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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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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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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0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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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4. 고통을 먹는 자 (15)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5.

“빌어먹을. 또 그걸 꿨어…….”

편재는 팔을 들어 이마에 걸쳤다. 땀을 흘려 축축해진 피부가 찰싹 소리를 내며 이마에 달라붙었다. 더욱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건 쿵쿵대는 소리다. 이번에는 머리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암릿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고작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은 꿈속에서는 영겁과도 같은 긴 시간으로 치환되었다.

편재는 불타는 저택에서, 어린아이를 수십 번이나 살해했다.

그리고 일어서면 똑같이 생긴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살인의 도구도 다양해졌다. 처음엔 곤봉이었는데, 나중엔 커다란 전동톱을 사용했다. 뼛조각이 걸려 고장 나자 이빨로 물어뜯기까지 했다.

반복되는 과정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죄책감까지 마모되어갔다. 사람을 닮은 고무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봐도 그건 내 어린 시절의 얼굴이야. 그걸 1인칭 시점에서 살해하다니.”

용병 일을 그만둔 계기는 머리의 부상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두통이 생겼는데, 우습게도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통증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는 데에도 문제가 생겼다. 잘못 알고 있는 것도 허다하고, 기억도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니 이런 얼토당토 없는 꿈을 꿔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건, 편재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편재는 무거운 머리를 억지로 들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가요.”

편재는 방문을 열었다.

“괜찮으냐?”

문을 두들기던 사람은 편승이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방을 둘러보던 편승은 편재의 몸을 훑었다. 편재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어서 어딘가 아파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무슨 일이에요?”

“편재야. 영희 일은 내가 나쁜 뜻으로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니다.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리암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는지 편승은 어떻게든 아들을 달래려 했다.

편재는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아냈다. 불편한 주제로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심신을 깎아먹는다. 악몽을 꾼 뒤라 더욱 조심해야 할 때다.

“그 일은 이제 듣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가 알아서 잘 처리하시겠죠.”

“편재야…….”

“그리고 경과보고 같은 걸 하실 필요도 없어요. 날 죽이려던 사람 따위 이젠 관심 없으니까요. 리암의 일도 알아서 처리하세요. 제 눈치 보실 것 없으니까. 어차피 용병은 돈을 따라 움직이는 족속들이에요. 의리 같은 거 따져봐야 꼴만 우습죠.”

“…….”

“하실 얘기 없으시죠? 제가 무사한 걸 아셨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지금부터 기분전환 할 겸 게임을 할 생각이거든요.”

“알겠다. 필요한 게 있으면…….”

“네. 네. 알았으니까 돌아 가주세요.”

편재는 아버지를 밖으로 밀쳐내고 문을 닫았다. 물속에 가라앉은 앙금처럼, 방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한없이. 한없이.

편재는 피곤해진 눈을 짓누르며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막상 앉고 보니 게임 같은 거 할 기분이 아니다.

“꿈에서 내 손에 죽는 애는 대체 뭐지? 왜 나랑 똑같이 생긴 거야?”

편재가 꾸는 악몽-불타는 저택을 배경 삼아 꾸는 꿈은 두 가지 레퍼토리가 있었다.

오늘처럼 무의미한 자기살해를 반복하는 것과, 누군가에게 구출되는 꿈.

후자의 경우 구출해주는 쪽은 언제나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꿈 역시 깰 때까지 무한정 반복되었다. 어린 편재가 위기에 빠지고, 그때마다 여자가 와서 구해준다. 그때마다 편재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다시 같은 내용의 꿈이 반복되면서 다시 나타난 여자는, 전에 나타난 여자와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헤어스타일이나 입고 있는 옷이 그렇게 천차만별로 바뀌었다는 건, 편재를 구해낸 다음 여자가 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즉, 여자는 언제나 편재와 처음 대면하는 것이다.

꿈속에서 편재는 언제나 여자의 희생으로 살아남는다.

그것이 반복되자 편재는 실제 자신의 주변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나를 조사해보았다.

그 결과 실제로 있었던 일임이 확인되었다.

십삼 년 전.

어린 편재를 구하고 실종된 사람이 있었다. 편재와 같은 나이이며 여자였다.

하지만 그 밖의 자료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소되어 있었다. 암릿의 조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편재는 편의상 그 존재를 ‘그녀’로 지칭했다.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고부터 편재는, 앞으로의 모든 삶을 ‘그녀’를 구하는데 바치기로 결심했다.

편재는 책상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들었다. 종이와 가죽으로 만든, 진짜 수첩이다.

요새는 암릿에 무언가를 기록하지, 이런 걸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수첩의 내용은 편재의 필체로 가득했다.

“분명 내가 쓰던 것인데…….”

순응할 것이라던가, 생명의 무게 같은 단어들이 어지러이 나열되어 있었고……, 숫자와 알파벳의 조합도 드문드문 적혀 있었다.

“……하나도 기억이 안나.”

편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분명 자신이 쓴 것인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몇 되지 않는다.

게르마니시아와 생체부품. 달기지. 라엘리언.

“자신이 없어……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걸까?”

조금 전에 꾸었던 꿈은 편재 스스로도 몸서리쳐질 만큼 끔찍했다. 광기에 젖어서 몇 번이나 내리치고 내리치고 내리쳤다. 뭉클대며 흘러내리던 살점의 감각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꿈은 무의식의 표출이라던데…….”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을 떠올린 편재는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향했다.

“우웩!”

뱃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낸 편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변기에 달라붙은 토사물이, 시뻘건 피와 살점으로 보였다. 편재는 문득 그 살점들이 젤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끔찍한 환각이었지만, 더 끔찍한 것은 환각의 이면에서 드러난 두려움의 실체였다. 그것과 마주한 편재의 입매가 덜덜 떨렸다.

“아…….”

꿈속에서 아이에게 품은 살의는 너무도 농밀해서 쉬이 희석되지 않았다. 하루 이틀 품은 증오가 아니다. 만약 이 감정이 자신의 것이라면. 그리고 꿈속에 등장한 아이가 ‘그녀’라면.

“나, 나도 모르게 그녀를 죽여 버린 게 아닐까?”

스스로 망가져 있음을 알고 있는 편재다.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리자 그것은 10%에서 20%로, 다시 50%를 넘어 90%를 훌쩍 넘겼다.

“내가 죽여 버린 걸까?”

같은 말을 반복해보니 제법 그럴싸하다. 어떻게 그걸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편재의 축 늘어진 손이 바닥에 튄 토사물에 닿았다.

파직 소리를 내며 스파크가 튀었다. 그리고 암릿이 제멋대로 홀로그램을 투영시켰다.


- 내가 맡은 역할은 신분을 위장한 D2분리주의자를 빌딩의 무장경비로 고용해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 핑계를 대며 훈련에 참여하진 않았다.


“헤헤……영희 아저씨.”

편재는 힘없이 웃었다. ‘그녀’를 찾는 일에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 사람이 영희다. 홀로그램 속의 영희는 술을 털어 넣고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차마 ‘그녀’의 가문에 해를 입히고 싶진 않아서였다. 하지만 D2의 혈통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관해야만 했다. 하지만……3년 전 편재가 돌아온 그날, 결심이 섰다. 배신하기로. 모든 걸 배신하기로. ‘그녀’를 잡아먹고 돌아온 편재에게 복수를. 내게 패륜을 강요하는 D2에게 복수를. 웃는 얼굴로 나를 아들 삼겠다는 편승에게 복수를. 사람이길 포기한 모두에게 복수를.


증오서린 말을 내뱉으면서도 영희의 얼굴은 독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상처 입은 어린애 같이 울고 있었다.


- 그래서 무장경비단의 절반에 해당하는 D2계열 분리주의자들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할 생각이다. 다른 계열 분리주의자들도 같은 꼴을 당하겠지. 이로서 분리주의자 멍청이들에게 복수가 완성된다. 그리고 이 혼란을 틈타 빌딩지하에서 마스터키를 손에 넣을 셈이다. 그게 뭐냐고? 다이렉트로 폐쇄구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지. 이로서 편재는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될 것이다. 백날 해킹을 해봐야 소용없지. ‘그녀’를 구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다.


“뭐, 뭐라고!”

폐쇄구역이란 단어가 편재의 정신을 일깨웠다. 편재는 암릿을 조작해 동영상을 다시 앞으로 돌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암릿에 묻은 토사물 때문에 작동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홀로그램영상도 제멋대로 켜진 것이다.

편재는 암릿의 단자가 드러나 있는 것을 확인했다. 조금 전 지하특실에서 메모리스틱을 뽑고 나서 닫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튄 토사물의 습기가 암릿의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럼 이 동영상은 캐시라는 건가?”

암릿의 전원이 꺼지면 사라질 데이터. 원본은 아버지의 손에 있겠지만 이걸 요구할 수는 없다. 분명 빌딩테러와 관련된 중요자료로 원로회에 넘겨질 것이다.

“이걸 살려야 해.”

편재는 토사물을 닦아내고 암릿의 일부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


다행히 캐시로 저장된 내용을 따로 저장하는 데 성공했다.

동영상을 다시 돌려본 편재는 희망에 부풀었다.

영희는 오래전부터 그녀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구출을 위한 계획도 구체적으로 짜놓은 상태였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어.”

영희라면 구해내는 건 일도 아니리라.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편재가 지칭하는 ‘그녀’는 십삼 년 전 실종되었다.

반면, 영희가 말하는 ‘그녀’는 삼년 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동일인물인가?

“동일인물이 아니라면……영희 아저씨가 내게 장단을 맞춰줬을 리 없지.”

찝찝한 결론이지만, 단서가 적다보니 편재는 다른 걸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영희 아저씨는 자기 나름대로 ‘그녀’를 찾으러 떠난 거로구나. 모든 사람을 배신하고서……어쩐지 살짝 로맨틱 한데?”

편재는 싱긋 웃었다.

리암에 대한 오해도 풀렸다.

그녀는 테러당일, 셸터 속에 있던 편재를 애먹인 해커와는 별개의 존재였다.

영희에게 고용된 리암의 목적은 빌딩 지하의 연구시설이었다. 이 과정에서 해킹을 했을지는 몰라도, 이것 때문에 빌딩의 시큐러티가 멈추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리암이 테러와 관련되었다는 점만은 변함이 없다.

이대로는 냉동감옥에 가거나 사형당할 게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사라지기엔 리암의 능력이 아깝단 말이지.”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편재는 직접 부딪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와 담판을 지어야겠어.”

편재는 곧장 아버지를 찾아갔다. 편승은 놀란 눈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서불안의 증세를 보인 편재가 쌩쌩해져서 찾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몸은……괜찮은 거냐?”

“문제없어요. 그보다……메모리 스틱의 동영상 보셨죠?”

“봤다.”

“영희 아저씨는 처벌하는 쪽으로 결정되겠지요?”

“어쩔 수 없다. 아는 사람이라고 봐줄 수 없는 문제다.”

“그럼 리암은요?”

“리암? 아……그 용병아가씨 말인가? 다시 냉동감옥으로 돌려보내야겠지. 그 이상의 처벌은 사실상 불필요한 것일 테니까.”

영희의 경우는 쉽게 잡힐 사람이 아니니 걱정할 게 없다. 문제는 리암.

리암은 이미 신병을 구속당한 상태. 게다가 한번 냉동감옥에 들어갔다가 잠시 해동되어 나왔다. 잠시나마 밖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테러수사에 도움이 된다는 명분 덕이었다.

영희의 메모리 스틱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리암 말고는 없었기 때문.

‘리암이란 인간의 특수성을 이용하는 게 정답이다.’

그녀는 죽이기에 아까운 고급인력에 속한다. 그렇기에 사형시키지 않고 일단 냉동감옥에 처박아두는 정도로 마무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추후라도 해동시켜서 어딘가로 보내질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리암이 얼마나 거물인지 미리 알려서 가로채는 게 낫다.’

편재는 그녀의 출신성분부터 밝혔다. 이야기를 듣고 편승은 놀랐다.

“AU(African Union)출신의 과학자라고? 게다가 게르마니시아 창립멤버의 손녀?”

“네. 그쪽 계열에서는 나름 귀족취급 받아요.”

“전자는 이해가지만, 게르마니시아라니?”

게르마니시아는 유럽의 과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연구 집단으로, 그들은 하나같이 혈통을 중시했다. 특히나 백인 우월주의에 물든 사람이 많아서,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유색인종은 절대 게르마니시아에 낄 수 없었다.

반면, 리암은 아무리 봐도 유색인종이었다. 피부색을 보면 분명히 흑인의 유전자가 섞여 있다. 편승이 이상히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리암은 외가 쪽이 AU와 아시아의 혼혈이고, 친가 쪽이 게르마니시아-백인이에요. 외모는 그냥저냥 라틴계에 가깝지만요.”

“과연……그래서였나. 어쩐지 원로 중에 몇몇이 사형을 반대하더라니.”

“AU의 영향력도 무시 못했겠죠.”

현재 콜로니의 시설을 조율하고, 유지보수하는 엔지니어들의 절반은 AU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술원조 명목으로 파견되었다.

만약 리암을 사형시킨다면, AU 측에서는 기술원조 중지를 선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이 콜로니의 시설들이 고장을 일으켰을 때 제때 수리를 할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이 콜로니 전체가 폐쇄구역이 되어버릴 것이다.

“리암이란 아가씨가 그렇게나 중요한 인물이라고?”

“게르마니시아와의 접점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고, AU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 있거든요.”

“그렇다면 어째서 용병 일을?”

“그건 게르마니시아가 벌인 생체부품 사건 때문이에요. 도덕적 책임을 지고 뒷수습을 하느라, 모든 요직을 거절했거든요.”

“희생양이군.”

“네. 일단 과학자들 중에도 이렇게 양심적인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AU가 리암을 버린 건 아닐 테니, 사형은 말도 안 되죠.”

“이것 참 곤란하군……사정을 알아버린 이상 냉동감옥에 보내기도 힘들겠어.”

AU출신의 요인이라면, 콜로니의 VIP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리암의 신병 문제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편재의 의도된 떡밥이었다. 이제는 떡밥을 회수할 때였다.

“아버지. 파이오니어 컴퍼니에서 주최한 파티에서 장식용 칼이 떨어지는 사건 기억나세요?”

“최근 일이니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저에게 제보를 주었던 사람이 또 전화를 걸었어요.”

“예전의 용병동료 말이냐? 무슨 말을 했지?”

“리암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어요.”

“일단 조사를 해보자꾸나.”

편승은 일단 리암의 안전문제를 염려해, 냉동감옥으로 돌려보내는 건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AU쪽 고위직과 접촉하기로 했다.

리암의 거처는 지하특실에서 1층으로 옮겨졌다.

대신 그녀의 방은 네트워크에 연결할 수 없는 격리구역이었고, 나노봇이 그녀에게 주사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요인이자 범죄자라는 특수한 신분을 가지고 있기에, 진정제를 투여하는 게 정상이지만 그녀가 거부했다.

“약물? 내 뇌를 망가뜨릴 일 있어?”

“절대 약물 같은 거 안 쓰게 할 테니 진정해요. 리암.”

편재가 어르고 달래서 영양제까지는 겨우 놓을 수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브렌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넌 저 녀석이 밉지도 않냐?”

“저마다 사정이란 게 있으니까요.”

“대단한 성자 나셨군. 나 같으면 내 식구들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

“어머? 누가 보면 댁은 떳떳한 줄 알겠네? 기억 안나?”

“크윽…….”

브렌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리암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본전도 못 찾을 거면서 까불기는.”


◇◇◇◇◇◈◇◇◇◇◇◇◈◇◇◇◇◇◇◈◇◇◇◇◇


리암의 문제를 해결하고 방에 돌아온 편재는 옷을 갈아입고 식물원에 갈 준비를 했다. 악몽까지 꾸고 난 뒤라 몸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운동을 거를 수는 없었다. 편재는 무심코 단말기 쪽을 바라보았다. 전원을 켜둔 채 나갔기 때문에, 모니터에는 더 오션의 팬 사이트인 솔티워터가 떠올라 있었다.

“로그파일을 분석했었지.”

편재는 단말기를 끄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때 편재의 눈에 새로 올라온 게시물의 제목이 들어왔다.


<안티 바하르칼, 자연에 패하다!>


“패배?”

해당 게시물을 열어 글을 읽은 편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레미라를 향해 출항한 배가 태풍을 만나 좌초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바다에서 활동하다보면 당연히 따라오는 리스크다.

“이 정도를 가지고 엄살은…….”

하지만 첨부된 동영상을 재생하고 편재의 생각은 싹 바뀌었다.

“뭐야 이건?”

동영상 속의 배는 너울지는 파도를 피해서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파도가 한번 칠 때마다 배가 바다에 삼켜진 것처럼 한참동안 보이지 않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삼각파도가 너무 컸지만, 선원들은 침착하게 배를 움직여 위기를 모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위험한 건 삼각파도가 아니었다.

같은 선단으로 보이는 배가 갑자기 어둠에 찢겨나가 조각조각 분해되었다.

“저게 뭐지?”

번개가 치면서 배를 삼켜버린 어둠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파도만큼이나 거대한 물기둥이었다. 그것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며 박살난 배의 파편을 빨아들였다.

배들은 분분히 흩어지면서 물기둥을 피해냈다. 그 배들이 달아나는 방향의 바다가 잔잔하게 변해갔다. 그러자 배들이 선수를 틀었다. 잔잔해진 바다를 피할 의도 같았다. 편재는 그들의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거기서 방향을 바꾸는데?”

잠시 후 잔잔해진 바다표면이 쑥 들어가기 시작했다. 편재는 그것이 거대한 파도가 생기려고 그러는 것인 줄 알았다. 허나 그건 파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재앙의 전조였다.

바다의 표면이 한도 끝도 없이 쑥 들어가며 깊은 음영을 드리웠다. 도망치던 배들은 음영의 가장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소용돌이!”

배들은 노까지 저어가며 빠져나가려 애를 썼지만, 하나같이 나선의 궤도를 타고 소용돌이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모든 배가 그렇게 박살이 나자 소용돌이와 물기둥이 사라졌다.

어두컴컴한 하늘과 굵은 빗방울은 여전했고, 파도만이 거칠게 몰아쳤다.

동영상 말미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 선장은 이게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누군가 폭풍을 틈타 장난을 쳤다고. 난 그게 바하르칼 녀석들이라고 생각한다.

동영상에 달린 댓글들 역시 이에 동조했다. 과거 바하르칼이 보여준 기상천외한 마법들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득 편재는 위즈가 로그아웃한 장소에 생각이 미쳤다.

“가만……그랄누타이 제독의 배도 이미 바다로 나갔을 텐데?”


◇◇◇◇◇◈◇◇◇◇◇◇◈◇◇◇◇◇◇◈◇◇◇◇◇


부랴부랴 더 오션에 접속해보니 역시나 ‘레이스단’ 역시 태풍 한가운데에 있었다.

접속하자마자 삼각파도라도 만났는지 배가 크게 기울어 졌다. 이대로 침몰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사진 바닥을 미끄러진 위즈는 사정없이 벽을 들이받았다.

“큭!”


<거세게 부딪쳐 120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1초간 스턴에 빠집니다.>



“가지가지 하네. 정말!”

배의 구조상 아래로 내려갈수록 흔들림이 덜한 법이다. 지금 위즈가 있는 곳은 밑에서 두 번째 층. 그런데도 몸도 못 가눌 정도의 흔들림 때문에 위즈는 걷다가 넘어지길 반복했다. 겨우겨우 기어서 갑판까지 나온 위즈는 아수라장을 볼 수 있었다.

삭구를 점검하고, 돛대에 달려있는 밧줄들을 조이고 풀고, 갑판에 고정되어 있는 짐짝들에 방수포를 씌우느라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위즈는 입을 헤 벌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고작 몸을 가누는 게 고작인데, 선원들은 흔들리는 배안에서 뛰어다니며 자기 몫을 해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위즈님!”

돛대에 몸을 묶은 빌헬름텔이 방수포를 내밀었다. 이미 그는 방수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바다에서는 추위로 인한 상태이상에 걸리기 쉽습니다! 젖지 않도록 이걸 쓰십시오!”

방수포를 뒤집어쓰며 위즈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비바람 소리에 묻혀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이럴 때는 차라리 파티채팅이 더 낫지 않은가. 위즈는 채팅창을 열어 대화를 시도했다. 그때 삼각파도를 만난 배가 거의 수직에 가깝게 치솟았다. 위즈는 황급히 난간에 매어진 밧줄을 잡고 매달렸다. 이래서야 채팅은 불가능하다.

“위즈님! 전투 준비!”

위즈는 기가 막혔다. 파도칠 때마다 몸도 못 가눌 지경인데, 어떻게 싸우란 말인가.

“누구랑 싸우는데요!”

“바! 하! 르! 칼!”

위즈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런 악천후 속에서도 싸워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흔들리는 배에서 칼질은 무리다. 차라리 스크롤을 써야겠다.’

화염돌격과 정령강화의 시너지 스킬인 ‘코로나’를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곳은 폭풍이 몰아치는 한가운데다. 코로나 스킬의 위력도 떨어질 것이고, 배에서 쓰는 것도 위험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상전투 관련 스킬은 익혀놓는 건데.’

로그파일을 확인하면서도,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제외시켜버린 게 위즈는 후회스러웠다.

땡땡땡땡.

갑판에서 종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위즈는 그것이 전투개시 신호임을 알아챘다. 곧 이어 배에 둔중한 충격이 울렸다. 비바람을 뚫고 굉음이 울렸다. 난간에서 벗어나 고개를 내밀자, 커다란 배가 옆구리를 들이받은 상태였다. 저쪽의 배에서는 갈고리를 걸어 배를 고정시키고 있었고, 이쪽에서는 갈고리를 끊으려고 도끼를 던져댔다.

“백병전이군!”

이미 빌헬름텔은 메인마스트에 올라가 화살을 날려대고 있었다. 심하게 흔들리는 곳에서 날린 화살임에도 모두 백발백중이었다.

“나도 질 수 없지!”

위즈는 모자손에 집어넣은 윈드커터 스크롤로 난입해 들어오는 바하르칼 용병들을 상처 입혔다. 레이스 단원들은 그들이 멈칫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바하르칼 용병들이 떼로 몰려오면 더욱 좋았다.

얼음족쇄로 여럿의 다리를 묶어 버리면 그만. 흔들리는 배에서 중심을 잃은 용병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다에 풍덩 빠져버렸다.

“꼴좋구나!”

위즈는 부지런히 스크롤을 끼워 넣으며 모자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때마다 바하르칼 용병들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위즈님! 조심!”

빌헬름텔의 경고를 받은 위즈는 난간에 매인 줄을 잡고 펄쩍 뛰어올랐다. 새카만 커틀라스가 허공을 갈랐다. 위즈는 그대로 돌려차기를 먹였다. 위즈를 공격한 자는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가 파도가 치는 바람에 바다로 빠져버렸다.

“이거 위험한데?”

위즈는 전투가 벌어지는 곳들을 둘러보았다. 싸워서 죽는 사람보다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지는 사람이 더 많았다. 위즈는 난간에 매인 줄을 힘주어 잡았다. 이거야 말로 생명줄이었다.

그때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이 일제히 싸움을 멈췄다. 그들은 머리 위를 올려다보더니 허겁지겁 붙잡을 것을 찾았다. 위즈 역시 그들과 같은 것을 보았다.

“아…….”

둥글게 휘어진 거대한 파도가 모두를 굽어보고 있었다. 벼락 치는 하늘마저 가리는 거대한 파도가 그 품을 벌렸다. 배는 거대한 그림자에 안겨진 채 파도의 경사면을 타고 높이 솟았다. 그리고 한없이 솟은 파도는 어느 순간 힘을 잃고 바다를 때렸다.

거인이 휘두르는 거대한 망치와 같은 일격은 바하르칼 용병들이 타고 온 배를 두 동강 내버렸다. 절단면을 따라 미처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 쓸려나갔다.

반면 레이스단의 기함은 돛대가 꺾인 걸 제외하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투는 다시 재개되었다. 바하르칼 용병들은 돌아갈 배가 없어졌기 때문에 기를 쓰고 저항했다. 하지만 용병들만큼이나 거친 해적들의 손에 걸려 차례차례 바다 속에 수장 되었다.

전투는 레이스 단의 승리로 끝났다.

비로소 여유를 가진 빌헬름텔은 위즈의 모습을 찾았다.

“이상하다? 메신저에는 접속 중이라고 뜨는데?”

하지만 선실에서도 위즈의 모습을 끝내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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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4. 고통을 먹는 자 (38) +5 14.04.10 1,396 26 25쪽
90 4. 고통을 먹는 자 (37) +3 14.04.07 2,294 54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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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4. 고통을 먹는 자 (23) +2 14.03.18 1,702 27 27쪽
75 4. 고통을 먹는 자 (22) +3 14.03.17 2,397 60 21쪽
74 4. 고통을 먹는 자 +21화 +2 14.03.17 1,603 29 13쪽
73 4. 고통을 먹는 자 (21) +2 14.03.15 1,260 30 16쪽
72 4. 고통을 먹는 자 +20화 +2 14.03.15 1,233 40 12쪽
71 4. 고통을 먹는 자 (20) +3 14.03.14 2,338 30 27쪽
70 4. 고통을 먹는 자 (19) +3 14.03.13 2,779 112 24쪽
69 4. 고통을 먹는 자 (18) +2 14.03.12 1,991 42 22쪽
68 4. 고통을 먹는 자 (17) 14.03.11 1,514 41 25쪽
67 4. 고통을 먹는 자 (16) +2 14.03.10 1,513 29 22쪽
» 4. 고통을 먹는 자 (15) +4 14.03.08 1,909 2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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