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복지
내 등 뒤에서 멈춰 서는 이종무 제독.
침묵이 흐르자 실수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로 느껴졌나?
하지만.
“어째서지?”
제독은 흥미롭다는 태도로 내게 물었다.
목소리가 아닌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다행이다.
조심스레 머릿속으로 정리한 이야기를 꺼내 든다.
“최근 과격해지는 도발 행위는 제독께서도 예상하시듯 전쟁에 대비해 명분을 쌓기 위한 밑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건수라도 잡으려는 마냥 점점 과격해지는 도발.
명백히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허나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아 해군 주력은 현재 내해인 대련으로 들어와 있는 상황. 연합함대 주력이 들어와 공격하기에는 사방에서 공격당할 수 있기에 난점이 많습니다.”
대련은 천혜의 요새다.
황해의 동쪽은 대한제국이, 서쪽은 중화민국이 지배하고 있다. 함대가 그 사이를 돌파하고자 하면 필시 기동로가 노출되어 반도와 대륙에서 집중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모든 저항을 뚫고 대련에 도달해도 요새화된 항구를 공격하는 건 전혀 쉽지 않다.
“자연스레 공격의 선두는 항공모함이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 항공모함의 공격 반경은 수백 킬로미터에 다다르기에 안전하게 사정권에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공모함의 함재기만으로 대련까지 유효한 타격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제독.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항공기로는 충분한 폭장량이 나오지 않을 텐데?”
이게 바로 이 시점에서 세계 해군 지휘관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생각이다.
물론 항공력 자체는 이미 여러 전투에서 변수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건 대부분 지상에서 발진한 중량급 항공 세력이었다.
항공모함의 좁은 갑판에서 발진하는 함재기의 한정된 숫자와 적은 폭장량으로는 장갑화된 전함에 치명타를 먹일 수 없다는 게 해군 관계자들의 시선이다.
항모 1척에 한 번에 동원 가능한 공격대는 보통 3~40기 정도니까.
‘이순신함을 상대로는 크게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고.’
더군다나 지금은 연합군과 추축국. 그 어느 쪽도 대량으로 해상 항공 세력을 운용하지 않고 있다.
유럽에서는 오직 영국 왕립해군만이 1~2척씩의 항공모함을 함대에 편입시켜 사용하고 있다. 그다음으로 항모가 많은 미 해군은 아직 참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항모의 잠재력을 아무리 떠들어봤자 여기서 큰 인상을 줄 수는 없다. 결국 근거 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니까.
여기서는 다른 방향으로 설득을 유도해야 한다.
“예. 하지만 연합함대가 노릴 수 있는 수는 오직 그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의 주요 전략은 대한제국의 점령이 아닌 남방의 침공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남방의 침공.”
예상외의 답변인 듯 눈을 살짝 치켜뜨는 제독.
슬쩍 고민하더니 턱짓한다.
“계속해보게.”
“저들이 구태여 우리를 자극하여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필시 지금 서방 국가들이 전쟁으로 극동에 전력을 투사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잠시 심호흡하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국력을 가진 이들은 바로 일본. 저들이 어떤 흉계를 꾸밀지는 이미 선례가 있지 않습니까?”
“빈 땅이나 다름없는 남방을 침공해 그 세력을 확장하고자 한다는 이야기군. 확실히 비슷한 우려를 하는 목소리가 늘어나고 있네.”
척하면 척.
곧장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
남방의 침공 이전.
후방의 안정화를 위해 항모와 장거리 폭격기를 다수 동원하여 장거리 공습.
대한제국 함대에 피해를 입혀 기동 불능으로 만들고 그사이 빈집이나 다름없는 남방을 장악한다.
왕립해군은 유럽의 전쟁으로 바쁘고 미 태평양 함대는 대양을 건너오느라 제때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일본이 남방의 자원 지대를 점거하고 알박기하면 우리로서는 방법이 없다. 수입, 수출로가 막힌 채 발버둥 친들 결국 고사할 뿐이니까.
얌전히 서방 연합군이 독일을 마무리하고 태평양에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초중전함 1척에 국력을 몰빵한 이 대한제국이?
어렵겠지.
애초에 그런 작계로 준비한 국가가 아니다.
“위험한 발상이지만··· 일리가 있네. 그렇기에 항공모함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여 동향을 살피자는 이야기로군.”
“어쩌면 항공모함 다수를 모아 일시에 들이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 척 한 척의 공격력이 약하다면 마땅히 그 세력을 모아 최대한 투사력을 높이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대만 등지에서 이륙한 장거리 폭격기를 포함한다면 충분히 위협적인 세력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말하자 이종무 제독 또한 일리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항공모함을 저평가하는 해군이라도 지상에서 발진한 뇌격기의 위력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특히나 일본 해군은 태평양을 무대로 하는지라 항속거리 또한 장대하기로 명성 높고.
다시 자리에 앉은 제독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며 묻는다.
“자네, 언제 그런 생각을 한 건가? 항공력에도 그리 관심이 깊을 줄 몰랐네만.”
다시 봤다는 뜻이겠지.
“남해에 주둔하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가···? 흥미로운 의견이었어.”
무심한 얼굴로 저러니까 칭찬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쁜 인상은 아닌 듯해서 다행이다.
그렇다면 점수를 벌었다는 가정하에 좀 더 나아가볼까.
그리고 때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좋은 의견 개진해주어 고맙네, 함장. 건선거에서 정비를 마치면 이순신함은 바로 합동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네. 함의 작전 수행에 있어서 문제 되는 점은 없는가?”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향후 실시할 기동 훈련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개진하고 싶습니다.”
***
제독과의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최소한 나쁘지 않은 인상을 남긴 것에 더해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확보했으니까.
첫째, 나는 상당히 기대받고 있는 유망주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모든 스탯 SS급의 초특급 함장을 박아두었으니 당연한 거지만.
막상 직접 이 세계에서 살아보니 내 입지가 상상 이상으로 두텁다는 느낌이 든다. 고작 대령에 불과한 자가 해군총장, 작전 사령관이 주관하는 자리에 동승할 정도니까.
이 말인즉 계급에 비해 상당한 운신의 폭이 존재한다는 거고.
좀 더 과감한 행동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좋은 일이다.
차후의 전쟁에 대비하여 준비해야 할 것들이 조금 많으니까.
게임 시작 전부터 점찍어 둔 최고의 승조원들부터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선진 전술과 교리 적용 등등.
시간이 부족한 만큼 내가 가진 권한이 많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
대한제국 해군은 생각보다 훨씬 유능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약간 맛이 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내가 만든 해군이지만 결국 초중전함 하나를 위해서 모든 걸 몰빵한 군대였으니.
정상적인 해군이라면 18인치 포 탑재 전함 단 하나에 국운을 거는 베팅은 하지 않는다.
그 일본 제국 해군도 본래는 야마토급을 4~6척씩 양산할 계획이었다. 그런 재력이 되는 나라니까 초중전함을 실제로 건조하고 운용해 본 것이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물론 지역강국이지만 불과 40년 전에 식민 지배를 당할 뻔했다가 기사회생한 국가다.
당연히 그런 국가에서 무리하여 18인치 포 전함을 건조했다면 분명 다른 쪽에서 애로사항이 터져 나올 거란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적어도 수뇌부 어딘가에서 나사가 풀려 있으리라는 각오는 했다는 말이지.
그런데··· 지금까지 본 제독들은 상당히 유능해 보인다.
해군총장인 신순성 제독은 물론이고, 작전 사령관부터 기타 함대 사령관들까지.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정국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극단적인 개함우월주의야 세력에서 밀리는 해군이 늘 선택하는 전략이기도 하고. 유사시에 대비한 전략도 체계적으로 마련하고 있고 해군항공 세력과 잠수함 또한 경시하지 않는 등 유능하다.
함장실로 돌아온 나는 기분 좋게 해군 전력표를 꺼내 들었고.
“이게 뭐야?”
마침내 깨달았다.
“15인치 주포 탑재 전함 2척에 13.5인치 포 전함 1척··· 중형 항모는 겨우 1척에 순양함, 구축함을 합쳐서 겨우 100척도 안 돼?”
어쩌면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걸.
“대한제국 해군··· 이게 다야?”
너무 적다.
국제 평균적으로 적다는 말이 아니다.
수십 년간 국가의 명운을 걸고 대함대 건설에 노력한 것치고는 너무도 빈약하다는 말이다.
해군력이 통째로 날아갔다가 겨우 복구한 나치 독일도 순양함 10척, 구축함 30척 이상은 보유했거늘.
거기다 나치 독일은 그 배가 대부분 신예 함선이기라도 했지. 우리 함대 중 절반가량은 구식함이다. 실질적인 전력은 그 독일 해군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물론 독일은 유럽의 패권에 도전하던 열강이고. 대한제국은 40년 전 겨우 식민지 신세를 면했던 지역 강국에 불과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이걸로 연합함대를 상대하기는 좀 그렇지 않나?
“나름 공들여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초중전함에 몰빵하는 테크였다고 한들, 만들고 나니 이렇게나 적을 줄 알았겠나. 설마 내가 이딴 세계에 떨어질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 항모라도 몇 척 더 뽑아 뒀지!
물론 내 애초 계획은 초중전함 1척으로 캐리하는 대일 함대결전이었다.
그렇기에 초중전함으로 해볼 만하다는 거고.
그 유명한 독일의 전함 ‘비스마르크’도 항모의 공습으로 발목을 잡고 전함 2척이 일방적인 포격을 퍼부은 끝에 겨우 침몰했다.
그리고 나의 이순신함은 비스마르크는 따위로 만들 만큼 강력하다.
대함 전투력은 말할 것도 없고 대공 능력도 이 시대에는 과잉으로 느껴질 만큼 심혈을 기울였으니 쉽사리 침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게임의 이야기고.
이건 현실이다.
생각 없이 초중전함 몰빵 중점 찍었던 것도 나름대로 정합성을 가지고 구현되었지만 그렇다고 전쟁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호위 전력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하고.
일본 항모?
아직 40년도에다가 중일전쟁도 없었으니 교리도 정립되지 않았을 때다.
어떻게든 방법은 있다.
문제는 개전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이고.
···하는 수 없나.
“행정사관, 오늘 16시까지 장교들 전부 사관실로 모이라고 해.”
이제부터 전격전으로 간다.
***
최종 정비를 마무리하고 해상 시험을 위해 부두에 정박한 이순신함.
별다를 거 없는 주중.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던 함 내에 경보가 울리며 사방에서 욕지거리 섞인 외침이 들려온다.
“또 시작이야! 또! 또!”
“아오···.”
이를 악물고 복도를 달리는 수병들.
미로처럼 복잡한 함 내를 지나면서도 익숙한 듯 다리가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분주하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그들 위로 함교 사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훈련! 총원, 전투 배치!>
“하루에 전투 배치를 세 번 돌리는 미친 함장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전투 배치! 전투 배치!”
단시간에 강군을 만드는 방법.
그 첫 번째.
<알림. 14시부터 긴급 손상통제 훈련 실시 예정. 승조원 총원, 참고할 것.>
“저거 걍 참고 구르라는 소리 맞지?”
“그런 거 같은데요.”
일단 존나 굴린다.
Comment '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