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조회수 :
231,510
추천수 :
5,519
글자수 :
1,674,356

작성
14.03.04 18:59
조회
1,799
추천
43
글자
25쪽

4. 고통을 먹는 자 (13)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3.

이날 밤 시에니투스에선 축제가 벌어졌다. 축제라고 해서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연극단이 길거리 공연을 하는 그런 평범한 모습은 아니었다. 무법자들의 도시엔 불꽃놀이를 할 화약이 없었고, 공연을 준비하는 연극단도 없었다. 일단 해적이나 산적들 자체가 그런 걸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축제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불꽃놀이 대신 기름을 마시고 불줄기를 뿜어내는 기예를 구경했고, 연극대신 온갖 힘자랑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팔씨름, 무거운 술통 들고 뛰기 등등.

그러나 일반 축제와 같은 것도 있었다. 음식은 끊임없이 조리되어 나왔고, 텅 빈 술통이 곳곳에 나뒹굴었다. 축제를 즐기는 마음만은 같았다.

이들을 지켜보는 위즈는 간단한 감상을 입에 올렸다.

“잘들 논다.”

위즈는 지금 여관의 지붕에 드러누워 있었다. 경사가 완만한 지붕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빌헬름텔은 창가에 기댄 채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차라리 저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위즈도 알고 있다. 이 축제는 뭔가 축하할 일이 생겨서 열리는 게 아니다. 시에니투스의 무법자들 모두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해 연 것이다.

“지금쯤이면 연합장들도 결정을 내렸겠지요?”

“안 봐도 번하죠. 분명 보복하기로 했을 겁니다.”

“하긴…이렇게 축제까지 벌이는 걸 보면 답은 나와 있지요.”

즉 지금의 난장판은 이름만 축제이지, 실제로는 내일부터 벌일 전투에 앞서 용기를 북돋는 행사였다.

이들이 싸울 상대는 바하르칼 용병.

싸움의 빌미는 저쪽이 먼저 제공하였다. 당하고도 가만있는 건 이들답지 않은 일이다.

이들은 해적이며 산적들이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존재여야 한다.

위즈는 지붕에서 내려왔다.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야겠어요. 상어들을 만나러 갈 건데, 빌헬름텔님은 어쩌시겠어요?”

“저는 축제를 더 즐기다 로그아웃하겠습니다. 오늘은 좀 피곤하군요.”

“그럼 내일 보죠.”

빌헬름텔과 헤어진 위즈는 상어들과 약속한 곳으로 이동했다. 연합장들의 회의에 참석하면 좋겠지만, 이방인의 신분으로 연합장을 만나는 건 힘들었다. 그렇다고 핏스톤을 이용해 정탐할 수도 없었다. 핏스톤은 지금 지하의 창고 생성작업을 마무리 중이다. 파낸 흙을 보이지 않는 먼 곳에 버리는 게 의외로 까다로워 밤을 새워야 한다고 했다.

위즈는 외딴 골목길에서 커다란 덩치의 모습을 발견했다.

“황소상어인가?”

발을 내딛으려던 위즈의 눈에 황소상어와 함께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귀상어였다.

위즈는 왠지 지금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낮에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이상했지. 설마? 오오!’

위즈는 즉시 지붕에 올라갔다. 몰래 지켜볼 생각이었다. 이렇게 으슥한 골목에서 한밤에 남녀가 밀회를 즐길 이유란 별거 없는 법이다.

헌데 위즈 말고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지붕에 모여 있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세게 나오는데?

“귀상어 녀석, 오늘은 화장까지 했다. 후후후. 녀석의 방에 향수도 살짝 가져다 놨으니 그것도 뿌렸을 거야.”

“황소상어 뒷걸음질 치는 거 봐라.”

“나라고 해도 당황했을 거다.”

“아아 저 녀석 얼굴을 코앞에서 봐야하는데.”

위즈는 그들 뒤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누구…….”

“쉿! 들키면 우린 모두 죽는다.”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는 흉터투성이의 사내. 흉상어였다. 그러고 보니 지붕에 엎드린 채 고개만 배꼼이 내놓고 있는 자들은 전부 상어들이었다.

“다들 뭐하는 겁니까?”

“뭐긴 뭐냐? 씨를 뿌리고 가꾼 농부의 심정으로 바라보는 거지.”

“지금 딱 좋게 익었어.”

“수확할 때다.”

위즈는 조금 전 이들이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들의 의도를 알아차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들은 황소상어와 귀상어를 짝지어주려 하고 있었다.

‘골목에 들어섰다면 미움 받았겠군.’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황소상어와 귀상어의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이, 이봐……대체 왜 그러는 거야?”

황소상어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가는 눈치다. 전형적인 둔한 남자의 귀감이라 할만 했다. 지켜보던 위즈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동안 귀상어가 했을 고생이 눈에 선하다.

“나, 어…어때?”

떨리는 귀상어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작았다. 하지만 축제의 왁자지껄함과 격리된 골목은, 귀상어의 작은 목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황소상어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음…화장했구나.”

“으응…….”

“여, 연극 준비 중이야?”

“……응?”

위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소상어와 귀상어의 대화에 미묘한 어긋남이 있다.

화장한 여자에게 연극을 하냐고 묻다니. 화장과 분장은 엄연히 다른…….

‘설마?’

위즈는 몸을 일으켜 후닥닥 지붕을 내려왔다. 인기척을 느낀 귀상어가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지붕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상어들을 발견했다.

“너희드을…….”

귀상어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본 상어들은 자지러졌다.

“끄아아아악!”

“사람 살려! 어흐흐흐…….”

상어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귀상어는 당장이라도 지붕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그때 골목에 들어선 위즈가 귀상어의 손목을 붙잡았다.

“넌 또 뭐야?”

귀상어가 으르렁대거나 말거나, 위즈는 할 말을 아끼지 않았다.

“분장과 화장을 착각한 것 같군요. 화장품은 어디 있죠?”

“뭐?”

“황소상어가 왜 저런 표정을 지을까요? 상어들은 왜 놀라서 자빠지고요?”

위즈는 귀상어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건 화장이 아니라 귀신분장이에요.”

“귀, 귀신 분장?”

귀상어는 뻣뻣한 고개를 돌려 황소상어를 바라보았다. 황소상어가 움찔거리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문제를 인지했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인이었다. 헌데 그녀의 화장은 그걸 너무나 부각시켰다.

눈두덩은 시커먼데 그 속에 파란 눈동자가 번뜩인다. 광대뼈는 더욱 튀어나와 각이 져 보이고, 입술은 너무 빨개서 피를 흘리는 것 같다. 거기에 더해 분칠을 너무 해대서 피부는 창백한 반면,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불이 붙은 것 마냥 선명하다.

이런 꼴로 한밤중의 골목에 서 있으니 당연히 귀신처럼 보이는 것이다.

“빌어먹을!”

귀상어는 도망치듯 골목을 빠져나갔다. 위즈는 황소상어에게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라 말해주고는 귀상어를 쫓아갔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울렸다.

“커헉! 귀, 귀신이야!”

“으아악!”

술이 확 깬 얼굴로 도망치는 자들 뒤로 맥주통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귀상어는 맥주통에 머리를 처박았다. 꿀꺽거리는 게 그 상태로 맥주를 마시는 중인 것 같았다.

“이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위즈는 귀상어의 머리를 끄집어내고는 곧장 얼굴을 닦아냈다.

“알고 한 것인지는 몰라도 맥주거품은 화장 지우기는 좋지요.”

꼼꼼히 얼굴을 닦아내고 보니 귀상어의 얼굴은 울상 짓고 있었다. 하지만 위즈는 가차 없었다.

“울 건지 말건지 한 가지만 해요.”

“너…참 나쁜 놈이구나. 우는 여자에게 윽박지르기나 하고.”

“화장품 어디 있어요?”

“어쩌려고?”

“내가 해줄 테니까, 앞장서요.”

“너 남자잖아? 화장할 줄 알아?”

“용병생활하면서 변장을 해본 적 있으니까요. 적어도 당신처럼 귀신분장을 하진 않아요.”

“크윽……너 내가 열 받아서 칼질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죽일 거면 진즉 죽였겠죠. 하지만 그럴 것 같진 않군요. 이번엔 귀신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줄 테니까 어서요.”

“여자로 만들다니 무슨 소리야!”

얼굴을 붉히며 귀상어가 후닥닥 물러섰다. 위즈는 팔짱을 끼며 억지로 그녀를 일으켰다.

“장난할 때가 아니에요. 황소상어는 더 이상 해적으로 살아가지 못해요. 날이 밝으면 떠나겠지요. 그래서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화장까지 한 거잖아요. 이대로 후회를 남길 거예요?”

“네가 상관할 게 아니잖아!”

“쫌! 사람이 호의를 베풀면 받아들여요.”

바득바득 위즈가 우기고, 어르고 달랜 끝에 귀상어는 화장품을 가지고 나왔다. 구성품을 훑어본 위즈는 문제없겠다고 생각했다.

‘게임이라 해도 현실과 비슷하군.’

위즈는 귀상어의 얼굴을 캔버스 삼아, 화장수를 뿌리고 분칠을 하며 그림을 그려나갔다.

잠시 후 조금 전과 달리 농도가 옅어진 화장이 완성되었다. 거울을 본 귀상어는 불만스러워했다.

“이건 그냥 한 번씩만 손 본거 아냐? 이래선 화장을 안 한 거나 다름없잖아?”

“어허. 초보가 고수의 케어를 받았으면 ‘고맙습니다’ 할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요? 지금 당장 황소상어에게 가 봐요. 예쁘다고 당장 춤추자고 할 걸요?”

“예, 예뻐?”

“원판이 예쁘니까 이정도면 충분해요. 화장을 두껍게 하는 이유는 단점을 가리기 위한 건데, 당신은 그런 게 없으니까……뭐하고 있어요?”

“어?”

“황소상어한테 안 가요?”

“그런 추태를 보이고 당장 갈 수 있을 리 없잖아!”

“하아……그럼 내가 억지로 끌고 가는 걸로 할게요.”

“뭐, 무슨!”

위즈는 귀상어를 우악스럽게 끌었다. 귀상어는 반항한다고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맥 빠지는 어설픈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

골목에 도착한 위즈는 귀상어를 쏙 밀어 넣었다. 황소상어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오는 길에 귀상어를 만났습니다. 귀신은 소금을 뿌려 쫓아냈고요.”

위즈가 입에 올린 귀신이, 서툰 화장으로 무시무시했던 귀상어였음은 당연하다. 귀상어는 자신을 놀리는 말을 듣고 발끈했다. 그녀는 허리춤의 커틀라스를 붙잡고 돌아섰다.

“이 자식…….”

그때 황소상어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 귀상어 맞아?”

어딘지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에 귀상어는 고개를 팩 돌렸다.

“그래! 나 못생긴 거 아니까 쫌!”

“아니……그게 아니라…너 오늘…….”

큼지막한 손이 귀상어의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귀상어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다. 그녀도 바보가 아닌지라 황소상어의 홀린 듯한 눈이 무얼 말하는지 정도는 알았다.

“뭐, 뭐하는 거야! 바보 멍청아!”

정강이를 차인 황소상어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위즈는 빙긋 웃었다.

“보기 좋구나! 이제 다들 철수 하시죠! 올해 농사는 풍작일 테니까요! 농·부·님·들!”

위즈는 상어들이 숨어 있는 지붕에 대고 소리쳤다. 상어들은 투덜거리면서 지붕에서 내려왔다.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미 들키고도 달라붙어 있을 배짱은 없었다. 시에니투스에서 귀상어와 원한을 사고도 편히 잠을 이룰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눈이 벌게진 귀상어가 쫓아오는 건, 그만큼 두려운 일이었다.

“어? 아직 안 내려오신 분도 계시네?”

위즈는 반대편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밤공기가 찹니다! 이제 그만 내려오시죠?”

흉상어가 물었다.

“저기 누가 숨어 있어?”

“네.”

“누군데?”

숨을 크게 들이쉰 위즈가 입을 벌렸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연합장님들! 체통을 시키시죠!”

기왓장이 떨어졌다. 위즈는 한걸음 옆으로 움직여 그것을 피해냈다. 누가 있는 건 분명했다.

“진짜 연합장들이라고?”

“글쎄요…나중에 물어보시던가. 저라면 안 그러겠지만.”

“어째서?”

위즈는 말없이 양손의 검지를 세운 주먹을 머리 양 옆으로 가져다댔다. 한마디로 뿔이 난다는 표현.

상어들은 파랗게 질려 흩어져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위즈는 헛기침을 하며, 귀상어에게 다가섰다.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한데, 하나만 물을 게요.”

“……뭔데?”

“바하르칼과 싸우기로 결정한 건가요?”

“그래. 바하르칼 녀석들이 먼저 싸움을 걸었으니까.”

“그렇군요. 이크!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귀상어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낀 위즈는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갔다.

‘이젠 알아서 잘하겠지.’

묵고 있던 여관에 들어간 위즈는 방이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메신저창도 비어있다.

“빌헬름텔님은 로그아웃 하셨구나.”

방문 너머로 시끌벅적한 외침이 들려왔다. 주로 ‘~를 위하여’ 같은 외침이 들리고, 술잔을 비우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나도 맥주 마신지가 꽤 되었는데.”

현실에서 편재는 다이어트를 위해서 금주 중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게임, 여기서 말술을 퍼마신다고 한들 현실의 육체에는 아무런 해도 없다.

식당으로 나온 위즈는 맥주를 한잔 시켜 가지고 왔다. 지하저장고에서 퍼온 맥주는 시원했으며, 잔에는 금세 작은 이슬이 맺혔다. 더 오션에서 맥주를 수차례 마셔보았지만, 이렇게 한밤에 흥취가 돋아 마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위즈는 기대가 컸다.

“으히히히히!”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은 위즈는, 불청객들이 너덧 명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위즈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중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기운이 달려서 초저녁부터 잠에 곯아떨어졌어야 할 영감님은 지팡이에 체중을 실은 채 서 있었고, 사자갈기처럼 마구 내뻗친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인은 육포를 질겅이고 있었다.

“연합장님들이 여기까지 찾아오시다니 무슨 일이신지?”

“우리는 은원을 분명히 하는 자들이다.”

“그렇겠지요.”

위즈는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흥이 식어서 그런지 맥주 맛은 그저 그랬다. 이럴 바에는 식당에서 마시고 올 것을 그랬다고 위즈는 후회했다.

“제가 의심스러우신 거로군요?”

“사실, 상황이 그렇다. 오늘 하루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 바하르칼과 손잡은 배신자들이 나타났고, 그들을 잡는 데 도움이 된 제보가 전해졌다. 그것도 아슬아슬한 시간차를 두고서. 그리고 처형당한 황소상어가 세 번이나 되살아났다. 또한 시에니투스가 공격당하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물자를 어찌어찌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일에는 이방인 W가 관련되어 있었다.”

“제가 연합장이었어도 의심했겠네요.”

“할 말은 그것뿐인가?”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위즈는 잔을 들어 맥주를 마저 비웠다.

‘역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를 잘했어.’

이들에게 접근하고 배신자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분명 노리는 목적이 있어서이다. 하지만 위즈는 이들에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내부의 적을 솎아낸 뒤라서 다들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설사 도움을 준 사람이라 해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걸로 안녕이다.

‘빌헬름텔님은 이런 내가 답답했겠지만……결국은 이게 정답인 것 같군.’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드러내지 않자 연합장들은 직접 찾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즈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원래 목적은 레미라를 침공하는 바하르칼을 귀찮게 해주는 정도의 견제. 시에니투스의 모든 무법자들이 보복을 시작하면,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닐 것이다.

‘이미 목적은 달성했다. 난 무조건 발뺌해야 한다.’

위즈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연합장들을 둘러보았다.

“오늘 일어난 일들을 계획한 사람이 저라면, 뭔가 이득을 얻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제가 여러분들에게 뭔가를 요구 했습니까? 아, 황소상어의 일은 빼두자고요. 그는 자기 갈 길을 갈 테니까요.”

“자네가 뭔가 요구를 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미 뭔가를 얻었을 거라 생각하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바하르칼을 견제할 무력이라거나.”

위즈는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위즈는 다시 느긋해졌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비밀리에 배신자를 만난 바하르칼 용병을 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건, 수정구에 담겨진 거래장면이었지. 여기 계신 그랄누타이님께서 말하시길, 상당히 가까이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하더군.”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머리 중년인의 어조는 단정적이었다.

“미리 좋은 장소를 선점한 일행이 있었겠지. 한마디로 우연히 찍은 게 아니라, 사전정보를 얻었다는 뜻이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게 이상한 일일까요? 대다수 이방인들은 바하르칼을 적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바하르칼 용병과 싸울 준비를 하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게 이해하면 문제될 일은 아니지. 그렇다면 황소상어를 처형할 때 끼어든 건 어떻게 생각하나? 그때 자네는 배신자를 처리할 시간이 아니라며, 시에니투스가 공격받을 거라 했지.”

“사실이니까요. 설마하니 아직까지도 배신자들을 처형하는 걸로 모든 일이 끝나리라 생각하십니까? 분명 시에니투스는 공격당할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이방인이 나서서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배신자들을 처분하는 일이 끝나고, 머리가 식으면 다들 그 문제에 생각이 미쳤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충분한 대비를 할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 잘된 일 아닌가요?”

“그 벌어들인 시간 덕분에, 바하르칼에 대한 보복을 결정할 수도 있었지.”

“보복 역시 언젠가는 할 일이었잖아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군.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사자머리의 중년인이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노인은 호신용으로 차고 다니던 숏소드를 풀어서 내주었다. 사자머리의 중년인은 숏소드를 뽑아들고 허공에 몇 번 휘둘러보더니, 예고도 없이 위즈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숏소드가 어지러이 휘둘러지며 잔상을 남겼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위즈는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이도 이 공격은 위즈에게 닿지 못했다. 지나치게 짧게 휘둘렀기 때문이다.

“이 검술은!”

위즈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알아보겠나?”

사자머리의 중년인이 씨익 웃었다.

‘어떻게 이걸 까먹겠어?’

크레센토를 지배하는 미노클의 왕가에는, 나이어린 왕족에게 ‘유린’이라는 미들 네임을 부여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초대 국왕이 남긴 유훈으로, 생전에 저지른 과오에 대한 사과를 하기 위함이었다. 사과 받는 대상은 다름 아닌 witch. 초대 국왕의 친누나였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위즈는 witch와 초대 크레센토 국왕 간의 오해를 풀어주게 되었다.

그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알현실로 2번째의 무단난입을 시도하던 당시.

왕국기사가 죽일 기세로 휘둘러대던 검!

그 검은 정확히 12번을 베어냈고, 2500이나 되는 데미지를 입혔다. 만약 스톤스킨이 걸린 로브를 입지 않았다면, 위즈는 결코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크레센토 왕국기사의 검법 아닙니까? 어떻게 시에니투스의 연합장인 당신이?”

“당연히 ‘12회 연속 베기’를 배웠기 때문이지.”

“당신이 사략해적?”

“이 방에 있는 모두가 그렇지. 아, 엄밀히 말하면 난 산적이다. 나머지가 사략해적이지.”

“너무 쉽게 정체를 알려주는 게 아닙니까?”

“허. 자네가 해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안 그런가, 이방인 위즈?”

이미 정체까지 까발려진 상황이다. 위즈는 두 손 두 발 들어버렸다.

“알았어요. 알겠다고요. 여러분들 말대로 바하르칼을 견제하고 싶었습니다. 놈들이 레미라를 치면, 힘이 강해질 거고 세상의 모두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테니까요. 됐습니까?”

“암. 암. 그래야지. 솔직해서 좋군.”

“그런데 제 정체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위즈의 질문에 답한 것은 잠자고 있던 노인이었다.

“그야 왕자님이 주신 반지를 끼고 있었으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위즈는 거무튀튀한 반지를 매만졌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도 않는 물건이, 갑자기 언급되자 위즈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은 픽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반지 내가 만든 거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지.”

이야기가 이렇게 되자 위즈는 처음부터 누군가의 각본대로 움직여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그건 착각에 불과했지만.

‘가만 내가 이 노인을 만난 건…….’

위즈가 노인을 처음 본 건 저항하는 바하르칼 용병들과 한창 싸우고 있을 때였다. 그때 노인은 귀상어와 함께 합류하여, 스톤월로 바하르칼 용병들의 발을 묶어놓고 있었다.

“그럼…내가 여자 모습을 하고 있을 때부터……?”

“당연하지. 하지만 뭔가 사정이 있으려니 해서 굳이 이야기 하진 않았다.”

“정체를 숨기려고 별짓을 다했는데 허무하군요.”

“모르는 체 하는 게 더 힘들었지. 어째서 그런 대단한 일을 하고도 숨기려 하는가? 덕분에 사략해적들은 전력을 보존했고, 쓸데없는 상잔도 피해갈 수 있게 되었어. 이제 남은 건 바하르칼의 음모를 분쇄하는 일 뿐이네.”

위즈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렇게 대놓고 칭찬을 받으니 쑥스럽다. 공치사의 말이 몇 마디 오간 뒤 노인이 제의를 해왔다.

“자네가 원한다면 레이스단의 기함에 탑승시켜주지. 압도적인 승리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거야. 어떤가?”

배에 태워주겠다는 제안에 위즈는 기꺼워했다. 어차피 싸움이 벌어지면 일반적인 여객선이나 화물선으로는 지나가기 힘들 게 뻔했다. 그렇다면 군함이나 마찬가지인 해적의 배를 타고 가는 게 나았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의 편이나 마찬가지인 크레센토의 사략해적들이다.

하지만 곧 위즈는 이게 기꺼워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사략해적들이 앞 다투어 자신의 배에 타기를 권유해온 것이다.

“하하. 그랄누타이 제독의 배라면 특등석일 겁니다. 하지만 내 배도 제법 괜찮은데 한번 둘러보는 게?”

“내 배는 돛만 12개가 달려 있지. 속도는 내 배가 압권일 거요.”

“산적이라 배가 없다는 게 슬프군.”

노인-그랄누타이를 비롯한 이들이 위즈에게 보이는 태도는 호감 그 이상이었다. 위즈는 그 점이 살짝 부담스러웠다. 자신이 한일이 대단한 일임엔 분명하나, 이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떼어줄 것처럼 구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어허. 그만들 하게. 미노클 왕가의 은인께서 난감해하고 있지 않은가.”

“유린에 대한 일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당연한 일이지 않나. 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300년의 시간을 넘어 화해한 남매의 이야기를 듣고, 난 가슴이 벅차올라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네.”

“아……그렇군요.”

다들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위즈는 생각했다.

‘미노클 왕가를 떠받드는 모양새가, 아이돌가수에 열광하는 니트족을 보는 것만 같다. 하긴, 사략해적이 되고나서도 딴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하니 당연하겠지.’

이들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본 위즈는 그랄누타이 제독과 함께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나머지 연합장들이 아쉬워했지만 반대는 없었다. 사략해적임에도 제독이라 부를 정도로 운용하는 함선의 숫자가 많았고, 무엇보다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함대라서 비교적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황소상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무래도 시에니투스의 일원으로 활동하진 못하겠지.”

“방법이 없겠습니까?”

“글쎄……과오를 씻을 만한 업적을 세우거나, 누구도 과거를 입에 올리지 못할 정도로 커버린다면 몰라도. 지금으로선 여길 떠나는 수밖에 없네. 그런데 그건 왜 묻나?”

“귀상어가 불쌍하잖아요. 기껏 화장까지 하고 나섰는데. 황소상어랑은 영영 이별이니.”

“그거야 당사자들끼리 해결할 문제지.”


◇◇◇◇◇◈◇◇◇◇◇◇◈◇◇◇◇◇◇◈◇◇◇◇◇


“맥주나 한잔 더 하고 로그아웃 할까나.”

위즈는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여관까지 찾아온 연합장들은 모두 돌아갔다.

떠들썩한 축제분위기도 이제 파장이었다. 다들 곤드레만드레 취해서는 아무데서나 엎어져 잤다.

물론 아직까지 버틴 주당, 아니 주신(酒神)도 있었다.

“어이! 이봐! 벌써 뻗은 거야?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위즈는 막 담겨져 나온 맥주를 마셨다. 이젠 연합장들도 없고, 찜찜했던 일들도 모두 처리했다. 마음이 느긋해지자 비로소 맥주의 알싸한 맛이 혀를 자극해왔다. 입가에 묻은 맥주거품을 핥으며 위즈는 중얼거렸다.

“누군지 몰라도 아주 밤을 샐 기세네.”

고래고래 목청껏 불러재끼는 노랫소리가 가까워졌다. 여관의 출입구 바로 앞이다. 대체 그 주신이 누군지 얼굴이 궁금한 위즈는 고개를 길게 뺐다.

달칵.

만화 속에서나 볼법한 큼지막한 살코기가 붙은 통구이를 든 사람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그 순간 위즈에게 맥주를 내준 주방장이 갑자기 탁자에 엎어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응?”

위즈는 잠시 동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거대한 통구이를 뜯어 먹던 사람이 갑자기 위즈를 가리켰다.

“너!”

“귀상어?”

주방장이 괜히 엎어져 잔 게 아니었다. 뭔가 귀찮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에 위즈의 엉덩이는 벌써부터 뒤로 빠지고 있었다. 귀상어는 허리춤에서 커틀라스를 뽑아들었다.

“후헤헤! 황소상어가 기다려 달랜다! 반드시 이번 보복에서 공을 세워서 당당히 찾아오겠다면서!”

“자, 잘 됐네요.”

“그런데 나랑은 뽀뽀도 하지 않고 가버렸어! 왜 그랬을까? 응? 왜지?”

귀상어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글쎄요오?”

위즈는 의자에서 내려와 뒷걸음질 쳤다. 귀상어가 커틀라스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지금 보니 커틀라스의 궤적이 12번의 베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귀상어도 왕국기사의 검법을 배운 것이다.

“네가 화장을 개떡같이 해놔서잖아!”

“으아악!”


작가의말

귀상어의 삽화 있습니다.

https://blog.munpia.com/gazha/category/287720/post/45075

제 서재의 좌측 게시판의

또 다른 셸터 <자료실>에서

4. 고통을 먹는 자 (13) 관련 검색 해보시면 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또 다른 셸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 +3 14.04.17 1,767 33 21쪽
9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 +2 14.04.16 1,427 28 23쪽
92 4-(ED) +1 14.04.12 1,451 28 22쪽
91 4. 고통을 먹는 자 (38) +5 14.04.10 1,397 26 25쪽
90 4. 고통을 먹는 자 (37) +3 14.04.07 2,295 54 31쪽
89 4. 고통을 먹는 자 (36) +3 14.04.04 1,245 35 22쪽
88 4. 고통을 먹는 자 (35) +2 14.04.02 1,327 30 26쪽
87 4. 고통을 먹는 자 (34) +1 14.03.31 1,168 26 22쪽
86 4. 고통을 먹는 자 (33) +1 14.03.29 1,034 31 22쪽
85 4. 고통을 먹는 자 (32) +1 14.03.28 872 21 20쪽
84 4. 고통을 먹는 자 (31) +2 14.03.27 1,124 31 20쪽
83 4. 고통을 먹는 자 (30) +2 14.03.26 1,398 25 21쪽
82 4. 고통을 먹는 자 (29) +1 14.03.25 1,415 29 22쪽
81 4. 고통을 먹는 자 (28) +1 14.03.24 1,979 45 25쪽
80 4. 고통을 먹는 자 (27) +2 14.03.22 2,981 118 36쪽
79 4. 고통을 먹는 자 (26) +1 14.03.21 1,205 25 24쪽
78 4. 고통을 먹는 자 (25) +2 14.03.20 1,708 34 24쪽
77 4. 고통을 먹는 자 (24) +3 14.03.19 2,094 35 25쪽
76 4. 고통을 먹는 자 (23) +2 14.03.18 1,702 27 27쪽
75 4. 고통을 먹는 자 (22) +3 14.03.17 2,398 60 21쪽
74 4. 고통을 먹는 자 +21화 +2 14.03.17 1,605 29 13쪽
73 4. 고통을 먹는 자 (21) +2 14.03.15 1,261 30 16쪽
72 4. 고통을 먹는 자 +20화 +2 14.03.15 1,234 40 12쪽
71 4. 고통을 먹는 자 (20) +3 14.03.14 2,339 30 27쪽
70 4. 고통을 먹는 자 (19) +3 14.03.13 2,779 112 24쪽
69 4. 고통을 먹는 자 (18) +2 14.03.12 1,992 42 22쪽
68 4. 고통을 먹는 자 (17) 14.03.11 1,514 41 25쪽
67 4. 고통을 먹는 자 (16) +2 14.03.10 1,513 29 22쪽
66 4. 고통을 먹는 자 (15) +4 14.03.08 1,910 29 24쪽
65 4. 고통을 먹는 자 (14) +3 14.03.07 2,484 117 2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