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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의 별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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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최근연재일 :
2024.06.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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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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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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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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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선처럼 가만히 누워 5

DUMMY

어이 쪼수. 뭔 말 좀 해봐라.


사수 마지막 교신 어땠냐? 그렇게 눈 뜬 채 입 벌리고 있으면 고참 맘이 좋겠냐. 말 좀 해보라고 나도 외로우니까. 너의 눈을 감겨줄 힘이 없어서 미안하다.


그냥 이런 데 오지 말고 좋은 부모 아래서 대학 가고 예쁜 여자친구 사귀고 때 되면 그냥 입대해서 병장 달지 그랬냐. 딱히 방법이 아니었어. 그러나 넌 최선을 다했다. 넌 훌륭한 특수전통신 조수였다. 다음 생에 똑같은 조건으로 태어나면 병신아. 그냥 잘난 집 돈 펑펑 쓰면서 신나게 놀아. 너의 다음 생은 그러해도 된다. 내가 보증하지. 넌 괜찮은 놈이다.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쫓기다 산중에서 비슷한 놈들끼리 서부영화 혈투가 벌어졌지만, 정말 시원하게 한 게임 떴다. 나도 죽이고 또 죽이고 그러다 맞았지. 그런데 말야. 나 오늘 내 내장을 봤거든. 담당관님이 붕대 다 모아서 감아주었지만 꼭 그러지 않았어도 뭐. 그걸 만져보고 싶었다. 혀로 한번 핥아보고도 싶었지. 진짜 리얼이잖아.


담당관님이 붕대로 감기 전에, 판자집에 우풍 막기 위해 비닐 대고 여기저기 대충 호치키스 박듯이, 드문드문 일단 외과 실로 봉합 비슷하게는 해주었는데, 정식으로 꼬맨 것도 아니고, 이게 붙어서 내 배때지 내장들이 방류되는 걸 막아줄 수 있는 거야?


난 항상 인생에 실감을 못 느끼고 살았어. 내가 사는 이유는 딱 하나였어. 세상은 왜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 니미 그 이유는 무엇이며 왜 인가... 이것은 저것은 나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왜 이따구로 살아가는 인생은 창출되어야만 하는가. 내 잘못인가 어떤 놈이 만들었나. 왜 인간과 지구와 우주는 지멋대로 존재하는가. 왜 이런 생각까지 하는 인간을 만들어 도전을 받으면서 어떤 존재는 제작한 재미나 있는 건가. 아니면 무통제 무방향인가. 고통이 인간 존재의 의미라는 개 같은 소리 말고. 이런 생각을 하면 비사회적인 존재로 만들어 굶어죽게 만드는가. 그냥 만들고 싶으면 無로 만들어 혼자 즐기지. 왜 생각하게 만들고 염병인가. 혹시 만든 주체가 아무도 없으신 것은 아니신가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하지만... 거기까지 내가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 그래서 나는 목표를 하향 조정했지. [나는 무인가 유인가? 나는 나를 어떻게 증명하는가...] 내 안에서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몰라. 전혀 모르겠어. 그러면서 먹고 싸는 게 너무 좋아 니미.


오래 전에 아는 형님이 정신분열로 정신병원에서 들어갔었는데, 약물치료가 잘 돼서 좀 멀쩡해졌을 때 면회 갔을 때 그러더라. 자기가 정상에서 벗어나 정신이 나간 걸 이성적으로 판단을 못한대. 뭐 당연한 거지. 미친 사람이 누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어.


그 시골 병원은 정말 값싼, 사람 입원시키면 안 되는 정말 열악한 곳인데. 말 안 듣는 환자 존나게 팬데. 근데 말야. 개 맞듯이 존나게 맞다 보면 제정신이 순간순간 돌아온다는 거야. 그럴 때 느낀다고 해. 아, 내가 정신이 이상했었구나. 그런 맨정신 판단이 느껴진다는 거야.


그런데 다시 공포와 혼돈으로 돌아가면 그 두들겨 맞으면서 번개처럼 번뜩번뜩 했던 제정신이 또 멀어진다는 거야. 그게 뭔지는 알겠는데 자기가 어떻게 자력으로 거기 돌아가지는 못한다는 거야. 그리고 그 제정신을 또 까먹는대.


난 그 비슷한 번뜩임을 나와 평생을 함께 한 내장을 보고 알았지. 십이지장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검고 초라했어. 생각보다 얇더라. 하지만 봤어. 내 실존을. 사람들이 책 읽고 실존이 어떻다 그러지만, 책으로 모두 정신 차려서 그렇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면, 그런 사람이 정말 다수라면 뭐 이런 전쟁까지 났겠냐?


존나게 죽이고 보면 누가 왜 죽이기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도 않아. 상대를 죽이고 내가 사는 게 더 중요한 거지. 이젠 사람 죽이는 게 정상적인 행동처럼 돼. 언젠가부터 마음이 충돌하더라고. 이래도 되는 건지.


전쟁터도 사실 똑같은 것 같고, 평시라고 해도 우린 세상이라는 여러 정신병원 중 하나에 수용된 거 같아. 누가 제정신이라고 증명하겠어? 제정신을 우리가 어떻게 정의하지? 어떤 놈이 자기가 완전한 제정신이라며 표본을 삼으라고 자신하겠어? 그 병동 안에서 서로 싸우고, 병원끼리 싸우는 거지. 니미 더 어떤 멋진 말이 필요해? 우리 인생이, 우리 사회가?


병원(방식)의 차이. 어떤 사람들은 무난함을 택했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무난하지 않은 것에서 뭘 찾으려 했어. 찾기는 뭘 찾어. 원래 없었어. 모든 답은 다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 답을 찾는 시늉으로 해프닝을 평생 동안 하는 거야. 하지만 조심해. 무난함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면 다시 자력으로 못 벗어날 수도 있어. 평이한 행복으로 다시 돌아가기 힘들 수도 있다고. 그 반대로, 무난함을 택한 사람들은 속으로 칼을 갈면서 평생 참으며 사는 거에서 못 벗어나고.


다 스타일대로 살다 가는 거야. 물론 뒤질 때는 공통적으로 더러울 걸. 이게 다야? 내가 이게 다야? 이게 끝이야? 의미가 있었어? 그럴 테지.


배가 완전히 젖었네. 이 봐 의무, 뭐해? 혈장 없냐? 나 피 많이 흘렸어. 눈이 가물가물해진다고. 헌데, 누가 죽고 누가 산거야? 진규는 생존한 거야? 살았으면 좋겠는데. 내 사소한 주둥아리질로 전우가 죽었어. 하여간, 내가 뭘 맞다고 강하게 주장할 때 내가 가장 위험해. 나만 위험하면 그만인데, 항상 곁에 사람이 힘들어지지.


몸을 돌려보자. 인간답게 쉬려면 누워야지. 힘을 써보자. 아, 배때지... 아파서 기절해 죽으면 너무하지 않아? 의무! 백회부터 용천까지 침이라도 놔줘봐.


가슴이 답답하고 분통이 또 올라온다. 제기랄, 왜 내가 살고 다른 사람은 죽은 거지? 가장 멋지고 괜찮은 놈들이 왜 먼저 가야하는 거지? 순번이 좀 합리적이면 어디 덧나나?


이제 나 어떻게 해? 어떻게 해야 돼? 일단 쉬고 일어나서 생각할까? 자고 나서 일어났더니 죽은 거야? 말이 좀 이상하네. 이건 사후 영혼이 존재한다는 전재가 필요하잖아. 난 아직 확신은 없어. 내가 뭘 알겠어. 고민하는 바퀴벌레 하나 정도지.


다시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자고 일어나니 약간이라도 괜찮아질 수도 있나? 피는 멈출까? 찢어진 복부는 조금씩이라도 붙는 거야? 붕대는 정말 못 풀겠다. 내 속이 쏟아지면서 죽고 싶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 훈련받지 않았어.


그래. 내 마음으로 포기하지는 말자. 내가 상상한다고 이뤄지고 내가 곱씹는다고 과거가 바뀌나? 아무리 떠들어도 하나의 작은 그 정도일 뿐이야. 하여간 이런 생각을 하는 존재로 만들어준 건 그게 누구였든 감사해. 이 생각하는 자체가 얼마나 훌륭해. 본능만 있는 짐승이었다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깨닫지도 못할 거 아냐. 그래, 이건 의미가 있군. 감사해.


일단 쉬고, 뒤지면 뒤지는 거고. 깨어나면 어떻게라도 하자. 모 아니면 도. 가면 가고 안 가면 뭐라도 한다. 그래. 좋은 말이 있잖아. 그거야. 안 되면 되게 하라. 그래, 난 포기하지 않는다. 왜 포기 안 해? 포기하면 재미 꽝이야. 포기하면 그게 무슨 재미야! 죽음을 체념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눈을 감고 기억의 저편으로 잠을 청하며 기다려보자.


하지만,

신이시어,

새로운 아침의 동이 터 올 때, 나를 깨어나게 하소서.

신이시어,

내가 더 할 일이 있다면 나를 까먹지 말고 깨우소서.


내가 깨어날 운명이 아니라면,

내가 고통을 준 사람들에게 사과를 전해주시고,

내가 지은 죄는 하나도 남김없이 벌하여 주시며.

세상에 필요한 다른 전우들을 구하여 주소서.


하지만 신이여,

솔직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단 하루라도,

더 살고 싶습니다.

단 하루,

24시간만이라도...




작전참모는 두꺼운 보고철을 들고 사령관에게 보고 들어갈 준비를 한다. 질문이 있을까봐 잠시 서류를 들춰본다. 사실, 차마 읽을 수가 없는 내용들이다. 어제도 오늘도 넘어간 대원은 줄어들고 목숨을 건 레이스를 벌이며 무선전문에 단순한 문구로 말하고 있지만, 살려달라는 아우성 같다. 이런 전 세계적으로 어리석고 무자비하며 대책 없는 특수전이 어디 있나. 퇴출도 재보급도 없다니. 데리고 올 방법이 없다니...


참모는 맨 마지막 어느 지역대에 관한 내용을 보다가 두 서류의 앞뒤 순서를 망설였다. 사령관은 대대 단위로 묶어서 보고하는 것에 크게 분노했었다.


“당신 지역대 생활 해봤어? 보고를 대대로 묶어? 당연히 지역대가 보고 기초 단위가 되어야 하고, 중요한 건 팀 단위로도 자세하게 보고해. 어떻게 피 흘리는 부하들의 보고를 이렇게 대대로 묶어 대충대충 몇 마디 말로 간략하게 정리할 수가 있어? 이건 보고서가 아니라 행동하는 혈서야. 죽어가는, 그리고 데리고 오지도 못하는 내 부하들의 얘기야. 북에선 동지들이 이러고 있는데 식당 밥 먹으면서 스토아 철학이라도 떠올려? 단 한 명에 관한 것이라도 있는 그대로, 전문 그대로 완전한 상태로 모두 보고서에 넣어서 가져오라고! 알겠어?”


마지막 지역대 것은, 어느 것을 앞으로 넣고 어느 것을 뒤로 넣어야 하나. 작전참모는 망설였다. 잠시 망설이다, 사령부 수신 전문을 앞으로 하고 송신 전문을 맨 뒤로 넣었다. 정확한 교신 시각을 보니 지역대 통사가 보낸 전문이 먼저 수신되었고 그 다음 사령부 전문이 송신되었다. 사령부에서 보낸 전문은 사령관도 잘 아는 것이니 굳이 앞에 넣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군복 깃을 펴고 상의를 펴고 발을 구른 다음 사령관 실에 노크한다.


---------------------------


특수전사령부 예하

00여단 02대대 5지역대 통신보고서


사령부와 00-02-5지역대 간 송수신한

마지막 전문에 관한 사항과 분석.


----------------------------


송신 : 00여단 02대대 5지역대

수신 : 특수전사령부 작전참모/전시작전실.


내용 : (전문 그대로)


10. 29 지역대 목표 타격 후 적 추격.

도피탈출 중 대규모 적과 교전. 적 정규군.

적 포격. 30일 새벽 2차 교전. 분산탈출.

지역대장 7~8중대장 전사. 현 생존 확인 2.

차후 지시 요망. 안되면 되게 하라. 단결.


분석 : 수차례 5지역대 교신 시 통사 피아식별이

있었고, 00여단 통신대로 수신된 전문으로 보면,

여단 통신대는 지역대 통사를 중사 조충환으로

추정함. 조중사와 1명이 생존한 것으로 추정.


이후 3일간 무선망에 등장하지 않음. 5지역대

는 전투불가 상태로 추정. 대대 규합에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보임.


---------------------------------


송신 : 특수전사령부 작전참모. 전시비상작전실

수신 : 00여단 02대대 예하 3개 지역대 공통


내용 : 전 대대는 20XX년 10월 30일 23시까지

좌표 39857987로 규합하여 대대 통합작전으로

전환. 17km 북방에서 목격된 적 장거리 미슬

포대들을 찾아 습격 섬멸 파괴하라. 반드시 제거

해야 할 주요 이동목표임. 최선을 다해 반드시

제압하라. 재보급과 퇴출 일정 노력 중. 통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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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44 히힛히힛하
    작성일
    20.08.29 22:00
    No. 1

    자까님 글이 술술읽힌다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꼈슴돠 . 자까님 홧팅임돠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조휘준
    작성일
    20.08.30 03:32
    No. 2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6 SW01
    작성일
    22.11.26 21:26
    No. 3

    지금에야 알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뭔가 너무 처절하네요. 영상으로나 보던 그런 환상속 멋진 특수전이 아니라, 너무나도 극한이고 처절한 현실적인 특수전이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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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후미경계조 5 20.09.04 703 28 11쪽
64 후미경계조 4 20.09.03 686 24 9쪽
63 후미경계조 3 20.09.02 699 23 13쪽
62 후미경계조 2 20.09.01 713 22 13쪽
61 후미경계조 1 +5 20.08.31 783 24 11쪽
» 선처럼 가만히 누워 5 +3 20.08.28 795 24 12쪽
59 선처럼 가만히 누워 4 20.08.27 725 24 11쪽
58 선처럼 가만히 누워 3 20.08.26 728 2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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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선처럼 가만히 누워 1 20.08.24 863 2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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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Rain 4 20.08.19 754 25 12쪽
52 Rain 3 +3 20.08.18 802 2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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