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
동중국해 해상.
연합함대 기함 ‘나가토’.
책상 위에 놓인 작전 지도를 사이에 두고서 연합함대 참모들 사이로 갑론을박이 오갔다.
“필리핀 공략 부대에 경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적 전함이 상륙지에 특공 한다면 대참사가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그보다도 항공대를 이 잡듯이 풀어 함대를 찾아야 하오. 지금 함대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지 않소?”
불안한 목소리가 참모진 사이로 오갔다.
그들이 찾고자 하는 대상은 고작 10척도 안 되는 소함대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에 해군 전체가 전력을 다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현재 남방에는 10만이나 되는 대군이 작전에 투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전 육군의 반수에 다다르는 수치.
그야말로 국운을 건 대결전.
그런데 여기에 해군의 책임으로 이순신함이 훼방을 놓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망할 육군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진정 두려운 일이었다.
한 참모장의 외침에 회의실로 불안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끔찍한 전망에 모두가 발만 구를 때 제1함대 사령관 다카스 시로 제독이 입을 열었다.
“그래, 통신 참모. 아직 위치는 보고되지 않은 건가?”
“예, 사츠마의 최종 항로는···.”
“사츠마가 아니라 이순신!”
참모장의 불호령에 통신 참모가 사색이 된 채 발언을 수정했다.
그날의 참사 이후.
일본 해군에서 ‘사츠마’라는 단어는 거의 금지당했다.
당장 시마즈가 연상되는 이름을 지었다가 재수 없게 적중돌파를 당해버린 마당이다.
어쩌다라도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이들은 전부 불호령을 피할 수 없었다.
“다들 진정하게. 너무 예민한 거 아닌가?”
마침내 야마모토가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불행한 소식이 있었지만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순 없네. 무엇보다 나머지 작전은 모두 문제없이 순항 중이지 않나?”
1항함이 전멸했지만 가장 중요한 남방 작전은 아직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영국의 싱가포르 공략도 코앞이다.
일본군의 앞을 막을 정예병은 당장 덩케르크에서 몸만 빠져나온 와중이니까. 최소 1년간 영국은 본토 방위에나 급급한 처지일 것이다.
필리핀 공략도 순조롭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도 당장 방문 박차고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다.
황국의 운명, 아니 대동아의 미래가 걸린 이 일전!
조선의 전함 따위가 찬물을 뿌리게 둘 수는 없다.
하지만···.
“우선 히에이, 키리시마와 8전대가 수습을 마치고 곧장 추격에 들어갔습니다. 3함대의 공고, 하루나에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두었습니다.”
“공고급은 이순신함을 상대할 수 없을 거요. 역시 항공대를 투입해야···.”
“비행기로는 전함을 잡을 수 없소! 1항함의 과오를 되풀이할 셈인가!”
“그건 폭장량이 부족한 함재기이지 않소! 육상 발진 폭격기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오!”
총론은 좋아도 각론이 문제다.
1항공함대가 허무하게 궤멸한 지금.
일본이 전개하여 동원 가능한 함대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연합함대 직할의 전함 중심 제1함대.
둘째는 선봉 부대이자 다수의 중순양함으로 구성된 기동력 높은 주력, 제2함대.
그리고 셋째는 필리핀 공략을 앞두고 재창설된 신편 제3함대.
1함대는 현재 야마모토의 손길 아래 작전 중이고,
2함대는 전대 단위로 나뉘어 남방 각지의 지원, 그리고 한반도 해역의 봉쇄 작전에 동원되었다.
3함대는 신편 부대에 2함대의 지원 병력까지 받아 필리핀 공략에 전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사실상 제1항공함대를 제외하면 마땅한 기동예비대가 없던 셈이다. 하지만 개전 초기의 기습 효과 극대화를 위한 동시다발적 스케줄을 달성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나머지 전선은 모두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고 있으니. 야마모토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았다.
“적 함대에는 수준 높은 방공망이 있다. 경솔히 항공대를 투입했다간 손해만 늘어나겠지.”
그는 냉철한 얼굴로 작전 지도 위의 기물을 움직였다.
“중부 태평양 부대는 작전 행동 중인가?”
“현재 괌과 웨이크섬을 공습하는 중입니다.”
필리핀과 달리 중부 지역은 폭풍으로 인해 작전이 상당히 늦어졌다.
기왕 늦은 김에 전력을 빼 올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순 없다. 미 태평양 함대 선견 부대가 이제 막 샌디에이고를 출항했다는 소식 때문이다.
진주만의 시설은 최근 들어서야 증설하기 시작했으니 대함대가 태평양을 건너오려면 당장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미리 대비해 둘 필요는 있다.
“폭격 부대를 돌릴 순 없겠지?”
“예정된 작전을 취소하지 않는 한 그러기에는···.”
“해야 합니다, 장관! 이순신함이 필리핀에 돌입하면 남방 작전 자체가 어그러지는 거요!”
“3함대의 전력으로 격퇴할 수 있을 겁니다.”
“택도 없다니까! 당장 2함대 잔존 부대도 본토에서 불러들여야 하오!”
“그럼 조선은 누가 봉쇄하라는 말이오?”
그 순간.
야마모토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모두가 논쟁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자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선의 주력 함대는 분명 제주도 남방에서 패했다지?”
“예, 확실한 전과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에 남은 함대는 오직 이순신 함대뿐이다.”
상황을 따져보자 생각보다 희망적인 관측이 나온다.
1항공함대를 잃은 건 안타깝지만.
동시에 제해권 장악이 코앞에 왔다는 소리다.
무엇보다 1항함이 궤멸했다고 해서 일본의 해상 항공력이 전멸한 건 아니다.
야마모토는 차가운 눈으로 참모진을 보며 말했다.
“오키나와, 대만 항공대에 남중국해 근방을 샅샅이 뒤지라고 전하게. 사세보 항공대, 호쇼와 3함대의 류조 항공대에도 마찬가지로 전하고.”
“예!”
“이순신함을 발견하는 즉시, 공습으로 발을 묶는다. 하지만 손해는 감수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위치를 놓치지 않는 걸로 충분해. 놈의 항로가 대략적으로 드러나면···.”
야마모토의 손끝이 작전 지도 위로 움직인다.
도고 제독 이래,
제국을 위기에 구원한 바로 그 결단.
“동원 가능한 전 함대를 집결, 조선과의 함대 결전을 시행한다.”
단호한 손끝이 남방의 바다 위를 가리켰다.
이윽고,
나가토의 신호 깃대로 결전의 Z기가 올랐다.
***
한편,
필리핀해 근방.
포성이 하늘을 울린다.
검은 연기가 구름처럼 머리 위를 뒤덮고 그 사이로 프로펠러 소리를 울리는 비행기가 불꽃에 휩싸여 고꾸라진다.
“적기! 화염을 보이며 추락 중!”
“몇 기째지?”
“이걸로 3기입니다.”
쌍안경을 내린 항해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남중국해에서 빠져나와 태평양 필리핀해로 나온 후.
우리는 수많은 일본 항공기의 추격을 받았다.
이걸로 벌써 3번째 공습.
이순신함의 레이더와 정운함의 전투기로 번번이 요격 중이지만 이러다가 피해가 발생할까 걱정이다.
무엇보다 남방 작전을 지원 중인 항공대도 언제 기수를 돌려 우리를 잡으러 올지 모르고.
“일몰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1시간입니다.”
날이 저물기 전,
저들의 추격을 따돌려야 한다.
이대로 필리핀으로 도망쳐봐야 진로를 들통날 뿐이다.
“통신관, 정운함에 남은 항공대 몇 기냐고 물어봐.”
<예, 함장님!>
확인 결과.
F2A 버팔로 전투기가 4기.
신형 F4F 와일드캣이 3기.
헬다이버 폭격기가 8기.
국산 3인승 ‘솔개’ 뇌격기 6기.
총합 21기.
50기를 꽉꽉 채워서 출항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용기체가 반 토막이라니.
심지어 상실 기체 중 절반은 태풍 때문이다.
···나중에 정운 함장에게 진짜 한 소리 듣겠네.
제아무리 필요한 행동이었다지만 너무 손실이 크니까.
“이대로 항공전을 지속하기엔 곤란하긴 합니다.”
우선 항해장의 말대로다.
어떻게든 추격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함대, 침로 180으로 돌리지.”
“필리핀으로 향할 계획이십니까?”
의아한 눈으로 묻는 항해장.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태평양으로 간다.”
그리고 머리 위의 비행운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함대 근처를 주회하는 적 정찰기.
레이더로 포착 중이지만 아직 자기가 들켰다는 걸 알지 못하는 듯하다.
“적기의 무전은 방수 중인가?”
“예.”
“침로 180에서 270 사이로 기동하지. 일몰까지 15분에 한 번씩 변침하자.”
남쪽에서 남서쪽 사이로 계속 움직이자는 말.
항해장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적기를 속이실 생각이시군요.”
“그러려면 아군도 속여야겠지.”
나는 전화기로 통신관을 불렀다.
“해본에 전달. 13기동부대는 필리핀으로 남하. 미군과 합류하여 재보급 및 작전 지속할 예정.”
부디 효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사령장관 각하, 적 기동부대로 추정되는 통신입니다.”
긴장 속에 물든 나가토의 함교.
참모장이 신이 난 목소리로 제독을 불렀다.
“우리, 필리핀으로 남하 예정!”
“역시 남방이 위험합니다!”
“적 기동부대 또한 침로를 변경 중입니다. 필시 남중국해나 필리핀 북부로 향할 것으로 보입니다.”
“제2함대와 3함대에 특별 경계령을 하달하고 전투 부대를 집결시키게. 놈이 향할 만한 장소는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침착하게 지시를 내리고 야마모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설마 연합함대가 대한제국의 암호문을 대략적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이걸로 마지막 실마리가 잡혔다.
지금이야말로 결전의 때가 무르익은 시기!
1항공함대의 손실은 적 기동부대의 궤멸로 만회할 수 있다.
야마모토는 성공을 확신한 듯 호령했다.
“함대, 전속으로 기동한다! 밤이 지나기 전에 이순신을 따라잡는다!”
“예, 제독!”
철의 파도가 바다를 가로질렀다.
그로부터 며칠간.
필리핀 근해에서 연합함대는 단 1척의 대한제국 함선도 찾을 수 없었다.
***
6일 후.
중부 태평양. 웨이크섬.
중부 태평양의 외딴섬.
웨이크섬을 지키던 미 해병대 병사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수평선을 주시했다.
일본군과의 교전이 끝난 지도 어느덧 나흘이다.
선전포고 이후.
그들이 지키던 섬은 소규모 함대의 침공을 맞이했고 해병대는 보란 듯이 침략자들을 격퇴했다.
일본 순양함과 구축함은 해안포에 얻어맞고 후퇴했으며, 섬을 폭격하던 항공기들은 전투기에 쫓겨 달아났다.
하루아침에 함락당한 괌과 순식간에 포위당한 필리핀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성과.
그럼에도 섬을 지키는 이들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적의 함대에 맞설만한 병력은 5인치(127mm) 해안포 일부와 버팔로 전투기 8기뿐이었으니.
“근무 중 이상 무.”
“특이 사항 있나?”
“없습니다.”
감시 초소로 들어간 중대장이 쌍안경을 들어 수평선을 살핀다.
고지대에 설치된 초소에선 수평선 수십 킬로미터까지 관측이 가능하지만 드넓은 바다 위에는 티끌 하나 없이 푸른 파도만 철썩거렸다.
적이든 아군이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오늘은 아니었다.
“저건 뭐야···?”
수평선 너머로 솟아오르기 시작한 거대한 함교를 보며 중대장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일본 놈들이 전함을 끌고 왔나?
경악 속에 마지막 유언을 고민하던 그는 이내 사령부에서 보낸 통신을 듣고 황당한 듯 되물었다.
“일본 배가 아니라고?”
갑작스레 웨이크섬에 나타난 함대의 정체는 그가 상상하지도 못한 이들이었다.
1940년 7월 말.
전함 이순신 외 제13기동부대가 웨이크섬에 도착했다.
- 작가의말
최초의별님, 소중한 후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Commen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