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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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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조회수 :
231,485
추천수 :
5,519
글자수 :
1,674,356

작성
14.04.12 15:57
조회
1,449
추천
28
글자
22쪽

4-(ED)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4-(ED)

콜로니 연합 역시 분리주의자들에게 오랫동안 시달려온 단체다.

그렇기에 항시 테러에 대비하여 무장경비를 갖춰두고, 부상자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의료 인력까지 상주해 있다.

그리고 마도로스 社는 콜로니 연합에서 운영하는 기업이다. 이곳에 의사가 없을 리 없다.

케이트가 목숨을 건진 건 그 덕분이었다.

“어떻습니까?”

“응급조치가 빨라서 뇌손상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소가 몸 전체에 퍼졌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는 휴식을 취해줘야 합니다.”

의사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편재는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케이트를 내려다보았다.

“케이트. 전투약물은 만능이 아니에요.”

“헤헤……또 꾸중 들었다.”

편재는 예전에도 같은 내용의 대화를 나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상황도 그렇다.

‘아니 조금 다르다.’

이렇게 누워있는 케이트는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야 할 것 같고, 자신 손에는 펄스라이플이 들려있어야 어울릴 것 같았다. 편재는 이 혼란스러운 기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데자뷰, 다른 말로는 기시감. 경험한적 없는 일을 익숙해 하거나, 만난 적 없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생각하는 것.

확실히 케이트는 편재를 잘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편재에게 있어 케이트란 소녀는, 오래전부터 만나던 사람이 아니다. 편재가 케이트를 알게 된 건 고작 1달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나 특징 있는 외국인 소녀의 존재를 까먹을 리 없는데?’

편재는 케이트가 약시라서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착각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케이트가 편재의 두툼한 팔뚝에 손을 올렸다.

“무슨 생각해요? 와아…직접 만져보니 생각보다 심하네.”

“으윽….”

“살 빼는 게 어때요? 식물원에서 만났을 때는 살이 너무 쪄서 못 알아볼 뻔했다고요.”

지금 케이트의 태도로 보건데 다른 사람과 편재를 착각한 건 절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편재는 이 같은 의문을 가진 계기, 즉 케이트가 치료받은 상황에 주목했다. 병실에서 전투 약물을 화제로 대화하자마자 데자뷰를 느꼈다는 건, 바꿔 생각하면 과거 케이트와 자신이 과거 같은 상황에 처했었다는 뜻이 된다.

편재는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또……라. 역시 우린 오래전에 만났었군요.”

편재의 자신 없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케이트가 반색했다.

“이제 기억이 나셨어요?”

“지금의 이 상황, 희미하게 기억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편재는 여전히 케이트에 대한 기억이 부족하다.

“맞아요. 당신이 날 구해주었지요. 긴가민가한 얼굴인데 힌트를 더 드릴까요? 피온?”

피온. 편재가 용병시절 사용했던 이름.

케이트가 이걸 알고 있다는 건 용병으로서 만난 적이 있다는 뜻.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편재의 눈에 잔 경련이 일었다.

편재는 그녀-자신의 누나를 구할 단서를 찾기 위해 용병이 되었다.

용병이 되면 자주 아우터라인에 나가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콜로니에 더부살이 중인 자들이 사는 곳, 아우터라인에는 분리주의자들의 소굴이 많았다. 콜로니 바깥, 그중에서도 아래층에 가까울수록 위험했다.

이는 용병들만 겪는 위험이 아니다.

외부에서 수송선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노출되는 위험. 그렇기에 콜로니에 접근하는 수송선은, 일정 높이 이하로 비행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가끔 기상악화 등을 이유로 저고도 비행을 할 때가 있다.

“아우터 라인에 추락했던 기체…….”

케이트가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를 보자 편재의 기억은 더욱 생생해졌다.

당시 케이트를 구하는 임무를 받았을 때, 이 당찬 소녀는 가족을 지키겠다며 피온의 전투약물을 훔쳐 사용했다. 그녀가 1분 동안 파괴한 인형병기는 모두 9대.

대전자방어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인형병기가 상대였고, 거기에다 펄스라이플로 급소만 노린 걸 감안해도 굉장한 수치다. S급 용병 그 누구도 1분 안에 인형병기를 10대 가까이 침묵시키진 못한다. 그런 전투력을 보인 건 순전히 전투 약물 때문이었다.

그리고 케이트는 멋대로 쓴 1분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시력을 잃은 것이다.

“분명 그때 눈이…….”

“나노머신을 통해 시신경을 복구시키는 중이에요. 실명단계에서 벗어나 약시 수준으로 발전한 거죠.”

“아아!”

“당신 덕분에 살아남은 거고, 그래서 치료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피온. 날 기억해줘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작은 손가락이 편재의 두툼한 손가락을 꼭 쥐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인연이 장소를 바꾸어 자신을 찾아왔다. 가슴속에서 벅차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끼며 편재는 그 손가락을 마주 쥐었다.

“그때 그 당돌한 소녀가 이렇게나 컸군요.”

“성장기니까요. 여기도 더 커질 거고요.”

케이트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편재는 쿡 웃었다.

“브리타니아 혈통이니 오죽할까요.”

예로부터 영국이란 섬나라의 여성의 B사이즈는 세계최고였다. 편재는 짓궂게도 그 점을 상기한 것이다.

“놀리지 마요.”

“케이트. 전투약물은 어디서 손에 넣었죠?”

편재가 갑자기 정색하자 케이트는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반칙이에요……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대답해요.”

편재는 대답할 때까지 계속 몰아붙일 분위기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실토했다.

“그때 당신 것을 두 개 빼돌렸어요. 하나는 곧바로 썼고. 나머지 하나는 오늘.”

“역시…….”

“뭐가 문젠가요?”

편재는 마른침을 삼켰다. 케이트는 전투 약물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전투약물은 여러 가지 화학물질을 섞은 칵테일 같은 거라 위험하죠. 그걸 알면서도 쓰는 건,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용병들은 그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쓰던 건 특히 위험합니다. 죽을 각오로 불퇴전을 할 때나 사용하는 거니까.”

“그럼 그걸 쓰고 나면 죽나요?”

“죽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몸속에 약기운이 남아 있는 한.”

“그래서 피를 몽땅 빼내고 수혈 했구나…….”

“약속해요. 두 번 다시 전투 약물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케이트양은 전투와는 어울리지 않아요.”

“알겠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그런데……절 찾아오신 용무는?”

케이트는 곧장 화제를 바꾸려 했다. 전투 약물을 가지고 더 이상 따지는 건 편재 역시 바라는 일이 아니기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편재는 메모리 스틱을 케이트의 손에 쥐어주었다.

“잇페인 문제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 그자들을 보니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요. 이래서야 저 역시 케이트양을 괴롭히는 게 되지 않습니까.”

케이트는 메모리스틱을 흔들며 키득거렸다.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요.”

“다시 가져갈까요?”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요? 그래서 여기엔 뭐가 들어 있는 건데요?”

“제 캐릭터가 잇페인과 싸울 당시의 데이터입니다. 시스템로그와 동영상을 편집한 것이지요.”

“그런 거라면 확보해둔 게 있어요. 우리 직원들 중에도 게임하다가 잇페인에게 당한 사람이 제법 되거든요.”

“이건 다를 겁니다. 케이트 양. 저는……아니 위즈는 잇페인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를 거뒀거든요.”

“위즈?”

“제 캐릭터입니다.”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중간보스로 등장한 잇페인이 여러 차례 패퇴한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패퇴시킨 사람이 편재라니…….

“가만……잇페인을 이겼다면 어째서 찾아오신 거죠? 다른 유저들이야 졌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지만, 이기면 별 탈 없을 텐데요?”

“심상세계라는 개념을 아십니까?”

편재는 더 오션 속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 해주었다. 어디까지나 필요한 만큼만.

해킹을 해서 마도로스 社를 말아먹을 뻔한 원흉이 편재인 건 변함없는 사실.

‘잇페인의 문제만 없었어도, 호랑이 굴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에 찾아오진 않았을 거야.’

겉으로야 얼굴에 켕기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드러낼 내용과 숨길 내용의 비율을 적절히 조절하느라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 그 과정은 참 힘들었지만, 어찌어찌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었다. 다행이도 케이트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잇페인 문제는 두 가지로군요. 하나는 심상세계에 침입하여 유저의 기억을 헤집어 놓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스탯을 강탈.”

“잇페인이 상대한 유저는 위즈 빼고는 모두 죽었으니, 다들 사망 패널티로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사실과는 다릅니다.”

“게임 밸런스문제라니……골치 아프군요.”

“그래서 한 가지를 묻고 싶은 겁니다.”

“말해보세요.”

이미 편재는 한 가지 질문에 대해 답변을 받기로 약속받은 상태였다. 밖에 퍼트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잇페인이 심상세계를 공격하는 건, 원래부터 잡혀있는 컨셉입니까?”

“아뇨. 정신공격 계열의 능력은 주로 마계생물에게 부여된 거예요. 대표적인 게 사이테리아지요.”

“아……환각을 보게 만드는 것 말이로군요.”

“이미 겪어보았으니 알겠지만, 사이테리아가 보여주는 환각은 그동안 유저가 보여준 행동에 따라 특정패턴이 적용되게끔 되어 있을 뿐입니다. 어떤 환각을 보았었죠?”

“제 경우는 화상을 입은 아이와 여자였습니다.”

“여성과 어린애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요. ‘약자’라는 단어에 누구나 떠올리는 보편적인 심볼. 아마 화상이라는 옵션이 추가된 건, 랜덤이었을 거예요.”

“그렇군요…….”

처음 사이테리아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편재는 괜히 억울해졌다. 그때 필요이상으로 흥분하며 사이테리아를 잡았는데, 그때 본 환영이 랜덤으로 보여준 것이었다니. 편재는 얼굴이 뜨끈해졌다. 이런 줄도 모르고 자신은 진심이 되어서는 사이테리아를 상대한 것이다.

“아무튼 협조에 감사드려요. 잇페인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할 테니 기다려주시길.”


◇◇◇◇◇◈◇◇◇◇◇◇◈◇◇◇◇◇◇◈◇◇◇◇◇


다음날 마도로스 社에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즉각적인 반응이 아닌, 하루 뒤에 발표된 것이라 유저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내용도 별것 없었다.


§§§§§§§§§§§§§§§§§§§§§§§§§§§§§§§§§§§§§§§§§§

안녕하십니까. 더 오션을 즐기는 유저여러분.

최근 벌어진 레미라수호전쟁에서 바하르칼 진영의 NPC-잇페인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단 피해자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해당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게임기에는 의료용 스캔이 장착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알립니다. 따라서 피해를 입은 유저분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잇페인에게 받은 공격은, 정해진 패턴대로 출력되는 영상과 감각의 조합입니다. 과거 마족이나 마계생물을 상대해보신 분들이라면 잘 알고계실 정신공격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유저 분들의 현실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리뉴얼 뒤 게임의 접속감도를 높였기 때문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접속감도를 하향하는 패치가 자정에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피해를 입은 유저들의 경우, 정신적인 피해보상과 무상치료를 약속하겠습니다. 또한 잇페인의 데이터를 다시 잠금으로써, 두 번 다시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더 오션을 사랑하시는 유저여러분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의료진에게 자문한 결과, 잇페인의 정신공격은 위험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안심하고 게임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언제나 노력하는 마도로스 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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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렇게 반응할 줄 알았지.”

이건 잘못을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애매한 모양새다. 거기다 보상하겠다면서 상세한 내용은 빠져있다. 이러니 누구라도 성의 없게 느껴질 법하다. 하지만 편재는 이미 잇페인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기에 마도로스 社의 입장을 이해했다.

케이트를 만난 뒤 편재는 네메시스에게 잇페인 사건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대한 네메시스의 답은, 셸터였다.

셸터는 브림캐스터의 기술이 녹아든 거대한 기계.

현재 셸터는 더 오션과 콜로니의 폐쇄구역을 연결해주고 있다.

게임 속 NPC에 불과한 잇페인이 유저들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는 편재가 우려했던 최악의 사태.

멀쩡히 잘 굴러가는 게임을 해킹하여 강제로 폐쇄구역과 융합시킨 건 편재다.

제 2의 브림캐스터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건 편재의 책임이었다.

네메시스에게서 잇페인 사건이 셸터와 관계있음을 듣자마자 편재가 떠올린 건 자수.

그리고 더 오션의 서비스를 당장 중단 시켜야 한다는 것.

소중한 사람을 찾겠다면서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힌다면, 시오닉스의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다를 게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더 오션의 양대 팬 사이트인 솔티워터와 마린블루를 본 편재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공지로 올려진 게시물에는 마도로스 社의 대응이 미흡하다며 악플들이 달렸다. 제2의 브림캐스터 사건이 생기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사람이 상한다면 그건 나 때문이야. 그렇게 되면 누나를 구해도 똑바로 얼굴을 볼 수 없게 될 거야.”

그렇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네메시스는 이게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관측했다.

셸터에도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인간의 두뇌활동에 간섭하게 되면 기능이 제한된다는 것. 실제로 잇페인이 등장한 직후, 셸터에 안전장치가 가동되었다.

그 때문에 유저들의 피해가 경미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안전장치의 존재는 또 다른 의문을 낳았다.

‘어째서 나만 정신공격을 그대로 받았냐는 거야.’

유저들이 받았다는 정신공격을 확인한 결과, 그들이 받은 공격은 평범한 루시드 드림의 수준이었다. 그 때문에 두뇌가 자극받아,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뿐이다.

반면 편재가 겪은 건 꿈의 영역을 한참 넘어선 것이었다.

기억의 실체화.

직접적으로 기억을 재생시켜 그대로 체험하게 하는 것.

정상인이라면 기억의 실체화는 오히려 루시드 드림만큼이나 안정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괴로운 기억이라 해도 그것이 실재했던 사건임을 알고 납득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기억이 결손 된 상태인 편재는 진실에 오히려 집착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다른 사람에게는 기억의 재생이 두 번째 경험하는 일이기에 충격이 적지만, 편재에게 있어서는 첫 번째이자 그 경험하는 당시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기억이 재조립되면서 불안정한 기억이 한차례 뒤집어엎어졌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상 브림캐스터의 기술에 의해 정신적 외상을 입은 거나 마찬가지이기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리되면 후계1순위의 자격도 S랭크 용병라이센스도 회수되어, 더 이상 지금처럼 활동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편재는 두려웠다. 이대로 미쳐버리면 누나를 찾는 일을 못하게 된다는 게.

설사 다른 사람들이 대신 누나를 찾아준다 해도……완전히 맛이 가서 알아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사람을 해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미 그런 마음이 편재의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대로 잇페인과 셸터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덮어두는 게 어떻겠냐는 생각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다. 비겁한 생각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미쳐버리든 말든 무시하고, 누나를 찾는 일에 열중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언젠가는 크게 터질 일이다.

만약 정말로 제2의 브림캐스터 사건이 터지면, 더 오션은 서비스를 중단해야 한다. 그리되면 편재는 다시 아우터라인을 돌아다니며 기약 없는 용병생활을 반복해야 한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자. 한번 가동된 안전장치는 더 오션이라는 게임이 존재하는 한 꺼지지 않는다고 했고, 마도로스 社에서도 대책을 마련할 테니까.”

편재는 한숨을 푹 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이 무거우면 몸도 함께 쳐지는 법. 이 상태로 앉아 있다간 없던 우울증도 생길 것이다. 편재는 이럴 때일수록 몸을 움직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며칠 빠지기도 하였으니 벌충도 해야 했다. 편재는 식물원의 푸르른 녹음을 떠올렸다. 벌써부터 몸에 활력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


편재는 전신거울 앞에 섰다. 한 달 전의 몸과 비교해보면 완전히 딴 사람이 거울 속에서 쭈뼛거리고 있다.

지금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은 3번째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도 헐렁헐렁하다. 편재는 남아도는 품을 허리에 감아보았다. 허리 라인이 드러난 정도가 아니라 진짜 사람의 허리가 보인다. 옆구리에 살이 만져지긴 하지만 그래도 이정도가 어디인가.

편재는 눈까지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쭉 째진 눈이 거울에 나타났다. 날카롭던 눈매도 약간은 둥글둥글 해진 느낌이다. 살집에 파묻혀 간신히 눈구멍만 내놓은 것 같은 모양새는 이미 벗어난 상태.

이건 모두 나노머신까지 써가며 다이어트를 강행한 성과다.

“여기에 근육만 붙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유산소 운동에만 신경 쓴 폐해다. 이젠 나노머신을 빼내고 근력증강에 신경 써야 한다.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이렇게 헐렁한 옷을 입고 뛸 순 없지.”

트레이닝복의 지퍼를 내리던 편재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매끄러운 살결에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더듬거리는 편재의 손길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목덜미에 꺼끌꺼끌한 직물의 감촉이 느껴진다. 편재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목덜미에 실로 꿰매놓은 흔적이 있었다. 그것도 세로방향.

편재는 소름이 확 끼쳤다.

마치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 같았다.

실밥은 목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정수리에서 시작된 자국이 코를 지나 목을 지나 명치까지 이어져 있다.

하지만 편재의 시선은 꿰맨 자국이 아닌 가슴을 노려보고 있었다. 쇄골이 드러날 만큼 살이 빠진 상태인데도 가슴 쪽에는 여전히 지방이 남아 불룩했다. 편재는 손가락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뱃살과는 다른 부드럽고 말캉거리는 질감이 손아귀를 가득 채우고 있다. 한 번도 만져본 적은 없지만 이게 뭔지 모르는 건 아니다.

“아냐…아닐 거야.”

편재는 트레이닝복의 지퍼를 끝까지 내렸다. 활짝 열어젖혀진 트레이닝복 사이로 여성의 상징이 드러났다.

“이건 유방이잖아?”

완연한 만곡을 그리며 중력의 영향으로 늘어진 그것은 누가 봐도 비만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편재는 정수리에서 시작된 꿰맨 자국이 가슴골을 지나 배까지 이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갑자기 꿰맨 자국이 가려웠다. 긁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편재는 손톱을 세워 거칠게 정수리를 긁었다. 피부가 찢어지면서 실밥이 뜯겨져 나왔다. 몸을 긁는 우악스러운 손놀림은 코를 거치고 턱을 지나 목을 가슴골을 향했다. 거울속의 편재는 강제로 실밥이 뜯겨지며 피가 낭자했다. 편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흉측해서 스스로 파괴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편재는 그 충동을 거스르지 않았다.

양손이 머리카락을 좌우로 나누어 쥐었다. 그리고 힘주어 잡아당겼다. 피부가 벌어지며 안에서 시뻘건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편재는 바닥에 떨어뜨린 트레이닝복을 주워 머리 부분을 닦았다. 피가 말끔히 닦여 나가며 멀쩡한 편재의 얼굴이 드러났다.

편재는 허물을 벗듯 나머지 부분도 벗겨냈다.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인 몸이 닦이며 말끔한 모습이 드러났다. 꿰맨 흔적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편재는 다시 판판해진 가슴을 확인했다. 여성이 아닌 남성의 단단한 가슴. 편재는 바닥에 널브러진 허물을 펼쳐들고 전신거울 앞에 섰다.

호리호리한 체격인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그 거죽은 너무나도 편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편재는 거죽에 뻥 뚫린 눈구멍에 시선을 맞췄다.

“누나…….”


◇◇◇◇◇◈◇◇◇◇◇◇◈◇◇◇◇◇◇◈◇◇◇◇◇


우직!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편재의 몸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무리 역치가 높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지만, 고통을 모르는 몸은 아니다.

“아야야.”

편재는 머리를 매만졌다. 혹이 느껴진다. 머리부터 떨어진 탓이다.

“꿈이었나…….”

편재는 조금 전까지 누워있던 벤치를 바라보았다. 자면서 무슨 짓을 한 건지 벤치는 두 동강이 나 있었다. 편재는 손에 묻은 플라스틱 조각을 털어냈다. 쪼개진 플라스틱 조각은 날카로웠지만 다행이도 피는 보지 않았다.

편재는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망정이지, 만약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제법 곤란했을 거다. 기물파손에 대한 보상 문제 때문이 아니다. 편재는 자신의 불안정한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다.

걷는 것도 아니고 뛰는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로 부서진 벤치에서 멀어지자 숲이 끝났다. 이 너머에는 수송선이 도킹하는 시설-공항이 있다. 이렇게 걸어서 와본 건 처음이었다. 편재는 발길을 돌렸다. 뒤에서부터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왔다. 바닥에 떨어진 나무 잎사귀가 가볍게 들썩거릴 정도의 가벼운 바람.

하지만 편재는 몸을 떨었다. 바람은 차갑지 않았지만, 땀을 흘린 탓에 춥게 느껴진다.

바람은 차갑고 따뜻함으로 구분 지을 대상이 아니다.

단지 사람이 그렇게 느낄 뿐이다.

무의식의 발현인 꿈도 마찬가지다. 짐승들도 꿈을 꾸지만 그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인간뿐이다.

“대체 왜 그런 꿈을 꾼 거지? 어째서 누나의 거죽을 걸치고 있었던 거야?”

편재는 가슴어림이 아릿해지는 걸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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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4. 고통을 먹는 자 (37) +3 14.04.07 2,294 54 31쪽
89 4. 고통을 먹는 자 (36) +3 14.04.04 1,244 35 22쪽
88 4. 고통을 먹는 자 (35) +2 14.04.02 1,326 30 26쪽
87 4. 고통을 먹는 자 (34) +1 14.03.31 1,167 26 22쪽
86 4. 고통을 먹는 자 (33) +1 14.03.29 1,033 31 22쪽
85 4. 고통을 먹는 자 (32) +1 14.03.28 870 21 20쪽
84 4. 고통을 먹는 자 (31) +2 14.03.27 1,124 31 20쪽
83 4. 고통을 먹는 자 (30) +2 14.03.26 1,398 25 21쪽
82 4. 고통을 먹는 자 (29) +1 14.03.25 1,414 29 22쪽
81 4. 고통을 먹는 자 (28) +1 14.03.24 1,979 45 25쪽
80 4. 고통을 먹는 자 (27) +2 14.03.22 2,981 118 36쪽
79 4. 고통을 먹는 자 (26) +1 14.03.21 1,203 25 24쪽
78 4. 고통을 먹는 자 (25) +2 14.03.20 1,708 34 24쪽
77 4. 고통을 먹는 자 (24) +3 14.03.19 2,093 35 25쪽
76 4. 고통을 먹는 자 (23) +2 14.03.18 1,702 27 27쪽
75 4. 고통을 먹는 자 (22) +3 14.03.17 2,397 60 21쪽
74 4. 고통을 먹는 자 +21화 +2 14.03.17 1,604 29 13쪽
73 4. 고통을 먹는 자 (21) +2 14.03.15 1,260 30 16쪽
72 4. 고통을 먹는 자 +20화 +2 14.03.15 1,233 40 12쪽
71 4. 고통을 먹는 자 (20) +3 14.03.14 2,339 30 27쪽
70 4. 고통을 먹는 자 (19) +3 14.03.13 2,779 112 24쪽
69 4. 고통을 먹는 자 (18) +2 14.03.12 1,991 42 22쪽
68 4. 고통을 먹는 자 (17) 14.03.11 1,514 41 25쪽
67 4. 고통을 먹는 자 (16) +2 14.03.10 1,513 29 22쪽
66 4. 고통을 먹는 자 (15) +4 14.03.08 1,909 29 24쪽
65 4. 고통을 먹는 자 (14) +3 14.03.07 2,483 117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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