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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B

함경도의 별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최근연재일 :
2024.06.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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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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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후미경계조 5

DUMMY

추정컨데 여기를 뛰다가 다른 어느 방향으로 꺾었을 것 같다.


따라오는 놈들에게 두 번이나 총을 자동으로 갈겼고, 그때마다 어둠 속에서 연속으로 번쩍이는 조명 파르르르...


5.56밀리 한 발 섬광이 오래된 영화의 한 컷이 되어, 번쩍이는 조명 속에 따라오던 그림자들이 도미노처럼 밑으로 무너지는 걸 봤다. 살집에 총알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필름을 느리게 돌린다면, 섬광 한 컷에 서 있다가, 다음 한 컷에 무릎이 구부러지고, 다시 한 컷에 무너져 밑으로 사라진다. 근육의 강한 경직 그런 거 없이 그냥 부드럽게 맥없이 쓰러진다. 주르륵 땅에 흘러내렸다. 정말 이렇게 사람이 무너지나 놀랐다.


군장 안에 탄포가 있기는 하나, 삽탄된 탄창은 이제 하나 남았고, 꼽혀 있는 탄창에 몇 발 없는 것 같다. 수류탄도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숨어서 상황을 보다가 지역대를 찾는다? 그런데 지역대 끝이 적에게 혹시 잡히면?


너무 지쳤다. 만사가 귀찮아지려고 한다. 굶고 뛰는 것도 한두 번. 대체 얼마나 도망 다녀야 하는가. 추격을 따돌리면 하루 이틀 있다 또 산을 내려가 뭐 조지겠지? 그리고 또 도망가는 거야. 뭐 다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왜 도망쳐야 하는가 그 자체. 겁나서? 전력이 딸려서? 뭐가 모자라서? 전력을 유지해 교란작전을 지속하려고? 도망치니까 적이 따라온다는 생각이 든다. 안 도망치면? 놈들도 일단 멈춰야지 어쩌겠어. 맨 앞에 오는 세 놈은 반드시 죽는다! 고함 한번 쳐볼까?


‘좆도 아닌 것들이 쪽수로 쫓아오면서 짜증나네.’


두 번의 역매복 사격은 가깝게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의 면상에 대고 갈겼다. 지금까지 두 번의 총질에서 그의 발아래 쓰러진 적만 열 명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계속 온다.


뭐 이런 미친놈들 아닌가 물음표가 고개를 든다. 분명히 특명을 받은 것 같다. 추격을 중단하거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누가 즉결처형 받을 것처럼 따라온다. 그러지 않고는 이렇게 죽여도 어떻게 따라오나. 남조선 산사람들이 죽도록 미운 거다. 얘들도 지금 제정신 아니다. 전에 비해 놈들 체력도 상당하고 사격도 꽤 괜찮다.


남자는 지쳤다. 더 이상 도망하고 싶지 않다. 창피하다. 자존심이 상한다. 더 이상 내빼고 싶지 않고, 속에서 뭐가 욱 올라온다. 거친 숨 속에 비수 같은 열불이 난다. 평생 꽁무니를 뺀 경험이 없다. 그래서 화난다. 정지해서 조금 있으니 능선을 넘어가는 바람이 너무나도 시원하다 곧 차가워진다. 젖은 몸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몸에서 군장을 푼다. 몸이 휘청휘청. 군장 벗고 일어나 오른팔을 나무에 기대고 팔에 얼굴을 묻는다. 숨소리는 폐병환자처럼 저 내장 깊숙한 곳에서 긁는다. 자기 숨소리를 듣는다. 젖은 몸은 점차 떨기 시작한다. 오기 시작한 한기와 오한은 얼굴을 찡그리게 만든다. 몸이 얼 것 같다. 특전조끼 겉까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이빨을 악물어 나무를 밀어내고 서서, 총에 꼽혔던 탄창을 뽑아 하늘에 비춰본다. 탄창에는 세 발 그리고 약실에 한 발. 남자는 30발 들이 만땅 탄창에 세 발을 더 꼽아도 되는 건가 의문한다. 해본 적 없다. 스프링 빠가 나는 게 아닌지 좀 그렇다. 빠가 나면 빈 탄창에 다시 꼽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뽑은 탄창에서 총알 세 발을 들어내 손에 들고, 하나 남은 실탄 가득한 탄창을 꺼내 실탄을 눌러 삽탄해본다. 하나 둘 셋.... 어? 들어간다.


‘서른 네 발.... 워 씨발.’


탄창을 총에 꼽는다. 철커덕 탁!


군장에서 실탄을 꺼내 빈 탄창에 삽탄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양손 모두 땀으로 젖었고, 팔뚝을 타고 물기가 흘러 떨어진다. 북어에서 물이 빠진다. 양손을 하의에 북북 문지른다. 잡았던 총열덮개까지 미끌미끌하다. 복부 근육은 고무줄처럼 당겨져 엉킨 것 같고 쓴물이 역류해 배가 쓰리다.


‘저녁을 안 먹었어...’


다시, 허리를 굽혀 팔굽을 무릎에 대고 숨을 내쉰다. 지역대가 얼마나 멀어졌는지 예상 안 된다. 그리 멀리 못 갔을 것 같다. 빨리 제발 멀어지라고 간구한다. 빨리 튀라고. 조금만 늦으면 큰일 난다고. 자신이 못 쫓아가더라도 최대한 멀어지라고.


‘이정수 이 놈 대체 어데 간 거야? 뒤진 거야? 후미경계는 또 어데야? 시간상으로 안 나타날 리가 없고! 준호 수호 정수 김중사임 다 죽은 거임? 내가 지역대 후미야? 단독 후미 내가?... 오, 하느님. 이제 창피해서, 정말 드러워서 못하겠습니다....’


도망가고 싶지 않다. 창피하다. 인상을 찌푸리면서 팔을 무릎에서 떼고 다시 천천히 무릎과 허리를 편다. 양손으로 K1을 잡고, 여기서 다시 총을 쏘면 지역대에게 적이 이쯤 있다고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떨린다. 춥다. 이빨이 아래위 다다다닥 친다. 힘도 떨어진데다 젖은 몸이 떤다.


그래도, 가늠조차 힘겨운 발을 딛고 서서 몸을 편다.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숨. 다시, 거총 자세로 나무에 등을 기댄다. 휘이이~~~ 휙휙휙 거친 바람이 능선을 타고 넘어간다. 조용하고 외롭다. 턱에서 떨어지는 물기.


그가 살아왔고 성장했고 먹고 자고 쌌던 추억의 장소들은 여기서 너무나 멀다. 저 멀리 남쪽 어딘가에 있다. 다시 못 갈 것 같다. 그게 외롭다. 죽는 것이 두렵기에는 너무 먼 길을 봤다. 사람을 무척 죽였고, 전우가 죽는 걸 보면 자신도 그리 멀어 보이지 않고, 차례가 온다는 것이 새롭거나 억울하지도 않다. 그건 그냥 오는 거라 생각한다. 담배가 피고 싶어진다. 피울 수도 없고 담배도 없다. 마지막 외로움조차 그 여유를 빼앗아가 버렸다.


귀에, 속보로 오는 소리가 들린다. 적어도 1개 분대. 길 저쪽을 바라본다. 또냐? 그 뒤에 더 따라올 것 같다. 중대급은 분명히 넘는다. 땅을 치며 누르는 발자국 소리들이 점차 가까워온다. 아무 감정 담기지 않은 눈. 무념무상. 서로가 죽이고 죽기에는 화려하지 않은 결투의 장. 서로의 시체 모두 발견되지 않을 것 같다. 한 10년 뒤에 등산객? 백골이 누군지 알겠어?!


능선길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다, 다시 오른쪽 저 멀리를 돌아본다. 그 유명한 강이 보이는 것 같다. 처음 본다. 도피하고 피하다 보니 원래 섹터에서 은거지가 북동쪽으로 너무 이동했다. 남자는 더 이상 안 가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못 간다. 체력이 아니라 마음이 못 간다.


결심하자... 왔다. 바람소리마저 느껴지지 않는 정적이. 비현실적인 고요. 모든 것이 정지화면처럼 멈췄다. 그리고 거기 자신이 서 있음을 느꼈다. 느낌은 놀라웠다. 갑자기 자기란 존재가 훨훨 타오르며 동상만큼 거대해 보인다. 몸과 마음의 융합. 시간의 결정. 나무. 잎사귀와 풀. 능선 바람. 공기 냄새, 풀 냄새. 푸른 물에 뱃사공 없는 산 아래 강과 저 멀리 들리는 폭음. 하나하나 오진규는 또렷이 기억하고 싶다.


그 모든 것을. 시베리아 벌판에 벌거벗은 몸. 야생 늑대 떼가 온다. 벌거벗은 그는 하나라도 죽이기 위해 날카로운 뼈 조각을 든다. 하나라도 더 찌르겠다. 그 비명소리를 듣겠다. 자신이 무얼 ‘하고 있다’는 걸 또 느끼고 싶다. 자신을 느꼈으면 이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우연과 불확실성에 맡기고 싶지 않다. 누가 자신을 결정하지?...


드디어 길에 그림자들이 나타난다. 거침없는 속보로 오고 있다. 엄지로 자물쇠 자동을 확인한다. 저쪽에서 간나새끼를 본 거네 어쩌네 말한다. 이제 다 잡았다는 식으로 떠들고 있다. 20미터.


‘쟈들이 미쳤어... 죽고 싶어 환장했쓰. 휴~ 10월 29일 02시. 평안남도 대흥군 두만강 아래 어느 산...’

정확한 시간을 알고 싶어 플라스틱 손목시계 야광 분침을 본다.

‘공두 시 공오 분. 조중사님은 아마도 저기 어디서 기다릴지 몰라. 그 양반 그러니까... 가이소. 내가 이제 지역대 후미경계 아임미까.’


10미터. 귀에 목탁소리가 들린다. 맑다. 깊은 산 암자의 목탁소리 청명하게 만추(晩秋)의 수목 사이로 퍼진다. 때가 왔다. 뇌는 분 초를 쪼개 사고를 무한으로 늘인다. 1초가 인생 같고 찰라가 영원에서 중단될 것 같지 않다.


'어무이 잘 계이소. 희야 잘 모시래. 내사 마 삐까뻔쩍했다임미까. 이놈아 인생 마... 불꽃임더. 기분 안 좋아질라 그러네. 허허허허.'


역시, 가장 저미는 것은 허기도 체력 고갈도 물도 밥도 아닌 외롭다... 아무도 뵈지 않는 이름도 없는 곳. 차고 서슬한 바람이 가뜩이나 시린 가슴을 얼린다. 아쉬운 거 없다. 뒤져 염을 당하며, 가족에게 추한 털과 성기와 항문과 상처와 문신을 보이지 않고 화장터 버너 푸른 불에 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살이 흙으로 녹아 백골이 되어도 여기 누가 찾아와주나...


대신 상대가 와주고 있다. 여기는 해골 뼈다귀 군락지는 된다. 시체를 먹고 풀들이 허리까지 자랄 거다. 존나게 반갑다. 얼음장 같은 바닷물에서 두 시간 만에 나온 것처럼 떨린다. 뜨끈한 고무보트 바닥이 그립다.


‘아무 것도 아냐. 우린 이렇게 하라고 배웠어. 내가 용감한 게 아이고, 그냥 이게 다야. 이제 내가 지역대 최종 후미경계야. 나에게 넘어왔어. 날 살리려고 후미들이 죽었고 이제 내 차례가 왔어. 뭐 어쩌라고. 우리 지역대! 내 총소리 듣고 퇴출루트 잘 비벼. 즐거웠다.’


5미터. 3미터. 손가락 방아쇠울로.

‘갈라캄 내를 넘어가라 마 게세끼야.’


몸을 숨겼던 수풀에서 능선 길 정중앙으로, 양발을 넓게 딛는다. 총을 허리 수평, 왼발을 내밀어 구부렸고, 총 자동에 밀리지 않도록 몸을 앞으로 민다. 어슴프레 그림자 다섯 이상.


"아나 여깄다 오진규!"


포효하는 입과 날카로운 송곳니, 야수의 눈, 총을 움켜쥔 팔뚝,

오진규는 섬광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마지막 활동필름을 본다.


마, 지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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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반사 굴절 회절 1 +1 20.09.07 743 22 14쪽
» 후미경계조 5 20.09.04 706 28 11쪽
64 후미경계조 4 20.09.03 691 24 9쪽
63 후미경계조 3 20.09.02 702 23 13쪽
62 후미경계조 2 20.09.01 716 22 13쪽
61 후미경계조 1 +5 20.08.31 786 2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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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선처럼 가만히 누워 2 20.08.25 792 20 12쪽
56 선처럼 가만히 누워 1 20.08.24 869 27 11쪽
55 Rain 6 20.08.21 815 24 14쪽
54 Rain 5 20.08.20 760 24 11쪽
53 Rain 4 20.08.19 760 2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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