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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B

함경도의 별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최근연재일 :
2024.06.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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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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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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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Rain 4

DUMMY

그날,

그 여자가 쥐어주는 용돈을 거부하고 돌아서는 그에게, 새로운 것이 일어났다. 겨울 칼바람 속에 세상 무서운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밤거리에서 우연히 알고 있는 ‘것’을 봤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자신을 무시하고 때리고 따돌림에 앞장을 섰던 한 녀석.


그 녀석은 술에 취해 흥얼거리며 오랜만에 만난 장난감을 보듯이 다가와 큰 실수를 했다. 손으로 뺨을 만졌다. 중간은 문주환 자신도 기억이 안 난다. 상대의 무참한 얼굴과 아직도 주먹에서 힘이 풀리지 않은 자신을 봤다. 제어할 수 없었다. 구둣발로 면상을 밟았다. 그리고 용역에서 고참들에게 배운 멘트를 했다.


“어이 개 같은 놈. 니가 지금 사는 길은 00이. 00이. 00이 어디 사는 지 말하는 거다. 너 지금 여기서 내가 널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고민할 필요 없다. 널 여기서 죽이는 건 내 맘이고 그 이후는 명 끊긴 니가 관여할 일이 아냐. 내가 놔줘도, 신고하면 징역 살고 나와서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염통에 기스내줄게. 신고해! 빵 갔다 와서 니가 결혼하고 처자식 낳았을 때 찾아온다. 대 봐. 어디들 사는지. 들어보고 판단한다. 생사는 니가 결정하는 거야 응? 니가 그냥 잘 지내냐 물었어도 난 안 이랬을 거다. 봐라. 저 아파트 불빛. 저게 니가 마지막으로 볼 세상의 풍경으로 삼을 건지는 니가 결정하는 거다.”


죄책감은 군에 와서 느꼈다. 거기 사람이 있었다. 하나하나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존재'였다. 좀 모자라도 동료로 끌어주고 믿어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냉정하게 말하면 군대가 완벽하게 정으로 융합된 건 아니다. 거기도 개인 색깔 있고 차별 있고 험난한 서열이 있다. 그러나 한 놈을 완전히 병신이 될 때까지 방치하지는 않았다.


특수전교육단 임용식에서 어깨에 교육단장이 달아준 계급. 하사. 살면서 처음 받은 상장과도 같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의미가 그에게 부여되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하사라고 불러주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른다. 한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흐른다. 수풀 속에 숨 쉬는 짐승이 매일 먹이를 얻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 속에서 두 가지 사건이 다시 일어난다.


하나는 9중대장 박대위와 11중대 화기 이하사였다. 야간에 잠행하던 어느 밤.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뒤범벅 되어 섞였다. 거길 지켜볼 수 있는 쪽으로 다가섰으나 곧 동이 터온다. 문중사는 어떤 일인지 지역대원 누구인지 보려고 위험하지만 근처 능선의 수풀에 위장하고 들어갔다.


동이 터 오고 날이 밝고, 북한군과 함께 민간인들도 모습을 보였다. 둘은 명을 달리해 도로 근처에 누워 있었다. 길게 자란 머리, 더러운 얼굴과 손과 수염, AK, 군관이 둘의 시신을 뒤지는데 쌀 봉지가 나오고, 먹을 수 있는 그저 풀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삭아버린 야채가 나오고. 총알이 회수되었다.


문중사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수풀 속에 웅크린 그는 이제 누가 남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날 군장을 뒤져 간 것이 박대위와 이하사였나? 이하사는 북한군복을 입고 있었다. 위쪽에서 죽은 사람을 도로 쪽으로 끌어낸 듯 수풀에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그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거리는 한 100미터 정도였는데, 군관이 권총을 꺼낸다. 문중사는 일어서려고 했다. 누가 살아 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슬로우비디오처럼 장면은 흘러갔다. 높지도 않은 중위 정도 계급인 장교가 권총을 꺼내 왼손으로 위를 당겨 장전하고, 두 발을 쐈다. 박대위를 향해. 목숨이 붙어 있던 것은 9중대장 박대위였다. 문중사는 몸이 경직되고 턱이 떨렸지만 이내 피식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 그런 거지. 하지만 기억한다. 군복은 거짓말 못한다. 색깔이 멀리서도 보인다. 너 정치군관이냐? 백주에 대놓고...’


총알은 시신에 이르러 몸을 때렸고, 총알에 시신이 퉁퉁 퉁기며 밀리던 모습이 보였다. 죽은 시신에 총을 쏴도 미동도 않는 건 구라였다. 죽은 자의 몸이 총알 반대편으로 원을 그리듯 밀린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아침, 수풀 속에서 잠이 들어 있는데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혼자였기 때문에 산을 깊이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밤에 내려오기만 불편하니까. 확성기는 산에 대고 떠들고 있었다. 그러려니 하려는데 문득, 문득, 아무리 들어도 자신의 이름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단어. 투항. 투항? 항복하라?


이어 아무리 앰프로 증폭되어도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신중사님이었다. 문중사는 바로 일어나 조준경에 눈을 실었다. 남쪽의 탑차 같은 스피커가 달린 차량이 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정지하더니 마이크를 든 사람이 나왔다. 담당관 신중사였고, 그 뒤에 총구를 겨눈 보초와 군관이 따라 나왔다. 멀리서 봐도 신중사는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고, 얼굴은 밤송이처럼 부어오른 것이 여러 군데 있었고 피부는 위장한 것처럼 얼룩져 있다. 군관은 처음 보는 놈이었지만 또 정치장교였다.


문중사는 하늘을 본다. 하늘은 자신의 마지막 것까지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 한숨을 쉬고 다시 조준경에 시선을 얹는다. 병사가 입에 들이민 마이크로 신중사가 말하고 있었다.


“문주환 중사, 어서 나와 투항하라!!!”


문중사의 귀에 들리는 그것으로 신중사에게 실망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저 상황에서 고문 받고 자신이 더 저항할 것이다 말할 수 없다. 다만, 구차하게 명을 유지하는 개인적인 치욕은 말하지 않아도 보인다. 문중사는 그것보다 신중사를 자세하게 보는 데 열중했다. 포켓은 다 뜯어지고 바지는 허벅지가 다 드러날 정도로 찢어져 있고, 너무도 다르게 비쩍 말라 있었으며, 한쪽 눈은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 손이 묶인 상태로 간신히 서 있었고, 지나가는 한 줄기 서늘한 바람에도 훅 넘어가 버릴 것 같았다. 흔들리는 비쩍 마른 묘목 같았다.


그때 새로운 말이 귀에 반복해서 들어왔다.


“문주환 중사. 어서 나와 투항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광화국은 항복자를 살려주고 우대한다. 0공수특전여단 5대대 폭풍지역대 10중대 문주환 중사. 폭풍! 폭풍 지역대! 문주환 중사 투항하라!”


그건 신중사가 머리속에서 꺼낸 멘트가이 아니다. 한 병사가 종이를 눈앞에 보여주며 신중사를 툭툭 쳤다. 문중사 귀에 들어온 말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폭풍’ ‘폭풍’ ‘폭풍’ 오랫동안 짐승처럼 뇌를 쓰기보다 본능에 의존했던 문중사 귀에 들린 그 단어. 그건 지역대 약정어었다. 바로 [강압에 의한 말/행동]이라는 약정어. 이 약정어를 말하지 않았다면 신중사는 굴복한 것이다.


지역대는 북으로 넘어오기 전에 집중화교육을 하면서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신호 전달로 지역대 일반명칭을 골랐다. 폭풍 지역대의 ‘폭풍’은 강압에 의해 행동하고 있다는 약정어였다. 예를 들어, 투항하면 살려준다고 말하는 동료가 '폭풍'을 말하면 - 투함하면 죽는다고 읽는 것. '폭풍'을 말하면 '날 쏴라' 의미도 된다. 신중사의 폭풍이라는 단어를 듣자 부각되었던 실망감이 다시 저 멀리 먼지처럼 사그라져 흩어진다.


문중사는 씨익 웃는다. 폭풍.

‘담당관님 알아들었어요. 그만해요.’


그냥 봐도 강압에 의한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 상황에서 신중사가 재차 그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언어를 정 반대로 해석하라는 말이며, 더 설명하면 (제발) 투항하지 마라! 그 말이다. 끝까지 하라는 말.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 자기를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은, 문중사가 그 말의 뉘앙스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항상 그래왔던 분이니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동료를 위해 항상 퍼주는 사람.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고 확신하고 딱 집어 부르는지 이유는 몰랐다. 아마도 불쌍한 놈 여러 명을 칼로 거시기 해 도로에 전시한 걸 보고 문중사로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담당관님은 자기와 같은 비참한 상태로 절대 오지 말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나처럼 되지 말라고 하고 있다.


차량은 곧 다른 장소로 이동할 것처럼 준비하고, 신중사는 흔들리는 몸으로 힘겹게 차량 뒤에 오르려 했고, 뒤에서 북한 병사가 밀었다. 마이크는 아직 켜져 있었고, 신중사는 마지막으로 다시 소리쳤다.


“폭풍지역대 문주환 중사. 투항하라. 폭풍!”


문중사는 조준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선배를 바라본다. 신중사가 살아남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땅은 남쪽의 자연스런 인권 인본주의 개념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관이 법이며, 관이 죽이라면 죽이고 박수를 친다. 신중사가 협조했으니 그들이 인도적으로 목숨만 살려준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거짓말이다. 믿을 수 없다. 그간 행태를 봐도 이곳은 저개발 비-문명국. 잡히면 죽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쪽은 악랄한 게릴라다.


신중사는 결국 차에 올랐고 문은 쾅 닫혔다.


문중사는 조준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멀어지는 차량을 바라본다. 굽이굽이 비포장도로를 따라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지는 차량. 문중사는 드디어 조준경에서 눈을 뗐다.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멈췄다. 표정은 고통스럽지도 않았고 씁쓸한 미소 같은 것이 스치는 듯하다. 좋아하지도 않고 그냥 사귄 여자가 알아서 이별을 통보하고 떠난 직후의 표정? 문중사 인생을 지배해 온 모든 것. 냉담. 그러나 그것이 문중사에게는 마음에 일렁이는 파도를 암시하는 가장 큰 얼굴표정이었다. 문중사는 태어나서 처음 하는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잘 가. 형.”


그날 밤, 정치국을 향해 내려갔다.


비. 이 헐벗은 산천에 비. 큰 나무 없고 지난여름 자란 수풀만 무성한 산과 들. 수풀이 갈색으로 변하고 겨울이 오면 무인 행성처럼 변해버릴 이곳. 대검에서 마지막 핏방울이 떨어지고 이제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진다. 검도 투명해진다.


또 하나를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지역대장이 말했었다. 우리는 전선의 병사들을 위해 쉬면 안 된다고. 대검집을 거꾸로 들어 물을 털고 대검을 군복 상의에 문질러 닦았다. 5일 전에 그가 보낸 정치장교의 군복. 자세히 보면 여러 군데 대검 크기로 찢어져 있고 흑자주색 얼룩이 묻어 있다.


북한군대는 일반 장교가 있고, 거기에 중대급 이상에 한 명씩 정치장교가 있고, 정치장교는 해당 지휘관을 감시하고, 정치장교 역시 보위부의 감시를 받는다. 정치국 근처에서 문중사는 한 차례 대검으로 찌른 뒤 대검을 박은 상태로 살려줄 것처럼 그를 거주구역이 끝나는 수풀까지 끌고 왔다.


‘이거 뽑으면 너 바로 죽는다... 따라 오면 정보만 듣고 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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