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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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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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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6쪽

4. 고통을 먹는 자 (27)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27.

투석기란 지렛대와 도르래가 달린 활차, 그리고 무게추로 이루어져 있다. 간단한 구조이기에 거대화 시킬수록 효율이 떨어지는 무기다. 재료들의 무게가 늘어나기에, 투석기가 받는 무게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거대화된 구조에 걸맞게 날리는 물체의 무게를 늘리는 것 역시 한계가 있다. 실제로는 100킬로그램을 넘기는 게 힘들다. 억지로 무게를 늘리는 건 가능하겠지만, 사거리가 떨어지거나 투석기가 그대로 박살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즉, 실제로는 5톤짜리 바위를 날릴 수 없는 구조이며, 1.5킬로미터라는 사거리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랄누타이가 사용하는 투석기는 하늘 높이 떠있는 타깃을 노릴 만큼 견고하다. 또한 명중률도 높았다.

그냥 놔둬도 그랄누타이 혼자서 잇페인을 상대할 수 있어 보인다.

‘아니지……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위즈는 잇페인이 끌어올린 바하르칼의 함선을 바라보았다. 연이은 투석 공격에 당해 선체의 절반 이상이 날아간 상태라 배의 내부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건 거대한 마력포다. 그것이 보랏빛 방전을 일으키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이 간 곳에서 보랏빛 마력이 새어나와 바다를 훑었다.

“안 돼에에!”

잇페인의 비명이 울리며 마력포가 폭발했다.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세상을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부서진 배의 조각이며, 마력포의 부서진 파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폭발 때문에 바다가 거칠어지긴 했으나, 폭풍을 뚫고 오던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섬광이 사라지고 드러난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잇페인은 마력포와 함께 자멸한 것처럼 보였다.

“잇페인이라는 자의 마력이 사라졌군.”

그랄누타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흠…굳이 끼어들 필요는 없었네.’

위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갑판에서는 여전히 투석기가 작동하고 있다. 엄청난 풍압을 주변에 뿌리며 바위들이 날았다.

위즈는 의아하게 여겼다. 마력포가 폭발한 이상 더 이상 바위를 낭비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랄누타이는 여전히 지팡이로 허공을 휘젓고 있다.

- 그랄누타이?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채팅창이 뜬다.

- 어라? 이거 왜 이래?

위즈는 버그가 생긴 줄로 알았다. 헌데 버그는 목소리 문제만이 아니었다.

머리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떠 있다. 위즈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 바하르칼의 배?

조금 전 폭발로 사라졌어야 할 배와 잇페인이 하늘에 둥둥 떠 있다. 투석 공격 때문에 너덜거리던 배도 원래대로 복구되어 있다.

그랄누타이는 여전히 투석공격을 가하고 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 같지 않은가?

-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조금 전과 달리 잇페인은 롱혼과 거리를 좁힌 상태다. 거리가 좁아진 만큼 투석 공격에 더 많이 얻어맞았지만, 그때마다 떨어지는 부서진 조각이 가까이에 떨어져 위험해졌다.

- 완전히 같지는 않아. 마치 이건……평행우주 같잖아?

머리 위까지 도달한 잇페인이 돌연 마법진을 해제시켰다. 그러자 부유력을 잃은 바하르칼의 배가 끈 떨어진 연처럼 추락하기 시작했다. 위즈의 눈동자에 비친 바하르칼의 배가 점점 커져갔다. 대낮인데도 하늘이 어두워졌다. 롱혼을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 때문이다.

- 으으아아아!

폭풍 속을 뚫고 항해할 정도로 단단한 롱혼이었지만, 수 백 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체의 충격에는 버티지 못했다. 충돌을 일으킨 지점부터 균열이 발생했고, 두 조각으로 나눠진 롱혼이 순간적으로 높이 붕 떠올랐다가 바다 속으로 처박혔다. 충돌지점으로부터 넓게 번져나가는 파도가 주변의 배들을 휩쓸었다.

위즈는 그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렸다. 손에 단단한 것이 잡혔다. 위즈는 살기 위해 그것을 꼭 쥐었다. 힘을 주자마자 강한 반탄력이 발생했다.

- 어?

위즈는 멀쩡한 롱혼의 갑판에 있었다. 손에 잡힌 것은 난간이었다.

- 파도에 떠밀려서 멀쩡한 배로 내쳐진 것인가?

하지만 곧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 롱혼에는 그랄누타이와 궤상어, 그리고 빌헬름텔이 타고 있었다. 그랄누타이가 지팡이를 하늘 높이 쳐들고 주문을 외웠다.

“버스트&무브.”

빛이 번쩍이며 투석기로 날린 골렘이 터져나갔다. 그 조각들이 폭탄의 파편처럼 바하르칼의 함선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계속해서 골렘이 투석기로 쏘아졌다. 일정 높이에 도달한 골렘들이 줄줄이 폭발하면서 바하르칼의 함선에서 잔해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랄누타이는 정밀한 공격을 포기하고, 공간을 무수한 파편조각으로 제압할 생각인 것 같았다. 골렘의 폭발은 배에만 타격을 입힌 게 아니었다. 마법진을 조종하는 잇페인은 로브가 누더기처럼 찢기고,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배리어가 와장창 깨져나가면서 잇페인의 몸에서 피보라가 튀었다.

“크아아악!”

마법진을 유지하고 있던 잇페인이 중심을 잃고 쓰러져졌다. 마법진에 새겨진 문장이 빛을 잃으며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져갔다. 마법진이 사라지자 잇페인의 몸은 바하르칼의 함선에 처박혔다. 마법진의 힘으로 떠있던 바하르칼의 배 역시 바다로 곤두박질쳤다.

이번에도 높은 파도가 발생하며 레이스 단의 배들을 휩쓸었다. 위즈는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눈을 크게 떴다. 파도가 덮치는 순간, 부자연스럽게 세상이 정지했다. 그리고 위즈의 눈앞에 거대한 바하르칼의 함선이 날아왔다.

위즈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 무한 루프?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 당황하지 말자. 일단은 버그 같지만, 내 힘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게임 속에서 발생한 특별한 이벤트일 수도 있잖아?

위즈는 가만히 앉아 사태를 지켜보았다. 대개는 그랄누타이가 잇페인을 격퇴하는 걸로 끝이 났다. 가끔씩은 잇페인이 발사한 마력포에 당해 레이스 단이 통째로 증발해버리기도 했다.

전제조건은 같지만 결과는 조금씩 다르다. 그것을 깨닫자 위즈는 어떤 변수가 작용하기에 결과가 달라지는 지가 궁금해졌다. 직감적으로 그 변수를 알아내야 이 무한 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변수의 정체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 즉, 위즈.

이곳에서 무한루프를 인지하는 건 위즈 자신뿐이다.

- 방관자로 있지 말고 플레이어가 직접 나서야 된다는 것인가?

변수의 정체를 알아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무한루프를 경험하는 동안, 더 오션의 다른 유저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 더 오션은 1인용 패키지 게임이 아냐. 온라인 게임이라고. 내 시간만 되감겨질 수가 있나?

과거로 가는 퀘스트의 경우는, 기존 필드와 전혀 다른 인스턴트 필드를 생성해 진행된다. 통상적인 더 오션의 세계에서, 더 오션의 과거에 해당하는 필드로 캐릭터가 직접 이동하는 방식이다. 과거 세계라는 인스턴트 필드에서 A캐릭터가 놀고 있는 동안, 현재 세계라는 통상적인 필드에서 A를 만날 방법은 없다. 그러니 서로의 시간이 다르게 흐를 리 없다.

- 그럼 여기도 그런 인스턴트 필드란 말인가?

위즈는 다급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위즈가 여기서 허송세월하고 있는 동안, 레미라 수호전쟁이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 로그아웃!


<로……>

<로……>

<로……>

.

.

.

위즈는 소름이 쫙 끼쳤다. 로그아웃이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라도 떠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버벅거리고 있다.

- 이거……설마?

이 게임 더 오션은, ‘레드오션’이라는 게임과 ‘폐쇄구역’의 시스템을 융합시킨 결과물이다.

그 작업을 수행한 것은 파이오니어 빌딩 지하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기계-셸터, 그리고 네메시스라는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셸터에는 브림캐스터의 기술이 적용되었다. 한때 광인(狂人)을 쏟아낸 불완전한 기술.

위즈는 그 불완전한 기술의 여파가 지금 온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럼 영원히 여기서 나가지 못하는 건가?

위즈는 힘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그랄누타이와 잇페인이 서로 지지고 볶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위즈는 텅 빈 영화관의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과 다를 게 없다고 느꼈다.

그때 위즈는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랄누타이가 날려대는 바위덩어리가 하늘에 박혀있었다. 금이 간 하늘에서 파편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틈에서 시뻘건 불길이 날름거렸다. 그럴 때마다 하늘은 시커멓게 그을렸다. 잇페인이 충전을 마친 마력포를 바다에 겨눴다. 보랏빛 광선이 바다를 휩쓸고 지나가자 역시 와장창 소리가 나면서, 파도치는 바다가 파편을 뿌렸다. 깨어진 바다 너머에서는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즈의 눈이 충혈 되며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 이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긴 위즈는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로 뛰어내렸다. 위즈의 발이 닿자 바다의 모습이 깨져나가며 하얀 복도가 드러났다. 하늘 역시 완전히 박살나며 그 뒤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점차 번져나갔다. 하얀 대리석 바닥위로 불길이 춤을 췄다. 주황색 물결이 일렁이는 바닥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의 다리부분은 위즈의 발밑을 지나 뒤까지 길게 연결되어 있다. 위즈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자기 인형처럼 하얀 피부의 아이가 씨익 웃고 있었다.

“무장경비는 처리 했어.”

아이의 발밑에는 디지털 길리슈트를 입은 자가 쓰러져 있었다. 온통 하얀색 일색인 옷은, 주홍빛에 잔뜩 물들어 있다. 불꽃보다 더욱 선명한 붉은 색.

“뭐하고 서 있어?”

아이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탕! 복도에 총성이 울리며 아이가 비틀거렸다. 아이의 옆구리에 붉은 기운이 번져간다. 조금 전 죽은 무장경비의 옷을 곱게 물들인 그 색이다. 그리고 같은 색깔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 시작은 또 다른 무장경비의 목덜미였다.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날붙이를 더욱 거세게 박아 넣었다. 무장경비는 자신이 흘린 붉은 색에 빠져 깊숙이 침잠했다. 아이가 다시 다가와 손을 붙들었다.

“고맙게 생각한다면 움직이라고 좀! 끝까지 짐이 될 생각이냐?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다니까.”

이 아이의 얼굴, 보면 볼수록 닮았다.

‘내 어릴 적의 모습과 판박이야.’

위즈-아니, 편재는 아이를 껴안았다. 그리운 얼굴이다. 구하고자 하는 사람. ‘그녀’다.

그리고 이곳은 시오닉스의 연구소다. 불타는 연구소는 ‘그녀’와 헤어졌던 바로 그날 본 모습이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편재는 이게 게임 속에서 일어난 버그 같은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위즈는 잇페인 때문에 죽은 거야. 그리고 나는 피곤해서 잠든 거야. 여긴 꿈속인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 무한루프로 이어지던 꿈도 이해가 갔다. 잠들기 전에 열중해서 하던 일이 게임이었으니, 꿈마저도 게임 꿈을 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새인가 평소 자주 꾸던 꿈으로 넘어온 것이다.

하늘과 바다가 깨지며 시오닉스 연구소의 모습으로 바뀐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이곳 악몽과 그렇지 않은 꿈을 번갈아 반복해 꾸던 공간.

아이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악몽은 아니다. 편재는 아이를 더욱 꼭 끌어안은 채 볼을 비볐다.

“야! 뭐하는……크윽!”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편재를 밀쳐냈다. 껴안으면서 옆구리에 입은 상처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편재는 바닥에 엎어진 무장경비의 몸을 뒤져 메디팩을 꺼냈다. 출혈을 막는 스프레이를 꺼내들고 다가서자 아이가 진저리를 쳤다.

“멍청아! 그거 쓰면 안 돼!”

“하지만 다쳤잖아?”

“그거 진통제도 들어 있어. 그러면 몸이 둔해진단 말이다. 그런 몸으로 짐까지 달고 탈출할 순 없어.”

다행이도 시스템 메시지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하자마자 말문이 트였다.

편재는 마음속으로 맴돌던 말을, 평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짐이 된다면 혼자라도 빠져나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편재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아이가 냅다 뺨을 갈겨버린 것이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편재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 새끼가 말이면 다인 줄 아나.”

아이가 편재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데굴데굴 구른 편재의 몸이 부드러운 것에 걸려 멈췄다. 아이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편재의 머리털을 쥐더니 바닥에 처박았다.

“눈을 떠! 뭐가 보이지?”

아이의 말대로 눈을 뜨자 죽은 무장경비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보고 있자니, 이유 없이 편재는 두려웠다. 죽는 건 싫었다. 죽어서 저렇게 눈을 허옇게 뜨긴 싫었다. 자신이 흘린 피바다에 빠져 죽긴 싫었다.

“뭐.가. 보.이.느.냐.고!”

아이가 머리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편재의 얼굴이 무장경비의 얼굴에 닿았다. 아직 따뜻하고 부드러웠지만, 그것이 시신이라 생각하니 편재는 무서워서 눈물 콧물을 짜내며 빌었다.

“잘못했어. 살려줘!”

“질질 짜지 말고 질문에나 대답해!”

아이가 윽박질렀다. 편재는 울먹이며 간신히 대답했다.

“시체가 보여.”

“그래! 죽으면 저런 고깃덩어리가 돼! 눈깔은 눈꺼풀은 뒤로 돌아가고, 혀는 길게 삐져나와! 괄약근이 풀려서 똥이며 오줌이며 다 질질 흘리지. 얼마 뒤면 온기도 사라져서 몸이 뻣뻣하게 변할 거야. 그리고 며칠 지나면 썩어가면서 생긴 가스 때문에 시신이 부풀어 오르겠지. 여기가 아우터라인 밖이라면, 구더기도 끓어오를 테지. 하등한 생물들이 살을 파먹으며 분비한 소화액 때문에, 썩은 국물이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흘러나올 거야. 그때 시체를 뒤집으면 참 볼만할 거야. 물 풍선처럼 출렁출렁 소리가 날 테니까! 대답해! 너도 이렇게 되고 싶은 거야?”

“아으으…어으으…….”“새끼야! 온갖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갑자기 말문이 막혔냐? 죽고 싶냐? 대답해!”

“나…나는……어헝엉엉…….”

아이가 멱살을 잡아 편재를 들어 올려 벽에 밀어붙였다. 목에는 예리한 날붙이가 들이밀어졌다.

“죽고 싶은 거면 얘기해. 저놈들 손 빌릴 필요 없어. 내가 죽여줄 테니까.”

“죽기 싫어! 죽기 싫어!”

“그런 놈이 감히 희생을 입에 올려?”

아이가 멱살을 풀어주었다. 편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이는 그런 편재를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났으면서도, 왜 나만 궂은일을 해야 하는 거지? 이딴 놈을 위해 나만 희생하고! 나만 빼앗기고! 왜 나만!”

편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거지같아…….”

아이가 바닥을 걷어찼다. 무장경비의 팔에 걸쳐진 샷건이 떠올랐다. 아이는 한팔 만을 뻗어 그것을 쥐고 방아쇠를 당겼다. 넓게 퍼진 산탄은 지금 막 벽에서 튀어나온 무장경비를 덮쳤다. 무장경비는 총에 방아쇠도 걸치지 못하고 벽에 처박혔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걸.”

아이는 허리춤에 매어진 작은 상자에서 앰풀을 꺼내 암릿에 끼워 넣었다. 찰칵 소리가 나면서 앰풀이 비워졌다.

“뭘 주사한 거야?”

“나노머신. 신경간섭을 해서, 능동반사속도를 강제로 늘려주지.”

“전투약물?”

“가정교사가 그런 것도 알려주던?”

“…….”

“하긴…TV만 봐도 알 내용이지. 이제 가자. 또 놓고 가라느니 하는 헛소리 하면, 그땐 제발 죽여 달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두들겨 패주겠어. 이래봬도 지금 내 몸은 강화외골격으로 코팅된 몸이라고. 맨주먹에 맞아도 뼈가 부러지지. 시험해보겠어?”

편재는 고개를 저었다. 장난으로 딱밤조차 맞고 싶지 않았다. 강화외골격에 얻어맞을 바엔, 그냥 돌을 맞는 게 낫다.

편재가 달리기 시작하자 아이는 한발 앞서 움직이며, 나타나는 적들을 모조리 무력화시켜버렸다. 무장경비들은 빼앗긴 총에 맞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훈련된 경비견들은 맨 주먹을 맞고 머리에서 뇌수를 터뜨리며 멀리 날아갔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아이는 암릿을 조작해 연구소의 설계도면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놈들이 점점 몰려온다. 경비시스템을 무력화 시켰는데도 이렇다면, 자체 전원으로 움직이는 CCTV로 지켜본다는 뜻이지. 할 수 없네. 어차피 이쪽의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면 빙빙 돌아가는 건 무의미해.”

아이는 강행돌파를 계획했다. 편재는 자신이 짐이 될까 걱정되었지만, 이 방법 밖에 없었다.

“괜찮아. 여긴 나만 온 게 아니거든? 밖에도 파이오니어 컴퍼니의 무장경비가 와서 싸우고 있을 거야.”

“그럼 왜 혼자 온 건데?”

“환기구에 들어갈 만큼 작은 건, 나 밖에 없거든. 넌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아이가 주머니 속에서 둥근 디스크 모양의 물건을 꺼냈다.

“그건?”

“폭탄이야. 위험하니까 여기 있어. 당장 여기로 쳐들어올 녀석은 없으니까.”

마치 이 연구소의 병력배치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태도다. 아이는 꺾이는 복도로 뛰쳐나갔다.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탁탁탁 달리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편재는 초조해져서 고개만 살짝 내밀어 모퉁이 너머를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무장경비들이 쓰러져 있었다. 아이는 무사히 지나간 모양이다.

“하아……이거 꿈이라고는 하지만 엄청 생생하네. 이제껏 꾼 것 중에 가장 디테일 해.”

이렇게까지 대화를 많이 나눈 것도 처음이요,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기승전결이 이어진 적도 처음이다. 편재는 결말을 알고 있다. 아마도 지금 뛰쳐나간 아이는 부상을 입어 자신을 대신해 사로잡힐 것이다.

“비록 꿈이라 해도 싫어. 차라리 내가 잡혀 갔다면…….”

“탈출한 꼬맹이인가?”

목덜미가 따끔하더니 다리가 풀렸다. 쓰러지는 편재의 몸을 누군가 받쳐 들어 올렸다. 연구원 복장을 한 남자였다. 바닥에는 그가 쓰고 버린 1회용 주사기가 뒹굴고 있었다. 바늘 없이 앰풀과 일체형인 특이한 주사기이다.

“가만있자…이 얼굴은 파이오니어 컴퍼니의 편재로군. 맞지?”

편재는 대답하지 않고 연구원을 쏘아보았다.

“맞나보군. 너는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외계인의 기술을 뛰어넘는 현장을 함께할 영광을 누릴 테니까.”

“생체부품이 되는 게 그리 영광스럽다면 당신의 뇌나 꺼내 쓰시지?”

“하하하. 꼬맹이가 무서운 소리 하는 거 아니지. 정말 그렇게 해버리고 싶잖아?”

연구원이 편재의 볼을 잡아당겼다. 편재는 반항을 담아 연구원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연구원이 볼에서 손을 떼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편재는 그 웃음 뒤에 감추어진 위선을 보았다.

“후후후후. 생체부품이란 건 말이야, 사람의 뇌만 뽑아 사용하는 그런 엽기적인 기술이 아냐. 사람을 통째로 기계에 집어넣는 거지. 배양액을 통해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고, 노폐물도 따로 처리하지. 아주 위생적이고 완벽해. 인체에는 무해하고.”

“그럼 지원자를 받으면 될 거 아냐!”

“아무나 가능한 게 아냐. 특정 유전자에 결함이 발생한 인간이 필요하지. 너처럼 혈우병에 걸린 인간 말이야. 게다가 어릴수록 좋지. 살아온 시간이 짧으니 기억이 적을 것이고…….”

“어린 거랑 기억이 무슨 상관이 있는데?”

“아 참, 깜빡했군. 부품이 되는 인간은, 영원히 가수면 상태로 만들어야 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의식을 유지하는 거지. 그러자면 쓸데없는 생각 같은 거 떠올리지 않도록, 기억을 지워버리는 게 최고야.”

편재는 눈을 부릅떴다. 이건 처음 듣는 내용이다.

“자, 장난하지 마. 꿈 속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봐야 설득력 없어!”

“꿈? 무슨 헛소리냐? 아하~현실 도피인가? 그것도 좋지. 부품에 인격은 필요 없으니 잘됐어. 어린애라 그런지 멘탈이 참 보드랍군 그래.”

연구원이 히죽거리며 편재를 옆구리에 꼈다.

‘이건 처음 보는 전개다. 내가 연구원에게 납치돼서 끌려가다니?’

편재는 이 꿈이, 평소 꾸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을 알고 불안해졌다.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악몽이다.

‘제길. 악몽은 싫은데.’

걸어가면서 연구원이 암릿을 조작하자 복도의 한곳이 벌어지며 통로가 드러났다. 조금 전 자신을 지켜주던 아이와 함께 지나왔을 때는, 이런 게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연구원이 들어가자 통로는 뒤쪽부터 격벽이 내려와 닫혔다. 안전한 곳에 들어와 마음을 놓은 한 것인지 연구원이 주절거렸다.

“너랑 있던 그 괴물 같은 녀석도 곧 처리될 테니, 이제 연구만 완성 시키면 된다.”

편재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냥 경비시스템을 고친 것뿐이야. 나는 망가진 기계를 약간 손봤을 뿐이라고. death zone에 들어간 건 그 녀석 잘못이지.”

“뭐야…그게…….”

“독가스와 펄스캐논으로 무장한 인형병기 스무 기가 있는 방이지. 히드라 타입이라서 방어력도 끝내줘. 그 애가 가진 폭탄으로는 하나도 못 부숴.”

편재는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펄스캐논이 어떤 무기인지는 가장 잘 알고 있다. 닿는 것만으로 몸을 터뜨려버리는 에너지탄을 쏘는 무기 아닌가. 아무리 꿈이라지만……‘그녀’가 그런 끔찍한 몰골로 죽는 건 싫었다.

“그만둬! 그 애를 죽이지 마!”

“까딱 잘못하면 탈출도 하기 전에 내가 죽을지 모르는데?”

“제발 그 애를 살려줘! 뭐든지 다할 테니까!”

연구원이 편재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싱글거리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든지 다하겠다고?”

“제발…….”

“시키는 건 뭐든지 다?”

“그래! 그 애만 살려주면 뭐든지!”

“너더러 생체부품이 되라고 해도?”

“으으……그, 그래!”

“그 애는 네 녀석의 대역으로 키워진 녀석이 아니었나? 딱 봐도 그림자 같던데. 그런 그림자를 위해, 경호대상이 희생하겠다고?”

“맞아!”

“하아…눈물 나는 신파극이로군. 하지만……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좋아. 경비시스템을 셧다운 시키겠다.”

연구원이 책상에 놓인 단말기를 조작했다. 그러자 전등이 꺼지고, 붉은 경광등이 울렸다.

- 자동소거까지 1분 남았습니다.

“이건……자폭?”

1분 동안 연구소를 빠져나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자는 자동폭파 시스템을 가동했다. 그렇다면 이자는 자폭하기 전에 빠져나갈 곳을 알고 있는 뜻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연구원이 암릿을 조작하자 바닥의 구멍이 열렸다.

“이럴 줄 알고 고속 엘리베이터를 준비해두었지. 머리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것과 동시에 연구소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안 돼!”

편재는 목청이 터져라고 외쳤다. 하지만 폭발은 이미 일어났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고속 엘리베이터가 통째로 흔들거린다.

“아……또 악몽이야…….”

“벌써부터 지치면 곤란하지. 네가 자발적으로 협조해주겠다고 해서, 내가 편의를 봐주고 있잖나?”

편재는 지쳐서 대답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서 이 꿈이 끝나기만 바랐다. 연구원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편재의 시야가 흐려지며 보글보글 소리가 울렸다. 편재는 눈에 힘을 주었다. 시력이 회복되면서 주변의 사물을 구별할 수 있었다. 이곳은 투명한 수조 안이었다. 무색의 액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고, 편재의 입에는 산소 공급기 같은 게 달려 있었다. 팔다리는 이상하게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후후후. 좋은 꿈 꾸셨나?”

연구원이 수조에 이마를 기댔다.

“네가 자발적으로 실험에 참여해주었기에, 생체부품이 무사히 완성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네 기억을 지우지 않으니 귀찮은 문제가 생기더군. 자꾸만 꿈을 꾸잖아? 꿈을 꾸면 두뇌가 활동하게 되지. 그리고 생체부품의 출력이 낮아지는 거야. 와~ 얼마나 골 때리는지 몰라. 과부하가 걸려서 자꾸만 정지되다니. 홧김에 네 뇌를 끄집어버릴까 생각도 했었다니깐?”

보글보글. 보글보글.

“후후후. 하지만 네가 보여준 성의를 생각해서, 난 의리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바로 네가 조금 전 꾸었던 꿈이다. 네가 가진 기억을 임의로 뽑아서, 계속 반복하게 한 거지. 원래 가진 기억의 반복이라 그런지, 별로 두뇌를 많이 쓰질 않더라고. 덕분에 생체부품의 출력은 안정 되었어. 좋은 기억이 맞겠지? 그러길 바라. 너는 좋은 꿈을 꿔서 좋고, 나는 내 작품이 발전해서 좋지. 이 얼마나 인도적인가! 이게 바로 진정한 상생! win-win이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이젠 모르겠어……생체부품이 된 내가 진짜인지, 그녀를 구하려던 내가 진짜인지…….’

편재는 눈을 감았다.


흔들리는 마음, 미혹에 빠지기 쉬운 눈을 가진 인간.


‘나는 생체부품…난 도망칠 수 없어.’


흔들리는 마음, 미혹에 빠지기 쉬운 눈을 가진 인간.

계명으로 스스로를 묶으매, 어둠 속에서도 길을 헤매지 않을 것이다.


‘저 싸이코 때문에 악몽을 반복하면서 미쳐가겠지.’


흔들리는 마음, 미혹에 빠지기 쉬운 눈을 가진 인간.

계명으로 스스로를 묶으매, 어둠 속에서도 길을 헤매지 않을 것이다.

이를 마음에 깊이 새기고 지키는 한, 최후에 믿고 의지할 것은 성전뿐이리라.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흔들리는 마음, 미혹에 빠지기 쉬운 눈을 가진 인간.

계명으로 스스로를 묶으매, 어둠 속에서도 길을 헤매지 않을 것이다.

이를 마음에 깊이 새기고 지키는 한, 최후에 믿고 의지할 것은 성전뿐이리라.


눈을 감고 있음에도 글자들이 떠올랐다.

‘뭐야 이 닭살 돋는 내용들은?’


1. 눈앞의 이익을 쫓느라 목적을 망각하지 않는다.

2. 내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손가락질 받는 것도 감수하겠다.

3. ### #### # # ## ##.

4. 최후엔 모두가 다 같이 웃을 것이다.


‘저 가려진 부분은 대체 뭐지?’

궁금증이 귀찮음을 이겼다. 편재는 눈을 떴다. 세 장의 종이가 주변을 빙글빙글 휘돌고 있었다. 편재는 그것을 만지려 한 걸음 내디뎠다. 바스락거리며 무언가 발에 채였다. 내려다보니 텅 빈 종이였다.

‘이건?’

그것을 집어 들자, 빈 종이에 글자들이 아로새겨졌다.


=======================================

3. 그대는 불에 타 울부짖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실존하지 않음을 안 뒤에도 그대는 분노를 품었다. 그대의 감정은 허깨비에까지 쏟을 만큼 하찮은 싸구려인가?

=======================================


‘아……이건 더 오션에서 마음속의 성소를 얻을 때 받은 질문이다. 어째서 이게 여기 있는 거지? 여긴 아직도 게임 속인가? 아니면 게임하는 걸 꿈으로 꾸는 중인 거야?’

편재가 집어든 종이가 활활 불타더니 거기서 새로운 종이가 생겨났다.


=======================================

3. 무한히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도 그대는 믿었다. 언젠가는 이 현실을 뒤엎을 거라고. 그리고 믿음은 현실이 되었다. 간절히 바라는 한, 그대가 바라는 현실은 가까이 다가와 있을 것이다.

=======================================


‘이건 질문이 아니잖아?’

편재의 손에서 종이가 제멋대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른 종이와 사이좋게 어울려 빙빙 돌았다. 종이에 새겨진 글자에서 빛이 뿜어졌다. 빙빙 도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며 빛의 고리가 생겨났다. 그 고리가 점차 넓어지면서 편재의 몸을 감쌌다. 편재는 눈을 치켜떴다.

빛의 고리에서 어떤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어떤 여인이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수조의 해치를 열고 있었다. 하지만 잘 안되자 여인은 호주머니에서 앰풀을 꺼내 주사했다. 한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해본 여인은, 다시 한 번 해치의 손잡이를 쥐고 힘을 썼다. 여자치곤 잘 발달된 근육이 꿈틀거리고, 해치가 조금씩 들어올려지기 시작했다.

흐아압! 여자가 이을 악물려 체중을 실으며 몸을 뒤로 넘겼다. 단숨에 해치가 열렸다. 여인은 수조 속에 손을 집어넣어, 안에 들어 있던 사람을 꺼냈다. 미라인지 살아있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가는 몸뚱이가 절반정도 딸려 나왔다. 여인은 수조에서 꺼낸 사람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볼이 쏙 들어간 앙상한 얼굴이 드러났다. 편재는 그것이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저건 내가 맞아.’

편재는 혼란스러웠다. 한 번도 자신의 마른 모습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저 모습은 너무도 진짜 같다. 편재는 이걸 더 이상 꿈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에도 여인은 꼼지락 거리며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역시…이대로 데리고 나갈 수는 없구나. 몸이 너무 약해져 있어.”

여인은 깡마른 편재가 하고 있는 마스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겨우 만나게 되었는데……널 데리고 나갈 수 없다니……하…….”

잠시 망설이던 여인은, 편재의 암릿과 자신의 암릿을 기다란 연장선으로 연결했다.

“생명유지 장치를 떼는 순간 넌 죽고 말겠지. 죽었다면 시체라도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았지만……그렇다고 널 죽여서 데려갈 수는 없지.”

여인은 수조에서 뛰어내려 수조와 연결된 기계에 자신의 암릿을 끼워 넣었다.

“편재야……나, 달 기지에서 브림캐스터의 기술을 연구했어. 어쩌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역시 우린 운이 좋아.”

그녀는 단말기에 명령어를 쳐 넣고, 엔터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녀의 눈길이 수조에 걸쳐진 편재에게 닿았다.

“편재야……만약 일이 잘못되어도……너 자신을 원망하면 안 돼. 이건 내가 멋대로 하는 일이니까. 그러니까……여기서 나가면……있는 힘껏 살아남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엔터가 눌려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만날 테니까.”

내가 꼭 그렇게 만들 테니까.

믿고 기다려 줘.

그러면 믿음은 현실이 되어, 네 곁에 성큼 다가와 있을 거야.

누나는 그렇게 너를 찾아온 거란다.

.

.

.


◇◇◇◇◇◈◇◇◇◇◇◇◈◇◇◇◇◇◇◈◇◇◇◇◇


“으아아아아아!”

편재의 눈에서 피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수조가 깨지며 말라비틀어진 또 다른 편재의 육신이 바닥에 뒹굴었다. 버려진 연구실이 통째로 쪼개지면서 넘실거리는 암흑이 새어나왔다.

“그래……기억났어. ‘그녀’는 내 누나…….내 하나뿐인 누나였어!”

파이오니어 컴퍼니 소속의 가문은 높은 확률로 쌍생아가 태어난다.

그중 먼저 태어난 개체는, 어릴 때부터 그 육체를 강화하고 전투훈련을 거쳐 전사로 키워낸다. 그리고 두 번째 태어난 동생을 암중에서 보살피는 역할을 맡는다.

꿈속에서 ‘그녀’가 때때로 편재를 미워하는 것처럼 구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여자의 삶을 포기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랄 나이에, 부모로부터 떨어져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웠다. 그 상실감은, 동생이 누리는 것들을 보며 증오로 변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동생을 구하려고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브림캐스터의 기술을 사용해 ‘무언가’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으악! 으아아아아악!”

편재의 고함이 갑갑한 연구소의 배경을 부쉈다. 본격적으로 어둠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엄청난 압력으로 편재의 몸을 휘어 감았다.

어둠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항하지 마라. 어리석은 자여. 이제 그대의 어둠은 내 힘이 되리니……』

편재는 소리 지르는 것을 멈췄다.

『네가 받은 고통은 이해한다……이대로 두면 분명 너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해 그 아픔을 가져가주겠다. 더 이상 과거에 사로잡히지 마라. 너는 앞만 보고 나아가거라.』

편재의 입매가 비틀렸다.

“무슨 개소리야? 과거 없이 내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어? 누나가 날 위해 희생해서 내가 존재하는 건데? 날 배은망덕한 짐승으로 만들 셈이냐?”

편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크게 소리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시커먼 어둠을 후려쳤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전부 내거야! 남의 것에 침 흘리지 말고 꺼져 버려!”

『소용없는 일이다. 어리석은 자여.』

“과연 그럴까?”

편재는 낭랑하게 다음의 문장을 외웠다.


나는 믿는다!

내가 간절히 소망하는 것을!

그 누구도 내가 지키는 영토를 범하지 못함이라!

이곳은 내 마음!

내 의지가 깃든 땅!


편재를 중심으로 환한 빛이 번져나갔다. 어둠은 그 빛에 밀려 저만치 멀어졌다.

『어째서! 인간은 이곳을 지킬 힘이 없거늘! 설마! 그녀의 후예인가!』

그 말을 들은 편재가 히죽 웃었다.

“그래. 개자식아! 300년 전 최강의 존재, witch가 넘겨준 힘이다!”

이곳은 악몽도 뭣도 아니었다.

아직 더 오션이라는 게임 속이었다.

그리고 저 어둠의 정체는 잇페인이다.

“감히 게임 속, 중간보스 따위가 사람의 상처를 후벼 파놓아? 아니지, 네 덕에 일부 기억을 되찾게 됐으니 고맙긴 하지만……그건 그거고…….”

『그녀의 후예라면 가만 둘 수 없다!』

어둠이 희미해져갔다.


◇◇◇◇◇◈◇◇◇◇◇◇◈◇◇◇◇◇◇◈◇◇◇◇◇


“으으으!”

위즈는 흐리멍덩한 정신을 털어냈다. 자신의 몸은 의지를 벗어나 귀상어와 대적 중이었다. 심상세계에서 잇페인과 대결해던 시간은 찰나에 가까웠다.

‘불가사의한 일이로군.’

원래 시간이란 상대적인 것이라서, 1분이 1시간 같을 수도 있다. 그걸 감안해도, 위즈가 겪은 일은 충분히 이상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고, 자신이 어떻게 구출되었는지를 알아버렸다.

‘내 피붙이가 희생해서 날 구해냈어. 이번엔 내 차례야.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잇페인을 꺾고 레미라를 지켜내겠어! 그리고 학살자의 망령을 이용해 메인 퀘스트를 깨자. 그렇게 하나하나 콜로니의 폐쇄구역을 여는 거야.’

그러자면 일단 잇페인에게 조종당하는 몸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멈춰, 멈추라고…….”

위즈는 팔을 휘둘러 귀상어의 커틀라스를 크게 밀치며 물러섰다. 그리고 진각까지 밟으며 다시 달려들었다. 귀상어는 커틀라스를 휘둘러 그런 위즈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는 동안, 잇페인은 바로 머리 위까지 날아오고 있었다. 마력포를 고정시킨 줄이 몇 가닥 끊기면서, 마력포가 수직으로 세워졌다.

보랏빛이 넘실거리는 포구를 본 위즈가 소리 질렀다.

“그만하라고 잇페인, 개자식아!”

그렇게 외치자마자 위즈의 머리에 둥근 휘광이 어렸다.


<불완전한 계명이 충족되었습니다. 마음속의 성소가 마음속의 성전으로 바뀝니다.>


“크아아아악!”

마법진 위에 서 있던 잇페인이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마법진이 비틀거리며 제멋대로 움직였다. 마법진에 매달려 있던 마력포도 이리저리 움직였다.

위즈는 잇페인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이유를 알아챘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 들어있었구나!”

위즈는 눈을 감고 심상세계 속의 빛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파직, 파지직.

얼마안가 시커먼 연기가 위즈의 정수리에서 피어올랐다.

“으악!”

단말마의 비명이 울리며 잇페인이 추락했다. 그가 올라탄 마법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부유력을 잃은 마력포가 떨어져내렸다.

그랄누타이가 황급히 MC를 불러들였다.

“퇴로를 열어라!”

세척의 작은 배가 레이스 단의 배들을 스쳐지나갔다.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며 수십 척의 배들이 자취를 감췄다.

그 위로 떨어진 마력포는 산산조각이 났다. 포신에 모인 마력이 방향성 없이 퍼져나갔다. 흡사 물속에서 원자폭탄이라도 터뜨린 것처럼, 수면이 크게 부풀어 오르며, 거대한 파문을 퍼뜨렸다. 순간적으로 바다가 움푹 파이면서 소용돌이가 일었다.

레이스단의 배들이 소용돌이로 쓸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거 어떻게 좀 해보세요!”

“MC를 사용한 직후에는 재사용 할 때까지는 5분이 필요하다네!”

그렇다는 것은……꼼짝 못하고 저 소용돌이에 삼켜져야 한다는 것.

“이건 불공평해! 중간보스를 물리치고도 죽는 게 말이 돼?!”

위즈의 고함이 소용돌이 속으로 메아리치며 사라져갔다.


작가의말

연참 12일 째인가요...

오늘은 그야말로 하얗게 불태웠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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