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조회수 :
231,463
추천수 :
5,519
글자수 :
1,674,356

작성
14.03.17 20:35
조회
2,396
추천
60
글자
21쪽

4. 고통을 먹는 자 (22)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22.

선원의 입장에서 항해란 업무의 연속이다. 폭풍 속을 항해하는 배에는 일이 많았다.

승객의 입장에서 항해란 무료함의 연속이다. 폭풍 때문에 선실 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 시간 죽이기가 애매해진다. 위즈는 괜히 하품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빌헬름텔이 말했다.

“이럴 때 잠깐 눈이라도 붙여두시지요. 저는 그동안 틈틈이 잠을 자두었지만, 위즈님은 그 섬에서 퀘스트를 하느라 못 주무셨을 거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하아암.”

또 다시 위즈는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해댔다. 괜히 가상현실게임이 아니었다. 유저가 피곤하면 얼굴빛이 변하거나, 하품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니 빌헬름텔이 위즈의 상태를 모를 리 없다.

“그런 상태로는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합니다. 가상현실게임은 뇌파가 흐트러지면 강제로그아웃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그렇군요.”

듣고 보니 빌헬름텔의 말이 맞다.

여기까지 와서 쓰러져버린다면 이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하루 동안 전투를 수차례 치렀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도 계속했다. 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사실 위즈도 쉬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어차피 항해 중에는 시간이 남는다. 이때 잠깐의 휴식으로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면, 이만큼 남는 장사는 없다. 하지만 로그아웃한 동안에 바하르칼과 전투가 벌어진다거나 할까봐 위즈는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메신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무슨 수로 알려 주신다는 겁니까?”

“모르셨습니까?”

“네?”

“게임 옵션 중에, 메신저와 암릿의 동기화 기능을 켜두면 됩니다. 일상생활 중에도 게임 속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요.”

“어? 정말이네?”

“이럴 때 보면 위즈님은 헛똑똑이 이십니다?”

“하, 하하.”

3~4시간 뒤에 접속하기로 하고 위즈는 로그아웃을 했다.


◇◇◇◇◇◈◇◇◇◇◇◇◈◇◇◇◇◇◇◈◇◇◇◇◇


현실의 시간은 아침 4시다. 꼬박 밤을 새어버린 것이다. 그 때문인지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걸음은 자꾸만 비척거린다. 세면대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니, 부스스한 얼굴이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생체리듬이 망가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편재는 남쪽 식당으로 향했다. 남쪽 식당은 특색 있는 매운 요리를 잘하는 곳으로, 이 저택의 많은 이들에게 외면 받는 장소였다. 편재도 외면하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지금 이렇게 남쪽 식당으로 갈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지금 시간은 4시를 조금 넘긴 시간대이다. 이 시간에 문을 연 곳은, 남쪽 식당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남쪽식당은 자극적인 식재료를 써 요리를 만들기 때문에, 사람이 오랫동안 버틸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인조리 시스템이 설치되었고, 24시간 운영될 수 있었다.

그런 남쪽 식당에는 선객이 있었다.

허겁지겁 칠리 핫도그를 집어먹는 떡 벌어진 근육질의 사내.

브렌이었다.

“역시 전설의 핫 푸드 마스터께서 자리하고 계셨네요.”

이 저택의 사람들에게 브렌의 기이한 식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편재는 브렌의 곁에 앉으며, 메뉴를 슬쩍 살폈다. 이곳의 음식은 맵고 자극적이라, 무엇을 골라도 폭탄이었지만 그나마 나은 게 눈에 띄었다.

“양파 카레. 우유는 넣고, 고추는 모조리 빼.”

주문을 받은 시스템이 조리를 시작했다.

“우유는 왜 넣는 건데?”

“그러면 맛이 순해져서 버틸 만해요. 인도 요리는 기이라는 인도식 버터를 넣기도 하니까, 우유를 넣는 건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요.”

“그렇구나.”

“그런데 어째 브렌 얼굴빛이 안 좋네요? 눈 밑이 라쿤처럼 거무죽죽……어? 이거 다크 서클이에요?”

“그래? 네 눈에도 보일 정도면 뭐, 후우…….”

브렌이 땅이 꺼질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브렌에게 다크 서클이 다 생겨요? 아버지가 못살게 구는 거죠? 그렇죠?”

“그런 건 아니다…….”

브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본 편재는 분개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아랫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굴려먹다니. 무슨 기계 부품도 아니고. 아버지에게 따져야겠어요.”

“그게 아냐.”

“리암 때문에 약점 잡혀서 그런 거잖아요? 리암이 냉동감옥으로 보내진 건 브렌이 부탁해서잖아요? 안 그래요?”

“그, 그래. 그건 사실이지.”

“아버지는 그걸 건수로 종신노예 하나 얻은 셈 쳤을 테고요.”

“끄응. 계약기간을 더 연장하긴 했다.”

“거기다가 체력 빼면 시체인 브렌에게, 문서작업을 강요하는 고강도 노동을 시켰고요.”

“문서 작업도 이젠 곧잘 해. 나 돌 머리 아니다.”

“길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요. 이 얼굴이 피로에 찌든 얼굴인지 아닌지. 세상에 이게 사람이야 너구리야? 다크서클이 광대뼈까지 닿겠네.”

편재는 주먹을 들고 허공에 휘두르며 편승의 악마적인 부림에 대해 성토했다. 그럴수록 브렌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져 갔다.

“그게 아냐. 피온. 사실 이건……리암……… 때문에.”

“에? 리암 때문이라면?”

그제서야 편재는 브렌이 어깨에 매어진 붕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브렌은 몸에 꽉 끼는 운동복의 일종인 gear를 입고 있었는데, 승모근 쪽으로 하얀 붕대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식탁에 상체를 기대고 앉은 자세에서 드러난 허리에는 온통 파스투성이다.

편재는 어깨 근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브렌이 몸을 움찔거렸다. 거즈를 대지 않고 그냥 붕대만 가볍게 돌려 감은 탓에, 우둘투둘한 상처자국이 느껴졌다. 잠깐 동안이지만 편재는 그 상처가 손톱을 세워 긁은 자국임을 알아챘다.

“그러니까……리암이 밤새?”

“그 녀석은 인간도 아냐.”

리암은 거칠게 칠리 핫도그를 물어뜯었다.

간밤의 일이 떠올랐다.


◇◇◇◇◇◈◇◇◇◇◇◇◈◇◇◇◇◇◇◈◇◇◇◇◇


리암은 AU에서도 우대받는 과학자다.

콜로니로 따지면 VIP와 동급.

그런 여자를 이쪽의 법으로 처분했다간, AU를 자극할 수도 있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리암을 노리는 세력이 있다.

이 또한 분쟁의 이유가 된다.

편재는 이런 논리로 회장인 편승을 설득했고, 일단 AU와 접촉해서 일을 해결해보자는 답변을 얻었다. 그때까지는 ‘감시받는 손님’으로서 대우하기로 정하고 독실까지 내주었다.

브렌은 그 독실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죄수에서 손님으로 신분이 바뀌자마자 리암은 브렌을 못살게 굴었다.

음식이 짜다. 물은 AU산 미네랄워터 아니면 안 마신다. 심심하니 책이나 좀 가져와라. 씻고 싶은데, 바디워시는 없냐. 등등.

그야말로 턱 끝으로 노예부리는 상전이 이럴까 싶을 정도였다.

브렌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딴에는 얼마나 억눌렸으면 그럴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리암의 요구는 갈수록 황당해져갔다.

“뭐?”

“뭘 그리 놀래? 어차피 나 잘 때도 감시해야 하잖아? 자장가 불러주는 것도 안 돼?”

“다 큰 어른이 무슨 놈의 자장가! 수면제 가져다줄 테니, 그거나 처먹고 자!”

등 돌린 브렌에게 대고 리암이 이죽거렸다.

“어허? 배짱 봐라? 내가 잘못되면 꽤나 곤란해질 텐데?”

“웃기지 마. 자장가 안 들었다고 잘못되었다간, 이 세상 모든 어린이들이 몰살이다.”

“험악하긴. 자장가 안 듣는다고 죽는다고 했어? 해동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정서적으로 불안하단 말이다. 누가 말벗이라도 되어주면 좋겠다 싶어서 그래. 그것도 싫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냐?”

브렌은 불안함에 뒷걸음질을 쳤다. 리암이 사악하게 웃을 때면 언제나 고통의 시간이 찾아온다. 남들은 그게 뭐 고통이냐고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피가 마른다.

리암은 과학자 출신임에도 맨손 격투에 능했다. 무슨 AU에서 만든 실전 무예라는데, 목숨을 취하지 않고 제압하는데 특화되어 있었다. 그것에 당하면 아무리 브렌이라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무기를 들이밀었다간 무기를 뺏긴다.

S급 용병인 브렌의 체면에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리암은 같은 S급이라도 조금 더 수준이 높았다.

“그렇게 두려우면 무기를 전부 벗어놓고 오던가. 그 의족에 달린 단분자커터만 켜도 내 손가락은 전부 날려버릴 수 있겠네.”

“끄응.”

그 말이 맞다. 의족이란 이름을 단 이 살인병기는 절대 탈취가 불가능하다. 살짝 출력을 높여 배를 걷어 차버려도, 내장파열을 일으킬 것이다. 거기에 쇠도 잘라내는 단분자커터까지 달려 있다. 반면 리암은 맨손이다. 이렇게까지 스펙에서 차이가 나는데 겁을 먹고 물러서는 건 모양새가 안 좋다.

브렌은 스턴건과 나이프, 화약무기인 리볼버를, 벽 속의 안전 클립에 보관해두었다.

“절대 이상한 짓 하지 않을 거지?”

“맹세코 안 해.”

“만약 허튼 수작부리면, 단분자커터로 손가락을 썰어버릴 거다.”

“살벌하기도 하네. 안 해. 절대 안 한다고. 예전 동료를 못 믿는 거야?”

“그 예전 동료가, 구원절날 내 직장에 쳐들어와서 깽판을 쳐놨지.”

브렌이 살벌하게 노려보자 리암의 이마에 식은땀이 쭉 솟았다. 브렌의 말대로 그녀는 깽판을 쳤다. 깽판도 보통 깽판이 아니라, 그 뒤처리 문제로 이렇게 갇혀있는 게 아닌가.

“어…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브렌은 리암이 누운 침대 곁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자장가 부른다. 뭐로 불러줄까?”

“됐어. 생각해보니 이 나이에 자장가는 좀 아닌 것 같아. 그냥저냥 팀 해체 후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봐.”

“나? 나야 뭐 그날 다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어서, 한동안 재활치료 하느라 시간 다 잡아 먹었지. 6개월은 재활치료로 바쁘게 보냈어. 의족을 달았는데, 이게 시오닉스 기술로 만든 폐품이더라고. 밸런스가 너무 안 맞아서 돈값도 못하는 똥이었지. 그때 피온이 찾아왔어. 피온 녀석 본명이 뭔지 아냐?”

“편재.”

“알고 있었어?”

“그야 우리들은 가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으니까. 걔도 딱히 숨기려던 게 아니었고. 그래서? 피온이 왜 찾아왔는데?”

“그 녀석 마치 채무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더라고.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여서, 한 대 패주려다가 참았다. 누가 누굴 동정하는 거야? 참나.”

“원래 그런 녀석이잖아. 이해해야지.”

피온은 용병생활을 시작하는 이유를 자신의 숙원 때문이라고 했다.

오래전 자기가 죽어야 했는데, 대신 죽은 사람이 있다고. 그 흔적을 찾아 장례라도 치러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서 설명해준 게 시오닉스에서 벌인 생체부품 사건이었다.

리암은 시오닉스의 초대멤버의 손녀였으므로, 그 일과 엮여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리암과 피온은 금세 친해졌고 의기투합했다.

“과거의 망령을 쫓아다니는 녀석이야.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 확인도 안 되는 사람을 찾겠다니. 그것도 혼자서. 언젠가는 자기 자신을 죽음 속에 밀어 넣고 말거라는 건 알고 있었잖아.”

“알지. 알고 있으니까 그 녀석을 떠나 팀을 짜지 못했던 거야.”

“우리 핫 푸드 마스터께서는 자상도 하시지.”

“벌써 소문을 들었어?”

“그냥 찍은 건데 사실이었어? 크큭. 여전하네. 매운 음식 좋아하는 건. 아무튼 피온 녀석이 뭔가 선물을 들고 오셨구먼? 그게 뭔지 맞춰볼까?”

리암이 브렌의 다리를 가리켰다.

“고출력 기계의족을 이용한 안드로이드化 수술. 그리고 파이오니어 컴퍼니에 고용.”

“맞아.”

“나쁘지 않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좋아졌잖아? 그야말로 꿈의 직장이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처음엔 좀 불쾌했지만……거절했으면 녀석 아마 망가져버렸을 거야.”

브렌이 용병으로서 수행한 마지막 의뢰는, 편재의 것이었다. 사비를 모조리 털어 자신을 도와달라며 편재가 무릎 꿇은 그날, 팀원의 누구도 의뢰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위험한 의뢰을 받아들인 결과, 브렌은 두 다리를 잃었다.

“아마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겠지.”

“흐응……나한테도 찾아오면 좋았을 텐데. 피온 녀석. AU출신 고급 인력이 놀고 있는데 그걸 지나치다니. 애가 크게 되긴 글렀어.”

“그런 걸 신경 쓸 놈으로 보이냐?”

“아니지.”

대화가 잠시 끊겼다. 브렌이 턱짓을 했다.

“생각해보니 내 얘기만 하고 있잖아? 너도 뭔가 얘기 좀 해봐.”

“나야 뭐, 시오닉스 멤버들을 찾아 움직였지. 그 과정에서 제법 성과도 있었고.”

“잡았어?”

브렌의 눈이 커졌다.

전 세계에 수배 중인 위험한 과학자 집단을, 한명이라도 사로잡으면 그것만으로도 안락한 노후가 보장된다. 생체부품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 중에는, VIP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그들이 걸어둔 현상금만 해도, 콜로니의 플랜트 10개는 구입해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다.

“그걸 어떻게 잡은 거야?”

흥미진진한 액션을 기대했는지 브렌이 침을꿀꺽 삼키며 흥분했다. 하지만 리암이 들려준 사건의 전말은 너무도 싱거웠다.

구원절로부터 일주일전, 시오닉스 멤버 하나가 아우터 라인을 넘어서 이곳 콜로니에 들어왔다. 비공개된 고속 엘리베이터와 도보로만 이동하였기에, 알아채는 게 늦었다. 하지만 급습하여 팔을 꺾었음에도 상대는 저항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나봐. 더 이상 도망치며 살기는 싫고, 차라리 자수하고 처형당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대.”

“그럼 왜 자수하지 않고, 너한테 잡힌 건데?”

“그 영감이 내게 잡힌 곳은 식물원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아우터 라인 바깥에서는 식물이 귀하잖아. 초록색이 그리워서 마지막으로 식물원에 와 보고 싶었대.”

“할 건 다하네. 뻔뻔스러운 인간 같으니라고. 그래서 상금은 받았어?”

“받았지. 그 덕에 인형병기도 운용할 수 있었어.”

“아……진짜, 기분 더러웠지.”

구원절날 리암이 개조한 인형병기-스캐럽 타입은 끈질기게 브렌을 몰아쳤고, 하마터면 죽을 뻔하기까지 했다.

“그때 어째서 날 죽이지 않은 거냐?”

“돌직구네.”

“말해봐.”

“그야 옛 동료니까. 차마 죽이긴 뭣 했지.”

“옛 동료 좋아하네. 원래 용병이란 돈만 주면 끝이 아니었어?”

“그렇지. 그런데 너랑, 피온, 제퍼슨은 그렇지 않더라. 오랫동안 팀을 유지해서인지 가족 같달까?”

“……가족이라.”

“뭐 그렇잖아. 제퍼슨은 할머니, 너랑 내가 엄마아빠. 피온은 말썽쟁이 자식새끼.”

“다른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제퍼슨이 왜 할머니냐? 그 인간은 여성성이 제로야. 제로.”

“하지만 섬세하잖아?”

“섬세? 웃기시네. 그건 그냥 편집증이야. 하루 동안 총기소제만 세 번을 하는 인간이야. 초조할 때는 노래를 거꾸로 부르고, 조금이라도 작전이 틀어지면 짜증날 정도로 갈구잖아.”

“그 덕에 우리가 살아 있잖아?”

“큭. 부인할 수 없다는 게 더 짜증난다.”

“언제 제퍼슨이랑도 연락이 되면 넷이서 한번 만날까? 식사라도 하면 좋잖아? 피온도 좋아할 걸?”

“그 인간이랑은 다시 만나기 싫어. 재수 없어.”

“그래도 한때 동료인데 너무 하네.”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이야. 잘 살고 있겠지.”

브렌은 고개를 팩 돌리며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썼다.

“뭐 그렇다고 치자.”

눈치를 보던 리암이 슬쩍 몸을 일으켜 브렌에게 다가갔다. 브렌의 다리에서 위이잉 하고 기계 특유의 구동음이 울렸다. 단분자커터를 작동시키기 전 단계였다.

“경고한다. 허튼 수작하면 붕대감고 침대에 누워 지내게 될 거야.”

“손님인데도?”

“감시 받는 손님이란 건, 포로라는 뜻이다. 설마 몰라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알지. 잘 알아. 포로라는 건 쓸모가 있을 때만이 포로가 될 수 있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렇게 쓸모 있어보이진 않는단 말이야?”

“하지만 회장님은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참고 기다리면 자유의 몸이 될 거다.”

“그런데 어쩌지? 내 입장은 조금 미묘하잖아?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 해도, 다른 나라에서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걸 감싸줄 필요가 있겠어?”

“그건…….”

브렌은 말문이 막혔다. 어쨌거나 CCTV등을 살펴보면 브렌이 사람을 죽인 건 맞다. 무장경비들을 죽이고 지나가는 장면을 보면, 소름끼칠 정도로 절제된 폭력에 전율하며 무장경비들이 스스로 바닥에 몸을 누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

리암이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내가 AU에서 온 특사라면, 이런 결정을 들고 왔을 거야. ‘리암 에이든 티타니아’는 범법자, 그러니까 당신들의 법으로 처리하라고.”

브렌은 AU의 정치 같은 건 잘 몰랐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거의 확실한 이야기일 것이다.“AU에서 널 버렸다는 거야?”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지.”

“두 번이나 버림 받는 거잖아!”

이미 리암은 AU의 요직에서 축출당한 적이 있었다. 그 혈통이 시오닉스와 닿아 있으니, 생체부품 사건을 해결하라는 이유로.

“브렌. 나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 냉동감옥 행이든, 사형이든 결정 나겠지. 두 번 다시는 너희들과 만나지 못할 거야.”

“리암…….”

“그러니까 오늘 밤은 나랑 함께 있지 않을래?”

“결국 그거냐!”

브렌이 후닥닥 뒤로 물러섰다. 리암은 양손을 펼쳐 보였다.

“강제로 덮치거나 하진 않을게. 너도 나한테 마음이 있지 않아? 나도 눈치란 게 있어. 재판도 거치지 않고 냉동감옥에 가는 일은 누군가 손을 쓰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야. 회장이 그럴 리는 없고, 피온은 내가 관련되었다는 걸 알지 못했으니까. 남는 건 브렌 바로 너밖에 없더라고. 브렌. 난 너를 원해. 너는 어때?”

다소곳하게 침대에 앉아 있는 리암. 평소의 괄괄하던 그녀와는 다른 매력이 브렌의 눈을 붙들었다. 나쁘지 않다. 강제로 첫 경험을 헌납한 여자라고는 하나, 그것만 아니었다면 대시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매력을 가진 게 리암이다. 여러 인종이 섞인 혼혈, 그것도 장점만이 발현된 덕인지 움직임 하나하나마다 교태가 넘쳐흐른다.

“어찌될지 모르니까 함께 자자고? 그거 사망 플래그야 알아? 공포영화에서도 섹스하는 남녀는 무조건 죽는다고.”

“핑계는 그만 주절거리고. 이젠 말해주겠어? 날 원해? 그게 아니면 방에서 나가도 좋아.”

그렇게 말하고 리암은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위로 쏟아져 내리며 얼굴을 가렸다.

브렌은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로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후회는 남기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리암은 반쯤 미친 매드 사이언티스트이지만, 그걸 마음에 두고 있는 자신도 딱히 정상은 아니다.

“그래. 하자, 해.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남자인 내 입장에서야 땡큐지.”

브렌은 여자를 너무 우습게 봤다.


◇◇◇◇◇◈◇◇◇◇◇◇◈◇◇◇◇◇◇◈◇◇◇◇◇


“끄윽. 그 녀석은 인간이 아냐. 인간이. 악마! 요녀! 서큐버스라고! 밤새도록! 밤새도록! 날 아주 잡아먹으려 들었어!”

브렌은 우적우적 칠리 핫도그를 씹어 먹었다. 편재는 마음속으로 복에 겨운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레는 절반정도 남긴 상태였다. 브렌은 의아하게 여겼다. 먹성 좋던 인간이 음식을 남기다니, 하면서.

“응? 더 먹지? 아, 다이어트 중이었던가?”

“그런 것도 있고요. 무서운 누님이 여길 노려보고 있어서 체할 것 같거든요.”

“무서운 누님?”

편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리암이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있었다. 어제는 푸석거리며 생기없던 피부가, 번들거리며 광택이 자르르 흐른다. 갈색의 건강한 피부에 그런 광택까지 더해지니, 리암은 그야말로 만개한 꽃처럼 보였다. 편재는 그런 리암의 변화를 모른 체 했다.

“이렇게 밖에 돌아다닌다는 것은, AU에서 벌써 답을 내준 모양이네요. 처벌은 면제?”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된 모양이야. 그러니까 잘 부탁해.”

“네네. 그럼 생존 기념으로 좋은 정보를 알려드리지요. 이 식당은 CCTV가 없어요. 도청장치도 없고요. 그동안 쌓인 게 있으면 이 기회에 풀도록 해요.

“오호~그것참 반가운 말이로구나.”

편재가 손을 흔들며 사라지고, 리암이 손가락 마디를 우드득거리며 브렌에게 다가왔다.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어젯밤 이야기를 시시콜콜 일러바쳐?”

“아니 그건 어쩌다 보니…….”

“여긴 침대가 없으니까, 2라운드는 낙법과 관절기로 할까?”

밤새 사랑을 속삭이던 여자의 모습이 아니다. 리암은 진심으로 브렌과 싸울 생각이었다.

‘으윽. 아침단련을 걸렀더니 이렇게 되는 건가.’

당연하게도 밤새 체력을 소진한 브렌은, 리암에게 붙들려 팔이 꺾이는 신세가 되었다.

남자로서도, 전투요원으로서도 완벽한 패배였다.


작가의말

연참 7일째.

드디어 따라잡았습니다.

하아하아.

내일은 병원에 가는 시간때문에, 글쓸 시간이 더욱 후달릴 예정입니다.

양이 적어지지 않도록 오늘밤에 조금 써두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PS)

아, 게르마니시아시오닉스로 바꿀 생각입니다.

악당 조직인데 이름에서부터 게르만족을 폄하하는 뉘앙스가 있어서 말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또 다른 셸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4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2) +3 14.04.17 1,765 33 21쪽
93 5. 혼돈을 비추는 거울 (1) +2 14.04.16 1,426 28 23쪽
92 4-(ED) +1 14.04.12 1,449 28 22쪽
91 4. 고통을 먹는 자 (38) +5 14.04.10 1,396 26 25쪽
90 4. 고통을 먹는 자 (37) +3 14.04.07 2,294 54 31쪽
89 4. 고통을 먹는 자 (36) +3 14.04.04 1,244 35 22쪽
88 4. 고통을 먹는 자 (35) +2 14.04.02 1,326 30 26쪽
87 4. 고통을 먹는 자 (34) +1 14.03.31 1,166 26 22쪽
86 4. 고통을 먹는 자 (33) +1 14.03.29 1,032 31 22쪽
85 4. 고통을 먹는 자 (32) +1 14.03.28 870 21 20쪽
84 4. 고통을 먹는 자 (31) +2 14.03.27 1,124 31 20쪽
83 4. 고통을 먹는 자 (30) +2 14.03.26 1,398 25 21쪽
82 4. 고통을 먹는 자 (29) +1 14.03.25 1,413 29 22쪽
81 4. 고통을 먹는 자 (28) +1 14.03.24 1,979 45 25쪽
80 4. 고통을 먹는 자 (27) +2 14.03.22 2,980 118 36쪽
79 4. 고통을 먹는 자 (26) +1 14.03.21 1,203 25 24쪽
78 4. 고통을 먹는 자 (25) +2 14.03.20 1,708 34 24쪽
77 4. 고통을 먹는 자 (24) +3 14.03.19 2,092 35 25쪽
76 4. 고통을 먹는 자 (23) +2 14.03.18 1,702 27 27쪽
» 4. 고통을 먹는 자 (22) +3 14.03.17 2,397 60 21쪽
74 4. 고통을 먹는 자 +21화 +2 14.03.17 1,603 29 13쪽
73 4. 고통을 먹는 자 (21) +2 14.03.15 1,260 30 16쪽
72 4. 고통을 먹는 자 +20화 +2 14.03.15 1,233 40 12쪽
71 4. 고통을 먹는 자 (20) +3 14.03.14 2,338 30 27쪽
70 4. 고통을 먹는 자 (19) +3 14.03.13 2,779 112 24쪽
69 4. 고통을 먹는 자 (18) +2 14.03.12 1,991 42 22쪽
68 4. 고통을 먹는 자 (17) 14.03.11 1,514 41 25쪽
67 4. 고통을 먹는 자 (16) +2 14.03.10 1,513 29 22쪽
66 4. 고통을 먹는 자 (15) +4 14.03.08 1,908 29 24쪽
65 4. 고통을 먹는 자 (14) +3 14.03.07 2,482 117 2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