교 견시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


같은 시각,

전함 이순신.


아침 해가 조금씩 떠오르는 바다.


드넓은 수평선상을 따라 수많은 함영과 굴뚝 연기가 보인다.


“좌현 견시 보고! 적 항모 2척! 방위 300! 거리 25,000!”


함교가 분주해지고 모두가 다급한 얼굴로 수평선을 바라본다.


천운이었다.


동중국해를 지나는 역대급 태풍.


7만 톤급 전함이 종이배처럼 흔들리는 와중에 등화로 적의 눈을 속이고 어떻게든 폭풍을 빠져나왔다.


그대로 최단거리로 밤바다를 내달려 마침내 발견했다.

새벽녘의 노을을 배경 삼아 나타난 수평선상의 함영을.


“총원, 전투 배치!”


적 항모 기동부대다.


“함대! 적 항모 기동부대를 향해 돌격 개시! 정운함은 후방으로 빠져서 항공 작전 실시한다!”


폭풍에서 살아나온 게 엊그제인데.

이제는 교전까지 해야 한다.


여기까지 이순신함을 따라온 함대는 항모 정운, 순양함 나대용에 구축함 3척뿐.


나머지는 태풍 속에서 낙오되어 아직 뒤따라오고 있다.


거기에 정운함은 격납고에 묶어둔 함재기 외에는 모조리 태풍 속에서 망실했다. 이순신함도 태풍에 흔들리느라 침수구역의 피해가 번졌다.


함대의 상황은 최악.


하지만 기회는 지금뿐이다.


“포술장! 조준 보고!”


<적 항모! 거리 2만 4천! 속도 28노트!>


아직 제1항공함대는 완벽한 상태가 아니다.


훈련도는 대단하지만 중일전쟁이 없었기에 실전을 겪은 베테랑은 없다.


아직 타란토 공습도, 비스마르크 추격전도 있기 전이라 항공력의 잠재력도 드러나지 않았다.


애초에 항모 운용 교리가 정립되기 이전이라 여전히 함대에서 항모를 앞세우는 등 잘못된 운용이 돋보인다.


공습에도 전함에 효과적인 뇌격이나 급강하 폭격 대신 수평 폭격을 시도할 정도니까.


솔직히 말해 이놈들은 아직 항공모함이란 걸 제대로 운용하는 방법조차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지난 공습으로 이순신함이 치명상을 입었겠지.


하지만 이건 전쟁 초기니까 나타난 현상일 뿐.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저들은 무서운 속도로 전훈을 흡수하여 태평양 최강의 기동부대로 거듭날 것이다.


포격함으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무서울 정도의 명중률로 일방적인 대타격을 가하는 언터처블. 1항공함대가 완성되면 제아무리 이순신함이라도 버틸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다.


태평양의 전장에서 전함과 항모는 완벽한 상하관계에 있으니까.


따라서 이건 승리를 위한 계획의 필수 조건.


<주포, 정렬 완료!>


“나대용함, 돌격 개시합니다!”

“구축함 전대에서 발광 신호! 돌격 개시!”


기회는 지금뿐이다.


태평양 유일의 항모 기동부대,

제1항공함대.


“주포! 목표, 적 항공모함! 조준 좋으면 쏴!”


너희들은 오늘 여기서,


<주포! 쏘기 시작!>


전부 죽어야 한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대한제국 전함이 일제를 찢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8 남방 수호자, 탄생 +29 24.08.22 12,438 421 13쪽
27 말레이 해전 (3) +22 24.08.21 12,307 447 15쪽
26 말레이 해전 (2) +25 24.08.20 12,163 412 16쪽
25 말레이 해전 (1) +15 24.08.19 12,213 391 14쪽
24 ABDA 함대 +17 24.08.18 12,261 400 20쪽
23 비밀 기지 +21 24.08.17 12,379 397 14쪽
22 웨이크 섬 +16 24.08.16 12,227 415 15쪽
21 추격 +19 24.08.15 12,544 422 11쪽
20 위대한 항로 +20 24.08.14 12,960 419 18쪽
19 운명의 5분 (2) +29 24.08.13 12,869 421 16쪽
18 운명의 5분 (1) +18 24.08.12 12,614 420 13쪽
» 폭풍 속으로 (2) +18 24.08.11 12,664 412 24쪽
16 폭풍 속으로 (1) +16 24.08.10 12,538 403 12쪽
15 불타는 하늘 +23 24.08.09 12,711 365 22쪽
14 This is not a drill +22 24.08.08 12,373 383 12쪽
13 폭풍전야 +17 24.08.07 12,400 390 14쪽
12 황제 (2) +15 24.08.06 12,529 366 12쪽
11 황제 (1) +13 24.08.05 13,165 373 14쪽
10 기동부대 (2) +11 24.08.04 13,273 368 15쪽
9 기동부대 (1) +11 24.08.04 13,993 381 12쪽
8 에이스 +19 24.08.03 14,502 394 13쪽
7 자진 입대 +12 24.08.02 15,082 397 13쪽
6 찾아라 드래곤볼 +19 24.08.01 16,063 396 14쪽
5 최고의 복지 +29 24.07.31 17,720 435 12쪽
4 안전운전 +18 24.07.30 19,756 469 15쪽
3 전함 이순신 (2) +27 24.07.29 21,396 515 15쪽
2 전함 이순신 (1) +29 24.07.29 24,992 556 12쪽
1 프롤로그 +47 24.07.29 30,944 584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